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령(3)
-------------- 609/952 --------------
“영감님? 아니, 영감? 배울 만큼 배운 양반이 그러면 쓰나?”
교수의 가슴을 한 손으로 밀치며 이죽거리는 친구의 말에 교수의 늘어진 볼살이 부들거렸다.
“어디 아까처럼 계속 말해봐요, 영감. 나 혼자 잘났다는 듯이 말해보라고. 왜? 난 내 친구처럼 만만하지 않은가 보지? 잘난 척 훈계라도 해보지그래? 욕도 하고 그래 보라니까?”
“이익!”
늙은 교수의 앙다문 턱에서 뿌드득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평생에 이런 치욕을 언제 겪어봤을까?
“그, 그만 해요.”
옆에 섰던 딸이 아버지를 한쪽 팔로 가리며 부탁했다.
“응? 이 분은 또 왜 이러시나? 아까처럼 명령해 보시지? 잘난 듯이 심부름시킬 땐 언제고, 왜 갑자기 연약한 척일까? 아, 이것도 연긴가? 보니까 마음에도 없는 눈물을 흘릴 것처럼 애잔하게 굴던데, 이번에도 그건가? 왜? 사람들이 막 쳐다보니까,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당신을, 당신 아버지를 동정할 것 같아? 웃기지 마. 당신 아버지, 이 영감, 이미 사람들한테 찍힐 만큼 찍힌 사람이야. 제자라고 떠들까 봐 겁나? 웃기시네. 정 반대라고, 이 영감아. 당신 제자라고 사람들이 손가락질 할까 봐 겁난다고.”
대휘는 자신이 술자리에서 털어놨던 이야기를 하나도 잊지 않고 술술 털어놓는 친구의 기억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감탄은 감탄이고, 이대로는 도가 지나칠까 겁이 나기 시작했다.
‘말려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자신을 대신해 속 시원히 쏘아붙이는 친구의 모습을 계속 지켜보고 싶은 마음도 컸다.
“너, 너!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공갈, 협박죄야, 이거!”
“공갈, 협박? 허, 참. 공갈이랑 협박은 지금까지 당신이 한 게 공갈이고 협박이야. 불쌍한 제자들, 그저 공부에만 매진해보겠다고 밤잠 설치는 학생들을 석사, 박사 학위 논문 심사를 핑계로 종 부리듯 부려 먹은 게 공갈이고 협박이야.”
눈을 부라리며 강 교수를 노려보는 친구의 기세에 눌린 걸까? 교수는 대꾸도 못 하고 그저 마주 노려볼 뿐이었다. 하지만 친구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양반 아주 내로남불이네? 응? 영감 사고방식이 그따위니까 영감 딸내미도 아주 못 배워 처먹어서 이 꼴인 거야. 알아? 당신 미국 명문대 출신이라며? 미국 명문대 출신이면 아버지 빽으로 낙하산 취업해도 되는 거야? 당신 때문에 수년간 준비하던 사람이 불합격하는 게 말이 돼? 서류 심사 한 번 안 거치고 들어온 것도 모자라, 뻔뻔하게 얼굴 들고 다니지? 그리고, 여기가 어디라고 상전 노릇이나 하고 다녀? 네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줄 알아?”
친구가 무슨 해코지라도 할까 봐 아버지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주아, 그녀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봐요, 이제 그만 해요.”
지나가다 걸음을 멈추고 지켜보던 사람 중 한 명이 끼어들어 교수 앞을 막았다. 복장으로 보아 학생같이 보이지는 않는데, 교직원일까? 그가 끼어들자 옆에서 구경만 하던 몇몇 이들도 슬슬 끼어들어서 더 큰 싸움이 벌어지기 전에 말리겠다는 자세를 보였다.
이쯤 되니 대휘도 이 싸움을 말려야 하지 않을까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비록 친구가 대신 나서주긴 했지만, 괜히 자기 때문에 좋지 않은 일에 말려들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앞으로 나서려는 순간, 누군가가 자신의 손목을 붙들었다.
“선배님.”
돌아보니 단유였다. 그러고 보니 아까 마주쳤었지. 집에 간다더니 아직 가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마 자신과 교수 자제분 사이의 일을 지켜보느라 걸음을 멈췄던 모양인데, 자신도 잠시 잊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만 하세요.”
“응?”
안 그래도 이쯤에서 그만두게 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만 해요.”
재차 말을 잇는 단유의 깊고 검은 눈동자가 정확히 대휘의 눈동자를 향하고 있었다. 흔들림 없는 그의 눈동자가 대휘를 붙들었다. 그 순간 대휘는 뭔가 어긋났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게 정확히 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 그만두게 하려고 했어, 나도. 내 친구가 말이 좀 심했다고 생각했어. 내가 말려야지.”
“선배님.”
단유는 더 세게 대휘의 손목을 쥐었다. 대휘는 생각보다 강한 손아귀 힘에 통증을 느끼며 미간을 찌푸렸다.
