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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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어릴 때 얼굴 그대로라서 금방 알아보겠더라. 난 많이 변했지?”
자신의 얼굴을 더듬어 보이는 예영에게 단유는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똑같아?”
“똑같지는 않죠.”
“하긴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까. 나 많이 늙었지?”
“그런 의미가 아니라,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단 뜻이었어요.”
예영은 외모만 보면 20대 중반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다만, 과거 그녀를 만났을 때의 생기 넘치고 발랄하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짙은 무대 화장과 조명 아래서 통통 튀던 미소 대신 세월이 담겨 깊어진 눈동자와 수많은 이야기를 집어삼킨 야무진 입매가 그녀의 얼굴에 자리 잡았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혹시 여자친구?”
“아뇨. 그냥 같은 학교 친구에요.”
“아, 그래요?”
유진을 향해 싱긋 웃어 보인 예영은 다시 단유를 돌아보았다.
“시간만 있으면 같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보시다시피 일이 있어서.”
“괜찮아요. 저 신경 쓰지 마시고 일 보세요.”
“오늘 시간 되니?”
“오늘요?”
“이렇게 인사만 하고 가려고 했던 건 아니지? 오랜만에 만났는데 제대로 회포를 풀어야지. 저녁에 시간 되면 같이 밥이나 먹자고. 10시 퇴근인데, 넌 어떠니?”
“그럼 그때까지 여기서 공부도 할 겸, 책 읽고 있죠, 뭐.”
“여전하구나, 넌.”
빙긋 웃어 보이며 다시 카운터로 향하는 예영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퀴퀴한 지하 연습실에서, 낡아서 해진 마룻바닥 위에 굵은 땀방울을 떨구며 숨을 몰아쉬던 그녀의 뒷모습이 겹쳐 보였다.
단유를 데리고 왔던 유진은 중간에 먼저 일어서야 했다.
“촬영이야?”
“응. 밖에 매니저가 와 있대. 그래도 오늘이 마지막이라 다행이긴 한데, 기말 망칠까 봐 걱정이야.”
“열심히 해.”
“지금 그걸 응원이라고 한 거야? 영혼이 안 담겨 있잖아?”
유진의 투정에 단유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자 짐짓 화가 난 듯 눈을 좁혔던 유진이 볼을 부풀리다가 길게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 대신이라고 하긴 뭣하지만, 아무튼 열심히 공부해서 성적 잘 받아라.”
“그럴게.”
그녀는 윙크를 해 보인 뒤, 카운터에서 일하는 예영에게 인사를 하고 카페 밖으로 나갔다.
다행히 내일은 시험이 없었고, 대신 모레 두 과목 시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장 내일 시험이라고 해도 별로 신경 쓰지 않을 단유였지만, 그래도 하루의 여유가 있으니 저녁 시간을 빼는 것쯤은 문제가 아니었다. 어쨌든 시험은 시험이고, 나름 한 학기동안의 배움의 성과를 측정할 수 있는 기회였으니 허투루 보낼 수는 없기에, 단유는 노트북을 꺼내 그간 정리했던 내용들을 기록해 둔 파일을 펼치고 살펴보았다.
번역일을 하며 타이핑 실력이 올랐던 게 대학 와서 꽤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어지간하면 노트에 적는 대신, 워드 프로그램을 활용하여 파일로 저장했더니 장점이 많았다. 일단 보기 깔끔하고 필요한 경우 편집도 간편했다.
저장해 둔 것을 단순히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보면서 생각나는 아이디어나 참고해야 할 사항이 있을 때마다 내용을 추가하거나 수정하면서 공부를 하니 예전 방식보다 훨씬 편했다.
확실히 문물의 이기는 잘만 사용한다면 얼마든지 유용할 수 있음이라. 게을러질 것을 우려하는 대신, 효율을 높여 삶의 질을 상승시키는 것이 첨단의 길을 걷는 과정에서 인간이 선택해야 할 방향이리라.
그런 점에서 컴퓨터를 공부하기로 결정한 것은 잘한 선택 같다.
‘단순히 실험을 위해서만이 아니더라도, 배워두면 좋겠지.’
물론 아직은 실력이 좋지 않아, 실험에 사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는 수준에 오르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실험뿐만 아니라 실생활에서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을 직접 고안해서 만들 수 있는 수준에 오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잠시 가져본다.
시간이 흘러 어느새 예영이 말했던 10시가 다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되었다고 정확히 일을 마칠 수 있는 곳이 아니고, 더구나 예영은 이 가게의 매니저였기에 챙겨야 할 것들이 많았다.
카운터에 있던 예영이 단유가 있는 곳을 슬쩍 바라보니, 단유는 3시간 전부터 같은 자세로 노트북만 바라보고 있었다. 간간히 키보드를 눌러 뭔갈 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주로 화면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드라마라도 보고 있나 싶겠지만, 지나가다 어깨너머로 봤을 때 화면에 떠 있던 것은 이해하기 힘든 언어와 숫자들의 향연이었다.
