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616화 (616/956)

세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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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개강을 한 것 같은데 벌써 중간고사 기간이 찾아왔다. 서늘해진 날씨 탓에 사람들의 옷차림도 긴 소매에 두꺼운 옷들로 변해있었고, 한동안 한적했던 도서관도 다시금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시험공부를 하기 위해 사람들이 주로 찾는 곳은 비단 도서관뿐만이 아니었다. 교내에 입점해 있던 카페에 들어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옆에 두고 노트북으로 리포트를 쓰는 학생도 있었고, 빈 강의실만 찾아다니며 시간이 되는 데까지 책을 펼치고 공부하는 ‘메뚜기’같은 학생도 있었다.

드물게 호수공원의 벤치에 앉아서 이어폰을 끼고 책을 읽는 학생도 있었고, 그 외에도 남들이 잘 모르는 한적한 장소를 찾아 공부하는 학생도 있었다.

학교 근처에 자취방을 둔 학생의 집에 몰려가서 공부를 핑계 삼아 노는 학생도 있었고, 공부에 지친 심신을 달래려는 목적으로 피시방에서 준프로게이머 못지않게 마우스를 클릭하는 학생도 없잖아 있었다.

요약하면, 학교 안팎으로 자리 잡기 전쟁이 벌어졌다.

“제 방이 크면 같이 가서 공부하면 되는데, 워낙에 좁아서.”

“됐어. 난 다음 수업이 있어서 학교에 남아야 하니까, 먼저 가.”

“혼자 집에 있으면 공부가 잘 안 돼요. 괜히 침대에 눕게 되고, 침대에 누우면 나도 모르게 잠이 든다니까요. 누가 내 침대에 수면제라도 뿌려놓은 듯?”

“그럼 어떻게 할 건데?”

“음···. 그냥 메뚜기 하쉴?”

“그러자.”

다음 수업까지 2시간이 붕 뜨는데, 막상 학교 밖으로 나가기엔 시간이 애매했다. 결국 단유와 새벽은 빈 강의실을 찾기 위해 자연대 건물을 돌아다녔다. 문제는 강의가 없는 강의실이라도 적잖은 학생들이 선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몇몇 강의실을 돌아다니다 겨우 적당히 조용한 강의실을 찾아 들어갔다. 70명 이상이 앉을 수 있는 넓은 강의실이었고, 이미 자리 잡은 학생들도 있었지만, 조용히 공부에 집중하고 있는 터라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자리를 잡고 앉은 단유는 우선 노트북을 꺼내 앞에 펼쳤다. 이번에 컴공과 전공을 들으면서 필요를 느껴 구매한 최신형 노트북이었다. 그 옆에 두꺼운 책을 하나 올려뒀는데 ‘Java 프로그래밍 정복’이란 제목의 책이었다.

지난 한 달간 단유가 가장 많이 공을 들인 주제가 바로 자바였는데, 처음 접하는 내용인 데다 관련 지식이 거의 전무했던 탓에 꽤 많은 노력이 요구되었다.

때문에 단순히 자바만 공부할 게 아니라, 컴퓨터 제반에 관련된 기본적인 서적들을 찾아 공부해야만 했다. 그 와중에도 수업 내용을 따라가야 했기 때문에 쉽지 않았다. 교양 과목과 전공과목의 난이도가 이렇게 차이가 날 줄 알았다면 좀 더 신중하게 골랐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후회마저 들 정도였다. 1학기 때 수리물리학이라는 전공과목을 도강해 들을 때는 그럭저럭 괜찮다고 여겼는데, 아무래도 그쪽 관련 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어려움을 못 느꼈던 것이리라 판단했다.

때문에 지난 한 달, 단유는 정말 정신없이 공부에 매달려야 했고, 개인적으로 해보던 실험이나 틈틈이 하던 번역 일도 모두 미뤄야 할 정도였다. 그래도 그런 노력 끝에 라는 간단한 출력물을 화면에 보이도록 하는 것에서 벗어나, Java AWT를 이용한 GUI 그래픽 구현에까지 올랐다.

