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603화 (603/956)

방심(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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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친 후, 계산은 변호사가 했다.

“이걸 수임료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한 일에 비해 지나치게 많이 받은 것 같네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린다는 뜻에서 계산은 제가 하겠습니다.”

세 명의 식사라고 해봐야 얼마나 나올까 했는데, 가격을 듣고 유영은 위 활동이 멈추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건 약과였다. 가게 밖으로 나와 변호사가 준비해뒀다는 차를 보고는 뇌 활동마저 정지하는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 차인가요?”

“네. 단유 씨가 운전하기 편하고 좋은 차를 원하신다 해서 고르고 고른 차입니다. 사실 제 드림카이기도 하죠. 하하.”

단유는 볼을 긁적이며 변호사가 자랑하듯 손을 뻗은 끝에 기다리고 있는 자동차를 바라보았다. ‘운전하기 편하고 좋은 차’라는 모호한 주문을 한 탓도 있지만, 그 말에는 ‘무난하게 좋은 차’라는 말과 ‘사람들의 시선을 많이 끌지 않는 차’라는 기호가 섞인 표현이라고 생각했는데,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 가격은 중요하지 않다고 했었지.’

그 역시도 단유에겐 가격 상관없이 사람들이 많이 찾는 차, 라는 의미였지만 변호사에겐 돈이 넘쳐나는 젊은 남성이 원하는 최고급 차량, 이란 의미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지금 눈앞에서 광채를 뿜어내는 이 차는 누가 봐도 ‘돈지랄’이다.

단유가 말없이 바라보고 있으니, 변호사는 설명이 더 필요하다 느꼈는지 쾌활하게 설명을 이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드림카이기 때문일까? 딜러도 아닌데 차를 설명하는데 애정이 듬뿍 묻어났다.

“트윈터보 V8엔진을 탑재한 이 차는 최대출력 528마력에 제로백은 4.9초, 최고속도는 306㎞/h입니다.”

차량 앞에 붙은 B 심벌과 날개 모양, 그리고 그 아래로 넓게 자리 잡은 그릴을 가리키며 변호사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공감하기 힘든 흥분이어서 단유는 묵묵히 설명을 듣기만 하다 키를 건네받았다.

“이것보다 더 화려한 스포츠카들도 있지만, 사실 국내에서는 스포츠카를 타고 다닐만한 곳이 없거든요. 트랙에서 달리는 거면 모를까. 사실 국내 도로 노면 상태가 썩 좋지 않아요. 고속도로도 마찬가지고. 자칫 과속으로 달리다가는 타이어가 터지는 경우도 생기니까 굳이 스포츠카를 탈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고 그래서 적당히 묵직하고 승차감 좋은 차를 고른 겁니다.”

“고맙습니다.”

“과속하지 말고 안전 운행하세요. 혹시 사고 나면 연락 주시고.”

“···네.”

“타, 데려다줄게.”

“···네.”

유영은 쭈뼛대며 조수석에 올라탔다. 처음 타보는 고급 차였다. 이제껏 타본 차들이라고 해봐야 아버지가 몰고 다니시는 국산 중형차나 택시 정도밖에 없었는데, 이 차는 외형도 외형이지만, 실내 인테리어의 차원이 달랐다. 손때라도 묻을까 봐 어디 손도 댈 수 없었다.

“안전벨트 매.”

“네.”

“운전면허 딴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천천히 운전할게.”

“네.”

“그래도 사고는 안 낼 테니까 걱정마.”

“걱정 안 해요.”

도리어 유영 본인이 잘못 손대서 고장이라도 날까 봐 무섭다. 깍지 낀 두 손을 무릎 위에 얌전히 올려두고 정면만 바라보았다.

시동을 걸자 동굴 저 안쪽에서 정체 모를 야수가 으르릉대는 것 같은 엔진음이 들려왔다.

‘조금이라도 움직여봐라. 어흥 하고 잡아먹을 테다.’

그렇게 들렸다.

걱정과 달리 자동차는 부드럽게 도로 위를 달리기 시작했고, 단유는 침착하게 핸들을 조종해서 차를 운전했다. 처음 차를 보았을 때의 부담스러움은 남아있지만 좋은 점도 있었다. 자동차 학원에서 몰았던 차에 비해 승차감이 좋고 운전하기도 여간 편한 게 아니었다. 변호사에게 부탁했던 ‘운전하기 좋은 차’라는 관점에서는 합격점이라 하겠다. 물론 비교 대상이 운전학원의 싸구려 자동차에 한해서이지만, 당장은 편안하게 운전할 수 있으니 좋다.

또 하나 좋은 점은 주위의 차들이 심하게 들러붙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느리게 주행 중이지만 앞쪽으로 끼어드는 차량은 많지 않았고, 끼어들어도 한참 앞에서 차선 변경이 이루어지니 앞뒤로 널찍한 공간이 만들어져 마음의 여유를 줬다. 이런 여유가 동승자인 유영에게도 전달되리라.

