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619화 (619/956)

세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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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잔이 비어갈수록 예영의 얼굴은 점점 불콰해졌고 자주 웃음을 흘렸다.

“그러니까,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내가 딱 지금 네 나이였단 말이지.”

11월 말의 차가운 밤바람이 가게 문을 덜컹거리며 지나갔지만, 얼큰하게 취한 취객들의 정신을 돌릴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불판의 따스한 기운에 점점 정신을 놓기 시작한다.

“내가 원래 술이 그렇게 세지 않았단 말이지. 어릴 때는 언니들이랑 같이 마시면서 회사 뒷담 까는 게 재미있어서 마셨던 거고, 그때는 술맛도 몰랐다고. 그런데, 나이가 드니까 말이야, 술이 점점 맛있어지네?”

말끝이 늘어지고, 가끔은 했던 말을 또 하기도 하지만, 단유는 참을성 있게 들어주었다. 아니 솔직히 이 자리가 썩 나쁘지 않았다.

단유의 기준에서 예영은 친구도 아니었고, 매니저 형과의 관계를 정리한 이후로 연락 한 번 없던 사이였으니 ‘남’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아주 외면하고 살 정도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내색하진 않았으나 단유는 지금의 자리가 꽤 즐겁다고 느꼈다. 간간이 과거의 한 장면을 떠오르도록 하는 이야기가 오고 갈 때마다,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이유였다. 사람들이 빛바랜 사진을 앨범에서 찾아낼 때, 이런 기분을 느끼지 않을까 싶었다.

“아까 그 친구, ‘그쪽’ 사람이지?”

두리뭉실하게 대명사로 표현했어도, 단유는 쉽게 알아들었다.

“네.”

“그런 거 같더라. 친구가 아주 예쁘더라. 딱 배우상인데, 마침 데리고 들어온 사람들도 스탭처럼 보이더라고. 가끔이지만 유명한 연예인들도 우리 가게에 오긴 하거든. 그런데 니 친구도 그런 연예인들 못지 않게 예쁘고 젊어. 내 생각이지만, 아마 니 친구 크게 성공할 거야.”

“유진이가 들었으면 무척 좋아했을 거예요.”

“이름이 유진이구나. 이름도 예쁘네. 본명?”

“네. 아직은 본명을 쓰고 있나 봐요.”

“그렇구나.”

술잔을 든 채로 고개를 끄덕이던 예영이 눈을 가늘게 뜨며 단유를 바라보았다.

“서둘러야 할 것이야.”

“네?”

“가만히 있다가는 그냥 놓치고 말 것이야.”

“뭘 놓쳐요? 유진이요? 그런 사이 아니라니 깐요.”

“놓치고 나서 후회해봤자 소용없다.”

단유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말을 받았다.

“저나 유진이나 서로에게 이성적인 감정을 느끼진 않아요. 그냥 친구일 뿐이죠. 가끔 서로의 일상을 묻고 답하는 정도의 친구. 그리고···설령 이성적으로 느낀다고 해도 연애는 불가능하죠.”

“왜?”

“소속사에서 가만 두고 보겠어요? 한참 뜨기 위해 바쁠 아인데, 일에만 집중해도 모자랄 판이죠.”

“배려심 쩌네. 그런데, 이성적인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라. 넌 그렇다쳐도 걔도 과연 너한테 그럴까?”

“그만 하세요. 일부러 떠보는 거 아니까.”

“어라? 들켰네?”

예영은 키득거리며 술잔을 들었다.

“이것만 마시고 일어서죠.”

“벌써? 난 이제 시작인데?”

“비운 술병이 벌써 3병인데요?”

정확히 3병을 비웠고, 반쯤 남은 소주병 하나가 예영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래? 근데 왜 난 이제 겨우 한 병 마신 거 같지?”

“기분 탓입니다.”

예영은 단유의 빈 잔에 술을 따르며 웃었다.

“우리 단유도 술 잘 마시는구나.”

