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617화 (617/956)

세례(2)

-------------- 617/952 --------------

“형, 이게 뭔데요?”

“이거 누르면 뭐 무서운 거 나오는 거 아니에요?”

새벽과 유영이 화면의 빨간 버튼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뭔데요?”

단유는 마우스 포인터를 옮겨 버튼을 눌렀다. 딸깍 소리가 나며 버튼이 사라지고 대신 4자리 디지털 숫자가 화면에 표시되었다.

“어? 타이머네요? 15초?”

“이거 0되면 뭐 터지는 거예요?”

새벽의 두 눈동자는 ‘궁금해 미치겠어’라는 물음이 가득 담긴 채로 화면에 고정됐다.

“뭐야, 이거? 무서워.”

유영도 말로는 무섭다지만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0이 되길 기다리며 화면을 바라본다.

3초, 2초, 그리고 1초.

그때 단유가 노트북을 덮어버렸다. 갑작스런 단유의 반응에 전혀 대비가 안 됐던 두 사람이 깜짝 놀라 움찔거렸다가 단유를 돌아보았다.

“어? 왜 덮어요?”

“시간 다 된 거예요?”

“아니.”

“그럼요?”

단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며 책상 위를 정리했다.

“별거 아니었어. 프로그래밍 연습한다고 만들어놨던 폴더를 삭제하는 버튼이었거든.”

“…그걸 왜 만들었어요?”

“첫째는 프로그래밍 연습용으로 심심해서 만들어 본 거고, 두 번째는 지금까지 연습했던 걸 지우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면 어떤 심정일까 궁금해서.”

노트북을 가방에 넣고, 대신 다른 교재를 펼쳐 시험공부를 준비했다.

“정말 별거 아니었네요.”

“괜히 빨간 버튼이 떠 있으니까 뭔가 가슴을 두근두근하게 만드네요. 마치 무슨 핵미사일 발사 버튼같이.”

“별거 아니라고 했잖아?”

무던한 표정으로 책 페이지를 넘기는 단유를 보며 새벽이 혀를 내둘렀다.

“이럴 때면 형이 괴짜라는 걸 실감하게 되네요.”

“너만 하겠니?”

“내가 뭐? 너 또 나한테 시비 거는 거냐?”

새벽과 유영의 아웅다웅이 시작되자, 단유가 가볍게 책상을 두들겼다.

“둘이 계속 다툴거면 내가 자리 피해줄게.”

“아뇨. 다투긴요.”

“오빠, 가지 마요.”

“저거 또 이상한 애교 부린다.”

새벽을 째려보는 유영. 새벽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

―바쁘니?

“요즘 안 바쁜 사람이 어딨다고?”

―왠지 넌 남들보다 여유로울 것 같아서 말이야. 괜찮으면 밥이나 먹자.

오랜만에 만난 유진은 커다란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그녀의 말로는 다크서클을 감추기 위한 아이템이라고 했다.

“많이 힘들구나.”

“고맙다, 알아줘서.”

누구라도 피곤에 절은 그녀의 얼굴을 보며 다른 생각은 떠올릴 수 없을 것이다.

“웹드라마 하나 참여하게 됐는데, 원래는 기말고사 전에 끝이 났어야 하는데, 중간에 제작사 측에 일이 생겨서 미뤄졌네? 덕분에 기말고사 준비도 제대로 못 하고 촬영이랑 공부랑 같이 하다 보니 이 꼴이 됐다. 회사에서는 학교를 휴학하는 게 어떻겠냐고 하는데, 이제 1년 남았는데, 굳이 휴학을 해야 되나 싶고, 이왕이면 빨리 대학 마치고 일에 집중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싶은데, 굳이 졸업장이 필요할까 싶고.”

