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605화 (605/956)

헤드샷(2)

-------------- 605/952 --------------

이보다 황당한 경우가 없다. 감히 누굴 때려?

강주아는 미국 동부의 명문 대학을 졸업한 수재(秀才), 라는 평가를 받길 원하는 여자였다. 비록 명문 대학이라는 곳도 겨우 들어간 데다 졸업도 겨우 하긴 했지만, 다른 평범한(?) 사람들은 해낼 수 없는 간판을 따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다만 그 간판이 ‘취직’으로 이어지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다. 여러 경로를 통해 취업을 하려 했지만, 인턴십 제도가 활성화되었다는 미국임에도 1차 면접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자리를 잡을 수 없었다.

물론 그녀가 취업에 유리한 전공을 이수하지 않았다는 점도 영향이 있을 테고, 관련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도 소홀했던 면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문대 간판이 취업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건 개인적으로 억울할 정도였다.

‘어떻게 들어간 학교며, 어떻게 졸업한 학교인데!’

그렇다고 동네에서 파트타임이나 하며 시간을 보내는 건 자존심이 상했다. 피자집에서 허름한 앞치마를 매고 아르바이트하는 주위 학생들은 애초에 그런 직업이 어울리는 애들이나 하는 거였다. 게다가 명문대 학생이라는 자존심에 일주일은 씻지 않은 것 같은 백인 뚱땡이에게 웃음을 파는 짓이나 눈깔을 번들거리며 저속한 말이나 늘어놓는 흑인에게 굽신거리는 짓은 하기가 싫었다.

굳이 그런 걸 하지 않더라도 집에서 보내주는 용돈은 넉넉했고, 오히려 그런 일을 하기보단 번듯한 직장을 잡는 게 진정한 효도라고 생각했다.

사실 강주아는 자신이 있었다. 왜냐하면 흔히들 말하길 미국은 스템(STEM)전공자들에게는 상당한 특혜를 주는 나라라고 했기 때문이다. 주아는 그중에서 S, 과학(Science)계열 전공을 이수했다.

그러나 인터뷰는커녕 1차 면접 기회 자체가 없었다. 어쩌다 인터뷰를 해도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낙방하기 일쑤였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결국 집에서 귀국을 종용하기에 이르렀다. 차라리 국내에 취업하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에 주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한국에서는 몇 안 되는 미 명문대 간판을 단 유학생 출신이니 귀하게 써주지 않겠냐는 심산이었다.

그 생각이 틀렸음을 알게 되는 건 별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명문대 출신 학생이 자기 외에 얼마나 더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간판이 국내 회사에 먹히지 않는다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자유로운 분위기인 미국에서 공부하셨는데, 저희 회사의 조직문화에 잘 어울릴 수 있겠습니까?”

면접장에서 면접관이 주아에게 한 질문이었다. 실상 질문의 형식을 하고 있지만, 누가 들어도 명백한 거절 사유였다.

“회식이나 야근을 싫어한다던데 강주아씨는 그렇진 않죠?”

대답이 요구하지 않는 질문이었다. ‘니가 무슨 말을 하든, 우린 정답을 알고 있어’라는 의미가 담겨있지 않은가?

주아는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하지만 주아에겐 믿는 구석이 있었다. 바로 아버지. 귀여운 늦둥이 외동딸을 사랑하는 아버지는 어떤 상황에서도 주아만을 생각했고, 주아를 위해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능력이 닿는 한까지 해 주었다.

“우리 학교에서 일해라. 요즘은 행정직도 나쁘지 않다.”

무려 서울대다. 거기서 괜찮은 신랑감을 만나면 더 좋다. 아버지는 주아의 미래까지 생각해서 일자리를 알아봐 주었다.

몇백 대 일이라는 경쟁률은 의미가 없었다. 다행히 학벌과 토익 점수 등이 기본 서류를 꾸미기에 적당했기에 문제가 없었다. 학교 관계자를 사석에서 만나 웃음 한 번 짓고 적당히 이야기를 나누었더니 취업이 됐다! (형식상 면접도 진행됐지만, 결과는 나와 있었다!)

‘역시 아버지 뿐이야!’

취업 후, 같이 일하는 이들은 ‘강 교수님 자제분’이라는 타이틀에 고개를 끄덕였다. 미 명문대 출신이라는 간판도 ‘지성’과 ‘미모’를 한 몸에 갖춘, 이라는 수식어를 꾸미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것이 강주아, 그녀가 원하는 그림이었고, 마침내 화판에서 붓을 뗄 수 있었다.

“화학과에 경진범이라는 친구가 있다. 젊은 친군데 꽤 괜찮아.”

국제협력 업무 파트에 들어간 주아는 한 달쯤 지난 뒤, 아버지로부터 소개를 받았다.

