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심(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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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온 도경은 숨을 헐떡였다. 어떻게 집까지 왔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다. 현관 앞에서 숨을 헐떡이다 불에 덴 듯 놀라며 신발을 벗어 던지고 거실로 뛰어갔다. 그리고 신경질적으로 커튼을 잡아 끌었다. 거실을 환히 밝히던 바깥의 불빛이 암막 커튼에 가려졌다.
커튼 자락을 붙잡은 채로 숨을 헐떡이던 도경의 숨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주변의 상황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고요한 어둠에 잠겨 있는 거실. 매일 보던 거실이지만 어쩐지 낯설게 느껴진다.
“상미의 근처를 얼씬거리면,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갑자기 귓가를 울리는 목소리에 도경은 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쳐들었다. 목뼈가 나가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정도로 주위를 홱홱 돌아보던 도경은 빠르게 거실 가운데 탁자로 향했다. 그리고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리모컨을 들어 TV를 켰다.
[···아침 인근 피시방에서 긴급 체포되었습니다. 남성은 여성의 이별 통보에 앙심을 품고 살인을 계획한 전 남자친구로 밝혀졌으며, 현재 경찰은 보다 구체적인 살인 동기와 방법을 조사 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 이 남성은 지난 밤 11시경 여자 친구를 찾아간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 과정에서 꽤 심한 다툼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에 이웃 주민들의 신고가···]
뉴스에서는 여기자의 리포팅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도경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집안에 드리운 고요함과 환청처럼 울리는 남성의 목소리를 지우고 싶은 마음에 틀었을 뿐이니까.
자신보다 한 뼘은 더 큰 키와 넓은 어깨를 가진 남자가 쏘아내던 눈빛이 떠오른 도경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어떻게 내 이름을 아는 거지? 진짜 여길 아는 거야? 회사도?’
‘아닐 거야. 내 이름은···그래, 사이트 관리자한테 물어서 알 수 있다고 쳐도 주소까지는 알 수 없잖아? 그 사이트 가입할 때 주소는 입력하지 않았잖아?’
‘아냐, 어쩌면 해킹해서 내 이름이랑 주소를 알았을지도 몰라. 그럼 회사 주소는 어떻게 알지?’
‘그래, 뻥카야. 모를 거야. 무슨 수로 안다는 거야!’
“내가 모를 것 같나요?”
“헉!”
도경은 너무 놀란 나머지 순간적으로 숨을 멈추며 눈동자를 빠르게 굴렸다. 하지만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고, 환청이라는 것을 알게 된 뒤에야 겨우 긴장을 풀 수 있었다. 그러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고, 갑작스러운 경직에 어깨 근육이 결렸다.
불안한 마음을 안고 살 수는 없다. 불안감을 만드는 근본 요소를 해결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 그의 말처럼 상미에게 접근하지 않고 사는 것은 해결이 될 수 없다.
그의 방해로 상미를 만날 수 없었지만, 분명 자신을 만난다면, 상미 그 아이도 자신을 기다렸다는 듯 반겼을 것이다.
그의 일상도 지켜야 한다. 그의 직장도 지켜야 하고, 지금의 삶도 지켜야 한다. 상미와의 관계도 진전시키면서 동시에 그의 삶도 유지하는 법. 간단하지 않은가?
다만 혼자서는 어렵다는 걸 인정한다. 그래, 모든 게임이 다 그렇지 않은가? 예부터 공주를 구하기 위해서는, 공주를 가두고 있는 괴물같은 수문장을 부셔야 하는 법이다. 이번에 그 수문장의 존재를 알았으니 그를 어떻게 공략할 것인지 연구를 하면 된다.
“자신 있으면, 해 보세요.”
또다시 환청이 들린다. 자신? 만약 이게 진짜 게임이라면 자신이 없다. 도경은 싸움도 해 본 적 없고, 운동을 자주 하는 편도 아니니까. 힘이든 체력이든 그 무엇도 그 남자에게는 견줄 수준이 안된다. 하지만 현실은 게임과 다르다. 현실에서는 자신의 부족을 채워줄 수 있는 것들이 많다.
돈. 돈만 있으면 그 부족함도 다 채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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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이렇게 자주 오시지 않아도 돼요.”
“그런 것 치고는 많이 반가워하는 표정인데?”
단유는 들고 온 것을 침대 옆 탁자에 내려놓으며 어머니께 먼저 인사했다.
“어휴, 매번 올 때마다 뭘 이렇게 많이 사와요?”
“어머니 드시라고 좀 사왔어요.”
“괜찮다니까.”
단유는 새벽을 슬쩍 보며 말을 이었다.
