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604화 (604/956)

헤드샷(1)-수정(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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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을 열고 들어와 침대 위에 주저앉았다. 가슴 위로 손을 가져다대니 쿵쾅거리는 심장이 멈출 줄을 모른다. 예전에 한눈에 반했던 남자 아이돌을 실물로 직접 봤을 때도 이렇지는 않았다.

심장이 진정하길 기다리며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어두운 장막 위로 단유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니야!’

유영은 눈을 번쩍 뜨고 다시 가빠진 호흡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어떻게 집에 들어왔는지, 정확히 기억나질 않았다. 희미하게 웃던 단유의 미소와 갑자기 눈앞으로 다가왔던 얼굴, 가슴을 밀쳐 내고 물러났던 기억과 허겁지겁 뒤돌아서 아파트 안으로 들어왔던 기억들이 마구잡이로 섞여 혼란스러웠다.

그 와중에, 손에 남아있는 감촉.

‘가슴이 단단했던 것 같아.’

순간 화끈거리는 얼굴. 누가 볼세라 볼을 감싸 쥐니 손이 뜨거울 정도다. 오늘 하루 동안 얼마나 볼을 붉혔는지, 이러다가 템퍼링(Tempering)으로 피부의 인성(靭性)과 연성(延性)이 강화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잠시 스쳐갔다.

유영, 그녀 역시 서울대 물리학과에 입학한 물리학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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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로 접어들면서 날이 점점 더워지기 시작했다. 뉴스에서는 외출을 자제하고 야외에서 격한 운동을 삼가라는 뉴스가 간간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이 집에만 틀어박혀 있을 순 없었다. 산으로, 바다로 여름 휴가를 떠나는 사람들도 있었고,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더위를 피하는 방법은 그 외에도 많았다. 이를테면, 도서관에 틀어박혀 에어컨 바람 쐬면서 독서를 즐기는 것도 그 방법 중 하나다. 당연히 단유가 선택한 방법이기도 했다.

차를 사고 좋은 점 중의 하나는 역시 통학이 편하다는 것이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한다고 해도―버스든, 지하철이든―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주긴 하지만, 사람들 속에 묻혀 있는 것과 홀로 쾌적한 바람을 쐬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몇 차례 운전했더니, 그새 경험이 쌓여 이제는 적당히 속도를 내면서 달려도 무난히 시내 주행을 할 수 있었고, 주위 차들의 도움(?)도 여전해서, 붐비는 서울 시내에서도 나름 쾌적한 드라이빙이 가능했다.

동작대교를 지나 길을 따라 가다 강남순환도시고속도로에 올라타 봉천 터널을 지나면 금방 서울대에 이른다. 대략 30분 정도인데 평소 한 시간이 조금 넘던 거리가 반으로 줄어드니 여간 편한 게 아니었다.

사실 이런 편리함을 느낄 때마다, 예전에 사용하던 마법을 떠올리게 되고, 그때마다 마법의 강력함과 편의성을 느끼며 좀 더 구사할 수 있는 마법의 종류를 늘리고 싶다는 갈증을 느꼈다. 최첨단 현대 문물의 편의성도 마법의 힘을 넘지 못하니, 마법이란 것이 가히 초월적인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니 더 빨리, 더 많은 마법을 사용할 수 있기를 바라며, 오늘도 단유는 도서관으로 향한다.

요즘은 열람실에 자리가 없다시피 꽉 찬다. 이유는 며칠 뒤에 있을 시험 때문이었다. 불과 며칠 전, 그러니까 6월 말쯤에 공무원 7, 9급 필기시험이 있었는데, 그 시험이 끝난 후 사람이 쫙 빠져나갔다.

예전에는, ‘서울대 나와서 고작 9급 공무원 시험이나 치냐’는 말이 있었다지만 다 옛말이었다. 지금은 어떻게든 빨리, 졸업 전에 취업을 확정 짓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그래서 7, 9급 공채 시험을 위해 밤잠 설치며 공부하던 이들이 한동안 열람실에 가득했고, 시험이 끝나니 해방을 외치며 도서관 밖으로 뛰쳐 나갔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고 다시 사람들이 꾸역꾸역 밀려 들어오더니 다시 자리 경쟁이 시작되었다. 곧 있을 5급 공채 시험과, 하반기 채용을 대비한 공부를 위해서였다.

그런 점에서 단유는 다른 이들과 사뭇 달랐다. 시험을 준비하지도 않았고, 취업을 걱정하지도 않았다. 남들처럼 색색깔의 볼펜을 준비해 노트를 꾸미지도 않았고, 다크서클이 생기도록 오래도록 책을 보지도 않았다. 그날 읽을 책 한 권, 혹은 두 권을 앞에 두고 그냥 ‘독서’를 할 뿐이었다.