‘여전하구나, 단유는.’
뭔가 극적으로 달라진 자신과 달리, 단유는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한 것 같아 조금 기쁘기도 했다.
“미안하다. 많이 기다렸지?”
“아뇨. 저도 공부 좀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네요.”
“요즘도 전교 1등하니? 아, 이제 대학생이구나. 대학교에서는 전교 순위 같은 거 없지?”
“뭐, 그렇죠.”
“대학 안 간 티를 이렇게 내내. 방금 나 되게 아줌마 같았지? 나이를 먹으니까 점점 푼수 아줌마가 되는 거 같아.”
“별로, 그런 것 같진 않았어요.”
“그렇게 봐주면 고맙고. 아무튼 나가자. 오늘은 내가 쏠게.”
그저 노트북을 덮고 가방에 넣기만 하면 끝이니, 단유는 곧 일어나 예영을 따라 가게를 나섰다.
가게를 나간 뒤 향한 곳은 ‘대구 곱창’이라는 간판이 달린 식당이었다.
“우리 가게에서 일하는 애들이랑 가끔 일 끝나고 와서 먹었는데, 괜찮더라고.”
“밥만 먹나요?”
“그럴 리가.”
예영은 입꼬리를 늘리며 다가온 종업원에게 곱창 3인분과 소주 한 병을 주문했다.
“술 마실줄 알지?”
“네.”
“이야, 내가 단유 너랑 술을 같이 마시는 날이 오다니. 새삼 감격스러워. 꼬꼬마였던 단유가 어느새 나랑 대작을 할 정도로 크다니 말이야.”
“그러게요.”
단유는 예영 앞에 수저를 정리해 놓아주며 대답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가게를 채우고 있었는데, 근방에서 꽤나 맛집이라고 소문이 난 모양이다. 드럼통같은 불판을 끼고 둘러 앉아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손님들이 많아 꽤 시끄러운 편이었지만, 대화가 어려울 정도는 아니었다.
단유의 근황에 대해 이것저것 묻고 답하는 와중에 주문했던 곱창과 소주가 도착했다. 예영은 능숙하게 소주 뚜껑을 따고 단유의 잔을 채워주었다.
“공부하는 데 방해하는 건 아닌가 모르겠네.”
“예의상 던지는 말 같네요.”
“역시 사람은 쉽게 변하질 않네. 언제나 돌직구야.”
미소를 지으며 소주병을 건네고 잔을 드는 예영. 맑은 소주가 잔을 채우자 예영은 입맛을 다셨다.
“자, 일단 건배부터 하자. 음, 단유의 보람찬 대학 생활을 위해?”
“건배.”
곧이어 인상을 와락 찌푸린 예영이 입가를 닦으며 웃었다.
“오랜만에 마시니까 좋네.”
“오랜만은 아닌 거 같은데.”
“들켰나? 사실 집에서 가끔 혼술하기도 하거든. 그래도 단유 너랑 마시는 술이라 그런지 혼자 마실 때보다 훨씬 맛있네.”
석쇠 위에 올라간 고기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벌써 고소한 향이 주위를 감싼다.
“그럼 어디 어디 여행한 거야?”
“그냥 여기저기요. 딱히 시간 제약을 두지 않고 돌아다녔더니 여러 곳을 갈 수 있었거든요.”
“좋겠다. 난 아직 여행 못 가봤는데.”
“휴가 받아서 가시면 되잖아요.”
단유의 말에 예영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혼자 가기 무서워서.”
“같이 갈 사람 없어요?”
예영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혼자 술은 마셔도, 혼자 어딜 가는 건 잘 못 하겠네.”
의미심장한 그녀의 멘트에 단유는 대꾸를 하는 대신 소주병을 들어 잔을 채워 주었다.
안주도 없이 몇 잔을 마셨더니, 벌써 소주 한 병이 사라지고 없었다. 살짝 볼이 달아오른 예영은 기분 좋다며 깔깔 웃더니 소주를 한 병 더 주문했다. 집게로 고기를 뒤적거리다가 슬며시 이야기를 꺼냈다.
“다른 언니들 소식은 아니?”
“아니요.”
“그렇구나. 아, 어디까지 들었니? 매니저 오빠랑 에이바운스 나가서 새 기획사 차린 건 들었니?”
“네.”
그 과정에서 매니저 형이 단유에게 와서 부탁하기도 했었다.
“누나도 그때 같이 나가셨던 거 아니에요?”