“야, 왜 이래? 이거 놔.”
그러나 단유의 시선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고, 그런 단유를 바라보던 대휘는 무심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랬는데, 주위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시선이 이상하다. 마치 이상한 사람을 보는 마냥. 고개를 뒤로 돌려 교수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교수는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 분노로 핏발이 섰던 눈동자에 의문형 부호가 함께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의 딸은,
‘두려워한다?’
그런데 갑자기 정적에 휩싸인 현장에서 문득 이상한 점을 느꼈다. 친구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내 친구는 어디 갔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찾아도 친구가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자기 앞에 서 있던 친구였는데? 단유가 자신의 손목을 잡았을 때, 잠시 한눈 판 사이에 어디로 간 것일까? 설마 도망간 것은 아니겠지? 그렇게 교수를 몰아붙이던 친구였는데, 갑자기 상황의 불리함을 느껴 도망친다? 말이 되지 않는다.
“내 친구는?”
단유가 친구가 있던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을 테니 그 행방을 알고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물었는데, 단유가 대답했다.
“친구라뇨?”
“조금 전까지 여기 있던 친구 말이야. 그래, 내 친구가 말이 조금 심하긴 했어. 그래도 교수님한테 그러면 안 되는데 말이야. 그래서 나도 말리려고 했었어. 정말이야. 그런데 진짜 내 친구 어디 갔지?”
두리번거리는 대휘에게 단유가 대답했다.
“선배님, 친구가 누굽니까?”
“응? 방금 여기 서 있던 친구 말이야? 오늘 저녁에 같이 술 한잔하기로 약속했던 친군데, 미리 왔다가 우연히 내가 말싸움하는 걸 보고 끼어들었는데···.”
“친구분, 이름이 뭔가요?”
“···그걸 왜 묻지?”
혹시 친구의 인적사항을 알아내서 신고하려는 걸까? 그래도 자신을 대신한 친구인데 보호해줘야 하지 않을까?
“그걸 니가 알 필요까진 없잖아?”
단유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이더니 말을 이었다.
“선배님, 여기에 다른 사람은 없었어요.”
뭐라고?
“선배님만 혼자 계셨어요.”
****
한여름의 뜨거운 햇살도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기울기 시작하며 고층 건물의 그림자도 길게 늘어지고 더위도 점점 꺾이기 시작했다. 거기다 건물 사이를 가르며 수목들을 흔들고 지나간 바람에 사람들의 목덜미에 맺혀있던 땀방울을 식혀주었다.
그러나 그 바람도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잠재울 정도는 되지 못했다.
“저 사람 뭐야?”
“언제부터 저랬는데? 나 조금 전에 와서 뭐가 뭔지 모르겠다.”
“보다가 소름 돋는다, 이것 봐라.”
“경찰 불러야 하는 거 아냐?”
“119를 불러야 할 거 같다.”
“말로만 들었는데 실제로 보니까 무섭네.”
“공부를 너무 많이 한 부작용 같은 건가?”
“예전에도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애가 갑자기 미쳐서 소리 지르고 한 적 있지 않았나? 그때 사람들 전부다 멍 때렸다던데.”
“그 정도면 다행이지. 해마다 한 번씩은 꼭 자살 소동 벌어지잖아?”
보일 듯 말 듯 은밀한 손가락질이 대휘를 가리키고, 좌판에서 튀어나와 시장 바닥을 뒹구는 더러운 생선을 보듯 대휘를 바라보는 사람들. 모인 이들의 시선이 홀로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대휘를 향할 때, 단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사람!’
주아는 대휘의 손목을 붙잡고 있는 단유를 바라보았다. 얼마 전, 자신의 뺨을 때렸, 다고 생각하게 만들, 었지만 정말 현실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어 혼란케 했던 남자가 몇 미터 앞에 서 있었다. 그일 이후로 혹시라도 마주칠까 봐 도서관 가는 방향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런 상황에서 마주치게 되다니. 지금 당장은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지 않았지만, 혹시라도 그가 자신을 보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었기에 주아는 몸을 떨었다.
스스로는 ‘이유 없는 폭력의 희생자’라고 생각하며 억울하고 두려울 뿐이었던 주아는 시선을 떨군 채로 아버지의 옷깃을 세게 붙잡았고, 딸의 그런 모습이 대휘에 대한 두려움이라 생각했기에 강 교수는 더 큰 분노에 싸였다. 그리고 조금 전 홀로 대휘와 마주 설 때와 달리, 지금은 둘 사이에 끼어든 구경꾼이 있었기에 조금 더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다 봤지? 이 미친 녀석이, 여자한테 함부로 막말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지 선생한테까지 폭언에, 농락을 했어! 응? 네가 그러고도 무사히 대학을 다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당장 경찰에 신고해서 네 녀석, 더는 이곳에 발 못 붙이게 만들 거야! 이런 위험한 놈이 내 랩에서 공부를 해? 어림도 없다, 이 녀석아!”
