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심(2)
-------------- 598/952 --------------
사고로 정신이 없어 몰랐는데 주위에 지나가던 학생들이 조금씩 몰리기 시작했다. 학생뿐 아니라 차도 막히기 시작했는데, 택시 때문에 병목현상이 생긴 탓이었다. 그래도 구급차는 일찍 도착했다.
“유영씨,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
“예, 뭔데요?”
“저기 저 자전거 좀 챙겨 주실래요?”
“자전거요?”
“얘가 자기 아픈 거보다 자전거를 더 신경 쓰네요.”
유영의 입꼬리가 어색하게 올라갔다.
“웃으면 안 될 상황인데.”
“미안해요. 귀찮은 부탁드려서.”
“아뇨, 괜찮아요. 제가 맡아 놓을게요.”
“여기 자물쇠요. 본부 옆 자전거 주차장에 세워두시기만 하면 돼요.”
“네.”
“제가 조금 있다가 다시 연락드릴게요.”
“예. 새벽 씨, 조금만 참아요.”
“으윽, 아, 네. 전, 괜찮, 습니다.”
애써 미소를 지으려는 새벽의 모습이 참 안쓰럽게 느껴졌다. 단유는 구급차에 같이 올라타며 유영을 향해 다시 한번 고맙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구급차의 뒷문이 닫힐 때, 유영의 뒤로 고급 승용차 한 대가 빠르게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유영을 향해 지었던 표정이 빠르게 굳어갔다.
단유가 응급실 앞 대기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을 때, 유영이 다가왔다.
“왜 왔어요. 안 와도 된다니까.”
“어떻게 안 와요.”
그날 저녁, 새벽과 같이 식사했던 자리가 그렇게 좋았나? 보기엔 말수도 적어서 별로였던 게 아닐까 짐작했었는데.
“어떻대요?”
“골절이랑 근육 긴장으로 통증이 심할 뿐이고, 깁스하고 쉬면 나을 수 있대요.”
“심한 건 아니죠?”
두 달간 왼쪽 다리를 못 쓴다고 하니, 심하다면 심할 수도 있겠다. 달리 생각하면 두 달 동안 다른 데 신경 쓰지 않고 책만 볼 수 있으니까 자기 계발의 시간으로 이용할 수도 있겠다, 는 단유의 생각을 새벽에게 전하면 아마 크게 실망하겠지만.
“이왕 왔는데 얼굴 보고 가야죠.”
“지금, 볼 수 있어요?”
“조금 전에 검사실 갔다 와서 침대에 누워 있어요.”
머뭇거리는 유영을 뒤에 데리고 새벽에게로 향했다.
“형.”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단유를 부르던 새벽이 단유 뒤에 따라오는 유영을 보곤 벌떡 일어나려다 통증을 느끼며 이를 꽉 깨무는 모습에 단유는 피식 웃고 말았다.
“누워 있어. 여기 유영 씨가 일부러 너 괜찮은지 보려고 오셨대. 괜찮지?”
“괜찮고말고요. 정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괜찮으세요?”
“그럼요. 별로 아프지도 않아요. 솔직히 부끄럽기만 하죠. 바로 피하면 되는데 그걸 못해서. 여기 왼쪽 다리만 살짝 부딪힌 거예요. 다른 쪽은 건강해요.”
단유가 보기에 새벽은 지금 입에서 나오는 대로 생각 없이 말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까 의사 선생님의 말씀으로는 머리에는 이상이 없다고 했는데.
“집에는 연락했어?”
“예, 조금 전에요.”
“걱정 많이 하시지?”
“그렇죠, 뭐. 교통사고라고는 말 안 하고, 자전거 타고 가다가 넘어졌다고만 했어요. 그래도 크게 안 다쳤냐고 소리를 지르시더라고요. 앞으로 자전거 타지 말란 이야기도 하시고. 그런데요, 형. 자전거는···.”
단유가 유영을 바라보자, 유영이 ‘본부 옆 주차장에 세워놨어요’라고 말하며 새벽을 안심시켰다.
“내가 나중에 너희 자취집에 가져다 놓을게.”
“고마워요, 형.”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자전거를 주지 말 걸 그랬다는 생각도 들어.”
“그건 아니죠. 제가 실수를 한 건데.”
“그건 맞아. 주변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네 실수도 있어. 그런데 네 실수만은 아냐. 그 차는 규정 속도 이상의 속도를 냈고, 전방 주시 의무 위반도 있으니까. 아, 조금 있다가 그 택시 가입된 보험사에서 연락 올 거라고 하더라. 그건 네가 전화를 받아야 할 거야.”
“예.”