그때 책상 위에 올려둔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진동으로 해놨기에 망정이지 벨이라도 울렸다면 강의실 내 사람들의 눈총을 받을 뻔했다.

“여보세요? 아, 그래? 여기?”

단유는 강의실 번호를 알려주고 통화를 마쳤다. 옆에 있던 새벽이 슬쩍 고개를 기울여 물었다.

“유영이요?”

“응.”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자신의 책으로 시선을 돌리나 싶었는데, 다시 몸을 기울이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근데, 형. 진짜 유영이랑 안 사귀어요?”

“응.”

“흠. 제가 보기엔 아닌데.”

유영도 1학기 때는 같이 어울려 다니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단유 껌딱지라고 할 정도였다. 식사는 물론이고, 수업 때도 단유 옆자리에 앉아서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두 사람이 사귀는 거라고 생각할 거다. 그런데 정작 두 사람은 사귀는 게 아니라고 하니 새벽은 이해할 수 없었다.

“설마 사귀는 것과 사귀지 않는 것의 기준이 스킨쉽인건 아니죠?”

“스킨쉽?”

“이를테면, 뽀뽀라든가, 입맞춤이라든가, 아니면 키스라든가?”

“음, 그건 아닌 거 같네.”

“그럼요? 유영이랑 무슨 관계인 거예요?”

단유는 노트북 화면에 그대로 시선을 둔 채 되물었다.

“너랑 비슷하지 않나?”

“저요?”

그때 새벽의 뒤에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아마 다른 사람들은 널 게이라고 생각했을걸?”

새벽이 기겁하며 돌아보았다가 얼굴을 찡그렸다.

“무슨 개소리냐? 그거?”

“개소리는. 너 갈수록 말을 심하게 한다? 아무리 내가 편해졌다고 해도 선은 지키자고.”

유영은 자연스럽게 단유의 옆자리에 앉았다.

“이제 이 책도 거의 다 보셨네요?”

“응. 그런데 다른 책도 한 번 봐야겠어. 배열 위주 코딩을 하다 보면 Array 메서드들을 많이 알아야 한다는데, 이 책만 갖고는 잘 모르겠네.”

“에궁, 전 잘 모르겠네요. 너무 어려워요.”

‘헉!’

유영의 애교 섞인 목소리에 새벽이 눈을 부릅떴다.

“도서관에 자리 없었어?”

“자리가 없기도 했지만, 오빠가 여기 있는데 제가 여기 와야죠.”

새벽은 참을 수 없다는 듯 콧김을 세게 내뿜었다.

“야, 말 돌리지 말고. 내가 왜 게이야?”

유영은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기며 부드럽게 대답해줬다.

“니가 ‘껌딱지’처럼 오빠 곁에 붙어서는 떨어질 생각을 안 하니까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그쪽 취향이 아닐까?”

“아니라고! 껌딱지처럼 달라붙은 건 너잖아!”

“네가 아니든 말든 상관은 없는데, 괜히 오빠까지 이상한 취향으로 몰리면 안 되잖아? 그래서 내가 오빠 옆에서 지켜주는 거야.”

“지켜?”

“내가 오빠 곁에 있으니까, 균형이 맞는 거지. 그렇죠?”

단유는 대답을 피하고 대신 더 빠르게 노트북 키판을 두드렸다.

“그렇대.”

“야, 형 대답 안 했거든?”

“꼭 말로 해야 아니? 사람이 왜 그렇게 미련해?”

“뭐? 미련?”

“저기요, 좀 조용히 해주시죠?”

결국 앞자리에서 공부하던 학생 한 명이 돌아보았다.

“죄송합니다.”

새벽과 유영은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그 후 두 사람은 서로 날카로운 눈빛을 교환한 뒤, 노트로 시선을 돌렸다.

****

자바를 배우며, 컴퓨터 프로그래밍이 꽤 재미있는 거라고 단유는 생각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컴퓨터 화면으로 구현해낸다는 게 마치 마법과도 비슷했다. 이를 위해서 논리적이며 수학적인 알고리즘을 구성할 줄 알아야 한다는 점도 재미있었고, 컴퓨터 세계에서만큼은 상상하는 것 이상의 것도 구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점에서 도전의식도 생겼다.

