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령(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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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는 반복 훈련을 해서 나쁜 습관을 고칠 수 있다지만, 사람은?
사람도 꾸준하게 교정과 반복을 이어나가면 나쁜 습관을 고칠 뿐 아니라, 바른 습관을 만들 수도 있다. 한때 이런 내용의 자기계발서가 유행하기도 했으니, 그 유효성은 인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유효성과 달리 실효성이 있는지 묻는다면? 과연 그 자기계발서를 읽고 좋은 습관, 바른 습관을 만든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물며 고작(?) 뺨 몇 대 맞았다고 사람이 바뀔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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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휘는 동료들과 함께 ‘다광자 양자얽힘 상태 생성’에 대해 연구중이었다. 본래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선배의 논문 주제였는데, 대휘는 보조 협력으로 논문 저자에 이름을 올릴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었다. 개인 논문 준비도 준비지만 임팩트 팩터(impact factor)에서 5점 이상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주목받는 논문에 참여할 수 있다는 건 흔치 않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현석의 말에 함께 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다른 선배가 놀란 얼굴로 돌아보며 물었다.
“너무 이른 거 아니에요?”
“금요일이잖아? 오늘 하루 쯤은 일찍 가자. 어차피 내일도 나와야 하는데.”
“어, 이제 보니 형수님이랑 데이트 있으시구나.”
“야, 그런 건 알아도 모른 척해라. 그리고 니네는 불금인데 남자들끼리 이렇게 있고 싶냐?”
“저희가 뭐라 했나요? 저희도 좋죠.”
두 선배가 키득거리는 동안 대휘는 컴퓨터로 일과 보고서를 작성해 출력했다.
“아, 그리고 상준이 형이 데이터 취합해서 이메일로 보냈다는데 확인했어?”
현석의 질문에 대휘가 빠르게 대답했다.
“아까 보낸 것만 확인했는데, 시간이 없어서 내용은 아직 못 봤어요. 지금 확인해 볼까요?”
“아니다. 당장 급한 것도 아닌데.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데이터 분석하는 건 내일 하도록 하자.”
“네. 그럼 전 위에 올라가서 이거 드리고 올게요. 아, 7월 랩미팅 일정도 말씀드려야 하는데, 이 일정으로 보고해도 되나요?”
“7월 21일이지?”
“네.”
“그래, 그렇게 보고하고 공지문도 이메일로 돌려놔.”
“네, 형.”
“그래, 그럼 수고 좀 해.”
대휘는 선배들에게 인사를 하고 연구실을 나왔다. 그리고 위층에 있을 교수님께 오늘 일과 보고를 하기 위해 계단을 올라갔다.
위층에 올라가 적막한 복도를 걸어가자니 뒤에서 엘리베이터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더니 교수님의 자제분이었다.
“안녕하세요.”
듣기로는 대외협력처에 들어갔다는데, 사실 말이 없을 수 없다. 연초도 아니고 방학 기간에 뜬금없이 취업된 교직원인데다, 알고 보니 자대학 전임교수의 딸? 쉬쉬거리긴 해도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눈치주는 사람은 뒤에서 눈치 주기 바빴다. 그런데 또 이 여자가 어찌나 뻔뻔한지 그런 눈치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고개 들고 다닌다고 한다. 자신이 영어를 잘한다는데, 사실 그 정도 영어 못하는 사람이 어딨느냐고 사람들이 뒷담화를 하는 형편이다.
“네, 안녕하세요. 아, 우리 아빠 있죠?”
“아마도요.”
대휘의 대답에 고개를 갸웃거린 여성은 이내 또각또각 걸어 연구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빠 있었네?”
“주아 왔구나. 그럼 여기 있지, 어디 있었겠어?”
“아니, 저 사람이 아빠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고 해서 말이야.”
교수의 시선이 문가에서 꾸벅 고개 숙이는 대휘에게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널 여기서 보기로 했는데 어딜 가겠어. 밥은 먹었고?”
“아까 먹었어.”
“미안하네. 같이 먹고 싶었는데, 아빠도 점심 약속이 있었거든.”
“괜찮아. 내가 무슨 어린앤가? 맨날 아빠랑만 밥 먹게.”
“그래? 나는 맨날 우리 딸이랑만 밥 먹고 싶은데?”
“치, 퇴근 안 해?”
“이제 해야지. 이거 정리만 하면 끝난다.”
“아빠, 좀 쉬엄쉬엄 해. 그러다 병 나.”
“아이구, 우리 딸 걱정도 많다.”
부녀가 아주 알콩달콩 정이 넘친다.
그 모 교수가 자기 지도 교수라는 점에 실망했다? 대휘는 그런 거로 실망하지 않았다. 아니, 이미 지도 교수에게 실망할 건덕지도 남지 않았다.