하지만 단유의 생각과 달리 유영은 별로 여유롭지 못했다. 여유롭게 주위를 살필 여력도 없었고, 그저 앞만 보다가 간간이 눈동자만 굴려 오른쪽만 훔쳐 볼 뿐이었다. 단유의 운전 실력에 대한 불안감 때문은 아니었다.

‘어쩌면 좋지?’

생각이 많아졌다. 밥 사달라고 조를 때까지만 해도, 그래 이왕 저지른 거 한번 밀어붙여 보자, 라는 심정이었다. 헤픈 여자처럼 보이고 싶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여자가 먼저 고백하는 건 자존심 상해, 라는 마인드도 없었다. 그저 호감이 가니 마음이 가는 대로, 관계를 진전시켜 보자는 정도의 마음이었고, 마침 본인이 단유보다 나이도 어리니 여동생같이 느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계산이었다.

함께 밥을 먹어도 어색하지 않은 사이, 그리고 시간만 맞으면 같이 쇼핑이나 영화관람 정도는 같이 할 수 있는 사이, 그러다 더 친해지면 서로의 고민도 나눌 수 있는 관계, 정도가 유영이 그리던 관계였다.

그러나 척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대학생은 물론이고 일반 서민들은 상상도 하기 힘든―그래서 변호사가 ‘드림카’라고 부르기까지 한―자동차를 타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감히 말을 붙이기가 어려워졌다. 이런 상황에서 유영이 단유에게 친근하게 군다? 어쩌면 단유는 유영을 돈 많은 남자를 보며 밝히는 ‘속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제까지 친한 척하지도 않다가―기껏해야 ‘밥 사주세요’가 다였는데―, 단유의 재력이 상상 이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 지금 친하게 구는 것은 타이밍이 좋지 않다, 고 유영은 생각했다.

그렇다. 결국 타이밍의 문제였다.

‘조금만 더 일찍 말을 붙여 볼걸.’

결국 후회와 한숨만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단유를 쳐다보지도 못하는 유영과, 그런 유영의 생각을 조금도 모르는 단유를 태운 고급 승용차의 뒤로 불가피하게 속도가 느려진 자동차들이 방향지시등을 깜빡거리며 속을 태우고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한 차는 부드럽게 정차했고, 그제야 단유는 유영을 돌아보았다. 긴장한 티가 역력해 보였다. 귀밑으로 땀도 흘리는 것 같은데 그건 좀 이해가 안 됐다. 혹시나 더울까봐 에어컨도 틀어서 오히려 차 안은 서늘하다고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여기 맞아요?”

“네.”

“그럼 잘 가요.”

“······.”

입술을 꾹 다문 유영은 단유의 인사에 화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얼굴을 살짝 찌푸리는 듯했다. 조금 당황스러워하는 것도 같고.

“왜?”

단유의 물음에 여전히 대답도 하지 않고 차에서 내릴 생각을 하지 않는 유영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단유는 예전에 명수와 함께 보았던 드라마의 몇몇 장면이 떠올랐다. 혹시 새차 샀으니까 드라이브라도 하자는 걸까? 드라마에서 보면 여자들은 남자에게 바닷가로 놀러 가자고 꼬시던데.

이런저런 추리를 하던 중, 유영이 힘겹게 입술을 열고 말을 꺼냈다.

“···안 돼요.”

“응? 뭐가요?”

혼자 끙끙대는 듯 하더니 다시 말을 잇는 유영.

“몸이 움직이질 않아요.”

무슨 소린가 싶었는데, 유영은 거의 울기 직전인 얼굴로 ‘쥐가 나서 다리가 움직이질 않는다’고 토로했다. 순간 단유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유영은 그게 자신을 비웃는다고 느꼈고, 그래서 더 울먹거리는 소리로 변명했다.

“너무 긴장했단 말이에요!”

지금 유영은 어깨에서부터 다리까지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게다가 집까지 오던 중에 다리가 저릿해지더니 지금은 감각이 느껴지질 않을 정도였다. 어깨도 딱딱해서 팔을 움직이려해도 통증 때문에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고. 그래서 안전 벨트도 풀지 못하고 바보같이 눈물만 글썽이는 중이었다.

너무 속상했다. 그래도 나름 조신하게, 예뻐 보이고 싶은 게 여자 마음인데 이런 흉한 꼴을 보이고 말았으니. 게다가 단유는 비웃기까지 했다.

‘망했어.’

오늘 하루 종일 망한 하루였다. 아예 오늘 하루를 통째로 잊고 싶었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단유에게 밥 먹자고 조르지도 않았을 것이고, 식당에서도 바보처럼 멍 때리고 있지만도 않았을 것이며, 차에 타서도 자연스럽게 주위를 돌아보며 불편하지 않은 대화를 주도했을 것이다.

‘이게 뭐야. 완전히 이상한 여자로 볼 거 아냐.’

만약, 그럴 리 없겠지만, 그래도 만약에 단유가 자신에게 호감이 있었다면, 오늘 자신의 행동들을 보면서 그 호감은 산산조각 났으리라.