물론 주위의 학생들은 그런 단유에게 뭐라 하지 않았다. 당신은 왜 공부를 하지 않습니까, 라고 말하는 사람도 없었고 분위기 나빠지니까 다른 곳에서 읽으세요, 라고 말하는 사람도 없었다.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자기 공부하기도 바쁜 사람들이었고, 가끔 굳은 몸을 풀기 위해 스트레칭을 하다 슬쩍 시선이 머물렀다 갈 뿐이었다. 그마저도 바로 곁의 학생들이나 그렇지, 넓은 열람실에 자리 잡은 대부분 학생들은 단유를 신경쓰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가 단유를 신경 쓰지 않는 건 아니었다. 단유를 보며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도 더러 있었는데, 그들은 보통 도서관에 늦게 나온 이들이거나 자리를 뺐다가 다시 열람실을 찾은 이들이었다. 빈자리 없이 빼곡이 들어찬 열람실을 둘러보며 배회하다보면 거의 90% 이상 단유가 눈에 들어오게 되니까. 주위의 풍경에 위화감을 느끼게 만드는 단유의 모습에 학생들은 괜히 단유 주위를 돌면서 눈치를 줬다.

‘고작 책 한 권 읽으려고 여기서 자리를 뺏어?’

‘진짜 양심 없네. 다른 공부하는 사람 안 보이나?’

그래도 교양과 인성을 겸비한 대학생들이라 면전에서 욕하거나 따지고 들지는 않았다. 대신 눈에 힘주고 단유를 째려보며 주위를 맴돌 뿐이었다.

한두 번이면 모를까 계속되는 날카로운 시선을 무시하며 자리에 앉아 있기란 단유로서도 힘겹다. 자료실은 서고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번잡함 때문에 신경이 쓰여서 잘 가지 않았던 것인데, 그보다 더한 시선을 받으며 평화로운 독서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죄송합니다.”

그냥 가기는 미안해서 근처에서 쏘아보고 있던 학생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네?”

“눈치 없이 자리 차지하고 있어서 죄송합니다.”

“네?”

백팩을 매고 방석과 책을 한 아름 안고 있던 남학생은 단유의 사과를 받으며 얼굴이 붉어졌다.

‘그걸 왜 나한테?’

“여기 앉으세요.”

그리고 단유는 쿨하게 열람실을 떠났다. 남학생은 자기가 뭐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사과를 받았고, 그 때문에 주위 학생들의 시선을 모을 수 있었다. 억울하다는 생각에 울컥했다.

“저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비켜달라고 하지도 않았어요!”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사정을 모르는 다른 학생들은 ‘멀쩡히 앉아 있는 사람을 내쫓는 독한 녀석’이라는 시선을 보낼 뿐이었다. 남학생, 그리고 몇몇 배회하던 학생들은 단유의 빈자리를 보고도 앉을 수가 없었다.

그 후로 단유는 열람실 출입을 끊었다. 비록 자료실이 번잡하긴 하지만 책에 집중만 한다면, 그런 것쯤은 무시할 수 있었다. 다만 열람실의 공부하는 분위기가 좋아서 갔던 것 뿐이니, 딱히 마음 쓸 일도 아니었다.

요즘은 연락 오는 데도 없었다. 6월까지만 해도 도연에게서 가끔, 아주 가끔 연락이 와,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자기 일상을 이야기하거나,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단유의 일상을 듣고 싶어했으며, 전혀 알고 싶지 않았던 그녀의 스케줄을 외워야 했다. 그러다 컴백이 얼마 남지 않아 준비를 해야 된다던 마지막 연락을 끝으로 단유를 귀찮게 하는 연락은 오지 않았다.

자주 연락하자던 유진은 동남아 쪽에 촬영 스케줄이 있어서 가야 한다며 자랑한 뒤로 연락이 없었다. 아마도 바빠서 연락할 틈이 없는 모양인데, 단유는 진심으로 감사했다.

유영은···.

‘후.’

유영을 생각하면 괜히 찜찜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엉뚱한 고백 이후로 연락 한 번 없었고 학교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날 밤 그녀가 밤새도록 이불킥과 실성한 듯 웃음을 흘리며 자책했다는 것을 모르는 단유는 그저 귀찮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고마워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긴 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뭔가 제대로 맺음이 되지 않은 채로 어영부영 시간만 흘러가는 게 찝찝했다.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때 그 일보다 더 큰 음모(?)를 획책하고 있는 건 아닌지 불안한 마음이 들어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유는 그녀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먼저 연락할 이유는 없었고, 사소한 몇 가지만 제하면 지금의 단유는 어느 때보다 자유롭게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오늘도 뿌듯한 마음으로 도서관 자료실로 향하던 단유는 자료실 입구에서 누군가의 부름에 걸음을 멈춰야 했다.

“학생?”

정확히 자신을 부른 건지 확신은 못 하지만, 일단 ‘학생’이라는 지칭에 단유는 고개를 돌렸다.

“잠깐 이것 좀 도와줄래요?”

뭔가 싶어 바라보니 그레이 계열의 세미 정장을 입은 여인이 도서관 자료실 앞 홀에 놓인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테이블 위에는 몇 권의 책과 논문들이 올려져 있었다.