취업을 위한 졸업장은 필요 없다. 이미 소속사도 있는 유진이니까. 하지만 단유의 말에 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정말 너니까 하는 말인데, 솔직히 배우로서 성공할 가능성이 높지가 않아. 특히나 여배우는 남자에 비해 수명도 짧단 말이야. 빨리 뜨지 않으면, 만년 엑스트라나 하다가 백수로 마감할 수도 있어. 처음에는 서울대라는 명함이 좀 먹힐까 싶었는데, 요새는 이런 타이틀도 별로 안 먹히는 것 같아. 오히려 외국에서 대학 다니다 온 애들도 많으니까 경쟁력도 없고. 외국물 먹은 티 팍팍 내면서 혀 굴리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지? 근데 그런 애들보다 더 잘 먹히는 건 감독님들 앞에서 눈웃음 지으면서 애교 살살 부리는 애들이 더 잘 먹힌다는 거야. 나? 나도 하려면 할 수 있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고, 적어도 난 연기력으로 승부를 보고 싶다 이 말이지. 그리고 내 얼굴 정도면 꽤 괜찮은 편이잖아. 안 그래? 너 왜 대답 안 해? 대답해, 얼른.”

“이게 그 ‘답은 정해져 있다’, 그거지?”

“야 이…. 됐고. 아무튼,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겨우 입학한 서울대인데 그래도 졸업은 해야 하지 않겠어? 그리고 혹시라도 배우로서 성공할 가능성이 적다면, 다른 길로도 나갈 준비를 해야 하는데, 다른 길에서는 서울대 졸업장이 꽤 먹히지 않을까? 난 그렇게 생각해. 하나에만 올인하는 게 더 좋지 않겠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난 그건 아니라고 봐. 사람이 지갑이 두둑해야 여유가 있듯이, 구제책이 준비되어 있어야 연예계 활동에도 더 자신 있게 나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니가 생각해도 그렇지?”

턱을 쓰다듬던 단유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손끝이 까칠까칠한 게 오늘 아침에 면도를 제대로 안 됐던 모양이다. 요즘 공부하는 양이 부쩍 늘어나기도 했지만, 그 때문에 피곤할 정도는 아니니 아마도 면도기의 날을 바꿀 때가 된 것 같다.

“역시 넌 내 친구다. 다른 사람들은 그걸 이해 못 한다니까. 휴학도 그냥 쉽게 하는 건 줄 알아. 휴학 한 번 하면 다시 따라잡기가 얼마나 힘든지 몰라. 그래서 남자들도 보통 1학년 마치고 휴학하잖아. 전공 들어가면 휴학하기가 쉽지 않으니까.”

단유는 턱 끝을 손가락으로 더듬다가 문득 ‘여기에 마법을 쓰면 어떻게 될까’ 궁금해졌다. 지금은 유진이 보고 있으니 쓰긴 어렵고, 나중에 화장실에라도 들어가서 거울을 보며 한 번 해볼까 싶었다.

“그러고 보니 너도 이제 군대 갈 때 됐지? 넌 다른 애들보다 나이가 많아서 고생 좀 하겠다. 군대 나이 들어서 가면 고생 많이 한다던데. 그래도 걱정 마. 내가 자주 면회 갈 테니까.”

“나 안 가.”

“어딜?”

“군대.”

“어? 진짜? 왜? 면제야?”

“비슷해.”

“그렇구나.”

“별로 안 놀라네?”

“응? 안 놀란다기보다는, 의외로 군대 면제인 사람들이 주변에 많아서 말이야. 너도 그중 하나구나, 라는 생각을 하니까. 그런데 넌 어떻게 면제야?”

“면제는 아니고, 5급인데, 예비군이라고 생각하면 돼.”

“어디 아파?”

“아픈 건 아냐.”

“하긴, 지금 그 몸이 아프다고 하면 그게 더 이상하다. 그럼?”

“나 고아야.”

“뭐?”

유진은 마치 귀신을 본 것처럼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침 흘린다.”

단유의 말에 얼른 벌렸던 입을 오므리며 입가를 손으로 빠르게 훔쳤다.

“몰랐던 것 같네.”

“몰랐지!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런가?”

단유는 볼을 긁적이며 시선을 돌렸다.