“그냥 맞춰 드리는 거죠. 잘 못 마셔요.”

“그래도 아쉽다. 한 병만 더 시키자.”

“내일 출근 안 하세요?”

“이 정도론 끄덕 없어.”

눈에 힘을 주니, 짙은 쌍꺼풀 주름이 더 깊어졌다. 하지만 금세 힘을 잃고 마는 눈동자를 보며 단유가 말했다.

“오늘만 날은 아니잖아요.”

“나중에 또 보러 올 거야?”

“그럼요.”

“약속하는 거다?”

“매상 올려드릴게요.”

예영은 손을 내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네가 매상 올려주는 건 별로 안 고맙고, 그냥 저녁에 이렇게 같이 술 한 잔 해주면 돼.”

“매일은 힘들어요.”

“나도 매일은 힘들어. 나도 나이를 먹나 봐. 체력이 안 받쳐주네.”

“누나 아직 젊어요.”

“젊긴. 그 바닥에서는 이미 퇴물인데.”

비교 대상이 ‘그쪽’이란 건 아직도 완전히 떨쳐내지 못했다는 뜻일까?

“···미련, 남아요?”

“전혀 없다고는 못 하지만, 거의 없어. 할 만큼 했고, 무릎도 닳을 만큼 닳았어. 그만큼 내 자존심도 많이 꺾여 나갔고. 이제 소주 찌꺼기만큼 남은 자존심이지만, 그것만이라도 지키고 싶네. 아, 부럽다. 청춘이여.”

“누가 보면 세상 다 산 사람인 줄 알겠네요.”

“서비스 직종이 힘들다고 하잖아? 근데, 난 할 만해. 어렸을 때 그 고생을 했더니, 카페 일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은 전부 양반들이야. 가끔 억지 부리거나 진상 피우는 손님도 있는데, 적어도 그 사람들은 내 걸 뺐으려고 악다구니 쓰는 사람들은 아니잖아?”

도대체 연예계에 있으면서 얼마나 많은 일을 겪었기에 저런 표정이 나올까 싶었다. 하지만 그게 무어냐고 묻진 않았다. 괜히 들쑤셔서 술자리를 길게 이어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니, 너!”

뒷자리에서 갑자기 툭 튀어나온 고성에 무심코 돌아보았다. 단유가 앉아 있던 자리 뒤로 여자 둘이 마주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이 소리친 것이었다. 그 대상은 다름 아닌 종업원.

“죄송합니다.”

짧은 머리의 남자 종업원은 눈썹을 치켜세운 여자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지만, 여자는 쉽게 화를 풀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정신은 어디 두고 다니는 거야?”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말만 죄송하면 다니? 이거 어떡할 거야?”

여자는 물에 젖은 핸드폰을 들어 흔들어 보였다.

“저기, 깨끗한 수건으로 잘 닦아서···.”

“닦아? 이게 닦는다고 되니? 응?”

“···드라이기로 말려드리겠습니다, 손님.”

“하, 나 참. 기가 막혀서. 드라이기? 이게 드라이기로 말린다고 되니? 응? 이게 얼마짜린 줄 아니?”

여자의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다른 손님들의 목소리는 점차 낮아졌고, 종업원의 얼굴은 더욱 새빨갛게 물들어갔다.

“이게 얼마짜린 줄이나 아니? 아냐고?”

“아, 거 아가씨. 보니까 아가씨 좀 심하네?”

“네?”

“거, 전화기에 물 좀 묻은 거 가지고 왜 그렇게 사람을 들들 볶고 그러나?”

“뭐라고요?”

“거기 총각이 저렇게 사과하면 대충 받아주고 말 것이지, 왜 사람을 종 취급하고 그래? 보는 사람 불편하게.”

“아 기막혀. 이봐요, 아저씨. 이게 고작 물 좀 묻은 거라고요? 아저씨는 옷에 김치 국물 튀어도 그냥 웃고 넘길지 모르겠지만, 전 그럴 수 없거든요? 이건 더럽혀지고 안 더럽혀지고의 문제가 아니라 서비스의 문제거든요?”

