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602화 (602/956)

방심(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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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을 맞이한 대학이지만 교정을 누비는 사람들은 적지 않았다. 학기 중일 때만큼은 아니지만, 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계절학기나 세미나 등의 이유로 학교를 찾아와 강의실로 들어갔다.

“너 이번에 몇 학점이야?”

“9학점.”

“꽉꽉 채웠네?”

“놀면 뭐해? 방학이라고 마냥 쉬는 것보다는 수업을 듣는 게 효율적이지. 넌?”

“6학점. 작년에 대학국어 빵꾸나서 그거 메운다.”

“대학국어? 그걸 왜?”

“작년 초에 선배들 따라 다니다가 출석 못 채워서 빵꾸났잖아. 어휴, 이걸 다시 들으려고 하니까 아주 미친다. 너는 뭐 듣는데?”

“나는 민법총칙이 듣고 싶었는데, 결국 개설이 안 됐더라. 그래서 역사와 철학 듣는다.”

“듣기만 해도 졸린다야.”

“너만 하겠냐? 날도 더운데 30분 듣다 보면 머리 박고 자고 있겠지.”

“모르겠다. 아, 너 혹시 심리학과 교양 듣냐? 그거 이번에 정원 꽉꽉 채웠던데?”

“‘행복의 과학적 탐구’? 제일 만만하다고 해서 수강했는데 모르겠다, 어떻게 될지.”

“그거 사람이 너무 많아서 강의실 옮긴다고 하더라.”

“진짜? 그런 이야기 못 들었는데?”

“확인해봐. 다른 애들도 그거 몰라가지고 허둥대던데.”

“아이 씨. 알았다. 빨리 알아봐야겠네. 아무튼 고생해라. 끝나고 전화해. 같이 밥이나 먹자.”

“그래. 너도 수고해.”

강의가 없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드물게 친구들과의 약속을 위해 왔거나, 혹은 개인 공부를 위해 도서관을 찾는 사람들이었다.

중앙 도서관에는 오늘도 사람으로 가득했다. 학기 초에도 그랬듯, 지금도 각종 시험을 앞두고 밤새가며 공부하는 학생들로 가득했고, 그들의 열기가 더해져 도서관의 에어컨은 맹렬히 돌아갔다.

에어컨 덕분에 시원해진 열람실에서 책과 씨름하는 학생들 사이에 단유도 자리 잡고 독서에 열중했다. 멀리서 보면 옆의 학생들과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지만, 자세히 보면 단유는 그런 이들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보여 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옆자리의 학생들이 책과 노트, 필기구를 펼쳐두고 열심히 손을 움직여 필요한 부분들을 발췌하거나 암기하며 책과 싸우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면, 단유는 편안한 자세로 여유롭게 페이지를 넘기며 독서를 즐기는 모양새였다.

그런 묘한 분위기에 주위 사람들이 호기심을 느끼며 단유의 어깨 너머로 슬쩍 시선을 던져 뭘 보고 있는지 살펴보는데, 펼쳐진 페이지를 보자마자 사람들은 시선을 돌렸다.

[···Independently proposed by Physicists, and were introduced as parts of an ordering scheme for hadrons···]

삽화 없이 영어로만 된 원서를 소설책 읽듯 넘기는 이에게 더 쏟을 관심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툭툭, 누군가 단유의 어깨를 두드렸다. 뭐지, 싶어 고개를 돌리니 눈앞에 작은 이슬이 맺힌 캔 커피가 나타났다. 고개를 들어 캔 커피를 쥐고 있는 사람을 바라보니, 유영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드세요.”

옆 사람에게 방해가 될까 봐 조용히 말하는 유영. 그런 유영이 신경 쓰인다는 듯 힐끗거리는 주위 남학생들의 시선이 따가웠다.

“괜찮아.”

단유는 정중히 거절했다. 설마 거절할 줄 몰랐던지 유영의 얼굴이 붉어졌고, 흥미로운 장면을 본다는 듯 주변의 부산스러운 움직임이 커졌다.

“······.”

어쩔줄 몰라하는 유영을 본 단유는, 나직이 한숨을 쉬며 책을 덮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유영의 커피를 받아들었다.

