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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멤버 더 네임-614화 (614/956)

실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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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문자를 받은 뒤로 유영은 머리가 하얘지면서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너무 넋이 나간 표정을 짓고 있었던 탓에 강의 중에도 담당 교수가 몇 번 지적할 정도였다.

어떻게 수업이 끝나는 줄도 모르고 멍하니 앉아있던 유영은 주변의 분주한 움직임에 수업이 끝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자연히 앞에 앉아 있던 단유에게 시선이 향했다. 그리고 마침 일어서서 돌아보던 단유와 눈이 마주쳤다.

“새벽아, 너 먼저 가라.”

“왜요? 오늘 수업 또 있어요?”

“아니, 수업은 없는데, 잠깐 볼 일이 있어서.”

새벽은 입을 살짝 벌리고 앉아 있던 유영을 흘깃 본 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네, 저 먼저 갈게요.”

그리고 눈을 찡긋거렸다. 단유가 미간을 좁히자 얼른 가방을 챙겨 강의실을 나갔다.

다음 수업이 있는지 학생들이 들어와 빈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나가서 잠깐 이야기 좀 할까요?”

“···네.”

유영은 나름 조신하게 말하려고 했는데, 목이 잠겼는지 이상한 목소리가 났다. 유영은 얼굴을 붉혔지만 단유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강의실을 나갔다.

아무래도 개강 첫날이다보니 캠퍼스에 학생들이 많아서 조용히 대화를 나눌만한 장소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수업 더 있어요?”

“크흠. 아니요.”

짧게 헛기침을 하고 대답한 유영.

“그럼 잠깐 학교 밖에 나가서 이야기할까요?”

“···네.”

“가시죠.”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는 단유. 유영은 다소곳이 손을 모으고 그 뒤를 졸졸 따라갔다.

버스를 타고 학교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가까운 카페에 들어갔다. 카페에도 사람은 많았지만, 대화를 나누기 어려울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적당한 소음이 두 사람의 대화를 가려줄 것 같았다.

간단하게 음료수를 주문한 뒤, 자리에 앉은 두 사람. 유영은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나눌지 생각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까 나 따라온 거 맞죠?”

단유가 밑도 끝도 없이 꺼낸 한 마디에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유영을 보며 단유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아까 수업 들어갈 때, 계속 뒤에서 누가 쳐다보는 것 같더라고요. 제가 그런 게 조금 예민하거든요.”

“······.”

“강의실에서도 비슷한 느낌이 들길래 보니까 유영씨더라고요.”

“······.”

“그러고 보니까 유영 씨랑 할 이야기도 있었다는 걸 뒤늦게 생각해 냈는데, 사람들 많은 데서 이야기하는 것보단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해서 여기 오자고 한 거예요.”

“······.”

말을 계속 이어도 대답이 없는 유영을 보며, 단유는 볼을 긁적였다. 괜히 주변을 둘러보다가 여전히 자신을 멍하니 쳐다보는 유영을 향해 다시 말을 꺼냈다.

“방학, 잘 보냈어요?”

****

“오빠는 왜 깜빡이도 없이 훅 들어와요? 처음에 먼저 그런 걸 물어야 했던 거 아닌가요?”

“그래요?”

“오빠랑 저 한 달 만에 본 거잖아요. 그러면 당연히 너는 그동안 잘 지냈냐? 별일 없었냐? 건강하게 잘 지냈냐? 같은 이야기로 먼저 안부를 묻는 게 순서 아니에요? 어떻게 사람 민망하게 그런 걸 먼저 물어요?”

“그렇군요.”

“그리고 저한테 궁금한 게 그렇게 없어요? 만약에 아까 오빠 뒤를 따라갔던 사람이 저라면, 물론 그게 사실이긴 해도, 그걸 굳이 그렇게 밝혀서 사람을 곤란하게 하셔야 해요? 안 그래도 오빠 앞에서는 말 한마디도 하기 어려운데, 굳이 그렇게 하셔야겠어요?”

“미안해요.”

‘이건 아닌 거 같은데.’

유영은 머릿속에서 대화를 그려보았지만, 결코 좋은 방향의 대화법은 아닌 것 같았다. 단유에게 대화를 받아내고 싶은 마음도 없고, 단유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몰아붙일 일도 없었다. 괜히 자신의 지금 처지가 민망하니까 들키지 않으려고 발악하는 것밖에 안 되는 것 같다.

“오빠는 저 안 보고 싶었어요?”

“응?”

“제가, 오빠 좋아한다고 했었잖아요? 기억 안 나세요?”

