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615화 (615/956)

실험(5)

-------------- 615/952 --------------

단유는 유영의 촉촉한 눈망울을 보며 말을 신중하게 골랐다.

“시간을 줘서 고마워요.”

“네?”

“만약 그 자리에서 대답을 듣겠다고 하셨으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을 테니까요.”

‘아니 딱히 그러려고 했던 건 아닌데.’

소매 끝을 붙잡은 손가락이 가만히 있질 못했다.

“그 뒤로 생각을 많이 해 봤어요.”

‘내 생각을 많이 했다는 거네요?’

“그런데요.”

꼼지락거리던 손가락이 멈췄다.

“저도 유영씨, 좋게 생각해요.”

‘···그래서? 그래서?’

“하지만 교제를 전제로 하시는 이야기라면, 아쉽지만 제가 받아들이기가 힘들어요. 왜냐하면, 전 아직 유영씨를 잘 모르기도 하거니와 유영씨도 절 잘 모르시잖아요.”

“예?”

단유는 좀 더 신중하게 말을 골라 꺼냈다.

“음, 남자와 여자는 고도로 복잡한 존재, 라고 이야기하잖아요? 영국의 수학자인 버트런드 러셀은 여성이 남성의 성격을 보고 사랑하는 경향이 있고, 남성은 여성의 외모 때문에 사랑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대요.”

‘응?’

“그리고 제임스 쿠란이라는 학자가 말하길 여자 대학생은 그들의 이상적인 데이트 상대자가 주장성과 지배성이 높아야 한다고 묘사했어요. 무슨 말이냐면 지배성이 높은 남성에게 끌린다는 뜻이죠.”

‘네?’

“간단하게 말해서, 여자는 매력을 느끼는 특정 남성상이 존재하고, 일반적으로는 남성적 지배력, 상황을 통제하고 주도하거나 적극적으로 여성에게 어필하는 남성을 선호한다는 뜻이죠. 좀 더 확장해보면, 여자는 이런 남성이 아니면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는 뜻이죠. 그런 점에서 보면 전 그런 남성에 미치지 못하죠.”

순간적으로 유영은 욱하는 마음이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유영이 어떤 반박을 떠올리기 전에 단유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저에 대해서 유영씨가 가지는 호감은, 사실 즉흥적인 호감이 아닐까 추측되네요. 대학교라는 자유로운 공간, 그리고 유영씨가 만들어낸 캠퍼스에 대한 환상 속에서 우연히 만난 연상의 남자에게 호감을 느낀 건 아닐까요? 우연찮게 조별 과제를 준비하는 동안 조장의 역할을 맡게 되면서 의도치 않은 통제력을 보였을 테고, 그게 유영씨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진 게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그런 점에서 유영씨가 절 잘 모를 거라고 예상하는 바이기도 하죠. 전 리더쉽이 있는 사람도 아니고, 적극적이거나 주도적인 면도 부족한 사람이니까요.”

다른 남자도 다 이런 식일까 싶지만, 상식적으로 그럴 리 없다고 유영은 생각했다.

“물론 저 역시 유영씨에 대해 잘 몰라요. 앞서 말한 것처럼 남자는 여자의 외모 때문에 사랑을 느낀다는 데, 그런 면에서 보면 분명 유영씨는 어떤 남자라도 사랑을 느낄 수 있을 만한 외모라고 생각합니다.”

‘너는?’

이라고 묻고 싶은 걸 꾹 참았다.

“하지만 그런 외모만으로 유영씨와 교제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너무 1차원적인 충동이며, 관계 지속을 위한 배려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어쩌면 이런 식의 가벼운 교제는 서로에게 상처만 주지 않을까요? 유영씨에게 상처를 주는 것도 예의는 아니고, 마음에 맞지 않는데 억지로 관계를 이어나가는 것도 스스로에게 상처가 될 겁니다.”

****

새벽은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단유를 쳐다보았다.

“세상에.”

단유는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으로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가방에 집어 넣었다.

“수고하세요.”