딸깍. 안전벤트 걸쇠가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유영의 앞으로 단유의 팔이 지나갔다. 안전벨트 걸쇠가 유영을 때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풀어준 단유였다. 그리고 차에서 내린 단유는 조수석 쪽으로 다가와 문을 열어주었다.

“내가 부축해 줄 테니까 내려볼래요?”

유영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불편하면 이야기해요.”

단유가 손을 내밀자 유영이 그 손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그리고 몸을 틀어 다리를 억지로 차 밖으로 내도록 했다.

‘그나마 바질 입고 오길 잘했어.’

그 순간에 유영이 떠올린 생각이었다. 몸을 틀어 두 다리를 밖으로 내놓긴 했는데, 그마저도 무리였는지 다리에 쥐가 났다. 저릿저릿한게 너무 고통스러워 유영은 아랫입술을 물었다.

“왜 그래요?”

“···아파요.”

단유는 유영의 다리를 한 번 보고는, 그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유영의 종아리를 두 손으로 쥐었다. 그 순간, 지금까지의 고통은 우습다는 듯 찌릿한 전기가 온몸을 타고 흘렀다.

“읍!”

육성으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얼굴은 붉다 못해 터질 것처럼 달아올랐다. 수치, 치욕, 이런 단어들로도 모자라다. 앞으로는 절대 단유 앞에 나타날 수 없으리란 걸 확신하는 순간이었다.

그런 유영의 사정을 모르는 단유는 부드럽게 유영의 다리를 주물렀다. 종아리 구석구석을 꾹꾹 누르던 단유의 손은 이어서 발 쪽으로 향했다.

“신발은 벗기 힘들죠? 벗으면 좋긴 한데, 부끄러울 수 있으니까 이대로 할게요.”

그 말이 더 부끄럽다고! 넓은 평야에서 대(大)부대를 호령하는 장수의 외침 같은 목소리가 유영의 가슴 속에서 터져 나왔지만, 끝내 입술을 뚫고 나오진 않았다. 귀머거리같은 단유는 태연하게 유영의 신발 아래를 한 손으로 붙잡고, 다른 손으로는 유영의 가는 발목을 붙잡아 돌렸다.

솔직히 종아리를 주무를 때,

‘허벅지까지 손이 올라오면 어떡하지?’

‘손을 내치며 ‘변태!’라고 외쳐야 하나?’

‘아니면 ‘왜 이러세요’라고 앙칼지게 소리쳐야 하나?’

‘···그것도 아니면 그냥 모른 척 가만히 있을까?’

온갖 방안들이 비누 거품처럼 부풀어 올랐는데, 단유의 손이 발 쪽으로 향하자 거품들이 걷히며 혼자 엉큼한 상상을 한 것 같아 민망하고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친구가 운동선수예요. 그래서 같이 운동할 때가 많은데 가끔 다리에 쥐가 나는 경우가 있어요. 그때마다 제가 풀어주곤 했거든요? 이런 거 익숙하니까 믿으셔도 될 거예요. 금방 낫진 않아도 이렇게 혈액 순환을 시켜주면 풀리니까. 괜찮죠?”

“더러운데.”

“네?”

“신발 더럽다고요. 그 손.”

신발 밑창을 맨손으로 붙잡고 있는 걸 가리키자, 단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아, 괜찮아요. 닦으면 되죠.”

단유는 다른 쪽 다리도 똑같이 붙잡고 풀어주었다. 그러는 동안 유영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다. 유영은 그게 단유의 배려라는 걸 알았고, 그런 배려 때문에 또 마음이 쿵쾅거렸다.

“이제 한 번 걸어봐요.”

단유가 일어나 자리를 비켜주었다. 유영은 조심스럽게 발을 땅에 딛었다. 발을 딛는 힘과 땅에서 밀려오는 반탄력을 느끼며 대답했다.

“괜, 찮네요.”

“다행이네요.”

단유에게로 고갤 돌리니 단유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유영은 눈을 깜빡거리며 단유를 바라보았다.

“왜요?”

멍하게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고 있으니, 또 뭔가 있나 싶어 물었다.

“좋아해요.”

“네?”

“오빠가 좋아요.”

“······.”

말없이 유영을 바라보는 단유와 그를 바라보는 유영. 어느 순간 유영이 화들짝 놀라더니 뒷걸음질을 쳤다. 뒤늦게 자신이 무슨 말을 한 것인지를 깨달았다. 마음속 진심이 잠깐 방심한 사이에 충동적으로 튀어나오고 말았다는 것을.

“아!”

아직 무리였던 걸까? 오른쪽 무릎이 풀썩 꺾이며 뒤로 넘어지려는 유영. 단유가 얼른 다가가 유영을 붙잡았다. 허리를 감싸 안으며 유영을 부축한 단유의 도움으로 쓰러지는 것은 피했지만, 오히려 더 큰 충격이 유영에게 가해졌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충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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