“새벽이야 병원밥만 먹어도 된다지만, 어머니는 맛있는 거 드셔야죠.”
“와, 왜 저는 병원밥이에요? 저도 병원밥 질리는데?”
“넌 빨리 나아야지.”
“형이 우리 엄마 아들 해야겠다.”
“나야 좋지.”
단유의 너스레에 어머니가 웃음을 지었다.
“단유군이 우리 아들이었으면 나도 좋지. 차라리 이번 기회에 아주 바꿀까보다. 맨날 사고나 치는 이런 놈보다 백배 낫네.”
“엄마도 말씀 되게 섭섭하게 하시네.”
“그럼 사고를 치지 말든가, 이 녀석아.”
웃음을 지으며 아들의 머리를 쿡 박는 시늉을 하시는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나 잠깐 화장실 좀 갔다올게.”
“네, 다녀오세요.”
어머니가 나가신 후, 새벽이 단유에게 말했다.
“매번 고마워요, 정말.”
“그런 소리 한 번이면 족해.”
“정말이에요. 형한테 받는 도움 어떻게 다 갚을지 걱정이라고요.”
서울에는 친구도, 친척도 없다. 그러니 병실에는 늘 어머니 혼자 새벽의 곁을 지켰다. 지방에서 올라와 아들의 병실 곁을 지켜야 하는 어머니 때문에 새벽도 속이 말이 아니었다. 아마 지금도 화장실을 핑계로 나가서는, 집에서 홀로 생활하실 아버지께 전화를 하고 계신 게 틀림없다. 식사는 잘 하시는지, 생활에 문제는 없는지 이야기를 나누고 계실 게다.
그런 어머니이기에 새벽은 혼자 있어도 괜찮다며 말씀드렸지만, 역시 아들 혼자 두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으신 어머니기에 내려가실 생각을 하지 않으셨다.
그런 와중에 단유가 이렇게 매일 와서 잠시라도 이야기를 나누고 필요한 것들을 사다주는 것이 심적으로 많은 도움이 된다.
“저 다음 주 월요일에는 김천으로 내려가려고요.”
“괜찮아?”
단유의 시선이 새벽의 다리 쪽을 향했다.
“금만 간 건데 괜히 요란을 떤 거니까요. 병원에서도 깁스만 제대로 하면 된다니까, 내려가서 요양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근처 병원에서 계속 진료를 받는 게 새벽 본인으로서도 도움이 되고 어머니도 혼자 아침을 챙겨 드실 아버지 걱정을 덜 테니 그게 맞다.
“방학 때 하고 싶은 게 많았는데···. 아, 그 택시 보험사에서 왔었는데요, 대인 배상금으로 입원비랑 치료비 같은 거 나온다네요.”
“다행이네.”
“그런데 8:2라서 택시 수리비의 20%는 제가 물어야 된대요. 블랙박스 확인해서 한 거라는데.”
새벽은 조금 억울하다는 눈치로 말을 꺼낸 거지만 그렇다고 이를 어떻게 해결할 방법은 없었다. 그런데 새벽은 단지 억울함을 토로하기 위해 그 말을 꺼낸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제 자전거, 아니 형 자전거 있잖아요? 그건 고장이 안 났다네요?”
사고 당시, 새벽도 경황이 없어 자전거가 어떻게 됐었는지 살펴볼 겨를이 없었는데 손해사정사 직원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자전거에 수리를 요하는 고장이나 훼손이 없었다는 증언이었다.
“손해사정사 말로는 정말 고급 소재 자전거라서 그런지 모르겠다며 혀를 내두르시더라고요. 만약 그 자전거가 부서지거나 했다면 택시 기사분은 엄청난 돈을 물었을지도 모른다면서. 그런데 그 자전거, 진짜 비싼 거였어요?”
단유는 볼을 긁적이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난감해했다. 비싸게 샀냐고 묻는다면, 몇백 만원씩이나 하는 고가의 자전거는 아니었으니 ‘아니’라고 대답하겠지만, ‘비싼’ 자전거냐고 가치를 묻는다면 아니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티타늄 소재 프레임과 직접적인 비교를 해보진 않았지만, 단유의 마법으로 당시 구현 가능한 최강의 경도와 탄성을 부여했으며, 잘 드러나지 않는 부품―기계식 디레일러, 디스크 브레이크, 풀리 등―들도 성능에 맞춰 마법적 개조를 가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얼마나 물어주기로 했는데?”
단유는 대답을 피하며 물었다.
“일단 대물 12만원이요.”
그쪽에서는 수리비로 60만원이 나왔다고 한다. 뭐가 그렇게 많이 나왔나 싶은데, 범퍼랑 헤드램프를 수리해야 한다고 손해사정사가 알려주었다. 그런데 ‘일단’이란 말이 걸린다.