“기억···하죠.”

“그런데 왜 대답 안 해줘요? 오빠 제 전화 번호 몰라요?”

“알죠.”

“그런데 왜 전화도 안 해요? 오빤 원래 그런 사람이에요? 여자가 먼저 고백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고, 궁금한 것도 없고, 고작해야 이 사람이 날 따라왔나 안 왔나 그걸 확인하는 게 제일 궁금한 거였어요?”

“미안해요.”

‘이것도 아닌데.’

대화를 궁리하다 보면 계속 몰아붙이는 식으로만 이어진다. 그게 자신의 창피함을 가려보려는 졸렬한 방식임을 모르지 않지만, 그러지 않고서는 도저히 단유를 바라보면서 대화를 나눌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머릿속으로 가상의 대화를 구성해보며 최적의 대화법을 찾아보지만 쉽지 않았다.

그때, 똑똑, 하며 주위를 환기시키는 소리가 들렸다. 얼른 정신을 차리고 바라보니 단유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들기고 있었다.

“네?”

“무슨 생각 해요?”

“···아무것도요.”

“방학 잘 보냈어요?”

“네.”

“그래? 방학 전에 아르바이트도 하고 싶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아르바이트라도 하고 지냈어요?”

“네.”

“무슨 아르바이트?”

“네? 아, 저기, 그게, ···안 했어요.”

횡설수설하는 유영을 보며 단유는 피식 웃었다.

“아르바이트 구하기 쉽지 않죠?”

“네.”

짧은 대답 뒤, 침묵이 이어졌다. 침묵을 깨뜨린 건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진동벨의 울림이었다.

“제가 가져올게요.”

단유가 일어나 카운터 쪽으로 향하고, 유영은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까 단유의 뒤를 쫓을 때도 봤었지만, 큰 키와 넓은 어깨, 단정한 옷 맵시, 무엇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없었다. 볼수록 마음에 드는 남자.

‘무슨 생각이야, 너!’

볼을 감쌌더니 손바닥이 뜨거웠다. 잠깐 거울을 꺼내 화장이 이상하진 않은지 확인하고 싶은데, 단유가 금방 돌아올 테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다.

“자, 여기.”

“고맙습니다.”

차가운 커피를 시키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유영은 한 모금을 입에 머금었다. 단유도 아무 말 없이 커피를 마셨다. 다시 조용한 테이블.

“저기요.”

“네?”

“왜 아무 말씀도 안 하세요?”

유영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단유는 웃음을 지었다.

“제가 계속 이야기를 하면, 유영씨가 하고 싶은 말을 못 할 거 같아서 기다리는 건데요?”

“······.”

“하고 싶은 말, 없어요?”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뭔데요?”

심호흡을 하는 유영의 얼굴이 혈색을 되찾았다.

“제가 오빠한테 했던 말 기억해요?”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이었어요.”

단유는 앞에 놓인 커피를 집어 들었다. 플라스틱 컵 바깥으로 송글송글 물방울이 맺혀 있다. 단유의 목울대가 꿀렁거리는 걸 바라보며 유영은 침을 삼켰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유영씨.”

그저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유영은 호흡이 가빠지는 기분이었다. 최근에 이렇게 긴장한 적이 있었을까?

****

단유와 유영을 뒤로하고 나온 새벽은 입꼬리가 계속 씰룩거렸다. 바보가 아닌 이상, 유영이 단유를 좋아한다는 걸 모를 수 없었다. 단유가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유영은 자연대에서 꽤 인기가 많은 여학생 중 한 명이었다. 애초에 여학생이 인문대만큼 많지 않은 탓이기도 하지만, 유영의 ‘청순’하게 보이는 외모가 많은 남자들의 가슴을 흔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새벽도 유영을 좋아했다. 이성적으로 좋아했다기보다는 예쁜 여자를 보고 호감을 가지는 정도였지만, 어쨌든 유영을 좋게 보았다. 그런데 그녀가 자신이 존경하고 따르는 형을 좋아한다고 하니, 괜히 기분이 좋기도 한데,

‘옆구리가 시린달까.’

시샘이 난달까, 그런 정도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현 상황이 너무 아쉽다. 1학기 때야 갓 대학에 올라온 터라 학사일정을 따라가기도 바쁘고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이제 어느 정도 돌아가는 상황을 알게 된 마당이다. 가끔 가다 보이는 CC들의 알콩달콩한 모습을 보면 새벽도 마음이 싱숭생숭해지는 것이다.

‘나도 남잔데 그런 마음 생길 수 있는 거잖아!’

