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621화 (621/956)

세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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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영과 단유, 그리고 통성명을 하지 않아 이름을 모르는 여자가 초겨울 저녁 바람에 술기운을 날릴 때 경찰이 도착했다.

“제가 신고했습니다.”

단유가 먼저 이야기를 했고, 여자는 다시 화가 난 눈초리로 단유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가게 안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사장이 나와 사정을 설명하니 경찰은 여자에게로 다가가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경찰의 몫이라 여기며 단유는 예영에게로 몸을 돌렸다.

“저희도 이만 가죠.”

“그러자.”

이미 계산을 마친 뒤라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왜 그러셨어요?”

외투도 걸치지 않고 가게 밖으로 나섰던 것을 후회하던 예영이 옷깃을 여미다 단유를 돌아보았다.

“뭘?”

“아까 가게 안에서요. 어쩌면 위험할 수도 있었어요. 괜히 시비가 붙어서 큰 싸움이 벌어졌을 수도 있고.”

“안 그랬잖아. 그럼 된 거지.”

예영이 후, 하고 뜨거운 공기를 뱉어내자 하얀 입김이 바람을 타고 흘러갔다.

“다른 때였다면 나도 안 끼어들었을 거야. 나, 은근히 겁 많거든. 그런데 너랑 예전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옛날의 내가 계속 생각나는 거야. 그 여자, 옛날의 나 같았거든. 이유는 다를지 몰라도, 피해의식에 절어서 아무에게나 날 선 말들을 뱉기도 했고. 막막한 현실이 답답해서 술이나 마시고. ···우리 엄마한테 참 모진 말도 많이 했었는데. 아무튼 그때 생각이 났어, 그 여자를 보니까. 그래서 돕고 싶었나봐.”

돕는다, 라.

“옛날의 자신을요?”

“···응.”

어울리지 않게 오지랖을 부렸다며 자기 머리를 툭툭 두드리는 예영을 한 번 쳐다보고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린다.

“하지만 앞으로는 그러지 않으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그럼. 나 겁 많다니까? 아까 그 여자 막 째려보는 거 봤지? 뺨이라도 때리는 건 아닐까 무서워서 혼났다 야.”

웃음을 참지 못하고 깔깔대는 예영의 목소리가 길거리를 내달렸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아요.”

“응?”

“아무리 좋은 말로 충고를 한다고 해도, 사람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고요.”

“뼈가 있는 말인데?”

“쉽게 고칠 성격이었으면, 애초에 그런 난장판을 만들지도 않았겠죠.”

예영은 눈을 돌려 단유의 표정을 살폈다. 비관적인 발언을 내뱉는 것에 비해 얼굴은 담담하기만 했다.

“노력하면 바뀔 수도 있지.”

“노력과 보상이 늘 일치하는 건 아니죠.”

한 호흡을 쉬었다 다시 말을 잇는 단유.

“누나들처럼요.”

‘누나들’이 ‘갤럭시즈’를 일컫는 것임을 금방 알아들었다.

“돌직구네.”

연습실에서 보낸 수많았던 나날들, 자신을 채찍질하고 서로를 격려하며 보냈던 그 시절. 하지만 그 결과는 처참하기만 했을 뿐이다.

“틀린 말이 아니라 더 부정을 못하겠네. 야, 2차 가자. 맨정신으로 집에 가긴 글렀다.”

“내일 일 안 해요?”

“이래서는 내일도 우울한 하루를 보낼 것 같아. 누구 덕분에.”

농담조이지만, 확실히 아름답지 않은 추억을 곱씹은 덕분에 우울한 마음이 드는 건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오늘만 살고 말 것도 아닌데 술로 밤을 보낸들 무엇이 남을까.

“다음에 마셔요.”

예영도 적극적으로 권하고픈 마음은 없었던지, 단유의 거절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냥 집에 가야겠다. 술이 문제가 아니라 추위가 문제네. 내일 몸살나는 건 아닐까 모르겠다. 너 집에는 어떻게 갈래?”

“대리 불러서 가려고요.”

“대리? 너 차 있어?”

“네.”

“이야, 단유 너 성공했구나!”

“그래서 매상 자주 올려드리겠다고 했잖아요?”

“아, 그랬지. 그래, 알았어. 그럼 자주 놀러 와. 내가 맛있는 커피로 대접할게.”

“네.”