“…뭐라 할 말이 없네. 내가 너를 알게 된 지 무려…아무튼 많이 지났지. 그런데 네가 고아란 걸 처음 알았다니….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네가 말을 안 했다는 걸 섭섭해하는 것도 이상한 거네. 그게 무슨 자랑이라고 떠벌리고 다니겠어. 에이, 미안하네. 내가 괜한 걸 물었다.”

“묻긴 뭘 물어? 내가 그냥 말한 건데.”

“아 몰라. 그냥 내가 미안해. 됐어, 다른 이야기 해.”

“아직 할 이야기 남았어?”

“아직 본론도 안 꺼냈거든?”

단유는 지난 대화를 복기하며 도대체 어떤 본론이 나오려고 그런 대화를 나눴던 건지 추리를 해 보았지만, 알 수가 없었다.

“지금 잠깐 생각해보니, 내가 널 처음 알게 된 게 뮤직비디오였거든?”

“기억난다. 그때 나보고 에이바운스 소속이냐고 물었었지.”

“기억하네?”

“니가 잔망스럽게 굴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시던 어머니는 잘 계시지?”

“…이상한 걸 기억하고 있어. 아무튼, 내가 널 알게 된 계기가 된 뮤직비디오의 원래 주인공, 알지?”

알다마다. 비록 연락은 하지 않고 지내지만, 그 이름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갤럭시즈.”

“그래, 갤럭시즈.”

“근데?”

“얼마 전에 나 갤럭시즈 멤버 언니 봤다?”

연예계에서 활동하는 유진이니 오다가다 만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며 단유는 다시 턱을 짚었다. 한 번 거슬리기 시작하니 계속 신경이 쓰인다. 차라리 잠깐 양해를 구하고 화장실에 갔다 오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하던 중이었다.

“여기 학교 앞에서 봤어.”

“학교 앞? 촬영 중이었어?”

“아니? 너 들으면 깜짝 놀랄걸?”

듣고 안 놀랠까 봐 겁이 난다. 유진의 화법 자체가 어떤 대상을 대단히 과장하는 버릇이 있으니까.

“카페에서 알바하더라.”

****

정확히 설명하자면, ‘학교 앞’ 카페는 아니었다. 서울대 정문에서 차로 10분, 길이 막히면 15분 정도가 걸리는, 신림역 근처의 카페가 유진이 말한 장소였다.

“여기야.”

유진은 눈을 찡끗거리며 앞장섰다. 카페는 5층 건물의 2층에 위치한 프랜차이즈 커피숍이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좁진 않았지만, 내려오는 커플을 피해 벽에 붙어야만 했다.

카페를 들어가는 입구는 유리문이어서 안이 훤하니 보이는 구조였다. 그 앞에서 안을 들여다보던 단유가 머뭇거리자, 유진이 단유의 손목을 붙잡았다.

“뭐해? 여기까지 왔으면 들어가야지.”

단유는 턱을 긁적거리려다 매끈해진 턱의 촉감에 손을 뗐다.

“에이, 뭘 빼고 그래? 너도 솔직히 궁금하잖아? 안 그래?”

예전 갤럭시즈라는 그룹과 연락을 끊을 즈음에 느꼈던 어설픈 섭섭함은 흘러간 시간만큼이나 바래져서 희미하게 흩어진 마당이다. 그마저도 갤럭시즈 멤버들 개개인을 향한 섭섭함이라기보다는 당시 어쩔 수 없는 이유로라도 등돌리며 돌아서야 했던 상황에 대한 섭섭함이었다. 그들과 함께 보냈던 시간들은 먼지 쌓인 앨범 속 사진처럼 향수로 다가온다.

카페 내 원목을 활용한 인테리어는 모던한 스타일링으로 고층빌딩이 즐비한 도시 내에서 시민들이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리라. 실내에 초록 잎새 식물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더욱 분위기를 고아하게 만들고 있었다.

