믿으셔도 좋습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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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은과 상미가 각자의 방을 청소하느라 분주할 때, 단유는 자신의 방에서 프로그래밍을 공부하고 있었다. 한 학기 동안 꽤 많은 시간을 들여 공부하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공부할 게 많았다. 하지만 알면 알수록 재미있는 과목이었고, 복잡한 프로그래밍은 아직 무리라고 해도, 간단한 프로그램은 약간의 시간을 들여 만들어낼 수 있는 수준이 되니 재미가 더했다.
한참 코딩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던 단유는 문득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어? 언제 왔어?”
“방금. 근데 아무리 불러도 대답을 안 해?”
오랜만에 명수가 찾아왔다. 단유는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몸을 돌렸다.
“이거 하느라고.”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는 있었다. 하여튼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올 줄을 몰라. 그냥 나갈까 고민하는 중이었다.”
“뭘 나가. 그냥 부르지.”
“불렀다니까?”
단유는 어깨를 한 번 으쓱거렸다.
“그런데 네 방은···어디 공기 청정기라도 쓰냐? 무슨 공기가 달라?”
“무슨 공기?”
명수가 방 안을 여기저기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방향제를 쓰는 것도 아니고. 공기가 너무 깨끗하단 느낌인데. 그냥 느낌인가?”
마법 실험의 부작용(?)이겠지. 단유는 너스레를 떨며 말을 돌렸다. 이 주제로 말이 길어지면 말문이 막히는 상황이 올지도 모르니까.
“오랜만에 와서 무슨 이상한 소릴 해. 상미 때문에 온 거야?”
“응. 여친 부모님이 오신다는데 모른 척할 수 없잖아?”
아침에 상미의 연락을 받고 놀라서 급히 프런트에 외출 신청을 하고 나왔다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장인, 장모님께 잘 보이려고?”
“앞서나가지 말자.”
명수가 짐짓 무게를 잡으며 말했지만, 단유에겐 먹히지 않았다.
“어차피 생각은 하고 있잖아?”
상미와의 ‘미래’에 대한 ‘생각’은 종종 단유에게도 털어놓았던 바이지만, 이런 식으로 공격만 받을 순 없다. 나름 K리그에서 잘나가는 공격수가 명수 아닌가?
“내 걱정하기 전에 네 걱정이나 하지?”
“무슨 걱정?”
“넌 여자친구 안 사귀냐?”
“···뜬금없이 무슨 여자친구야.”
“아, 물론 네가 아주 예전부터 인기가 많았고, 남들 부러워할 만한 여자친구도 있었지···만! 다 옛날 얘기잖아? 연애 안 해?”
“할 때 되면 하는 거지.”
“그러니까 그때가 언젠데?”
단유는 곤란하다는 듯 볼을 긁적였고, 그 모습을 보며 명수는 입꼬리를 길게 늘렸다. 역습 성공!
“요즘은 너 좋다고 쫓아다니는 애 없어? 서울대라서 다들 공부만 하고 그런 건 아닐 거 아냐?”
“그만하자.”
가진 자(?)의 여유를 부리며 통쾌한 웃음을 터뜨린 명수가 단유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우리 단유도 빨리 짝을 찾아야지. 겨울인데 옆구리 너무 시렵잖아? 예전에 인기 있었다고 자만하다간 독거노인 된다?”
“너한테 그런 소릴 들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푸하하. 이런 날이 올 줄은 나도 몰랐다.”
명수는 단유의 등을 탕탕 치며 말했다.
“내려가자. 이제 곧 상미 부모님 오실 거야.”
“그래.”
명수가 통쾌해하는 사이, 단유는 껄끄러운 문제를 무난하게 넘긴 것을 다행이라 여기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거실에서는 하은이 출근 준비를 마치고 나가려는 중이었다.
“나가세요?”
“그래. 혹시 몰라서 내 방도 청소를 해 놓긴 했는데, 웬만하면 내 방은···알지?”
“네.”
“상미 너. 다음부터는 미리 말을 해줘. 네 친구를 데려와도 좋고, 손님을 초청해도 괜찮은데 미리 이야기를 해줘야 같이 사는 입장에서 불편하지 않지.”