사실 지도 교수는 절대군주다. 이곳은 절대군주정이고 절대군주의 말에 토도 달 수 없는 세계이다. 그의 말은 법이며, 그의 기분에 따라 연구실 분위기가 결정된다. 학생들, 연구원들은 딸랑이가 되든지, 아니면 아예 눈에 띄지 않든지 해야 한다.
만약 지도 교수가 제자 양성에 열성적이며, 하나라도 더 가르치기 위해 열정적인 분이라면, 그 팀은 축복받은 팀이다. 그러나 모든 군주가 현명하지 못하고 어질지 못하듯, 어떤 지도 교수는 자신의 권력을 칼처럼 휘두르며 폭정으로 제자들을 짓눌렀다.
대휘에게 강교수는 폭군이었다.
“교수님.”
“뭔가?”
“금일 일과 보고서입니다.”
“거기 두게. 그런데 오늘은 빠르군?”
“네. 현석이 형이 오늘은 여기까지 해도 될 거라고 해서요.”
“그래?”
보아하니 일찍 랩을 닫는 게 불만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현재 프로젝트가 진행 중인 랩의 실무자인 현석이 결정한 것이기에 교수님은 그 결정을 번복할 수 없었다. 다만 나중에 현석을 따로 불러 다른 사유로 갈굴 것이다. 하지만 현석도 경험치가 쌓여 이 정도는 간단하게 무마할 자신이 있으리라.
“그리고 7월에 랩 미팅을 갖기로 했습니다. 이번에는 저희 랩에서 모이기로 했고, 시간은 7월 21일 오후 2시로 잡았습니다.”
“21일이면···.”
“수요일입니다.”
“그래, 그렇게 해.”
“네, 교수님.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 잠시만.”
“네?”
교수님은 책상 위에 있던 노란 봉투를 집어 들었다.
“이거 좀 우체국에 보내고 가게.”
“아, 네.”
대휘가 봉투를 받아들고 다시 허리를 숙일 때였다.
“아, 참. 저기요. 우체국 가시는 거면, 그 옆에 대외협력처 있잖아요? 거기에 이거 좀 가져다 주실래요?”
주아는 핸드백에서 열쇠를 하나 꺼냈다.
“이게 뭔데요?”
“···보면 몰라요? 열쇠잖아요?”
누가 그걸 모르나. 그런데 그 열쇠를 왜 자신에게 주냐는 물음이었는데, 주아는 오히려 역정을 냈다.
“대외 협력처에 있는 캐비닛 열쇠에요. 모르고 들고 나온건데, 거기 좀 주고 와요.”
대휘는 여자의 태도에 얼이 나가는 기분이었다. 사실 대휘는 성격이 꽤 내성적인 편이다. 그래서 선배들이 궂은일 시키는 것도 마다않고 하는 편이었고, 지도 교수가 가끔 말도 안되는 이유로 폭언을 할 때도 묵묵히 듣는 편이었다. 물론 성격 이전에, 사회적 관계도 상에서 대휘가 대들 수 없는 대상들이기에 감내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눈앞의 여성은 자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지 않은가? 굳이 있다면 지도 교수의 자제라는 점이지만, 그게 대휘가 심부름꾼으로 전락할 이유는 못 된다. 상냥하게 부탁하는 것도 아니고, 대뜸 심부름을 시키는 저 권위적인 태도는 아무리 얌전한 고양이라도 발톱을 드러내게 만들 뿐이다.
그러나.
“······.”
절대군주. 그의 시선 아래에서는 호랑이도 머리를 땅에 박고 기어야한다. 열쇠를 받아 챙기는 대휘를 보며 교수는 짧게 혀를 찼다.
뒤돌아서는 대휘 뒤로 ‘쟤 왜 저래?’라는 말과 ‘신경 쓰지 마라. 모자란 놈이다’ 따위의 말이 들리는데도 못 들은 척하며 교수실을 나왔다. 열쇠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여보세요? 아, 나야. 별일 아니고, 오늘 저녁에 시간 되면 술이나 한잔하자고. 응? 당연히 스트레스받지. 스트레스 안 받고 사는 날이 있겠냐? 말도 마라, 내가 오늘은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시다 죽을란다. 오늘은 진짜 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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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의 떠올랐던 아이디어의 끝을 보기 위해 단유는 미친 듯이 노트를 메워 나갔다. 가끔 열람실에 자리가 차서 자료실로 올라와 공부하는 사람들도 없진 않다. 그러나 단유처럼 미친 듯이 펜을 놀려 노트를 새까맣게 채워나가는 학생은 보기 드물다. 책장을 넘기던 사람도, 서고를 지나며 책을 고르던 사람도, 형광펜으로 노트를 채우던 학생들도 단유를 주시했다. 하지만 단유는 그런 시선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어떤 때는 디락 방정식(Dirac equation)을 이용해 양자장 내의 파동을 계산하다가, 벡터 연속 방정식을 응용하여 장내 질량 보존이 유의미한가를 검증하고, 밀도 범함수로 장내 파동이 아닌 밀도 모양 p(r)을 계산하기에 이르렀다.