도서관 사서에게 짧게 인사말을 남기고 돌아선 단유의 뒤를 새벽이 쫓아왔다.

“진짜 그렇게 말했어요?”

“응.”

“우와, 대박.”

새벽은 단유를 외계인 보듯 바라보았다. 세상 어떤 남자가 여자한테 저런 식으로 이야기할까? 아니면 어제까지 연애하고 싶다고, 기회만 닿으면 언제든 고백해야겠다고 다짐하던 자신이 이상했던 걸까?

“그거 일부러 거절 받으려고 한 말이죠?”

“반쯤?”

“그게 무슨 뜻이에요?”

“만약 내가 준비한 말에 설득을 당한다면, 이성적으로 서로의 관계를 이해한 거니까 서로 얼굴 붉힐 필요 없이 앞으로도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어 좋은 거고, 내가 한 말이 얼토당토않은 말이라 여기며 날 이상한 사람 취급했다면, 그건 그거대로 걔한테 상처 주지 않고 상황을 마무리 지을 수 있으니까 좋은 거고.”

“일부러 나쁜 남자인 척 한 거네요?”

“나쁜 남자인 척이 아니라, 나는 원래 좋은 남자가 아니었거든.”

새벽은 고개를 흔들었다.

“형은 그럼 평생 연애는 안 하실 거예요?”

“마음에 맞는 사람이 있으면 하겠지.”

“그 말은 유영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이야기잖아요?”

도서관 밖으로 나서니 더위가 한풀 꺾인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건 아니지. 그냥 서로가 잘 모르니까 아직은 교제를 생각할 때가 아니란 거지.”

“아니, 그게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제 말은, 원래 연애라는 게 모르는 두 사람이 만나서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 그런 거 아닌가요?”

“기본적으로는 그렇지. 그렇지만 내 생각엔, 연애는 어느 정도 서로를 아는 두 사람이 느끼는 호감 이상의 감정을 확인했을 때 가능하다고 생각해.”

“음, 그 말은 첫눈에 반한다거나 하는 건 없다?”

“없진 않겠지만, 그런 경우는 희박하지. 뮤온의 변칙적 자기 쌍극자 모멘트(뮤온 g-2)를 이론적으로 정확히 규명하는 것만큼 어렵지 않을까?”

“네?”

“그냥 어렵다고.”

“···그래서, 아무튼, 그럼 두 사람 그렇게 헤어진 거예요? 유영이가 납득 했어요?”

단유는 손을 들어 볼을 긁적였다. 얼굴에 열이 살짝 오르는 느낌이다.

****

유영은 앞에 놓인 플라스틱 컵에서 빨대를 뽑아 테이블에 내려놓고, 컵을 그대로 들이켰다. 얼음이 채 녹지 않은 아이스커피의 차가움도 느끼지 못하는 듯, 벌컥벌컥 들이킨 유영은 얼음만 바닥에 남은 컵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손등으로 입술을 훔친 뒤, 단유를 똑바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오빠.”

“네.”

박력 넘치는 부름에 단유는 공손히 대답했다.

“오빠, 저 사랑해요?”

“···아니요.”

“그럼 제가 오빠를 사랑하나요?”

“···글쎄요?”

“저도 몰라요. 제가 오빠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 오빠 말대로 환상에 젖어서 오빠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인지도 몰라요. 하지만 이렇게 표현하든, 저렇게 표현하든, 제가 오빠를 ‘좋아한다’는 말은 진심이에요. 제가 오빠를 좋아하면 안 돼요?”

“어, 그건 뭐···.”

“솔직히 털어놓을게요.”

잠시 말을 끊고 크게 심호흡을 하는 유영의 볼이 부풀어올랐다가 가라앉길 반복했다.

“사실 저 이상한 여자로 보일까 봐 걱정 많이 했어요. 오빠 말대로, 오빠 본 지 며칠 되지 않았을 때니까요. 그리고 오빠가 그, 비싼 차 타고 다닌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요, 솔직히 오빠한테 고백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속물처럼 보일까 봐 겁도 났지만, 오빠는 저랑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보였거든요.”

