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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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가 환영 마법을 즐겨(?) 사용하게 된 데는 직접적으로 손을 쓰지 않고 상대를 곤혹스럽게 만들 수 있다는 점도 있지만, 상대의 패악을 그대로 돌려줌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자신 때문에 얼마나 힘든지를 직접 느끼게 하려는 의도였다. 쉽게 말하자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다.
물론 말로 설득하여 상대를 깨우치게 하는 방법도 있지만, 이제까지의 경험에서 그 방법이 통한 사례는 찾기 힘들었다. 논리적으로 설명한들, 상대는 논리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감정적으로 대하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같이 감정적으로 맞대응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니, 결국 단유는 환영마법을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했다.
이번에도 단유는 경찰이 올 때까지 여자를 환상 속에 묶어두었다가, 예영을 데리고 소란스러운 현장을 벗어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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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소주병을 들고 위협적으로 나서던 여자가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자,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은 어리둥절하며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쉽게 다가가는 이는 없었다.
“뭐야! 어딨어!”
갑자기 허공에 대고 소리치는 여자를 보며 ‘진짜 미친거야?’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거 아냐?’ 같은 말을 주고받으며 눈치를 봤다. 여자와 직접적으로 대거리를 했던 아저씨 역시 그저 쳐다만 볼 뿐이었다.
여자가 시비 거는 걸 멈추니, 가게 분위기가 아까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가라앉았다. 단유는 이 정도로 만족하며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예영에게 그 생각을 이야기하려는데, 예영이 먼저 벌떡 일어섰다. 의자가 끌리는 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지만, 예영은 신경 쓰지 않고 걸어나갔다. 아무것도 없는 공중에 대고 손을 젓는 여자를 향해 다가간 예영이 가장 먼저 한 것은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소주병을 낚아채는 것이었다. 테이블 위에 소주병을 올린 뒤, 앞으로 뻗은 여자의 손목을 붙잡았다.
“저기요.”
그러나 여자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사방으로 초점없는 시선을 뿌릴 뿐이다. 예영은 물러나지 않고 그녀의 손목을 강하게 잡아 끌어내린 뒤, 다시 말을 걸었다.
“이봐요? 정신 좀 차려요.”
“거, 아가씨. 보아하니 그 여자 정신이 좀 이상한 사람 같은데 뒤로 물러나요. 위험해.”
대거리를 벌이던 아저씨를 말리던 일행 중 한 명이 걱정스럽다는 듯 예영에게 말을 걸었지만, 예영은 들은 척도 않고 계속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이 상황에서 단유도 가만히 지켜볼 순 없었다.
“누나, 그만 해요.”
그러나 예영은 포기하지 않았다.
“저기요, 대답 좀 해봐요.”
결국, 단유는 마법을 해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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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요, 이봐요?”
“어? 네?”
“이봐요, 정신이 들어요?”
“···뭐예요, 방금?”
“뭐가요?”
“방금···아무도 없었는데?”
“···괜찮아요? 어디 아픈 건 아니죠?”
예영을 멍하니 쳐다보던 여자가 고개를 돌려 가게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그대로인 가게. 자기만 잠깐 다른 세상으로 건너갔다가 온 것 같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 아까 전까지 자신을 못잡아 먹어 안달이 난 것처럼 굴던 남자들이 자신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발가벗겨진 마네킹의 사타구니를 바라보는 호기심이 아니라, 병색이 완연한 환자를 바라볼 때 무슨 병에 걸렸는지 궁금해하는 눈이었다. 호기심 반, 동정 반이 섞인 눈들이 자신을 바라본다.
그리고 다시 앞에 선 예영에게로 시선을 돌린 여자는 더듬거리며 물었다.
“조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어디까지 기억하세요?”
“그게···저기 저 아저씨가 저한테···.”
지목을 받은 아저씨는 또 자신을 걸고 넘어지는 여자의 발언에 황당하다는 듯 헛바람을 뱉으며 나서려 했고, 일행은 다시 그를 붙잡고 다독였다. 하지만 예영은 그런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자만을 똑바로 쳐다보며 상태를 살폈다.
이유야 어쨌든 독기에 가득 차서 흥분했던 것과 달리 침착을 되찾은 듯 보이니, 예영은 그녀의 손을 끌었다.
“우리 잠시 나가서 이야기 좀 할까요?”
“···왜요?”
“여기는 보는 눈도 많으니까, 나가서 둘이 이야기 좀 하죠. 바람이 차니까 술도 금방 깰 거고요.”
예영은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기가 한풀 꺾인 탓인지 예영의 힘에 저항 없이 끌려가는 여자를 바라보다, 예영이 눈짓하는 것을 보았다. 단유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두 사람이 가게를 나가자 마치 음소거를 해제시킨 것처럼 소란스러워졌다. 여자에 대한, 간간이 피식거리는 웃음이 섞인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마음은 없었다. 단유는 자리에서 일어나 예영의 자리 옆에 놓여 있던 짐들을 챙긴 뒤, 여자가 있던 자리로 갔다.