미국에서야 워낙에 되는 일이 없어 그랬다지만, 한국에 돌아오고 난 뒤 주아의 자신감은 넘치다 못해 흐를 정도였다. 남자? 그가 누구든 자신의 외모와 실력(?)으로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젊은 나이에 교수가 되는 업적을 세우기도 한 데다, 외모도 썩 나쁜 편은 아니었고 매너도 좋았다. 주아는 그가 자신의 짝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판단했다.

몇 번의 만남으로 관계를 진전시키는 와중에, 주아는 젊은 교수로부터 부탁을 받았다.

“아, 제가 좀 도와드릴게요. 네? 괜찮아요. 시간 남는걸요. 교수님 연구실에 가져다 놓으면 될까요?”

사실 부탁이라기보단 주아가 먼저 나서서 선심을 베풀겠다는 뜻을 보인 셈이었으나, 이런 식으로 자주 만남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눠야 자신의 친절과 마음 씀씀이에 매력을 느낄 거라고 계산했기에 스스럼없이 나섰다.

그리고.

세상에 이런 황당한 경우가 있나 싶은 상황에 직면한 주아는 뺨을 감싸 쥔 채로 부들부들 떨었다. 잠깐 사이 느꼈던 낯선 남자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지고 대신 자신을 때렸다는 행위에 대한 분노만 자리 잡았다.

“야!”

주아가 빼액, 소리를 지르자 텅 빈 복도가 울릴 정도로 높은 고주파 음역의 파장이 단유를 스치고 지나갔다.

“네?”

단유가 눈을 껌뻑이며 대답하자, 주아는 벌떡 일어나 손가락질하며 욕을 한 사발 퍼부으려 했다. 그러나 주아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 자기가 앉아 있던 책상 앞에까지 다가와 뺨을 때렸던 남자가 어느새 교수실 입구에서 들고 왔던 책을 든 채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바로 조금 전, 자신이 교수실 문을 열고 들어와 빈 의자에 앉으며 바라봤던 전면 풍경 속의 그 모습 그대로.

‘뭐, 뭐야?’

힘껏 치켜들었던 손가락은 힘이 빠져 점점 내려가고, 논리적인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 눈동자도 갈 곳을 잃어 정처 없이 이곳저곳을 누빌 뿐이었다.

‘여기 어디? 무슨 일이?’

단유는 문가에서 가만히 서 있다가 물었다.

“이 책, 어디에 두면 되나요?”

“······.”

“저기요?”

주아는 볼을 만졌다. 화끈거리는 느낌에 만져보니 꼭 맞은 것처럼 통증이 느껴지는 것도 같다. 그런데 맞았는지 맞지 않았는지 헷갈린다.

“저기요?”

안 그래도 머릿속은 복잡하고 심장은 미친년 널뛰기하는 마냥 날뛰어서 신경 사나운 마당에 ‘저 새끼’는 분위기 파악도 못 하고 짜증나게 만든다.

“거기 아무 데나 두면 되잖아!”

‘사람이 눈치가 없어’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데, ‘저 새끼’의 동태가 심상찮다. 턱턱 걸어와 교수실 가운데 있는 테이블에 책을 던지듯 내려놓더니 자신을 째려본다.

‘···응?’

사내가 뚜벅뚜벅 걸어오기 시작하자, 다시 심장이 두방망이질하듯 뛰기 시작했다. 숨이 점점 가빠질 무렵, 사내는 주아의 앞에 마주 섰다. 그리고 미처 마음의 준비를 하기도 전에 ‘예상한 바와 같이’ 사내는 오른손을 사선으로 밀어 올리며 주아의 뺨을 사정없이 갈겼다.

“아악!”

자리에서 엎어지며 쓰러진 주아가 뺨을 감싼 채로 고개를 돌려 올려다보자, 사내는 감정을 알아보기 힘든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보자 보자 하니까, 사람이 왜 그럽니까? 도움을 청한 상대에게 말도 함부로 하고 말입니다.”

“···이 자식이. 야! 내가 누군 줄 알아!”

“제가 그걸 어떻게 압니까?”

“너 누구야! 어디 학생이야!”

“···제가 누군지도 모르시는 분이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하면 안 되죠.”

“너 몇 살이야! 응? 여기 학생이야? 여기 학생이 나한테 함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해?”

“존중받고 싶으면 먼저 존중할 줄 알아야 하는 법이란 거 모릅니까?”

“뭐야? 이 미친 새끼가···.”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오른 주아는 찬 바닥을 밀치고 일어나 손을 휘둘렀다.

―부웅.