“나가죠.”

단유가 앞장서고, 그 뒤를 유영이 졸졸 쫓아가니, 또 그 뒤를 남학생들의 시선이 쫓는다. 몇몇 여학생들의 시선도 섞여 있지만, 두 사람의 모습이 열람실에서 사라지고 나니, 부산스러움은 사라지고 다시 에어컨과 맞서 싸우자는 투지와 열기가 슬금슬금 올라오기 시작하며 학생들의 눈동자는 책과 노트로 집중되었다.

“열람실 안에서는 음료수 반입이 안 돼요.”

“아, 깜빡했어요.”

“괜찮아요. 아무튼 잘 마실게요.”

“방해해서 죄송해요.”

“아뇨, 어차피 쉬려고 했어요.”

단유는 고갤 돌려 벽에 붙은 시계를 확인했다.

“또 조금 있다가 나갈 일도 있고.”

“아, 어디 가시는데요?”

단유는 유영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그걸 왜 궁금해하지?’라는 시선을 보냈다. 유영은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해요.”

“···죄송할 거까지야. 그냥 밖에 볼 일이 있어서요. 뭐 살 것도 있고.”

“네.”

어떤 ‘볼 일’인지, 무엇을 ‘산다’는 것인지 궁금해서 입이 근질근질하지만, 주제넘은 참견이기에 유영은 그저 캔커피만 홀짝일 뿐이었다. 달콤쌉쌀한 커피 한 모금에 눈치 한 번.

“아, 저기 새벽이는 어때요?”

열심히 머리를 굴리다 공통 화제를 하나 찾아낸 유영이 급하게 물었다.

“며칠 전에 집으로 내려갔어요. 서울에서는 연고가 없어 혼자 병실에 있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어머니가 서울에 올라와 계시려니 아버지가 혼자 계셔야 하니까 차라리 새벽이 내려가는 게 낫다고 판단 했나봐요. 어차피 방학이기도 하니까.”

“아, 그렇군요.”

“혹시 궁금하면 전화 한 번 해봐요.”

“네? 아니···.”

“아마 유영씨가 전화 주면 새벽이도 고마워할 거예요. 아, 전화 번호 아세요? 모르시면 가르쳐드릴까요?”

“아뇨, 지난번에 전화번호는 받아놨었어요. 나중에, 나중에 전화해 볼게요.”

“그래요.”

단유는 커피를 마저 들이키고는 빈 캔을 버리기 위해 쓰레기통으로 향했다. 그사이 유영은 좀 더 머리를 굴렸다.

‘기회가 많지 않아.’

솔직히 유영 본인도 이렇게 행동하는 게 좋은지 어떤지 알 수 없었다. 남자친구와 교제를 해 본 경험도 없지만, 자신도 아직 단유를 그렇게 좋아한다고 확실하게 말하기 어려운 탓이다.

애초에 오늘 학교에 나온 이유는 방학 동안 할 수 있는 학내 아르바이트 자리가 있다고 해서 나온 참이었다. 솔직히 과외를 하는 게 제일 낫지 않나 싶기도 했는데, 당장 과외 알바가 나오지 않기도 하거니와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게 솔직히 자신 없기도 했다.

문화인큐베이터에 가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선배와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선 길에, 날도 덥고 하니 도서관에서 가볍게 읽을 만한 책이라도 하나 빌려 나오자는 생각으로 들렀다가 이질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단유를 발견했다. 그 순간 느슨하게 풀려있던 긴장의 끈이 조여지면 동시에 머릿속이 팽팽 돌아갔다. 드라마, 영화, 소설에서 봤던 각종 장면들이 재생되기를 반복하다 마침내 캔커피를 떠올렸고, 도서관 정문 옆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다 슬그머니 접근했다.

지금의 감정을 유영도 정확히 설명하기 어려웠다. 이성으로서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글쎄요, 다. 호감은 가지만, 이 감정이 이성적 관심인지는 가늠하기 어려웠고, 그렇다고 단순한 호기심이냐고 묻는다면 그것보다는 좀 더 깊은 관계를 원한다고 볼 수 있다.

‘무슨 소리야.’

