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608화 (608/956)

호령(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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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 내의 분위기 따위는 개의치 않고 도서관 밖으로 나온 단유는 내리쬐는 햇볕 아래서 다시금 길게 숨을 토해냈다. 긴장과 흥분으로 달궈졌던 몸을 정돈하기 위한 호흡이었지만, 그 끝은 어쩔 수 없는 한숨으로 마무리되었다.

“하아.”

처음부터 많은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고, 작은 실마리라도 잡아 막혀 있던 벽을 넘을 수 있는 계기를 잡길 희망하며 시작했던 작업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꽉 막혀 있던 벽의 틈에서 새어나오는 빛을 포착했고, 점점 그 빛이 커지는 것을 느끼며 단유는 욕심이 생겼다.

어쩌면, 이번엔 벽을 허물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조급하게 굴진 않았지만, 그래도 몇 년간 정체되어있던지라 저도 모르게 욕심이 난 것이리라. 집중하고 또 집중하며 파고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단유는 벽을 깼다.

“하아.”

그러나 다시 한숨. 벽을 깼더니 또 다른 벽이 있다. 아직 자신의 공부가 부족하기 때문이고, 여전히 먼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을 확인한 셈이다. 벽 하나를 깼으니 뿌듯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욕심을 냈던 만큼 실망도 있었다.

그나마 성과라면, 처음의 생각처럼 ‘진리’라는 건 단순히 복잡한 학문을 통달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쿼크, 렙톤, 힉스를 몰라도, 스핀 1½인 페르미온을 다루는 라리타-슈윙거 방정식이나 슈뢰딩거 방정식을 몰라도, 세상의 진리를 체감하고 체득하는 것은 가능하다.

예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언급했던 이야기들, 동양 고전 철학이나 서양 철학사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그런 진리의 파편들을 언급하고 있었다. 어쩌면 현대의 학문은 고전이 전하는 진리와 진실을 검증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현대의 학문이 새롭게 발견해낸 것들도, 사실은 지금껏 사람들이 무의식적로 체감하고 있던 것들을 의식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가시화시키는 것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모든 답을 안다. 다만 그 답을 의식하지 못할 뿐.

****

“아, 맞다.”

“왜 그러니?”

“이것도 줘야 하는데.”

주아는 핸드백에서 USB카드를 꺼내 들었다.

“윤 주무관한테 빌린 건데 돌려주는 걸 깜박하고 들고 왔네. 아빠, 잠시만.”

“정신머리하곤. 얼른 돌려주고 와.”

“응. 잠깐만 기다려, 아빠.”

주아는 핸드백을 자리에 두고 USB카드만 쥔 채로 연구실을 뛰어나왔다.

“저기요!”

불러봤지만 대답이 없어, 복도를 총총 뛰어 엘리베이터로 갔더니 이미 문이 닫힌 후였다.

“에이, 씨.”

혀를 짧게 차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채로 기다렸다.

“내려갔어?”

강교수가 나와 엘리베이터 앞에 선 딸을 향해 물었다.

“응. 되게 성격 급한 사람인가봐. 불러도 대답도 안 하고.”

“기다려봐라, 아빠가 전화해볼게.”

“응, 어? 엘리베이터 올라온다. 아빠, 일단 내가 1층으로 갈 테니까 그 사람 1층 로비로 오라 그래.”

“그래.”

핸드폰을 꺼내 주소록을 훑으며 짧게 대답하는 강교수였다. 주아는 하이힐 앞코를 까닥거리며 엘리베이터 지시등을 바라보았다.

****

조금 이른 시간이긴 하지만, 오늘은 더 자료실에 머무를 필요가 없을 것 같아 단유는 차를 주차 시켜 놓은 자연대 쪽으로 향했다. 그러다 가려는 방향에서 마주 오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안녕하세요.”

“어, 그래.”

아직까지는 데면데면한 인사 정도나 나눌 뿐이지만, 그래도 같은 학과의 선배이고 방학 기간에도 근방에서 여러 번 얼굴을 마주치다 보니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식당 가니?”

“아뇨, 이제 집에 가려고요.”

“아, 그래.”

보통 해가 진 뒤에도 연구실에 남을 일이 많던 대휘는 가끔 연구실 동료들과 함께 먹을 야식을 사기 위해 나올 일이 많았다. 그리고 그즈음에 집으로 돌아가는 단유와 마주치는 일이 잦아서 ‘여간 열심히 하는 게 아니구나’ 라고 생각하곤 했었다. 그러나 오며 가며 인사만 나누는 사이에 더 자세한 이야기를 물을 생각도 없었고, 궁금하지도 않았던 대휘는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지나가려 했다.