단순한 아이디어, 작용-반작용과 같은 균질의 역학적 상호작용이 미립자적 세계에서 어디까지 적용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상호작용에 의한 생성과 해체, 조합과 분해를 이론적으로 규명해보는 것이다.
며칠 동안은 차분하게 아이디어를 풀어나갔다. 다행히 도서관에는 참조할 만한 책과 논문들이 있었고, 해외 저널과 논문도 검색만 하면 찾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때로는 단유가 이해하기 힘든 방정식도 있었고, 그래서 방정식을 이해하기 위해 여러 자료를 읽느라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새로운 아이디어의 편린을 얻고, 그 편린들을 하나 하나 기록하고 모으다 보니 어느 순간 생각지도 못했던 가설을 하나 얻었다.
그 뒤로 그 가설을 검증하기 위한 시간이었다. 도서관 자료실이 문을 열면 자리를 잡고 앉아 책과 노트를 오가며 이론을 검증해나갔다. 그러다 오늘, 단유는 거의 마지막에 다다랐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 그 느낌마저 이제 잊었다. 거의 몰아(沒我)의 경지에 이르러, 지금은 손과 머리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도 잊을 정도였다.
누군가가 옆에서 말려야 하나 싶을 정도로 단유는 몰입했다. 누군가가 노트를 한 장 넘겨줘야 하나 싶을 정도로 노트가 새까맣게 변했다. 공부를 하는 척하지만, 실은 그저 낙서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노트를 끄적대는 소음이 다른 주위 소음을 압도할 정도가 되었고, 누군가는 헛기침으로 주의를 끌려 했으나, 단유의 시선은 노트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리고 마침내 노트 위에 공백 하나 보이지 않는다 싶을 때, 펜이 멈췄다.
그 순간, 도서관의 모든 사람들은 시간이 정지라도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도서관이라는 공간 내에 모든 사물과 시간, 소리와 빛이 멈춘 느낌이었다. 그들 모두의 시선은 단유의 펜에 머물러 있었고, 펜이 다시 움직이기 전에는 그 무엇도 움직일 수 없을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펜을, 단유를 바라보던 중 펜을 잡고 있던 손가락에 힘이 풀리며 펜이 손가락을 벗어나기 시작하는 걸 보게 되었다.
엄지 손가락 끝에 살짝 걸린 펜은 빙글 돌며 쓰러지기 시작했고, 종이와 맞닿아 있던 펜촉이 슬쩍 떠올랐다. 펜은 무거운 공기를 밀어내며 천천히 쓰러지더니 마침내 펜이 노트 위에 모로 눕는 순간, 쿵 하고 소리가 들린 착각을 받았다.
―꿀꺽.
누군가가 침을 삼킨 걸까? 아니면 자신이 침을 삼킨 걸까? 긴장했던 목울대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순간, 몰아치듯 소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도서관 바깥에서 들리는 소음과, 자료실 천장에서 에어컨이 뿜어내는 바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목표를 잃은 눈동자가 방황하며 주위를 탐색케 하였고, 자신과 비슷한 감정을 담은 눈동자들과 마주치며 황당함을 토로했다.
‘너도?’
‘너도?’
그러나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고, 입을 여는 순간 조금 전의 장면에서 느꼈던 정체 모를 느낌이 흩어질 것 같았다. 언젠가는, 아니 고작 몇 분만 지나면 방금 자신이 겪었던 환상 같은 순간, 현실 같지 않은 감각, 두 번 다시 경험하기 힘들 것만 같은 긴장감을 떠벌리느라 바쁘겠지만, 지금 당장은 그 여운을 잊고 싶지 않았고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의 여운은 한 사람의 움직임으로 인해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후우.”
깊이 들이셨던 숨을 길게 내뱉는 단유,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른한 오후 햇살이 창문으로 들어와, 책상 위에 한 팔을 걸치고, 무수한 먼지들이 노란 햇볕에 반짝이며 주위를 떠돌아다닌다. 자료실 특유의 묵은 책 냄새가 흘러와 후각을 자극하고, 천장에서부터 내려온 서늘한 바람이 살갗에 맞닿자 소름이 살짝 돋는다.
의자가 끌리는 소음이 들리고 책상이 삐걱대며 철제 프레임이 우는 소리가 난다. 책과 노트가 책상에서 치워지고, 한 사람이 유유히 자료실을 빠져나가자, 그 순간 도서관은 현실로 복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