“거 아가씨 말 본새하고는.”

“여자가 얼마나 만만하게 보였으면 이래요? 남자였으면 이렇게 뻣뻣하게 굴지도 않을 거면서.”

“거기에 남자 여자가 왜 나와요?”

“그리고 이거 150만원 짜리거든요? 이거 고장나면 아저씨가 고쳐주기라도 할 거예요?”

“거참, 물 좀 묻는다고 무슨 고장 타령이야. 그리고 누가 그렇게 비싼 거 쓰래?”

“나 참, 아저씨 왜 반말이야?”

“반말이야? 반말이야?”

아저씨가 고개를 기울이며 여자를 노려보자, 여자는 더욱 큰 목소리로, 삿대질까지 하며 소리쳤다.

“왜, 여자 둘이서 이런 데 와서 술 마시고 있으니까 만만해 보여? 왜 소릴질러?”

“소리는 니가 지르고 있잖아?”

“아저씨가 먼저 큰 소리 치면서 협박했잖아!”

“협박이라니!”

아저씨가 버럭 소리 지르며 일어서자, 여자는 더 큰 비명을 지르며 도움을 호소(?)했다.

“꺄악! 사람 친다! 사람 쳐!”

“이 여자가 미쳤나···.”

그저 일어서기만 했을 뿐인데, 여자는 비명을 지르며 금방 죽기라도 하는 양 호들갑을 떠니 아저씨는 어이가 없었다.

“미쳐? 진짜 미치는 꼴 보고 싶어? 보고 싶냐고!”

“거, 아가씨도 좀 진정해요. 아버지 뻘 되는 사람한테 반말하는 거 보기 안 좋아요.”

“넌 또 뭔데? 왜 끼어들고 지랄인데?”

혼돈의 연속이다.

경험이 미숙해 잘 대처하지 못한 종업원의 잘못을 대신 사과하러 온 사장도 목소리 큰 여자의 기세에 어쩔 줄 몰라 허둥댔다. 이 광경을 지켜보다, 결국 참지 못하고 중재를 하려 들었던 옆자리 아저씨가 여자의 반격에 분노하면서 참전을 선언하였고, 결국 전쟁이 시작되었다. 여자는 본진을 지키면서 목소리를 높였고, 아저씨는 여자의 본진으로 침공하려 했지만, 아저씨의 일행이 싸움이 커질 것을 우려해 말리는 바람에 전쟁은 각자의 진영에서 눈싸움, 말싸움을 하는 정도에 그쳤다.

그러나 그마저도 미봉책일 뿐이니, 여자의 일행이라 생각했던 여인은 술을 많이 마신 탓인지 비몽사몽으로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고 있을 뿐이고, 점점 격화되는 말씨름에 아저씨를 말리던 일행도 분을 참기 어려워 부들대는 형편이었다.

나이가 많아도 한참 많을 게 뻔한 아저씨가 어린 여자에게 농락당한다 생각했던지 또 다른 응원군이 참전을 선언하며 가게 안이 혼란스러워지는 와중이었다.

“아, 뭐 저런···.”

대충 욕을 입에 담는 예영이 눈을 부릅뜨며 여자를 노려보는데 금방이라도 참전을 선언하고 거센 공격을 퍼부을 모양새였다.

기분 좋게 술자리를 마무리하고 일어서려 했던 단유는 즐거웠던 기분이 급격히 사그라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끼어 들어봐야 득이 없을 게 뻔한 이 전쟁에 예영이 참전하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

핸드폰을 꺼내 112를 눌렀다.

“나 참, 이 새끼들이 단체로 누굴 놀리나. 아, 그래. 아주 니들이 날 만만하게 본다 이거지? 힘은 좆도 없는 여자니까 마음대로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거지? 아주 이러다 강간이라도 하겠다? 응?”