“수고해.”

“네.”

단유 역시 간결하게 대답하고 계속 걸음을 이어가려 했다. 그때 대휘의 핸드폰이 울리고 대휘는 전화를 꺼내 들다 옆구리에 끼고 있던 봉투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마침 발 앞에 떨어진 터라 단유가 허리를 숙여 봉투를 주워들었다.

“여보세요? 네?”

봉투를 대휘에게 건네던 단유는 와락 일그러진 대휘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예,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후, 핸드폰 액정을 바라보며 대휘는 작게 욕을 중얼거렸다.

“씨발, 내가 무슨 종이야?”

목소리는 작았지만, 마주 섰던 터라 단유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물론 주제넘게 무슨 일인지 물어볼 생각은 하지 않았고, 그저 들고 있던 봉투를 받아들 때까지 기다렸다. 신경질적으로 봉투를 낚아채던 대휘는, 아차 하는 얼굴로 단유를 바라보며 사과했다.

“아, 미안. 너한테 화낸 거 아니다.”

“네.”

“하아, 정말···. 너도 나중에 대학원 갈 생각이면, 지도교수 신중하게 골라라. 지도교수가 엉망이면 아예 전공을 바꿔. 그게 속 편하게 사는 길이다.”

영문을 모르니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지만, 대충 상황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낄 사안이 아니란 것도 알았다. 빨리 자리를 피해 주는 게 더 좋을 거라 생각해 인사를 하고 지나가려는데 대휘가 먼저 돌아서서 왔던 길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대휘를 기다리던 사람은 참을성이 많이 부족한 이였다.

“이봐요! 왜 사람이 부르는데 못 들은 척하고 가는 거예요?”

성이 났다는 걸 온몸으로 표현하며 성큼성큼 걸어오는 여자의 모습에 어이가 없는 일을 당한 사람마냥 입을 벌리고 쳐다보는 대휘였다.

“절 불렀다고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되묻는 대휘였으나 반쯤 멘탈이 나간 상황으로 보였다. 물론 주아는 그런 걸 신경 쓰는 타입이 아니다.

“못 들었어요?”

“네, 못 들었는데요?”

대휘의 대답에 주아는 감히 상상도 못 했던 욕을 들었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하, 참 나. 기가 막혀서. 내가 가서 엘리베이터 내려가는 거 확인했거든요? 제가 불렀을 때 분명히 엘리베이터 문 닫히기 전이었던 거 알거든요?”

“문 닫히고 내려갈 때도 안 들렸습니다.”

“아, 웃기는 사람이네. 그렇게 오리발 내미면 다예요?”

주아의 억지에 대휘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하지만 끝끝내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대화를 계속 이어가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왜 부르셨는데요?”

“···됐고, 자요.”

불쑥 내미는 손에 USB카드가 들려 있었다.

“이거 저희 사무실에 윤 주무관님께 전해줘요.”

“뭔데요, 이게?”

“그건 알 거 없고요. 그냥 주면 알 거예요. 왜 이렇게 사람이 말이 많아요? 그냥 시키면 해요.”

그 말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던 끈이 뚝 끊어졌다.

“당신이 뭔데 시켜요?”

“···네? 지금 뭐라고 했어요?”

“제가 당신이 시킨다고 해야 합니까?”

대휘의 격앙된 어조에 주아는 손가락을 치켜든 채로 금붕어에 빙의된 듯 입을 뻐끔거리며 대휘를 바라보았다. 입술에 바른 새빨간 립스틱보다 더 붉어진 얼굴이 그녀의 심정을 대변했다.

‘아.’

그 모습을 보니 통쾌함보다 후회가 밀려든 대휘는 더 몰아붙이지 못하고 주아와 대치상태를 이어나갔다. 머릿속에는 앞으로 석사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걱정과 더러워서 못해 먹겠다는 치기가 충돌하는 통에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그때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등장한 인물은 강교수였다.

“자네, 그게 무슨 말버릇인가?”

정리가 아닌 처리를 하기 위해서일까? 대휘는 순식간에 핼쓱해진 얼굴로 교수를 향해 변명을 털어놓으려 했다. 그러나 교수는 그런 변명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아니, 그럴 생각을 가질 틈도 주지 않는 딸이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빠···.”

주아가 자신의 아버지를 향해 돌아서는데, 울먹거리는 듯한 목소리에 교수가 놀란 얼굴로 딸을 감싼다.

“괜찮니?”