“그런데 문제는 형이랑 상의를 해야 돼요.”
“응?”
“당장은 운행에 문제가 없는 수준이니 괜찮지만, 비싼 자전거는 스크래치가 나거나 혹은 휠에 문제가 있거나 하면 수리를 한다는데, 그래서 수리를 해야 한다면 돈이 많이 나올 거라고 하고, 그러면 그 돈을 보험사에 지급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물어보더라고요. 어떻게 하겠냐고. 그래서 생각해보니까 이걸 저 혼자 결정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죠. 어차피 수리가 필요한지를 알아보려면 수리점에 맡겨야 하고, 저는 당장 병원에 묶여 있으니 나갈 수도 없고요. 그리고 원래 형 거니까, 수리비를 받아도 형이 받아야 하지 않겠어요?”
뭔가 복잡한 일에 얽힌 듯한 기분이었다. 자전거를 개조한 이후 한 번도 수리점 같은 곳에 맡겨 본 적이 없기도 하거니와, 맡긴다고 한들 수리점에서 그 자전거의 정확한 금액을 계산해낼 수 있을까?
“알았어. 그리고 ‘일단’이란 말은 다른 게 또 있다는 이야기야?”
“그게요, 거기 택시에 타고 있던 분 있잖아요?”
단유는 사고 당시 택시에서 내려 오만하게 굴던 여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여자도 사고 이후에 병원에 입원을 했대요. 일단 택시공제조합 측에서 그 여자에 대한 치료비를 전액 부담하는데, 저한테도 과실이 있기 때문에 향후 합의금 계산 시에 그 금액을 상계처리한다네요.”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아니, 일단 당장에 떠오르는 건 그 여자가 다친 곳이 보이지 않았다는 거였다. 물론, 택시가 급정거를 했으니 그 상황에서 뒷자리에 타고 있던 여성이 다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의 기억에서는 어떤 통증을 호소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단유에게 엉뚱한 걸 물으며 신경질을 부리지 않았던가.
‘아, 어쩌면 아파서 신경질을 냈던지도.’
그렇지 않고서는 안하무인으로 행동했던 여자의 심성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사실 저나 어머니나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서 조금 헤맸는데요, 아무래도 형한테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될 거 같아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잘했어. 내가 봐줄게. 자전거도 수리점에 맡겨서 알아보고, 그 합의금인가 하는 것도 알아보고 이야기해볼게.”
“그냥 자전거만 부탁드릴게요. 합의금이야 뭐, 제 실수도 있으니까 조금 덜 받는다고 해도 이해해야죠.”
“아냐. 내가 아는 사람이 있는데, 그분한테 부탁하면 잘 알아봐 주실 거야.”
“너무 실례되는 걸 부탁하는 거 아니에요? 별로 큰일도 아닌데.”
“큰일이 아니니까 간단히 알아볼 거야. 넌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낫는 것만 생각해.”
“제가 좀 칠칠치 못해서요.”
“그런 말 하지 마. 솔직히 내가 잘 모르니까 여기서 장담은 못 하겠지만, 그 사고에서 네 실수는 있다고 해도 그렇게 크지 않아. 오히려 그 택시가 잘못한 게 더 많다고 생각해, 난. 같이 있으면서 신경 써주지 못했던 나도 도의적인 책임을 느끼니까 넌 그냥 푹 쉬기나 해.”
“에이, 그건 아니죠. 형이 무슨 책임이 있어요?”
“알았어. 아무튼 네 말대로 별일 아니니까, 그냥 알아만 볼게. 그건 별로 힘든 것도 아니니까. 알겠지?”
“예, 형. 고마워요.”
마침 어머니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신 어머니와 함께 앉아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다 단유는 병실을 나왔다.
그리고 택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새벽에 대한 이야기를 한 뒤, 도움을 받을 방법을 물었고, 택윤은 자신이 그 손해사정사에게 전화를 해보겠다고 답했다.
“아뇨, 변호사 한 명만 소개해주세요.”
“변호사요?”
자세한 정황은 모르지만, 들은 바에 따르면 굳이 변호사를 불러 처리할 정도의 사안은 아니라는 판단이 들어 택윤이 머뭇거렸다.
“그것 말고도 이것저것 여쭤 볼 게 있어서 그래요. 앞으로도 도움 받을 일도 많이 생길 것 같아 그러니, 그쪽으로 유능하신 분 소개 시켜 주세요.”
“비용이···.”
“돈 걱정은 마시고요.”
“아.”
택윤은 잠시 깜빡했다는 듯, 자신의 머리를 툭 하고 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