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610화 (610/956)

호령(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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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

“사과받을 일은 한 적이 없는데요.”

“괜히 곤란하게 만든 것 같아서 말이다.”

용기내서 하는 말이란 것은 알 수 있었지만, 그래도 단유는 대휘의 사과를 받지 않았다.

“저한테 사과하실 필요 없으세요. 그리고, 지금은 그런 거 잠시 잊으시고 빨리 나으실 수 있도록 힘쓰세요.”

단유의 말에 대휘는 구급차 곁에서 대기하는 구급요원들을 흘깃 바라보았다.

“고맙다. 고맙고 미안하다.”

말리지 않으면 석고대죄라도 할 모양으로 죄책감을 느끼는 대휘를 보며 단유는 볼을 긁적거렸다.

“법으로도 심신미약 상태에서의 행위에 대해서는 정상참작을 하죠. 더군다나 선배님은 딱히 법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일을 저지르지도 않으셨고요. 굳이 사과를 하신다면, 교수님께 하셔야겠죠.”

의도적으로 한 행동은 아닐지라도, 늙은 심장에 무리가 갈 만한 말들만 했으니 말이다.

“그래, 교수님께도, 사과를 드려야지.”

기운 빠진 얼굴로 하늘을 응시하는 대휘.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를 날씨이건만, 둘이 마주선 이 자리는 서늘하다 못해 처연할 지경이다.

“그렇지만 너한테도 미안하다. 괜히 나 때문에 학교 생활 힘들어지는 건 아닐지···.”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선배님의 사과를 받지 않으려 했던 것은 결코 선배님을 위해서 나섰던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

“선배님, 전 다른 것과 틀린 것은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눈치다.

“사람은 백 명이면 백 명이 다 다르다고 하죠? 성격, 습관, 살아온 환경이 다르니 생각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를 겁니다. 다른 건 그냥 다를 뿐이죠. 다르다고 차별해서는 안 되고 무시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들 그렇게 이야기들 하잖아요? 하지만 틀린 건 틀리다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틀린 걸 보고도 모른 척하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대휘는 그동안 입 꾹 다물고 참으며 지냈던 시간들을 되돌아보았다. 틀린 건 틀리다고,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자신이 ‘친구’라고 불렀던 또 다른 인격체를 만들어냈던 이유가? 자신을 위로해주고 달래주며 잘못된 것, 틀린 것을 향해 욕을 해주던 ‘친구’. 솔직히 아직도 그 친구가 현실이 아니라는 말을 믿기 힘들다.

“전 그 교수님이 어떤 분이셨는지 정확히 몰라요. 그 교수님이 선배님이나 또 다른 제자분들에게 어떻게 하셨는지 알지도 못하고, 조금 전의 일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었다고 추측은 해도, 확신은 하지 않아요. 하지만 조금 전의 일은 분명히 틀린 행동이었고, 틀린 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흔들리는 대휘를 보며 단유는 침착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건 틀린 것이라는 걸 스스로 알게끔 대처했던 것이지, 선배님을 돕겠다거나 교수님을 일부러 곤란케해서 모욕을 주려던 게 아닙니다. 물론 교수님은 다르게 생각하셨을지도 모르겠지만요.”

다툼이 벌어졌던 그 자리를 피하기 전, 단유를 노려보던 교수의 시선을 떠올리면, 교수는 ‘곤란’이나 ‘모욕’ 이상의 불쾌감을 느꼈으리라 짐작 가능하다. 하지만 불쾌하다고 그냥 둘 순 없는 일.

“모든 것은 원칙대로 흘러갑니다. 제가 그 자리에서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도요. 다만 제 나름의 방식으로 그 사실을 일찍 알려드렸을 뿐이죠.”

딱히 단유에게 해를 끼친 것도 아니니, 단유가 나서서 그들을 단죄할 것도 아니다.

“저 분들 너무 오래 기다리시는 것 같네요.”

“···그래. 네 말은 알겠다. 그래도, 내 개인적으로는 고맙다.”

이제 갓 대학에 들어온 신입생이니까, 아직 대학의 현실을, 사회의 현실을 모르니까 할 수 있었던 무모한 행동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니 대휘는 고마운 마음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런 말 할 자격은 없지만, 그래도 다음부턴 이런 일이 있어도 함부로 나서지 마라. 위험하니까. 원리 원칙보다 중요한 건 네 자신이다.”