잠시 자리를 피했던 종업원이 여자가 나간 사이, 엉망이 된 자리 근처를 치우고 있었다. 음료수를 엎질러 더럽혀진 바닥을 밀대 걸레로 닦다가 단유를 흘깃 쳐다보지만, 단유는 달리 대응하지 않았다.
이 상황이 되었는데도, 여자의 일행이었던 또 다른 여자는 여전히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마셨길래?’
단유는 그녀의 어깨를 짚고 흔들어보았지만,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고무인형처럼 흔들리기만 했다.
그녀를 깨우는 건 나중으로 미루고, 카운터 쪽에서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사장과 시선을 맞췄다. 미간에 새겨진 깊은 주름이 펴질 줄 모르는 사장에게로 다가가 카드를 내밀었다.
사장이 카드를 받아 계산을 하는 사이, 창밖을 바라보니 두 여자가 가게 앞에서 마주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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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좀 들어요?”
“왜 자꾸 정신 차리라고 해요? 내가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여요?”
정신이 들긴 든 모양이었다. 찬바람을 쐬니 다시 아까 보았던 기센 모습으로 돌아온 여자였다.
“저기요, 아까까지 그쪽 되게 이상했거든요? 아무것도 없는 공중에 대고 소리치고 그랬거든요?”
“······.”
조금 전의 일을 거론하니 또 금방 입을 다문다. 진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괜히 침이 마른다. 그렇다 해도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진 않는다. 설령 그녀가 술을 마셔서 그렇든, 아니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든, 다수의 사람들 속에서 위협을 느껴 악을 쓰며 자신을 보호하려는 그 처절함을 외면할 수 없었다.
“제가 그쪽한테 충고할만한 입장도 아니란 건 아는데, 그래도 모른척 할 수 없어서 그래요.”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건데요?”
날선 반응이지만, 예영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분명 처음에 그쪽이 화를 낸 건 합당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요. 종업원의 실수에 화를 낼 수도 있겠죠.”
“그래서요? 제가 화를 내면 안 됐다는 이야긴가요?”
“물론 화를 내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했다면 좋았겠지만, 얼핏 듣기로 꽤 비싼 물건이었으니 순간적으로 화를 참지 못했을 수도 있으니까요. 이해해요.”
어디 무슨 말을 하나 들어보자는 듯 팔짱을 끼고 노려보는 여자의 태도에도 예영은 차분하게 행동했다.
“하지만, 그 뒤로 그쪽이 보여준 행동은 솔직하게 말해서 조금 심했다고 생각해요. 그 옆의 아저씨나 다른 사람들이 아가씨한테 해를 끼친 것도 아닌데, 그렇게 신경질적으로 대할 필요는 없었다고 봐요.”
“나, 참. 저기요, 그쪽은 못 보셨어요? 그 아저씨들이 저한테 무슨 말을 하는지 못 들었어요? 미쳤다고 막말하고 깔보듯이 쳐다보던 것 못 봤어요?”
“봤어요. 봤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죠.”
“나중 일이요?”
여자는 코웃음을 치며 예영의 위 아래를 살피다 입을 열었다.
“이봐요. 그쪽 얼굴 보니 평소에 남자들이 여왕마마 모시듯 떠받들고 살았을지도 모르겠는데요. 그래서 남자란 족속들이 어떤지 잘 모르는 것 같네요. 그 사람들은 애초부터 절 미쳤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거라고요. 알아요?”
“억지 부리지 말아요.”
“억지요? 그런 말 있죠? 사람의 말은 그 사람의 성격을 드러낸다고. 그 아저씨들이 하던 그 상스러운 표현들과 말버릇을 댁은 전혀 못 들었나 보네요.”
그때 단유가 가게 문을 열고 나왔다. 그 모습을 흘깃 본 여자는 또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하긴, 남자랑 속닥거리느라 정신이 없었겠지.”
단유는 들고 있던 옷을 예영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추워요.”
“고마워.”
그리고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옷을 마주선 여자에게 건넸다.
“자요.”
“제 옷을 왜 마음대로 만져요?”
“추우니까, 우선 받으세요.”
“뭐야, 이 사람들?”
단유의 손에서 외투를 낚아챈 여자는, 그래도 꽤 차가운 바람이 참기 힘들었던지 바로 챙겨 입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녀의 공격은 무뎌지지 않았다.
“저기요, 사과하세요.”
“죄송합니다.”
단유는 곧바로 사과했다. 그렇게 나올 줄 몰랐던지 여자는 순간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벙긋거렸다. 곧 미리 생각했던 대사를 물리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뭐가 죄송한데요?”