유영은 머리를 흔들었다. 어떻게 자신의 마음인데 이렇게 통제가 안 될까?

“전 이만···.”

어느새 단유가 다가와 유영에게 작별을 고하려는데, 유영이 그 말을 잘랐다.

“식사, 하셨어요?”

“···아직 안 먹었어요.”

“같이 밥 먹죠?”

“저···.”

“밥 사주세요.”

갑자기 저돌적으로 나오는 유영의 태도에 단유는 눈만 껌뻑거렸다. 너무 배가 고파서 미칠 것 같아요, 라는 의미 이상의 무언가가 담긴 듯한 유영의 촉촉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안 되겠는데요’라는 말을 뱉기가 어려웠다.

“죄송해요.”

유영은 오늘만 몇 번을 사과하는지,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괜찮아요. 만약 어려운 자리였으면 애초에 유영씨를 데리고 오지도 않았죠.”

“그래도··· 이런데서 선약이 있으신 줄은 몰라서···.”

“여기가 어때서요. 그냥 밥 먹는 자린데요, 뭘.”

유영은 오른쪽 왼쪽 시선을 옮겨가며 주위를 훑었다. 정숙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레스토랑인데, 자리 잡은 이들도 모두 꽤 ‘교양’있어 보이는 사람들로 보인다. 일단 자기 나이 또래의 사람은 보이지도 않는데다, 복장도 고급 정장이나 품위를 갖춘 복식을 하고 있어, 얇은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백팩을 맨 유영은 어울리지가 않는다. 물론 단유도 그런 면에서 유영과 크게 다를 바가 없지만, 어쩐지 단유보다 자신이 더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었다.

“예약 하셨습니까?”

단정한 슈트를 입은 여직원이 다가와 공손히 물었다.

“최양규 변호사님 이름으로 예약이 되어 있을 텐데요.”

“아, 이미 와 계십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여직원은 두 사람을 데리고 레스토랑 안쪽 자리로 데려갔다. 레스토랑의 넓은 홀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니 따로 룸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로 꾸며져 있었다.

“왔어요?”

이미 자리에 앉아 폰을 들여다보던 중년의 남성이 단유를 발견하고 손을 들어 맞이했다.

“늦지 않았나요?”

“아뇨, 괜찮아요. 제가 일찍 온 건데요. 그런데, 그쪽 분은?”

“아, 저희 학교 동긴데 불편하지 않으시면 같이 식사해도 괜찮을까요?”

“저야 상관없죠. 클라이언트가 원하시는 거면 저야 무슨 상관 있나요?”

“네, 그럼 동석 하도록 하겠습니다. 여기 앉아요.”

“고맙습니다. 죄송합니다.”

단유에게 고개 숙이고 미리 자리하고 있던 남성에게도 허리 숙여 사과하니, 남자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손을 저었다.

“죄송하다뇨. 괜찮아요, 저는.”

세 사람이 자리 잡고 앉으니 남자 직원이 다가와 주문을 받았다.

“뭘로 드시겠습니까?”

“저는 잘 모르니까, 변호사님이 주문해 주실래요?”

“그럴까요? 그쪽 아가씨는?”

“저도요.”

“그럼 제가 알아서 주문하도록 하죠.”

이후 변호사는 익숙하게 몇 가지를 주문했고, 직원은 룸을 나갔다.

“그런데 두 분 관계가?”

“동기에요. 나이는 제가 좀 더 많고요.”

“그냥 대학 동기?”

“네.”

변호사는 볼을 감싸는 유영과 단유를 번갈아 보며 또 웃음을 지었다.

“뭐, 남녀가 그렇죠. 처음에는 친한 오빠 동생 하다가···.”

“그런 거 아닙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유영이가 불편해해요.”

“그럴까요?”

“아무튼, 식사 나오기 전에 잠깐 이야기 좀 듣고 싶은데요.”

변호사의 웃음이 잦아들었다.

“음, 일단 알아봤는데요. 사고가 난 뒤, 정확히 3일 뒤에 택시공제조합에 사고접수가 되었더군요.”

“왜, 그 날 바로 안 되고요?”