처음에 책에 나온 예제대로 계산기를 만들었을 때는 괜히 뿌듯하기도 했다. 컴퓨터에 기본적으로 제공되는 계산기 프로그램이 본인이 짠 조악한 프로그램보다 훌륭하지만, 단유는 실제로 구동되는 프로그램을 제 손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흥이 돋았다.

무엇보다, 이건 마법보다 간단했다!

중간고사도 지나, 서늘한 바람이 시리도록 차가워질 때쯤, 그리하여 목도리를 하거나 깃을 새우지 않으면, 자라목처럼 움츠리고 다녀야 할 것 같은 날씨가 되었을 무렵, 단유는 <프로그래밍방법론>에서 주목받는 학생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이번 시간에는 지난 과제로 냈던 리포트에서 가장 좋은 점수를 얻었던 김단유군의 The Goemans-Williamson Algorithm을 응용한 프로그램 코딩을 알아보도록 하죠.”

군더더기 없는 코딩으로 최적의 그래프 이론 문제를 빠르게 해결하는 프로그램이라 평가한 뒤, 프로그램에 사용된 코딩들을 살폈다.

그동안 수업 때도 조용하게 자리만 지킬 뿐이었던 단유였기에 학생들은 별로 의식하지 않고 있었다가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그간 과제 평가 시간에도 단유의 과제물이 언급된 적이 없었기에 어느 수준의 과제물을 작성했는지, 어느 정도의 점수를 받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저런 수준의 과제물이 나오니 의아하기도 하고 심지어 어떤 학생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나 강사는 그간 단유가 제출했던 과제들의 수준이 점점 올라가는 것을 보며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알겠다며 그를 칭찬했다.

“원래 예전부터 좀 하던 애 아냐?”

“원래부터 저 정도 했으면, 애초에 물리학과가 아니라 우리 과로 왔어야지.”

“물리학을 더 좋아해서 갔을 수도 있지.”

“야, 자괴감 들게 왜 그러냐? 같은 학년도 아니고 신입생인데 나보다 더 잘한다고 하면 나는 뭐냐?”

“너만 그렇냐? 나도 지금 내가 이 수업을 계속해야 하나 싶다. 중간고사 점수도 아직 안 나왔는데, 과제 수준이 저러면 나 이거 재수강해야 할지도 몰라.”

“설마 다른 사람들도 다 저 정도 수준인 건 아니겠지?”

“와, 대박이다. 저기에는 아예 코딩을 빼고 넘어갔어. 그런데도 컴파일이 된다는 말이잖아?”

“그만큼 가벼워지니까 속도는 더 빠르게 나올 테고?”

단유는 다른 학생들의 시샘을 받으며 뿌듯해하진 않았다. 다만 강사가 인정할 정도의 수준에 올랐음을 평가받은 것에 뿌듯해했다. 학기 내내 수업을 쫓아가기 바빴는데 학기 말이 다가와서야 겨우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이제 좀 더 자신감을 가져도 될 것 같다.

그 후로, 단유는 더 많은 시간을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할애했다. 가끔 유영이나 새벽이 졸라서 영화를 보러 간다거나 하는 여유도 부렸지만, 그 외는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노트북을 붙들고 프로그래밍을 하는 데 시간을 썼다. Java 외에도 수업 때 사용하는 컴퓨터 언어도 공부하면서 시간을 보냈더니 어느새 2학기도 마무리할 시간이 다가왔다.

****

“엊그제 중간고사 쳤던 거 같은데, 기말고사라니.”

책상에 눌어붙은 떡처럼 엎드린 새벽은 손가락만 겨우 들어 페이지를 한 장씩 넘기며 투정부렸다.

“일어나서 공부나 해. 모처럼 오빠가 중요한 부분 체크도 해줬는데.”