하지만 자연대 수업에는 여자가 별로 없기에 경쟁률(?)도 치열하고, 그 경쟁에 과감하게 끼어들 만큼 자신감도 없었다.

‘ASKY···. 그게 내 이야기일 줄은 몰랐어.’

새벽은 한숨을 내쉬며 건물을 나와 자전거를 세워둔 곳으로 향했다. 자전거 체인을 풀고 나가려는 그때, 누군가가 새벽을 불렀다.

“저기요.”

“네?”

새벽이 돌아보니 남녀 한 쌍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속으로 ‘또 커플이야’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남학생이 물었다.

“혹시 자전거 주인이세요?”

새벽은 살짝 어이가 없었다.

“그런데요?”

“아, 저희는 자전거 동아리인데요, 마침 지나가다가 그 자전거를 봤거든요. 이거 주문 제작한 자전거 같은데, 맞나요?”

자전거 동아리라는 말에 새벽은 오해를 풀었다. 자전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니 이 자전거를 보고 관심이 생겨 접근을 했었으리라. 새벽도 지난 교통 사고 때 자전거의 가치를 전해 듣고 입을 다물 수가 없었으니까. 그리고 이렇게 귀한 자전거를 아무렇지 않게 타라고 넘겨 준 단유에게 또 한 번 감탄하기도 했었고.

“아, 전 잘 몰라요. 사실 제 건 아니고 형 건데 형이 타고 다니라고 빌려준 거라서요.”

“아, 그러시구나. 저희는 혹시 자전거 좋아하시는 분이시면 같이 동아리 활동하지 않겠냐고 물어보려고 했거든요.”

“동아리요?”

“저희 동아리 아시나요? 저희 동아리가 교내 유일의 자전거 동아리에요. 주말에는 서울 근교로 정기라이딩도 하고, 방학 때는 국내나 국외로 자전거 여행을 떠나기도 하거든요.”

여학생이 남학생의 말을 받아 덧붙였다.

“지난 여름에는 제주도 라이딩도 했었고요.”

“가끔은 다른 대학교 동아리랑 같이 조인트도 하는데. 혹시 관심 있으세요?”

그 순간 새벽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장면들이 슬라이드쇼처럼 지나갔다. 해변가를 달리는 장면, 산악 사이클을 타는 장면, 한강변을 달리는 장면. 그리고 그 장면들마다 긴 머리를 흩날리는 여학생들이 곁에서 함께 웃으며 달리고 있었다.

“동아리에 여자도 많나요?”

라는 어리석은 질문은 하지 않았다. 새벽은 바보가 아니니까. 대신 물었다.

“혹시 라이딩 촬영한 사진 같은 것도 있나요?”

“사진이요?”

“그냥, 어떤 식으로 활동을 하는지 보고 싶어서요. 아, 요새 그런 거 있잖아요? 길막하면서 자전거 라이딩하다가 욕도 먹고 그러니까.”

“아, 저희는 그렇게는 안 하고요, 철저하게 교통 법규 지키면서 라이딩을 해요. 저희의 즐거움 때문에 다른 분들이 피해를 받으시면 안 되니까요.”

“제가 보여드릴게요. 한 번 보실래요?”

여학생이 핸드폰으로 사진첩을 열어 보여 주었다. 여학생의 것이라 그런지 몰라도, 사진에는 여자들과 찍은 사진들이 많았다. 가끔 남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찍은 사진도 있었는데, 그 정도면 새벽도 충분히 판단할 수 있었다.

“가입할게요. 어떻게 가입하면 되죠?”

새벽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동아리방에서 가입신청서 쓰시면 돼요. 같이 가실래요? 저희도 동아리방 가는 중이었거든요?”

“네. 그럴게요.”

“혹시 1학년이세요?”

“네.”

“아, 그렇구나. 이렇게 좋은 자전거 타고 다녔으면 예전에 말이 나왔을 텐데 이번에 처음 봤거든요.”

1학기 때도 가끔 타고 다니긴 했는데, 그게 1학기 말이어서 아마도 못 봤었나 보다. 뭐 별로 중요한 건 아니다. 오히려 지금 이 타이밍이니까 새벽도 동아리에 가입할 마음이 생긴 것일 테다.

동아리 방에 들어서니 넓지 않은 방에 적지 않은 학생들이 의자나 소파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중 반 이상이 여자였다!

‘여기다! 내 마음의 안식처!’

새벽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들키지 않기 위해 힘차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천문물리학부 1학년 강새벽이라고 합니다!”

새벽의 씩씩한 인사말에 까르르 웃음소리가 화답처럼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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