“이게 좀 관례적인 문제도 있는데, 영업용 택시의 경우 사고가 나도 바로 보험 접수를 하지 않는 경우가 있어요.”

“왜요?”

“회사 입장에서는 보험 적용이 된다는 것은 다음 보험 계약일에 보험료 납입 금액이 인상된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그러면 회사에게 불이익이 가잖아요? 그래서 큰 사건이 아니라면, 보험 접수보다 택시 기사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경우가 생기는 거죠.”

“이해가 안 되네요. 운전자도 이런 경우에 보상받으려고 가입하는 거 아닌가요?”

“일반 운전의 경우에도 작은 접촉 사고일 경우에는 보험사를 부르지 않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런 것과 비슷해요. 다만 이 경우에는 회사가 기사에게 책임을 넘긴다는 게 다르죠. 택시 기사의 경우도 사고가 크지 않다면 자기가 책임지려 하고요.”

“이상하네요. 뉴스에서 보기론 택시 기사분들 하루 벌어 하루 먹는다고 할 만큼 돈을 많이 벌지 못 하시는 걸로 아는데, 그런 분들이 이런 사고를 자기 돈을 들여 책임을 진다고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회사에서 짤릴 수 있으니까요.”

결국 지금 당장의 손실을 감수하고 미래 수익을 보장받기 위해 회사 대신 기사가 책임을 진다는 이야기다.

“그럼 왜 3일 뒤에 사고접수를 한 거죠?”

“그게, 그쪽 택시에 타고 있던 승객 분 쪽에서 클레임을 강하게 걸었더라고요. 알아보니까 그 승객 분이 단유씨가 다니는 학교 교수님의 자제분이시던데요.”

그건 이미 그때 알아보았다.

“그 교수님께서 클레임을 거니까, 회사에서 바로 깨갱하고 넘어간 거죠. 아마 다른 사람이었으면 그렇게 쉽게 태도를 바꾸지 않았을 거예요.”

교수라는 직함, 그 사회적 신분이 대단하긴 한가 보다. 전화 한 통에 회사가 태도를 싹 바꿀 정도라면.

“뭐, 아무튼 그쪽은 비용을 조금 줄이고 싶은 생각이었는지 새벽군의 합의금을 상당 부분 낮추려 했던 모양이에요. 하지만 제가 나선다는 걸 알고는 태도를 바꾸더군요. 그쪽 손해사정사가 조금 당황스러워 하던데요? 게다가 단유씨 자전거 문제도 확실히 그쪽엔 충격이었겠죠.”

꽤 유명한 자전거 센터에 단유의 자전거를 맡기고 의뢰를 했더니, 금액이 상상 초월할 정도로 나왔다. 애초 손해사정사 측에서는 자전거가 튼튼해서 별문제가 없더란 이야기로 마무리 지으려 했지만, 수리점에서는 자신들도 처음 보는 고탄력 소재의 프레임인데다 앞바퀴의 휠부분이 다소 휘어졌는데 이건 수리를 한다고 해도 공임비가 엄청나게 나올 거라고 증언했다. 만약 교체를 한다고 하면, 부품을 구할 수나 있을지 모른다고.

“그 부분은 뭐 대충 됐고요, 그럼 새벽이 합의금 문제는 깨끗하게 정리된 건가요?”

“네. 일단 그 부분도 제가 처리하면 아마 다음 주면 합의금이 나올 겁니다.”

“고맙습니다.”

“뭘요. 오히려 별일 안 하고 돈만 챙기는 것 같아 제가 더 죄송하죠. 아, 그리고 여기.”

변호사는 허리 숙여 옆에 두었던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들었다.

“자동차 등록 서류랑 몇 가지 서명하셔야 할 것들인데, 작성하시면 됩니다.”

“차는 나왔나요?”

“네. 주차장에 세워뒀으니 타고 가시면 됩니다. 서류 처리는 제가 알아서 끝내도록 하죠.”

마침 직원이 카트를 끌고 들어왔다.

“마침 타이밍 좋게 오네요.”

긴 이야기를 하는 동안 식욕이 돋았다는 듯, 변호사는 포크를 집으며 웃었다.

“밥 먹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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