예영과 헤어지고 대리기사를 불렀다. 뒷좌석에 타고 집에 가던 중, 문득 예영이 말했던 ‘성공’이란 단어가 생각났다. 단지 차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녀는 ‘성공’을 언급했다. 과연 삶에서 성공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그녀에게 성공은 물질적인 부의 획득을 삶의 성공 지표로 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해할 수 있다. 그녀는, 그리고 그녀와 함께했던 누나들은 모두 연예인으로 ‘성공’하길 바랐고, 연예인으로서의 성공이 부와 명예의 획득임을 고려하면 말이다. 비싼 외제차를 끌고 다니며, 명품 가방을 손에 들고, 값비싼 브랜드의 로고가 새겨진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장면이 카메라에 담겨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것을 기대하는 이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지하 연습실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을 것이다.

‘난 돈은 필요 없어. 노래로 인정받기만 하면 돼.’

라고 생각하며 거울 앞에 서서 몇 시간이고 춤 연습을 하는 아이돌은 없을 테니까.

그러나 단유는 그것을 성공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물론 그의 통장에는 지금도 증식하고 있을, 일반인이 쉽게 가질 수 없는 돈을 가지고 있다. 또한 지금 번 것 이상의 돈을 벌 수 있는 수단-마법도 있다. 그러니 그게 몇몇 이들이 말하는 성공의 척도라면, 단유는 더 이상 공부를 할 필요도, 마법에 목매달 필요도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성공이란 업적을 달성한 성취감에 행복을 느껴야 마땅하지만, 단유는 그런 감정은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단유 본인에게 성공이란 무엇일까.

‘······.’

마법사가 되는 것? 그것을 삶의 목표, 성공의 기준으로 둘 수 없다. 변호사가 되는 게 삶의 목표, 의사가 되는 게 성공의 기준, 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미친 듯이 마법을 연구하고, 더 많은 마법을 익히기 위해 공부에 매진하는 것은 그것이 단유가 생각하는 삶의 목표에 가깝기 때문이다.

삶의 목표. 그것은 본질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이다.

‘왜 나는 이곳으로 온 것일까?’

길 가다가 돌에 걸려 넘어진 뒤, 왜 나는 이 돌에 걸렸는가,를 궁금해하는 게 아니다. 무려 세상이 바뀌어버린 사건이다.

그러니 세상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이 세상이 드러내지 않은 진실은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이 이곳으로 오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 그리고,

‘내 가족들.’

만일 단유가―기적적으로―자신의 가족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그의 노력이 발한 가장 큰 성공일 테다. 물론 그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몇 차례 두 세계를 오가며 그 가능성을 확인하 바가 있으니 솔직히 기대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단유는 일말의 희망을 놓지 않는다. 가족들과의 상봉을 꿈꾸는 게 아니라, 가족들과 왜 떨어지게 되었는지를 알게 되는 것, 그 가능성을 꿈꾼다. 그 물음에 대한 답이 바로 단유의 성공이며, 삶의 목표다.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본질은 배제하고 드러난 질문만 따지면, ‘나는 왜 태어났을까’를 묻는 물음과 다를 바 없다. 마치 고등학교 시절 들었던, 사춘기 소년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할 때 하는 질문과 똑같지 않은가. 사정을 모르는 누군가가 단유에게 ‘중2병’에 걸린 거나고 물어도 헛웃음을 지을 뿐 다른 대답을 해줄 도리가 없다.

대리기사가 단유의 웃음 소리를 듣고 룸미러로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설명할 거리도 아니라, 그냥 창밖을 내다보았다. 긴 밤을 지새며, 대리 운전을 하는 저 사람에겐 자신이 부모 잘 만나 흥청망청 돈이나 쓰고 술이나 마시며 인생을 즐기는 한량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당신은 이 땅에서 태어난 사람이잖아.’

왜 자신이 태어났으며, 왜 하필 이곳인가를 고민할 필요가 없는 그는, 그저 자신의 삶에 충실하며 보다 나은 삶을 희망하며 노력하면 그만이지 않은가? 따지자면, 이 땅에서 태어나 자란 모든 이들, 부모와 함께 사는 이들이 단유는 부럽다.

해결되지 않을 결핍을 가슴에 안고 살아야 하는 단유로선 말이다.

****

기말고사도 거의 마무리가 되어 몇몇 수업들을 제외하면 종강한 과목들이 다수라 일부 학생들은 이른 방학을 맞이하기도 했다.

“다음 시험만 치면 끝이네요, 우리도.”

노트를 한참 들여다보던 새벽이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며 말을 걸었다.

“드디어 마지막이네.”

1학년이 이제 다음 수업, 마지막 시험만을 남겨두었으니 단유도 홀가분하다는 느낌이었다.

“한 시간만 더 있었으면 좋겠어요.”

공부할 시간이 모자라다며 투덜대는 유영의 말에 새벽도 깊이 공감한다는 표시를 보였다.

“언제나 시간은 모자란 법이지.”

“하지만 오빠는 늘 여유로워 보이는 걸요?”