“죄송해요.”
“뭐, 부모님과 네 입장 차이를 아니까 이해는 한다만. 그리고 절대, 절대 너 요리 하지 마.”
“···예.”
“부모님 오시면 뭐라도 시켜서 대접해. 괜히 뭐 준비하려고 하지 말고.”
“안 할게요. 주방에는 얼씬도 안 할게요.”
상미의 약속에 하은이 만족한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사정을 모르지만 대충 짐작한다는 듯 명수가 고개를 끄덕였고, 상미의 주먹이 그의 옆구리를 파고들었지만 하은과 단유는 신경쓰지 않았다.
“다녀오세요.”
“그래. 갔다올게. 단유, 네가 고생 좀 하고.”
“단유가 왜 고생을 해요?”
“멍청아. 이 집에서 제일 믿을 만한 사람이 단유 밖에 더 있니? 쟤는 공 가지고 뛰는 것 말고는 신뢰가 안가요. 신뢰가.”
“우와,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렇게 구박을 하시나?”
“오늘 내가 출근 미루고 푸닥거리 한 판 할까?”
“조심히 다녀오십쇼, 선생님!”
90도로 허리를 굽히는 명수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린 하은이 집을 나가고, 셋은 부모님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
“여보세요? 거기 2시부터 예약되나요?”
상미는 예약 가능한 음식점을 알아보고,
“야, 내 방도 청소할 거면 같이 해줘야지. 나도 도와줬잖아?”
명수의 항의는 상미에게 묵살 당했으며,
“쓰레기만 버리고 올게.”
단유는 오전 청소의 여파로 나온 쓰레기를 들고 집을 나섰다. 원래 쓰레기는 따로 골목에 지정된 장소에 모아서 버리도록 되어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 단유네 집에서는 쓰레기가 나오지 않았다. 집안 청소를 해도 쓰레기가 가득 쌓일 정도로 나오지도 않을뿐더러, 단유가 쓰레기를 본인의 방식으로 처리했던 탓이다.
이번에도 단유는 쓰레기 봉투를 들고 밖으로 나가는 대신 차고로 들어갔다. 혹시 몰라 차고로 들어오는 문을 잠근 뒤, 바닥에 내려놓은 쓰레기를 ‘해체’ 시켰다. 어두운 차고 안이 번쩍 번쩍 거리기를 몇 번, 후끈한 공기가 내부를 흔들었다.
크흠, 차고의 먼지가 기관지를 자극한 탓에 단유는 짧게 헛기침을 했다. 이곳은 자주 청소하지 않기도 하거니와, 청소를 해도 금방 먼지가 쌓이는 구역이었다. 어쨌거나 지금은 시설 준비가 안 돼서 그냥 하지만, 조만간 이곳에도 설비를 갖춰서 실험을 해 볼 생각이었다.
‘조그만 컴퓨터로 기록만 할 수 있게 갖추고, 각 모서리에 집진기와 온도 측정기, 광량 측정기를 달아야지. 카메라도 달아야 하나? 위험할 거 같긴 한데, 또 혹시 모르니까 준비는 해 놔야지. 영상은 그날 그날 확인하고 바로 지우던지, 아니면 따로 안전한 장소에 보관해둘까?’
실험에 대한 쪽으로 생각이 빠지자 단유는 어둠 속에서 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두했다. 만약 겨울의 차가운 공기가 단유를 놀라게 하지 않았다면 언제까지고 거기서 생각에 빠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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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 버리러 갔다가 사고라도 난 줄 알았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마.”
“단유야. 신경 꺼. 명수잖아.”
“뭐냐? 내 이름이 또 이상한 의미로 해석되는 기분인데?”
“기분 아니고 팩트.”
상미는 단유를 돌아보며 물었다.
“과일이라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주방에 들어가게? 칼은 잘 다뤄?”
“야, 그거 웃긴다. 칼은 잘 다뤄? 야, 너 연장 좀 다루냐?”
명수는 또 분위기 파악 못 하고 한마디 했다가 옆구리를 가격당한 뒤 바닥을 굴렀다. 패티가 뛰어와서 명수의 코를 핥았다.
“내가 할게.”