그 말에 조금 뜨끔했던 단유는 짧게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전 그렇게 비싼 차 타고 다니는 사람, 처음 봤어요. 어쩌면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재벌들처럼 오빠도 그런 사람이 아닐까 싶었어요. 일부러 평소에는 수수하게 입고 다니면서 티를 내지 않는 거죠.”

유영은 계속 진지했고, 그래서 단유는 감히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런데 전 신데렐라가 아니에요. 신데렐라가 되고 싶지도 않고요. 전 정말 스스로 성공하고 싶어요. 우리 집, 잘 사는 집은 아니지만, 못 살지도 않아요. 하지만 그래도 제가 성공해서 우리 집, 우리 엄마 아빠 잘살게 해드리고 싶어요. 그래서 고등학교 때도 노력해서 서울대에 들어올 수 있었던 거고요.”

평소의 유영에게서는 보기 힘든 강한 눈빛이었다.

“그래서에요. 오빠한테 쉽게 고백 못 했던 이유. 연애요? 환상이요? 물론 있어요. 하지만 그런 게 현실에서 눈 돌릴 이유는 되지 않잖아요. 그렇지만···그런데도 오빠가 좋았어요. 다른 건 다 착각할 수 있다 쳐도 제 마음을 착각할 순 없잖아요. 그래서 그날 저도 모르게 말한 거예요. 제 진심을요.”

전력으로 내달리다 지친 사람처럼 숨을 몰아쉬는 유영은 겨우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오빠한테 고백한 거 후회는 안 해요. 하지만 저도 알아요. 저랑 오빠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거. 그러니까 오빠랑 교제, 생각 안 해요. 그냥···오빠는 아이돌 같은 거예요, 저한테. 그래서 바라봤던 거고요.”

****

“어렵네요.”

새벽은 머리를 긁적이며 단유의 이야기에 화답했다.

“그러니까, 유영이 걔도 형이랑 사귈 마음은 없다 그건가요? ···어쩌면 형이 먼저 꺼낸 이야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건지도 모르겠네요?”

“몰라, 그것까진.”

“뭐야, 그럼. 그냥 안 보고 살기로 하는 거예요? 그런데 같은 과인데 안 보고 살 순 없잖아? 마주치면 서로 되게 민망하겠다.”

새벽은 자신이 유영을 만나면 어떻게 대해야 하나를 고민해보았다. 유영과 몇 번 오며 가며 만난 게 다이니 별로 친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자신이 다쳤을 때 병원까지 와준 인연이 있는데 마주쳤을 때 모른 척할 순 없다. 그러나 지금 가장 친한 형과의 관계가 있는데 친한 척 반응할 수 있을까? 어쩐지 명확하게 태도를 정하기가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 관계란 게 참 어려운 거 같아요. 그렇죠?”

어떤 생각에서 저런 대답이 나왔는지 몰라도, 딱히 틀린 말은 아닌지라 단유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학생 회관을 지날 무렵, 새벽이 단유에게 가볼 곳이 있다며 인사를 했다.

“자전거 동아리?”

“이번 학기부터 활동하기로 했거든요. 그런데 형 자전거로 이래도 되나 모르겠네요.”

“무슨 상관이야. 말했잖아. 나중에 필요 없어질 때까진 그냥 타고 다니라고. 아니면 그냥 네가 가져도 상관없고.”

“아이고, 그건 아니죠. 이건 제가 가지기엔 너무···그렇네요. 헤헤.”

“네가 알아서 해.”

“고마워요, 형. 아, 형도 혹시 동아리 들어오실래요?”

단유도 자전거를 좋아하니까 저렇게 비싼 자전거를 타고 다녔던 게 아닐까 짐작한 새벽의 제안에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됐어. 바뻐.”

귀한 주말에 바깥으로 나돌 여유가 없다.

“형이랑 같이 라이딩하면 좋을 텐데.”

“나중에 기회 되면 그러자.”