그가, 그리고 그의 선배들이 원칙을 몰라서, 혹은 부도덕해서, 이제껏 가만히 있었을까? 그런 스탠스를 유지했던 이유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갈게.”

대휘는 단유의 어깨를 두드리고 돌아섰다. 그리고 구급요원들에게 기다려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한 뒤, 구급차에 올라탔다.

****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버지는 핸드폰을 붙들고 방으로 들어가셨다. 아마도 아버지는 주변 분들에게 오늘의 사실을 알리며 자신의 편을 만들거나 오늘의 상황을 수습하려는 것, 이라고 주아는 생각했다.

그런 아버지와 달리 주아는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자신의 친구들에게 오늘 있었던 황당한 일을 떠든다고 한들, 자신을 위로하거나 도와줄 사람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친구, 라고 부르는 이들은 고작해야 쇼핑할 때 어딜 가서 무엇을 사야 좋은지를 알려주거나 어떤 게 자신에게 어울리는지를 조언해 주는 정도였으니까.

물론 그런 이유 말고도 주아가 다른 어떤 대처도 못 하고 방에 틀어박혀 손톱을 뜯는 이유가 있었다.

‘그 녀석이야. 그 사람이 그런 거야.’

건방진 학생 뒤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남학생.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해서 아버지를 당황케 만들고 자리를 피하게 만들었던 남학생. 자리를 떠나기 전, 잠깐 시선이 부딪쳤을 때 주아는 남학생의 눈동자에 서린 이유 모를 섬찟함에 소름이 돋았었다.

무슨 수를 썼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을 때리고도 증거를 남기지 않았듯, 이번에도 수를 쓴 것이 틀림없다고 주아는 여겼다. 멀쩡한 학생이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아니 진짜 미쳤겠지만, 아무튼 보이지 않는 사람을 보는 듯 행동하고 눈빛이 바뀌어서는 아버지에게 악담을 쏟아붓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여겼다.

‘전부 그 녀석이 뒤에서 조종한 거야.’

손톱을 잘근잘근 씹다보니 애써 기르고 꾸민 손톱이 망가질 수밖에 없다. 짜증이 난 주아.

“Fuc*!”

생각해보니 자신이 뭘 잘못했다고 이렇게 불안에 떨어야 하나 싶어, 억울하고 분했다. 눈물이 났다.

****

집에 돌아오니 집안이 썰렁했다. 호빵과 패티만이 달려와 단유의 발등을 핥으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지지.”

단유는 두 개를 품에 안고 거실로 향했다. 생각해보니, 오늘 상미는 명수의 저녁 경기를 직관하러 경기장에 간다고 했었다. 하은은 아직 학원 일이 끝나지 않았으니 돌아올 리 없었고. 결국 지금 이 집에는 단유만 있는 셈이다.

안고 있던 두 녀석이 모두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버둥거렸다. 거실에 내려놓으니 신난다고 거실을 뛰어다녔다. 당연히 거실에 개 털들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단유는 한숨을 쉬며 그 녀석들이 하는 꼴을 바라보다가 허리를 굽혀 날리던 털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가늘고 새까만 털을 보니 패티의 것이다. 살짝 흔들면 눈에 잘 보이지도 않을 털이지만 하얀 대리석 바닥 위에 놓으면 금이라도 간 것처럼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단유는 도서관에서의 일이 생각났다.

사실 대휘의 일이 아니었으면, 좀 더 일찍 집에 돌아와 차분하게 오늘의 소득을 되짚어보고 갈무리하는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갑자기 원치 않던 일에 끼어들면서 시간도 지체되고 머릿속도 괜히 복잡해졌지만, 다행히 도서관에서 얻은 깨달음은 여전히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깨달음이라고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다. 애초에 기대했던 정도에는 못 미쳤고, 이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은 까닭이다. 굳이 표현하면 반쪽짜리 성공이었고, 반쪽짜리 깨달음이라고 해야겠다.

물질의 본질, 이 세상의 원리를 탐구하던 중이었으니,―완전한 깨달음을 얻었다면―어떤 형체의 물질이든 만들어낼 수 있는 수준을 기대했지만, 그런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아직도 많은 벽을 넘어야 한다는 것만 깨달았을 뿐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하나의 벽을 넘은 성과가 있었으니, 이제 그것을 실제로 마법에 적용해 볼 차례였다.

‘그런데 이걸 어디에 쓰나?’