집게를 내려놓고 한숨을 길게 내쉬던 예영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당시 갤럭시즈와 소속사 간에 갈등이 생겼을 무렵, 예영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으면 서울에서 연습생 생활을 계속 하기 힘들었던 탓이다. 사실 데뷔도 하고 2집까지 냈던 상황이지만, 생활은 연습생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질 못했다. 숙소 생활이 필요하니까 들어가긴 했지만, 숙소 생활은 엄밀히 따지면 소속사에 빚을 지는 것이었다.
“그때, 갤럭시즈 멤버들끼리 싸웠을 때 있잖아? 나, 아르바이트 구하러 다녔어. 그리고 그때 아르바이트를 했던 게 여기 카페였어.”
소속사에 더 빚을 지기 싫기도 했고, 차라리 돈을 벌어서 조그만 원룸이라도 구해볼까 했었다는 예영.
그러다 매니저가 돈을 구해서 갤럭시즈를 위한 기획사를 따로 차려 나갈 계획을 세웠을 때, 예영은 솔직히 기대를 했었다.
“당시에는 기획사에서 제대로 지원을 해주지 않아서 우리가 뜨지 못했다고 생각하기도 했거든. 마침 가디스R이 나와서 히트 하는 모습도 지켜봤잖아? 그런 생각이 더 커지니까, 기획사에 섭섭한 생각도 들었고, 다른 곳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면 우리도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지.”
하지만 새 기획사에서 새 출발하자는 생각은 곧 암울한 현실과 맞닥뜨리며 좌절로 바뀌었다.
“우린 인지도도 낮은 그룹이었지. 수련 언니가 있었지만, 새 그룹을 런칭하기 위해 웅크려야 했던 시간은 우릴 완전히 잊혀진 그룹으로 만들기에 충분했어.”
힘없는 기획사는 방송 출연 기회를 잡아보지도 못했고, 어쩌다 한 번 나갈 기회를 잡아도 일회성, 단발에 그치니 지속적으로 노래를 홍보할 기회가 없었다.
“숙소도 없어서 각자가 알아서 살아남아야 했어. 난 실력도 모자란 주제에 연습할 시간보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생활을 유지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들여야 했지. 악순환이었던 것 같아.”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잔을 들더니 말을 이었다.
“흔한 이야기야.”
예영 개인에겐 꿈과 희망이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해 꺾여 나가야 했던, 악몽과도 같았던 이야기지만, 연예계란 곳에서는 흔하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 20%의 성공 뒤에는 80%의 실패자들이 각자의 사연을 안고 돌아선다.
“새 기획사로 옮기고 나서 아르바이트를 쉬었다가 다시 아르바이트를 해야 될 필요성을 느꼈을 때, 난 다시 이곳으로 왔어. 익숙했으니까. 다행히 여기 사장님이 날 잘 봐주시기도 했고.”
그리하여 3년 전, 이 카페에서 아르바이트가 아닌 정식 매니저로 채용되어서 일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끝으로, 두 번째 소주병도 바닥을 보였다.
“어쩌면 좀 더 빨리 깨달았어야 하는지도 몰라. 나한테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노력만 가지고는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물론 난 재능도 없고, 노력도 부족했던지라 후회라는 감정을 가질 자격도 안 되지만, 다른 언니들은 충분히 재능도 넘치고, 노력도 했잖아?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더라고.”
소주를 입안에 털어놓는 예영에게 곱창 하나를 집어 주었다. 고맙다며 입으로 받아먹고는 씩 웃음을 짓는 예영에게 물었다.
“다른 누나들이랑은 계속 연락하세요?”
“안 한지 꽤 됐어. 언니들도 연락 안 하고.”
“싸웠어요?”
“아니, 아니. 예전에야 다들 어릴 때니까 다투기도 했지만, 이제 나이들만큼 들었잖니? 내가 그쪽으로는 아예 선을 긋고 살겠다고 했더니, 언니들이 내 뜻에 공감해준 거야. 일부러 나 흔들릴까 봐 전화도 안 하는 거고. 우습게 들릴 수 있겠지. 조금 전까지 재능도 없고, 현실적으로도 성공의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인정한 주제에 흔들릴 이유가 어디 있냐고 말이야. 그런데 사람이란 게 참 그래. 분명 넘볼 수 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탐을 내니까.”
한숨을 내쉬던 예영이 살짝 풀린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나중에, 좀 더 나중에 시간이 지나서 말이야, 다시 만나고 싶어. 언니들이랑 다시 만나서 다 같이 수다도 떨고 여행도 가고 싶어. 지난 일들이 모두 추억으로 여기, 가슴에 새겨질 때쯤에 말이야. 옛날 한강변에 모여서 다 같이 맥주 마셨던 것처럼, 다 같이 모여서 술도 마시고 맛있는 것도 먹고 싶어. 그러고 싶어.”
눈꼬리에 맺힌 눈물 자국을 보며 단유도 앞에 놓인 잔을 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