결국 단유가 나섰다. 단유도 칼을 잘 다루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상미보다는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2시가 되기 전, 상미의 핸드폰이 울렸고, 상미는 전화를 받고 집 밖으로 나갔다. 식탁에는 오전 상미의 실험에서 겨우 살아남은 사과들이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고, 껍질을 까지 않은 귤도 몇 개 올라와 있었다.
자기 방 청소를 대충 끝낸 명수도 어느새 운동복 대신 깔끔한 정장으로 갈아입은 채 거실을 서성거렸다. 그 밑에서 눈치를 모르는 패티가 짧은 다리로 방방 뛰며 돌아다녔는데, 긴장한 탓인지 명수는 전혀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다.
단유는 소파 위에 올라와 햇볕을 쬐고 있는 호빵을 안아 들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야, 여기 앉아 있어. 왜 거기서 그러고 있어.”
“···옷 구겨질까 봐 못 앉겠어.”
조금이라도 흠 잡힐 만한 모습을 보일 수 없다는 단호한 결의, 라기보다는 그냥 상미 부모님을 만난다는 상황 때문에 긴장한 탓이리라.
“어릴 때 자주 뵀던 분이잖아. 뭘 그래?”
“그거랑은 또 다르지.”
초조한 기색이 역력하던 명수는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셨다. 하은이 있었다면, ‘입 대고 먹지 말라니까’라고 한소리 하셨을 테지만, 지금은 그런 경고도 귀에 들리지 않을 명수다.
“안녕하세요.”
“어, 단유구나? 오랜만이네? 넌 계속 키가 크는 것 같다?”
“고맙습니다. 들어오세요.”
“그래.”
상미의 어머니는 단유의 인사에 웃는 표정을 지었는데, 조금 어색했다. 어머니의 뒤를 상미의 아버지가 뒤따라 들어왔고, 역시 단유가 인사를 하니 아버지도 오랜만에 본다며 반갑다는 인사를 하시며 신발을 벗었다.
“안녕하십니까!”
거실 한가운데서 주뼛대다가 단유에게 선수를 뺏겼지만, 그래도 입장이라는 게, 어쨌든 상미의 남자친구라는 타이틀이 있으니 명수는 우렁찬 목소리로 어머니와 아버지께 인사를 드렸다. 기합이 팍팍 들어간 명수의 군대식 인사에 어머니가 살짝 놀란 듯하다가 그래도 웃으면서 인사를 받아주었다.
“우리 명수는 그새 많이 늠름해졌네?”
“감사합니다!”
“가끔 이이가 TV로 네 경기 보는 거 옆에서 봤어.”
“무슨 쓸데없는 소릴 해.”
“없는 말 했어요? 아, 그리고 너 국가대표 됐다며?”
“네, 그렇습니다!”
“그것도 이이가 말해줘서 알았어. 내가 축구는 잘 몰라서. 아무튼 축하해.”
“감사합니다!”
“그나저나···집이 참 넓네?”
“네, 그렇습니다!”
“얘, 나 귀 안 먹었어. 목소리 좀 낮춰도 돼.”
“알겠습니다!”
아버지 뒤에 서 있던 상미가 눈총을 줘도 명수는 기합을 떨어뜨릴 기미가 보이지 않아, 단유가 나서서 안내했다.
“우선 거실에 좀 앉으시겠어요?”
“어? 그래.”
“뭐 마실 거라도 좀 드릴까요?”
“어, 그래. 고마워.”
단유가 상미에게 눈짓을 하니 상미가 부모님을 거실 소파로 안내했다. 그 사이 단유가 명수를 끌고 주방으로 갔다.
“긴장 좀 풀어.”
“으응.”
“넌 어머니, 아버지가 편하게 있으셨으면 좋겠어, 아니면 불편하게 있으셨으면 좋겠어?”
“···편하신 게 좋지.”
“네가 그렇게 있으면 어머니도 편하지 않으실 거야. 그러니까 좀 긴장 좀 풀고 평소처럼 해.”
“평소처럼?”
“명수처럼.”
“···그게 뭔데?”
단유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명수는 알 것이다. 아니 몰라도 상관없다. 명수는 명수니까. 그거 긴장만 조금 풀면 되는 일이다.