“혹시 모르니까, 전화 받고 나서 내용을 알려줘. 만약 부당하게 처리된다면 따로 조치를 취해야 할 테니까.”
“신경 써주셔서 고마워요.”
“됐어. 이제 푹 쉬어.”
“가시게요.”
“왜? 같이 있어 줘?”
“아, 아뇨.”
새벽의 눈동자가 뒤를 향하는 것을 보고 단유는 코웃음을 쳤다.
“집에 들러서 필요한 것들 좀 챙겨 와야지.”
“아.”
“칫솔이나 이런 건 그냥 사면 되겠지만, 위에 걸칠 옷 정도는 미리 준비해놔야 하지 않겠어? 슬리퍼라든가. 아니면 그냥 다 새 걸로 사다 줄까?”
새벽은 깜짝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아뇨, 아뇨. 뭐하러 새로 사요? 집에 있는 거 쓰면 돼요.”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내가 가져올게.”
“죄송해요.”
몇 번을 더 물은 뒤에야 새벽은 더듬거리며 노트북이랑 충전기 따위의 것들을 읊었고, 단유는 그것들을 기억해서 가져오겠노라 대답했다.
“자상하시네요.”
“제가요?”
“네.”
“아픈 사람인데 옆에 따로 봐줄 이도 없으니까요.”
“아프면 다 그렇게 해 줄 수 있어요?”
“가까운 사람이라면요.”
유영은 진지하게 자신에게 어떤 병이 있지는 않았는지 떠올려보았다.
“이제 그만 가보셔도 돼요.”
“네? 아니, 저기 같이 가면 안 될까요?”
“어딜요? 새벽이네 집이요?”
“······.”
침묵이 잠시 흐른 뒤, 유영은 머뭇거리다 허릴 숙였다.
“가보겠습니다.”
“오늘 고마웠어요.”
“네.”
“이렇게 병문안까지 와주신 것도 고맙고요.”
“네.”
단유도 마주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병원 정문 앞에서 등 돌리고 가는 단유를 잠시 바라보던 유영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어휴, 바보네.’
그때 단유가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 유영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어찌 생각해보면 참 운이 없는 경우라고도 할 수 있다.
“어떻게 시험 다 끝내고 이런 일을 당하냐?”
또 달리 생각하면, 운이 좋았다고 할 수도 있고.
“병상에 누워 시험을 안 보는 것보단 낫지 않아요?”
“으이구, 이 철없는 것아.”
새벽의 어머니의 찰진 스냅에 새벽이 비명을 질렀다.
“아야!”
“엄살은.”
그래도 아들의 상태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시니 저렇게 때리는 시늉이라도 하신다. 아니, 시늉이 아닌가?
“다른 사람도 보는데 좀 그러지 마요.”
그러자 어머니가 옆에 앉은 단유를 돌아보며 만면에 미소를 짓는다.
“내가 이놈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그렇게 잘 챙겨 준다고요? 고마워요.”
“아닙니다. 새벽이 덕분에 저도 많이 도움받았습니다.”
“엄마, 나 도와준 거 하나도 없어요. 저 형이 맨날 나 도왔지.”
“으이구, 자랑이다, 이놈아. 이놈이 이렇게 철딱서니가 없어요. 내 아들이지만 저런 철없는 놈이 어떻게 서울대를 갔는지 몰라.”
단유는 그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런데 어쩜 이렇게 사람이 진중해? 그래도 몇 살 더 먹었다고 큰 형 노릇 하는 것도 보면 고맙기 이를 데가 없어요.”
어머니는 평소 새벽이 전화해서 단유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며, 그래서 전혀 낯설지 않다 말씀하셨다. 그렇게 사소한 이야기로 잠시 시간을 보내다가 두 사람만 이야기하도록 두고 단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앞으로도 우리 새벽이 잘 부탁해요.”
“네. 친동생처럼 잘 돌볼게요.”
어머니의 얼굴에 보름달 같은 미소가 떠오른다.
****
“대휘야.”
―네, 교수님.
“어디지?”
―···집입니다, 교수님.
“아, 그럼 잠시 이쪽으로 오겠나? 내가 술을 좀 마셔서 말이야.”
―···어디로 갈까요?
통화를 마친 붉은 얼굴의 교수가 기분 좋은 얼굴로 마주 앉은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끝내기 아쉬운데, 2차 가셔야지요?”
“이거 넙죽넙죽 받아먹는 것 같아 미안한데요?”