“네. 아, 형 수업 끝나고 같이 저녁이나 먹을까요? 저 그때까지 동아리실에 있을 거 같은데.”

“오빠!”

‘응?’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돌렸던 새벽은 저도 모르게 손가락질을 하고 말았다.

“유영이?”

“새벽이 너도 있었구나. 안녕?”

“어, 안녕.”

뭔가 괜히 기운이 넘치는 유영의 인사에 새벽은 주춤대며 화답했다. 생각해보니 불과 어제까지 서로 말을 놓지 못하고 쭈뼛대지 않았던가? 물론 본인이 먼저 말을 놓자고 했었지만, 그럼에도 수줍게 말끝마다 ‘요’자를 붙이다 갑자기 태세 변환한 유영을 보니 어색하고 이상했다.

그러나 유영은 전혀 그런 느낌이 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단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오빠, 어디 가요?”

“수업. 너는?”

“저도 수업 들어가는 길이죠. ‘미시’ 맞죠?”

“응. 같은 교실인가 보네.”

“그러네요.”

훗, 하고 웃는 유영의 모습이 어색하게 느껴져 새벽은 어쩔 줄 몰랐다. 빨리 자리를 피해줘야 하는 건지, 아니면 계속 이 대화를 듣고 있어도 되는 건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럼 같이 가요.”

“그래. 새벽아, 수업 끝나고 내가 연락할게.”

“아, 네, 형.”

“그럼 나중에 보자.”

“나중에 봐.”

유영도 해맑게 웃으며 인사를 한 뒤 단유의 곁에서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팔짱만 끼지 않았을 뿐이지, 찰싹 붙어서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는 그 모습에, 새벽은 어리둥절하기만 할 뿐이었다.

‘뭐지?’

****

“그런데요, 오빠.”

“네?”

“전 오빠가 말해준 이야기, 잘 모르겠고요, 오히려 조금 오기가 생겨요.”

“무슨 말이죠?”

“지금까지 제 이상형에 대해 별로 고민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오빠 말대로 제가 연상의 지배적 성향이 강한 남성을 우상시하여 매력을 느끼는지 궁금해지네요.”

“미국에서 한 실험의 통계가 그렇다는 이야기예요.”

“그건 미국이잖아요. 한국에서는 다를 수도 있죠.”

“그렇겠죠.”

“그럼 실험해보죠.”

“네?”

“한국에서는 여자가 어떤 남성상에 대해 매력을 느끼는지 말이죠.”

“음, 뭐 그런 실험도 해보면 재미있긴 하겠지만 제가 바쁘기도 하고 그런 실험을 주재할 여유도 없네요.”

“대규모 실험일 필요는 없잖아요? 그냥 검증이죠.”

“검증?”

“표본 검증이요. 이를테면 오빠랑 저의 관계를 표본으로 삼아서 실험을 해보자고요. 과연 여자가 매력을 느끼는 남성상이 그 실험과 같은지 다른지. 마찬가지로 남자가 매력을 느끼는 경우도 그런지를요.”

“음. 뭔가 묘하게 궤변이네요.”

“교제는 아니고, 그냥 그렇게 만나봐요. 한 학기 동안 만이라도 서로 가깝게 지내보는 거죠. 그리고 각자 서로에게 매력을 느꼈는지, 그리고 매력을 느꼈다면 어떤 점에서 매력을 느꼈는지 말이에요. 만약 느끼지 못했다면 어떤 이유로 매력을 느낄 수 없었는지 서로 이야기를 해보자고요.”

“음. 제가 굳이 그 검증에 참여해야 할 이유가 있나요?”

단유의 물음에 유영의 눈빛이 서늘하게 변했다.

“싫어요?”

단유는 어쩐지 대답을 신중하게 해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커피숍을 나오기 직전, 유영이 한 마디를 더 했다.

“앞으로 저한테 말 놓으세요. 알았죠?”

“···응. 그럴게.”

유영의 짙은 미소가 햇살을 받아 빛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