“그쪽 옷 마음대로 건드려서 화가 나셨다면서요. 그래서 사과드리는 것이기도 하고, 또 미리 사과해야 할 것도 있어서 한 겁니다.”
“미리?”
“여기요.”
이번에 건넨 건 그녀의 핸드폰이었다. 예영이 여자를 데리고 나가는 와중에 놓고 간 문제의 물건.
“비싼 건데 그냥 뒀다가 문제 생기면 큰일이잖아요.”
라고 말하며 건네니, 여자의 눈동자에 불꽃이 튀었다.
“당신 뭐야! 뭔데 허락도 없이 남의 물건을 막 만져! 응? 진짜, 당신들도 내가 우습게 보여? 그런 거야?”
예영이 뭔가 말을 꺼내기 전에 단유가 먼저 그녀의 말을 받았다.
“아까 본인이 말했죠? 말은 그 사람의 성격을 드러낸다고. 지금 본인이 사용하는 말은 어떤 성격을 드러낸다고 생각하시죠?”
“와, 이제 그냥 시비를 거시네. 그래서, 뭐, 내 성격이 더럽다고 말하는 거야? 그래, 나 더럽다. 아주 더러운 걸레다, 이 새끼야!”
빼액, 하고 소리를 지르니 가게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걸음을 늦추며 돌아본다. 일부러 사람의 주목을 끌려고 저러는 걸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단유야, 왜 그래, 너.”
예영이 단유를 말리려는데, 단유는 화가 난 게 아니라고 짧게 대답하고는 자신을 노려보는 여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가진 분노를 저는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불특정 다수를 향한 분노를 특정인에게 옮겨 푸는 것으로 보았습니다만, 그래서 당신의 분노를 저는 이해하기도 힘들었고, 공감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습니다.”
골목을 가로질러가던 바람이 여자의 긴머리를 흩날리고 지나갔지만, 여자는 머리를 정돈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확실히 말은 사람의 성격을 드러낸다는 그쪽 분의 말에는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언어와 단어의 사용은 그 사람의 지난 경험과 사고, 감정이 녹아들어 있으니까요. 종합하면 성격, 혹은 성향으로 볼 수 있겠죠. 그런 의미에서 그쪽 분이 가게 안에서 말씀을 하셨던 것들은 똑같이 당신의 성격을 드러낸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죠.”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응?”
“어떤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가요?”
“뭐?”
“말이란 것은, 적극적인 의사 표현 수단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가진 생각과 의지를 ‘언어’라는 수단으로 상대에게 전하는 것이죠. 요컨대 상대에게 ‘나’를 드러내는 것이란 뜻이죠. ‘적극적’이란 표현은 바꿔 말하면 내가 어떤 언어를 사용할지를 결정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종합하면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이미지로, 어떤 사람으로 보여질 것인지를 자신이 결정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좀 과장된 비유를 들자면, 제가 지금 그쪽에게 존대말을 하는 이유도 당신과 진지하게 대화를 하고자 하는 뜻을 밝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묻죠. 그쪽 분은 어떤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가요?”
“······.”
말은 없지만, 그렇다고 단유의 말에 공감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하긴 말 몇 마디에 생각을 바꿀 사람이었다면, 그 난리를 피우지도 않았을 것이다.
“단지 나이 때문에 존대말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하네요. 그렇다면 그쪽 분은 아까 가게 안에서 한참 나이가 많았을 분들에게 존대말을 하지 않았으니까요.”
“비꼬지 말고 그냥 욕을 해.”
“비꼬는 것으로 들리나요? 전 그런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솔직히 이런 말을 해줄 생각도 없었습니다. 여기 이 누나가 그쪽 분을 챙기는 모습을 보기 전에는요.”
예영이 억지로 미소를 짓는 모습을 보며 단유는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예영이 여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의 가슴 속에 담은 분노를 엉뚱한 사람에게 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이 친구 말처럼, 부디 다른 사람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길 바랄게요. 강한 사람 말고, 좋은 사람이요. 그럼 적어도 오늘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지금 이게 다 내 탓이란 소리예요?”
“그건 대답하지 않을게요. 다만 제가 예전에 이런 경험이 많아서, 그래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당시 저는 억울한 일도 많이 당하고, 그래서 화도 많이 냈지만, 결국 저 혼자 상처받고 저 혼자 힘들 뿐이란 것을 알았거든요.”
예영은 단유를 슬쩍 바라보았다. 그 당시의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이다.
“아, 남들 시선을 신경 쓰며 살라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면, 매일 아침마다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거울을 바라보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경험담이니까 믿어도 좋아요.”
차가운 바람에도 무너지지 않고 편안하게 웃음을 지어 보이는 예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