정말 소리가 날 정도로 세차게 주먹을 휘둘렀건만, 주아의 주먹은 공중을 헛돌고는 돌아왔다. 자신이 휘두른 힘에 밀려 비틀거릴 정도로. 하지만 한 번의 공격이 실패했다고 포기할 주아가 아니었다. 이미 이성을 잃은 주아가 다시 반대쪽 손을 휘두르려는 찰나였다.

‘······.’

조금 전까지 책상 옆에 서 있던 사내가 보이지 않았다. 그새 어디로 숨었나 싶어 눈동자를 돌리는 순간, 주아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느낌을 받았다.

문가에서, 아까 전과 같이, 양손으로 책을 든 채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 그 눈이 마치 ‘혼자서 뭐하는 겁니까?’라고 묻는 눈이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사내가 입을 열었다.

“이 책 어디에 두면 되죠?”

주아는 입을 반쯤 벌리고 넋이 나간 사람처럼 사내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살면서 귀신이나 이런 건 전혀 믿지 않았건만, 해가 너무 짱짱해서 더울 정도인 대낮에 귀신과 마주하고 말았다.

“너, 누구야?”

“네? 저기 이 책 여기 두면 되나요?”

“누구냐고!”

주아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사내가 한숨을 쉬며 책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몇 번을 본 장면이라 이제는 그다음 장면이 절로 떠오른다. 그리고 그 장면 속의 그 모습을 그대로 재연이라도 하듯,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왔다. 주아는 뒷걸음질 치며 뒤로 물러섰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새끼야!”

사내의 걸음은 거침이 없었고, 이번에는 마음의 준비까지 했건만, 방어 동작을 취하기도 전에 날아든 따귀에 주아는 새된 비명을 지르며 나가 떨어졌다. 어쩐지 반복을 할수록 세기가 강해진다는 느낌도 받았다. 바닥에서 몸을 웅크리고 사내를 올려다보는 주아의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깃들었다. 자존심? 이미 이 상황에서 그런 건 의미가 없었다.

“사람이 왜 그렇게 예의가 없어요?”

들었던 말이다.

“존중받고 싶으면 상대를 존중할 줄도 알아야죠. 쇼펜하우어 몰라요?”

모른다. 모르는데 안다. 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인가. 주아는 사내의 정체보다 이어질 상황이 두려웠다.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고 덜덜 떨리는 입술을 억지로 움직여 물었다.

“귀, 귀신이세요?”

그러자 사내가 한 걸음 다가왔다. 작은 움직임이지만 주아는 놀란 마음에 눈을 꽉 감았다. 그리고 외쳤다.

“죄송해요!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눈물이 나왔다. 눈물이 흐르며 검은 마스카라 자국이 볼에 깊게 그어졌지만 주아는 그걸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잘못 했어요, 잘못 했어요.”

몸을 웅크리고 두 손을 싹싹 비는 그녀의 모습을 단유는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 괜찮으세요?”

몇 번의 부름에 주아는 겨우 실눈을 떴다. 설마, 하며 바라보니 역시나 사내가 저 멀리 책을 들고 서 있었다.

“어디 불편하신 데라도 있으세요?”

저게 ‘어디 아프신 데라도 있으신가요’라는 말을 돌려 하는 거라는 걸 주아는 한참 뒤에야 알아들었다. 회색 계열의 세미 정장이 연구실 바닥을 뒹굴며 먼지로 뒤덮여 있었고,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는 자신을 보며 사내는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사내는 멀찍이서 가만히 지켜보더니 테이블 위에 책을 올려놓고는 ‘수고하세요’라고 어울리지 않는 말을 던지고는 연구실을 빠져나갔다. 혼자 연구실에 남게 된 주아는 그 뒤에도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바닥의 한기에 오슬오슬해질 무렵에야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몸이 말이 아니었다. 어깨부터 발끝까지 몸이 쑤시고 얼얼했다. 비틀거리며 벽에 걸린 거울로 다가간 주아는 그제야 자신의 몰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산발이 된 머리와 눈물과 마스카라와 색조 화장이 엉망으로 뒤섞인 얼굴. 저도 모르게 침까지 흘렸는지 입가에 하얗게 말라붙은 자국도 보였다. 옷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주아는 조금 전 자신이 겪었던 상황이 진짜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거울을 보니 볼을 빨갛게 부어 있었다. 통증도 확실히 느껴졌다. 맞은 게 분명했다. 맞은 게 분명한데 맞았다고 단언할 수가 없었다. 감각과 이성에 혼란이 왔다.

그런데 사람이란 게 참 신기하다는 것이, 그 와중에도 주아는 혹시라도 경 교수가 방에 돌아와 자신을 발견하게 될까 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런 꼴을 보면 자신에게 호감이 있었다고 해도 정이 떨어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우선 연구실을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리다가 우연히 천장 구석에 CCTV가 깜빡이고 있음을 발견했다. 주아의 눈이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