“냉장고에서 음료수나 좀 꺼내.”
그 사이, 어머니의 눈동자는 쉴 새 없이 주변을 살피느라 바빴다.
“밖에서 볼 때도 컸는데, 안은 더 넓네. 여기 몇 평이니?”
“난 잘 모르지.”
“얘는. 여기 살면서 그런 것도 몰라?”
“내가 그런 걸 알아야 하나? 뭐.”
“으이구.”
답답하다는 듯 혀를 찬 어머니의 고개는 오르락내리락 움직이며 곳곳에 자리 잡은 인테리어와 가구들, 집 구조를 확인하기 바빴다. 그리고 아버지는 굳은 얼굴로 바닥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 경계하는 시선을 보내는 패티와 눈싸움을 벌였다. 슬쩍 손을 내미니 패티가 슬쩍 다가와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고, 이 집안에서 그나마 제일 편안한 놈이 너구나, 라는 심정으로 아버지는 패티의 머리를 슬쩍 쓰다듬었다.
“여기 이것 좀 드십시오.”
“그래, 고마워.”
여전히 뻣뻣한 명수가 쟁반을 거실 테이블에 올려 두고 부모님께 음료수가 담긴 잔을 건넸다.
“자네 요즘 많이 바쁘지 않나?”
아버지가 처음으로 입을 열자, 명수는 바짝 얼은 얼굴로 대답했다.
“아직은 괜찮습니다. 대표 소집일 전까지는 팀 숙소에서 지내기 때문에 바쁘지 않습니다.”
“그렇군.”
어머니가 끼어들어 물었다.
“밥은 잘 챙겨 먹고?”
“네, 잘 먹고 있습니다.”
“프로팀인데, 어련히 알아서 잘 챙겨줄까.”
아버지의 타박에 어머니가 살짝 눈을 흘기고는 다시 명수에게 물었다. 물음보다는 칭찬이었다.
“오랜만에 만나니까 너무 좋네. 우리 명수랑, 단유랑 이렇게 보니까 괜히 눈물이 날 거 같아. 이렇게 좋은 집도 구하고. 명수가 고생을 많이 했지?”
아마도 이 집을 산 게, 프로팀에 들어간 명수의 덕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명수가 단유를 바라보며 단유가 산 거라고 말하려는데, 단유가 희미하게 고개를 저으며 눈짓을 보냈다.
“고생은요 뭘.”
“아직 어린데 명수가 대단한 거야.”
“아뇨. 단유 쟤가 샀어요, 이 집. 단유 집이에요.”
“응?”
아버지와 어머니의 눈이 모두 단유에게로 향했다. 단유가 멋쩍은 웃음을 짓고, 상미가 어머니의 팔을 붙잡고 흔들었다.
“엄마, 이 집 단유가 산 거라니까?”
“정말이야? 아니···어떻게? 복권이라도?”
일전에 지나가듯 상미가 단유가 샀다고 하긴 했지만, 어머니는 대학생인 단유가 무슨 돈으로 이 집을 샀을까 싶어, 당연히 프로팀에 입단한 명수의 돈으로 단유가 집을 알아보고 샀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아버지도 명수 정도면 충분히 집을 살 만한 돈을 구단으로부터 받았을 것이라고 넘겨짚었기에 어머니의 해석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참이었다.
“그냥 어쩌다 보니 돈을 좀 많이 벌게 됐습니다.”
“어떻게?”
어머니는 그게 무척 궁금했던 모양이지만, 상미는 어머니의 그런 질문이 단유를 곤란하게 만든다 여겨 어머니의 입을 막았다.
“얘는 왜 이래?”
“엄마, 일단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방 구경이나 해요.”
“아, 그래.”
어떻게 벌었는지도 궁금하지만, 집 구경도 어머니의 제1관심사였다. 말로만 듣던 재벌 집이 이렇지 않을까 싶기도 한 마당에 집 안 구석구석을 살필 기회라니, 호기심이 동하지 않을 리 없다.
“근데 집이 참 깨끗하긴 하네.”
“그쵸? 우리 깨끗하게 하고 산다니까요.”
상미가 너스레를 떨며 어머니와 아버지를 끌고 방으로 안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