대답 대신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모양새에 대휘는, 또 한번 어이가 털리는 기분을 느꼈다. 도대체 조금 전 상황에서 어떻게 저런 반응이 나온단 말인가? 오히려 억울한 사람은 자신 아닌가? 그러나 그런 항변을 받아줄 교수가 아니었다.

“자네, 제정신인가? 왜 애꿎은 사람한테 소리를 질러!”

“아니, 그게 아니고요.”

“아니면! 내 딸이 여자라고 그런 건가? 만만해서?”

“아닙니다.”

“그럼 아무한테나 윽박지르고 그러나? 내 앞에서만 겸손한 척 위선 떨다가 밖에서는 아무한테나 소리 지르고 그러냐고!”

“······.”

“여기가 자네 집 안방이야? 어디서 함부로 소리 지르고 그러는 거야! 설마··· 그 심부름 때문에 그러는 거야? 그 봉투 하나 갖다 주라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이 난동을 부린 거야!”

엄밀히 말하면, 심부름시킨 건 봉투 하나만이 아니고, 위압적으로 굴었던 건 오히려 교수와 그의 딸이 아니던가. 소리를 질러도 대휘보다 주아가 먼저 언성을 높였고,

‘만만한 건 당신 딸이 아니라 나잖아!’

머리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아니, 교수님. 솔직히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제가 따님 심부름꾼도 아니고···.”

“야, 조대휘!”

노교수의 쇳물 끊는 듯한 노성이 면전에서 터져 나왔다.

“누구 앞에서 그런 말버릇이야? 위아래도 없어!”

교수의 목소리가 올라가자 대휘의 얼굴이 검게 변했다.

“감히 교수 말에 따박따박 말대꾸나 하는 그런 심성으로 내 제자를 하겠다고 있었던 거냐!”

“아빠, 아빠. 참아. 이렇다 혈압 때문에 쓰러지겠다. 응?”

“내가 이런 녀석을 제자라고 두고 있었다니···.”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잖아?”

“너 같은 놈이 말이야, 어디 가서 내 제자라고 떠들고 다닐까봐 겁이 나서라도 이대로 못 지나가겠네. 제자 교육 잘못시켰다는 소리라도 들으면 내 체면이 어떻게 되겠어? 위아래도 모르는 자식이 말이야!”

목이 붉어지도록 노성을 지르니 드문드문 지나가던 이들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기 시작했고, 자연대 건물 안에 있던 인물들도 바깥의 소란에 관심을 기울이며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노교수의 분노를 자아내게 만든 이. 어떤 이유로든 평탄한 석사 생활은 물 건너간 셈이다.

****

대학교수. 상아탑이라 불리는 대학에서도 지성의 꼭지점을 이루는 사람. 교수라는 직함을 달기 위해 지난 세월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까? 셀 수 없이 많은 책과 논문을 쌓아놓고 씨름했을 것이며, 얼마나 많은 사람과 부딪히며 자신의 업적을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을까?

그런 사람이니 뭇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난 합리적 이성으로 세계를 읽고, 논리적인 언어로 사람을 가르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눈앞의 교수에게서는 이성이나 논리는 없었다.

석사? 박사? 이런 지도교수 아래서는 힘들기도 하거니와, 함께 하고 싶지도 않았다. 무슨 부귀 영화를 누리겠다고 그 고생을 했던가.

“대휘야.”

대휘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옆을 돌아보았다. 저녁 약속을 잡았던 친구가 어느새 여기까지 와서 자신의 수모를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

“너···여태 이런 꼴 당하고 있었던 거냐?”

“······.”

“야, 이건 아니잖아. 이런 대접 받으려고 대학 다닌 거 아니잖아?”

“···미안하다. 이런 꼴 보게 해서.”

“그게 지금 할 소리는 아니지.”

친구는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리고 교수를 노려보며 팔을 걷어붙였다. 말려야 하나?

“듣자 듣자 하니까, 아주 어이가 없네요? 뭐? 위아래? 나 참.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위아래를 찾고 있어요? 당신이 교수면 답니까? 교수면 사람 무시하고 욕하고 해도 돼요?”

교수는 불청객의 등장에 놀란 얼굴을 하고 말을 더듬었다.

“뭐, 뭐야?”

“난 당신 제자도 아니고 그러니까 내 마음대로 말해도 되죠? 당신이 이 친구만 했을 때, 그러니까 당신이 학생이었을 때는 교수가 막말해도 그냥 참고 지냈나 본데요, 아저씨. 아니, 영감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아무튼 이러면 안 돼요. 응? 이러면 안 된다고. 막말로 이러다 당신 칼 맞을 수도 있어요.”

교수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는 젊은 친구의 말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교수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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