입구에서부터 이어지는 녹색 식물들을 지나 카운터로 다가가니 단정하게 머리를 뒤로 묶은 여자 알바가 주문 컴퓨터를 조작하며 물었다.

“주문하시겠어요?”

하지만 유진은 그녀의 주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둘 모두 시선은 에스프레소를 추출하느라 정신없는 직원에게로 가 있었던 탓이다.

“맞지?”

단유를 팔꿈치로 툭툭 치며 작게 묻는 유진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며 입을 열었다.

“아메리카노 두 잔이요.”

진동벨을 받아들고 단유는 돌아섰다. 그리고 적당히 빈 자리에 앉았는데, 유진이 입꼬리를 씰룩이며 단유 곁에 찰싹 달라붙었다.

“왜 아는 척 안 해?”

“너는 왜 안 하는데?”

“나야, 저 언니랑 잘 모르는 사이기도 한데다가… 난 연예인이잖아.”

“그게 무슨 이유야?”

“괜히 잘난 척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거지.”

“그전에 저 누나가 과연 널 알아볼까?”

여기저기 얼굴을 들이밀며 활동 중인 유진이지만, 아직 인지도가 그리 넓은 편은 아니었다.

“아픈델 콕 찌르네.”

단유는 표정 없이 시선을 옮겨 에스프레스 머신 앞에서 이것저것 조작 중인 그녀를 바라보았다. 단유 뒤로도 계속 손님이 들어와 주문을 넣으니 꽤 바빠 보였다.

“바쁜 사람 붙잡고 아는 척하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

“그래서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이렇게 있다 갈 거야?”

주변을 대충 훑어보니, 가벼운 대화를 나누는 이들도 있고, 노트북으로 뭔가를 검색하는 이들, 커피를 마시며 독서에 열중하는 이들도 있었다. 대학가 근처가 아니라 일반인들도 더러 보였지만, 주요 고객들은 대부분 단유와 비슷한 나이의 젊은이들인 것 같았다.

“넌 여기 어떻게 오게 된 건데?”

유진은 마침 기다렸던 질문이라는 듯 속사포처럼 쏟아내기 시작했다. 사족들을 다 들어내고 요약하면, 이 근처에서 웹드라마 촬영하러 왔다가 잠시 쉬러 들어온 틈에 우연히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다른 사람들은 다 못 알아보는데 나만 딱 알아봤지.”

“그래서 물어봤어?”

“아니, 못했다니깐. 그때도 매니저랑 스텝들 몇몇이랑 같이 온 건데, 거기서 괜히 아는 척 해버리면 실례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

말하는 거 좋아하고 인간관계를 중요시한다는 유진은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은근히 배려심이 깊다. 그녀의 가벼운 입이 그런 성정을 가리지만, 간간이 나오는 배려심은 단유로 하여금 유진을 ‘좋은 친구’로 여기게끔 했다.

“이왕에 왔으니 커피나 마시고 가자.”

“왜? 그래도 너는 갤럭시즈랑 친하지 않았어?”

“일하는 사람 붙잡고 과거 이야기하며 시간 뺏고 싶지 않아.”

‘그리고 저 누나가 반가워할지도 확신할 수 없으니까.’

단유는 턱을 괴고 카페 벽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을 바라보았다. 인테리어용으로 구비해 둔 책일 테지. 중고를 사다 놓은 건지 꽤 낡은 티가 났는데, 그게 빈티지스러워서 원목 책장과 잘 어울렸다.

그때, 누가 다가오더니 테이블 위에 커피를 내려놓았다. ‘진동벨이 안 울렸는데’라고 생각하며 커피를 가져온 이를 올려다 볼 때, 가져온 이가 말을 건넸다.

“단유, 맞지?”

옅은 미소를 짓는 그녀, 한 때 갤럭시즈의 막내였던 정예영이었다.

하나 더 정확히 표현해야 할 부분은, 유진은 ‘알바’라고 이야기했지만, 실은 ‘아르바이트’가 아니라 ‘매니저’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