그 물음이 계속해서 떠올랐지만, 적당한 대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손에 들린 개털을 보니 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물질은 물질을 구성하는 입자의 조합으로 이루어진다. 이는 일정 규칙에 따라 입자가 조합되면 물질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규칙이 바로 오늘 단유가 알아내려 했던 것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실패했다. 그러나 그 메커니즘에 대한 이론적인 지식을 쌓으면서 단유가 얻은 능력은 바로,

‘해체(Dismantle).’

그러자 단유의 손에 들려 있던 개털이 번쩍이더니 사라져버렸다. 흔적도 없이.

‘됐네.’

손끝을 비비며 남아 있던 흔적을 흩어냈다. 어떤 물체를 미립자 단위로 분해 시켜버리는 것이 바로 오늘 단유가 얻어낸 성과였다. 분자, 원자를 지나, 더 작은 단위에서 ‘해체’를 시키는 것. 없애는 것(Delete)은 아니다. 극한의 미시세계에서나 관측 가능한 구조체를 각각의 단위체로 억지로 떼어내는 것이 '해체'였다.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에너지는 빛과 열로 치환되었다. 아주 작은 질량체였기에 상대적으로 치환된 에너지 역시 크진 않았다. 그러나 사용하기에 따라서는 약간의 유도만으로 유용한 에너지로 전환시켜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전환하는 방법도 모를뿐더러, 당장 에너지로 변환시킨들 어디에 쓸 수 있을까? 변환된 에너지를 저장하거나 사용할 수 있는 매체가 없는데.

만약 조합의 원칙을 알았다면, 단유는 해체와 동시에 조합으로 물질을 ‘생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원하지 않은 방식의 에너지로 소비시키는 것이 아니라. 당장에 어떤 물질을 자의적으로 전기 에너지화 시킬 수 있다면, 더는 전기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물론 지금도 전기세 정도를 걱정하진 않지만, 그렇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이란 가정이다.

‘이걸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손끝을 비비며 고민하던 단유는 문득 자신을 올려다보는 두 마리 개에게 시선이 옮겨졌다. 그리고 그 두 마리가 짧은 시간에 벌인 난장판도 발견했다.

잠시 후, 거실에 불꽃놀이가 펼쳐졌다. 여러 차례 번쩍번쩍하니까 거실에 보이던 모든 털들이 사라졌다. 그게 또 보기 좋았는지 두 녀석이 미친 듯이 뛰어다녔고, 그 덕에 또 번쩍번쩍 거렸다.

하는 김에 이것저것 다 ‘해체’를 시켜보았다. 거실에 떨어진 개털을 ‘해체’ 시키고, 거실 벽에 붙은 TV 위의 먼지들도 ‘해체’ 시켰다. 거실 쓰레기통에 있던 휴지들도 보이는 김에 다 ‘해체’를 시켰다. ‘해체’는 딱히 어떤 제약이 없었다. 크든 작든 상관없이 가능했다.

원래 무언가를 만드는 것보다 때려 부수는 것이 쉬운 법이다. 모래성을 쌓기는 어려워도, 부수는 건 쉽듯이 말이다.

“어머? 단유야, 청소했어?”

“응.”

“와, 집이 엄청 깨끗해 보인다? 갓 이사온 집 같애. 어? 소파도 청소했어? 새로 산 거 같은데? 설마 돈 많다고 새로 산 건 아니지? 와, 여기 먼지 하나 없네?”

여기 저기 둘러보며 놀라워하던 상미가 단유를 돌아보며 눈썹을 내려뜨렸다.

“야, 힘들게 왜 혼자 했어? 나랑 같이 하지. 이러면 나만 미안해지잖아.”

“괜찮아. 별로 안 힘들었어.”

“야, 이 넓은 집을 너 혼자 청소했는데 안 힘들었을려고? 잠시만 뭐 먹을래? 내가 시켜줄게.”

“됐어.”

“다음에 대청소할 거면 미리 말해줘. 나도 한팔 거들 테니까.”

팔을 들어 보이며 히죽 웃어보인 상미는, 자신의 방에 들어가서는 또 한 번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와, 대박! 내 방도 했어? 와! 여기 마우스 패드는 어떻게 청소했대? 안 그래도 내가 이거 조만간 빨려고 했었는데. 키보드도 했네? 야, 이거 설마 물로 부어서 청소한 건 아니지?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깨끗하게 했어? 책상 밑에도 다 했네? 너 설마 오늘 하루 종일 청소만 하고 있었던 거야?”

단유는 새로 얻은 마법이 청소 특화 마법이라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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