“무거워서 그러니까 좀 들어줘요.”

단유는 대답 대신 여인을 바라보았다. 눈에 익은 여자였다. 바로 한달여 전 새벽이 사고 났을 때 보았던 그 여자였다. 변호사에게 추가로 듣기로는 전치 4주가 나왔는데 1인실에 입원해 있다고 들었다. 물리치료와 약물치료를 병행한다던가? 그래서 꽤 비싼 배상금을 받게 되었다고 했다.

‘벌써 나았나?’

보기엔 멀쩡해 보였다. 하지만 겉으로만 그럴 뿐 속으로는 고통을 참는 건지도 모른다.

“뭐해요? 내 말 안 들려요?”

앙칼진 목소리에 지나가던 몇몇 학생들이 쳐다보지만 그들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네.”

단유는 짧게 대답하고 테이블 위의 책들을 들었다. 두 덩이로 나눠진 책과 논문 중 무거울 게 뻔한 책을 들었다. [분석화학 기초], [분자설계 및 합성]과 같은 책 제목들로 봐선 화학 계열 자료들인 것 같았다.

잠시나마 책 제목을 통해 여자의 정체에 대해 유추해보려던 찰나 들고 있던 책 위로 나머지 논문들이 턱 올려졌다. 당사자는 손을 탁탁 털더니 가벼운 어조로 말을 건넸다.

“가요.”

그리고는 앞장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도서관 중앙 홀에 경박한 하이힐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중앙도서관에서 자연과학관 건물까지는 별로 멀지 않다는 점이었다. 도서관에서 나오면 바로 왼쪽에 보이는 건물들이 자연과학대 건물들이었고 조금만 발품 팔면 금방이다.

그런데 그 여자는 단유나 학생들이 주로 사용하는 자연과학관 방향 건물이 아닌 행정관 쪽 길로 향했다.

“어디까지 가시나요?”

호기심에 물었더니, 여자는 왜 그런 걸 물어보냐는 눈으로 단유를 쏘아보며 말했다.

“503동이요.”

503동이라면 서쪽 순환로에 있는 출판문화원 옆이다. 만약 거길 가는 거라도 해도 이쪽 길보다는 학생회관을 지나는 길을 사용하는 게 더 빠르다. 하지만 여자는 그런 것 따위는 신경도 안 쓴다는 듯 마이웨이 식으로 걸어갈 뿐이었다.

“아, 더워.”

손부채질을 하며 투덜대는 여자는 단유가 잘 따라오는지 돌아보며 확인했다.

“빨리 와요.”

“네.”

“의외로 허약 체질인가봐요? 보니까 운동도 좀 한 것 같은데 빨리 따라와요.”

단유는 대답 대신 걸음을 빨리해서 여자의 뒤를 쫓았다.

몇 개의 계단을 타고 내려가면 닿을 수 있었던 곳을 멀리 둘러서, 겨우 목적지에 도달했다. 건물 내로 들어가자 따갑던 햇볕이 가려져, 그것만으로도 온몸을 감싸던 더위를 한주먹 정도 덜어낼 수 있었다. 정장 여성은 아까보다 기운이 빠졌는지, 1층 홀 바닥을 딛는 하이힐 소리가 별로 경쾌하지 못했다.

마침내 어느 방 앞에 선 여자는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에 걸려 있던 교수님의 이름을 살폈는데, 눈앞의 여성이 주인은 아닌 듯했다.

“거기 책상 위에 놔두고 가요.”

교수 전용 의자에 털썩 앉으며 책상 위에 놓인 서류 뭉치를 집어 부채질을 하는 여자의 얼굴은 짧은 운동이 과했던지 얼굴이 꽤 상기되어 있었다.

이쯤 되니 아무리 단유라고 해도 괜히 화가 나서 참을 수 없었다. 본래 단유는 자신에게 직접적인 해를 끼치지 않는 이상 무던히 참는 성격이었고, 어쩌다 불편을 끼치는 사람을 만나더라도 웬만해선 그냥 피하고 보는 편이었다. 하지만 봉사를 강요하고, 그 봉사에 대한 적절한 감사 표시도 않는 이 여성에게는 이전처럼 그냥 넘어가기가 싫었다.

단유는 책을 내려놓고 여자에게 다가갔다.

“뭐, 뭐예요?”

자신보다는 어려 보이지만 덩치도 크고 힘도 셀 것 같은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 다가오니 덜컥 겁이 났다. 게다가 여기는 교수실. 방학기간이라 옆 교수실에는 사람이 없을지도 모른다. 복도도 조용하고, 지금도 다가오는 남성의 발소리 외에는 들리는 게 없다.

단둘만 있는 교수실에서 무력한 여성에게 달려드는(?) 남성.

“까악!”

여자는 비명을 질렀고, 단유는 그 비명을 그치도록 행동했다.

―짜악!

볼이 얼얼할 정도로 매섭게 뺨을 날린 단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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