유영은 그런 새벽을 타박했다. 단유는 지난 학기, 아쉽게도 올 에이를 받진 못했지만, 한 과목을 빼고는 모두 에이를 받았다. 특히 지금 듣고 있는 [고급 물리학2]의 전 과목인 [고급 물리학1]에서는 A+를 받았다. 교수도 단유에게 ‘주목하는’ 학생이라고 공인했던 만큼, 이 수업에서는 단유의 노트를 보고 따라가는 게 제일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방법, 이라고 유영은 생각했다.

“누가 안 한대? 그냥 스트레스받아서 그러지.”

사실 시험 때마다 스트레스받는 건 학생이란 위치에 있는 자들에겐 숙명과도 같은 일이다. 공부를 많이 하고, 안 하고를 떠나서 그 자체가 부담이고 고통이다.

더구나 서울대에 들어온 학생들, 그중에서도 신입생들에게는 대학의 상대평가 제도에 의한 점수제가 꽤 큰 스트레스였다. 이전까지, 나름 반 1등, 전교 1등 하며 지내던 아이들이 대학에 들어와 상위 10%에도 들지 못하는, 아니, 하위 30%에 들어가는 점수를 받을 때의 고통을 다른 이들은 쉽게 짐작할 수도 없다.

선배들은 그 스트레스를 ‘성장통’이라고 했으며, ‘세례’라고도 불렀다. 1학년이란 시간은 오만과 자만에 젖어있던 신입생들에게 이 세계가 그리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는 동시에 이런 세계에서 살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시간이다. 그리고 그 시기, 대부분의 학생들은 노력과 결과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깨달음의 통증에 아파하는 1학년들에게 선배들은 술 한잔 부어주며 말한다.

“그게 현실이야.”

똑똑한 놈 위에 더 똑똑한 놈이 있다. 잘난 놈보다 더 잘난 놈이 있다. 그리고 그 똑똑한 놈, 잘난 놈이,

“너는 아니야.”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성장통을 벗어나 어른이 된다.

“그 다음은요?”

“C를 맞고 재수강을 해야 하는 상황이 와도 멘탈이 흔들리지 않게 되고, F로 후들겨 맞아도 허허 웃을 수 있는 경지에 오르면 도인이 되지. 버들골 잔디밭에서 도 닦는 사람들 있지? 다 그런 경지에 오른 거다.”

믿거나 말거나, 다.

어쨌든 누구나 겪는 과정이라니 그저 이겨내는 수밖에 없지만, 아직 이겨내지 못한, 새벽 같은 경우는 스트레스에 몸져누울 지경이었다. 그나마 단유가 곁에 있지 않았다면 방황했을지도 모른다, 고 생각하며 새벽은 고개를 들었다. 스트레스는 스트레스고, 공부는 공부다.

“할 일은 해야지.”

겨우 심신을 추스르고 펜을 드는 새벽을 보며 피식 웃던 단유는 새벽에게 자신의 노트를 건넸다.

“요약한 거니까 봐봐. 거기서 나올 거라고 자신하진 못해도, 아마 대충은 맞을 거야.”

“고마워요!”

그러자 유영이 입술을 삐죽 내밀고 새벽을 타박했다.

“너 일부러 노트 받으려고 수 쓴 거지?”

“수는 무슨. 나 신경 쓰지 말고 니 공부나 하셔. 응?”

“빨리 보고 줘. 나도 봐야 돼.”

“맡겨 놨니? 이게 니꺼야?”

“둘 다 그만.”

단유의 나직한 중재에 둘은 바닥에 바짝 엎드리는 시늉을 했다.

“너희 둘은 왜 맨날 만나면 싸우니? 그러다 정 나겠어?”

“어머, 오빠!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요?”

“형! 실망입니다!”

그 와중에도 자판을 두드리던 단유가 노트북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가볍게 엔터키를 눌렀다. 프로그램이 실행되나 싶더니 검은 화면이 나왔다. 그리고 검은 화면 중앙에 빨간 버튼 하나가 생성되었다.

“뭐예요?”

화면 위로 뭔가 호기심을 자아내는 버튼이 떠오르니 유영과 새벽은 다투던 걸 멈추고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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