“내가?”

“오빠도 시험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요?”

“솔직히 말할까?”

“네.”

“조금 받긴 하지.”

“그게 그렇게 뜸 들여 말할 내용인가요?”

“시험 점수야 별로 신경 안 써. 하지만 시험을 잘 보느냐, 못 보느냐는 내가 지난 시간 제대로 공부를 했는지, 안 했는지를 점검할 수 있는 사안이니까 긴장이 되지.”

“되게 모범생다운 답이네요.”

“이 형은 우리랑 다르다니까. 생각하는 게 달라. 우리는 조금이라도 더 좋은 점수를 받아야 스펙에서 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난 여기서 점수 못 받으면 나중에 취업할 때 얼마나 많은 불이익을 생길까 두려울 정도라고.”

“요즘은 취업할 때, 1학년 교양 강좌의 점수를 따지나?”

“모르죠. 하지만, 이것도 일종의 스노우볼이 될 수 있다고요. 이 한 과목 잘못해서 나중에 재수강을 하나 더 들어야 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고, 점수 방어를 못해서 빵구가 나면 한 학기를 억지로 더 들어야 할 수도 있고. 혹시 모르죠, 진짜 취업할 때 문제가 생길지?”

“걱정도 팔자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남자들은 군대 가기 전에는 다들 논다더라만.”

“그거야말로 무슨 개똥 논리야? 군가산점 없어진 지가 언젠데.”

“그런가? 아무튼, 1학년을 이렇게 책에 파묻혀서 보낼 줄은 상상도 못 했네. 대학 오기 전에는 되게 환상이 많았는데.”

“무슨 환상? 설마 CC같은 거?”

“······.”

“너 방금 형 눈치 봤지?”

“아니? 내가 언제? 나 안 그랬거든?”

“어, 그럼 이제 형한테 마음 떠난 거네?”

“야이 씨! 야, 니가 그러니까 여태 여자 친구가 없는 거야.”

“거기서 내 연애가 왜 나와?”

“어이그. 관둬라. 내가 곰탱이한테 사람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야? 알아듣지도 못할 텐데.”

“둘 다 그만하고 공부나 해. 시간 모자라도 투정 부리던 게 방금 전이었어.”

“하여튼, 넌 말이야, 방학 때 절대 연락하지 마.”

“누가 너한테 연락 한다든? 안 할거거든?”

“남자를 곰으로 여기는 너같은 여자는 절대 남자 친구 안 생길 거다.”

“웃기시네. 남자를 곰으로 여기는 게 아니고, 너를 곰탱이로 보는 거거든. 그게 진실이고.”

“어? 형, 어디 가요?”

“너희 둘 다정하게 이야기 나누라고 자리 비켜주려고 그러지.”

“알았어요, 조용히 할게요.”

“죄송해요, 오빠.”

“죄송하긴. 이야기 나눠.”

“아니에요, 오빠. 조용히 공부만 할게요. 아, 오빠 여기 이거 좀 가르쳐 주세요.”

“야, 형 옷 늘어난다. 적당히 좀 해라.”

“아, 쫌!”

시험을 끝내고 단유는 둘을 데리고 예영이 일하는 카페에 데리고 가서 커피를 한 잔씩 사주었다. 예영은 단유의 친구들이라는 말에 반가워하며 서비스로 조각 케익을 내주었고, 단유가 계산하겠다는 걸 극구 말렸다.

두 사람은 예영이 연예인이었다는 걸 전혀 알지 못하고, 그저 단유가 아는 사람들은 모두 외모가 장난 아니구나, 생각할 따름이었다. 단유도 굳이 그들에게 예영이 연예인이었음을 말하진 않았다.

“시험 끝났어?”

“네.”

“그럼 이제 당장은 급한 일 없겠네?”

“그렇죠.”

개인적으로는 실험과 공부와 번역과 프로그래밍, 이라는 과제들이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조율할 수 있는 사항이었으니, 급하게 처리할 일들은 없었다.

“그럼 오늘 술 한 잔 어때?”

“···혹시 저 없을 때도 계속 술 마시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얘는, 누가 들으면 알콜 중독자인줄 알겠다. 그런 거 아니고, 그냥 기분 좋게 마실 사람이 있으니까 말하는 거지. 싫으면 관둬.”

“알았어요. 저녁에 봐요.”

“저기, 저희도 껴도 돼요?”

유영이 단유에게 묻자, 새벽이 또 끼어들었다.

“저희? 너 왜 나한테 묻지도 않고 저희야?”

“넌 싫으면 관둬. 그래도 너 생각해서 물은 건데 싫으면 빠지시던가.”

얘네 둘 뭐냐, 는 예영의 시선에 단유는 그냥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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