이제 거의 모든 테이블에서 이야기를 멈추고 상황을 지켜보는 중이고, 어떤 이는 핸드폰을 꺼내 그녀를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쟤 미친년 아냐?”

“다 들린다? 응? 너, 너. 나보고 미쳤다고? 그래, 좋다 이거야. 너희들 전부 얼굴 기억한다고, 응? 다 고소할 줄 알아!”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여자를 바라보는 사람들. 그러나 여자는 그 시선에 더욱 힘을 얻는 모양인지 독기 서린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며 악을 썼다.

“진짜 미치는 거 보여줘? 미친년 널뛰기하는 거 보여줘? 응?”

여자는 소주병을 든 채로 벌떡 일어섰고, 곁에 서 있던 종업원과 사장은 움찔 놀라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후우.’

단유는 마법사이지, 예언가가 아니다. 미래에 벌어질 일을 미리 알 수 있는 힘은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몇 가지 정황들을 함수로 설정하여 계산을 하면 결과값을 계산하는 것은 가능했고, 이대로 상황을 두면 분명 문제가 생기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단유가 나서기로 한 것은, 종업원이나 사장이 불쌍해서도 아니었고, 정의감에 불타올라서 나서려는 것도 아니었으며, 그저 함께 자리한 예영이 좋지 못한 상황에 말려들 것을 우려한 것이고, 단유 개인의 즐거웠던 기억을 더럽게 오염시키려 한다는 것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지극히 개인적이며 이기적인 이유 때문에 나서기로 마음먹었다는 이야기였다.

“미친년이 되고 싶으면, 그렇게 도와드리죠.”

단유는 숨을 가볍게 들이쉬었다 천천히 내뱉었다. 술기운이 조금 가시면서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을 느꼈다. 다시 고개를 돌려, 금방이라도 소주병을 들고 난동을 부릴 듯이 사방을 노려보는 여자를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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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이란 이런 놈들이다. 틈만 나면 어떻게 한 번 해보려고 껄떡거리기나 하고, 평등을 부르짖으면서 뒤로는 차별에 앞장서는 존재들이다. 조금이라도 틈만 보이면 음흉한 눈으로 가슴과 가랑이 사이를 오가며 훔쳐보기 바쁜 주제에 입으로는 실력 운운하며 씹선비질이나 한다. 군대 다녀온 게 무슨 벼슬이라도 되는 듯이 자기들만의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벽을 쌓고, 벽 밖에 선 이들, 특히 여자들을 나약하고 짐만 되는 존재로 생각한다.

일을 배울 기회는 주지도 않으면서, 왜 이렇게 일을 못하냐고 눈치 보기 바쁘고, 정신없이 일하고 있으면 지들끼리 흡연 타임을 갖겠다며 회사 옥상으로 우르르 달려간다.

회의실은 왜 필요한 건지, 중요한 결정은 대부분 재떨이 옆에서 이루어지고, 거기에 끼지 못한 여자들은 그저 통보만 받을 뿐이다. 그러면서 술자리에는 꼭 옆에 끼고 앉아야 직성이 풀리는 족속들.

“좆같은 새끼들, 내가 가만히 참으니까 아주 만만하게 봤다 이거지?”

앙다문 어금니에서 뿌드득 소리가 들렸다. 여자는 들고 있던 소주병을 바닥에 내던졌다.

내던지려 했는데,

“어?”

손에 아무것도 없었다. 던지려고만 했지, 아직 던지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텅 빈 손을 보며 의아해 할 무렵, 사방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뭐야, 갑자기?’

그사이에 사장이 가게 불을 껐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단순히 불이 꺼진 게 아니라 주변의 사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워진 것이었다.

“뭐야!”

앙칼진 목소리가 입에서 튀어나왔을 때, 아까와 달리 미세하게 떨리고 있음을 본인도 느낄 수 있었다. 그만큼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두렵기까지 한 것이었다.

더욱이 자신의 말에 누구도 대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공포스럽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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