분노에 휩싸인 강 교수의 일갈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단유의 시선이 잠시 그에게 머물렀다가 대휘에게로 돌아갔다. 여전히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대휘. 아마도 일전에 그를 바라보며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었던 모양이라, 짐작했다.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다. 대휘가 평소 어떤 성격인지도 자세히 모르고, 강 교수란 사람이 어떤 성품을 지녔는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지금 당장에 벌어졌던 일만 보면, 그가 벌인 일이 꼭 무조건적으로 욕을 먹어야 하는 일인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단유는 대휘를 뒤로 물리며 나섰다. 그리고 어느새 바닥에 떨어져 있던 노란 봉투를 다시 집어 들며 말했다.
“교수님.”
여전히 씩씩대는 교수님의 시선이 단유에게로 향했다. 단유의 정체를 묻는 얼굴이다.
“이 봉투는 제가 선배 대신 전하겠습니다.”
봉투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우체국, 에 보내려던 것 맞으시죠?”
“뭐?”
“그리고···.”
이어 넋 놓고 있던 주아에게서 USB도 가볍게 뺏어 들었다.
“이것도 제가 가져다 드릴게요. 아까 들어보니 이 분 근무하시는 사무실의 윤 주무관님? 그분께 드리라고 했던 거 같은데, 이것도 제가 대신 드릴게요.”
교수는 당황했다.
“자네가 그걸 왜 하나?”
“어차피 여기, 선배님한테 시키시려던 거였잖아요? 보시다시피 선배님이 심부름을 대신 할 수 없는 상황이니, 제가 대신해드리려고요. 그리고 또 뭐 시키실 일이 있으신가요?”
“아니, 그게···.”
갑작스러운 단유의 개입에 교수가 말을 잇지 못하자, 단유는 능청스럽게 돌아서 대휘를 보았다.
“또 제가 대신 해야 할 일이 있나요?”
멍하게 단유를 바라보던 대휘가 호주머니에서 슬그머니 꺼낸 것은 열쇠였다. 곧 그 열쇠도 가볍게 뺏어 들었다.
“이것도 전해주면 되나요? 누구한테요?”
대휘는 대답 대신 주아를 바라보았고, 단유의 시선은 주아에게로 옮겨졌다. 동시에 주위 사람들의 시선도 주아에게로 향했다.
“이것도 윤 주무관님이란 분께 드리면 되는 거죠?”
“······.”
주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이게 뭐하는 짓인가!”
그래도 교수라서 그런지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단유는 교수의 화를 무던히 받아냈다.
“말씀드렸다시피, 선배님을 대신해서 심부름을 해드리는 겁니다. 어차피 이 선배님 아니면 다른 사람을 시키셨을 일 아닌가요?”
사람들에게는 단유의 말이 마치 ‘어차피 본인은 이런 일 안 하실 거 아닌가요?’로 들렸다.
몇 마디 말이 오갔을 뿐이지만, 단유의 말을 통해 상황을 이해하는 것은 어려움이 없었다.
“저 교수님이 저 사람한테 심부름을 시킨 거네?”
“교수님이랑 저 딸이랑 같이 심부름을 시킨 거지.”
“미친 거 아냐? 교수님은 그렇다 쳐도 저 딸은 뭔데 지 일을 남한테 시킨대?”
“그래놓고 교수는 딸 심부름 안 해준다고 역정 낸 거야? 대박.”
수군대는 목소리가 정확히 들리지 않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바뀐 것을 교수는 느낄 수 있었다.
그날 서울대학교 대나무숲에 짧은 동영상과 글이 올라왔고, 그 영상은 곧 수많은 학생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했다. ‘정신병에 걸린 학생’과 ‘학생을 종 부리듯 한 교수’에 대해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누가 옳고 그른가에 대한 문제 제기도 있었지만, 주요 논제는 ‘왜 한 사람이 저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가’에 대한 추론이었으며, ‘신성한 학문의 장에서 시대착오적인 대우가 웬 말인가’라며 성토하는 글도 다수의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게 되었다.
특히 이 사건에서 나름 중심 캐릭터인 강 주아, 라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쏟아져 나왔는데, 소수의 사람들에게나 알려져 있던 일이 크게 알려지며 학내 비리와 부패에 대해 학생들이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날 이후 그녀는 학교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게 되었고, 더불어 교수 역시 대학에 나오지 않게 되었다. 교수에 대한 학교 측의 제재는 즉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비록 교수의 언행에 대한 문제는 각자에 따라 해석이 다를 수 있으니, 이를 처벌의 빌미로 삼을 순 없었지만, 역시나 딸을 취업시킨 행정 비리 문제에 연루되어 있었기에 제재는 불가피할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대휘, 그도 이후로는 대학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