“처장님 덕분에 저희 딸이 면을 서게 됐는데, 애비로서 이 정도 성의 표시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슨 말씀을. 교수님께서 저희 학교를 위해 헌신하신 거에 비하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어차피 빈 자리였는데요. 오히려 훌륭한 인재를 너무 작은 자리로 보내는 것 같아 죄송할 따름입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비록 제 딸이지만 그런 과찬을 받을 정도는 아니죠. 그저 미국에서 학위 하나 받았을 뿐인데요.”
“그저라뇨? 무려 미국 명문대 출신 아닙니까?”
“허허, 우리 처장님께서 너무 띄워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속없는 이야기들이 오고 가며 흥을 돋운다. 옆에서 미소를 팔던 여인들이 그들의 빈 잔에 술을 채워주고 그들은 1차의 마지막 잔을 비웠다.
“미친다, 미쳐.”
―또, 왜? 혹시 교수님?
“그래. 이 시간에 부르고 지랄이다.”
―아주 지랄이 풍년이네. 술 마셨대?
“내가 지 개인 기사야, 뭐야? 아주 부려먹으려고 난리다.”
―또 룸이야?
“두말하면 잔소리지.”
―야, 그러지 말고 그냥 확 질러. 더러워서 못 해 먹겠다고. 내가 공부하러 왔지, 니 시다바리 하러 왔냐고 질러버려.
“···그게 그렇게 쉬웠으면 이 고생을 했겠어?”
―···그래, 그도 그렇지. 정말 흙수저라 고생이다.
“내가 진짜 제대로 공부해서 꼭 출세하고 만다.”
―그래, 그게 진정한 복수지.
“···미안하다. 늦은 시간에 전화해서. 아주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다.”
―아냐, 임마. 친구가 뭔데? 이럴 때 이야기 들어주는 게 친구지.
“고맙다.”
―별소릴 다 한다. 야, 밤도 늦었는데 운전 조심하고. 사고 안 나게, 응?
“알았어. 얼른 자라.”
대휘는 전화를 마치고 고개를 들었다. 네온사인이 빛나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입구에 들어서기도 전에 끈적끈적한 공기가 불어와 숨을 막히게 하는 기분이었다.
“아우, 스트레스.”
대휘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아래로 발을 내디뎠다.
****
마지막 기말고사를 끝으로 1학기가 끝이 났다. 고등학생 때는 이 시기에도 교실에 처박혀 교과서에 눈을 들이밀고 있어야 했는데, 그런 점에서 확실히 대학은 시간적 여유가 많은 편이다. 하지만 강제하지 않는 이 시간에도 ‘자율적’으로 공부를 하지 않으면, 비싼 등록금 내며 다니는 이유가 없다.
그러나 1학년은 다르다. 전국의 수재들만 모아놓았다는 서울대라고 해도, 고교 3년간 청국장처럼 묵혀놨던 젊음의 혈기를 계속 묵힐 1학년은 별로 없었다. 개강까지 대략 2개월 반. 그들은 자유를 찾아 떠나기 시작했다. 산으로, 바다로, 혹은 해외로. 어떤 이는 지방으로.
또 어떤 이는 PC방으로.
“내가 꼭 여길 와야 하는 거야?”
“해주기로 했잖아?”
“그건 네가 비밀을 지킨다는 전제 조건이 있었지. 넌 그 전제 조건을 깔끔히 무시했고.”
“사소한 건 따지지 말자?”
“그냥 니 남친 불러.”
“니가 불러 줄래?”
단유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무슨 게임 대회 예선이라는데, 왜 자신이 이곳을 순순히 따라왔는지 모르겠다는 심정이었다.
강의 시간을 쫓아 다닐 필요도 없고, 시험 준비나 리포트 걱정은 할 필요도 없는, 자유의 시간이었다. 그 자유의 시간을 얼마나 기다려왔고, 어떻게 알차게 보낼까를 계획하며 있었는데, 종강의 시간에 맞춰 말도 안 되게 게임 대회 따위에 끌려오게 되었다.
물론 꺼낸 말이 있긴 해도 지킬 필요는 없다 여겼다. 쌍방의 이행 조건이 어긋났으니까. 그런데도 단유는 따라왔다.
“넌 정말 좋은 친구야.”
“됐다. 어디로 가면 돼?”
“가서 물어봐야지. 아마 접수 순번대로 자리 정해져 있을 거야.”
씩씩하게 안내원에게로 걸어가는 상미를 보며 단유는 몰래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엄살을 부리긴 했지만, 그렇게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일도 아니고, 무엇보다 친구가 저렇게 즐거워하는데, 즐거워하는 친구를 보는 게 기분 좋은 일이다.
문득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뒤쪽에는 대회 예선에 참가하기 위해 PC방을 찾아온 이들로 인해 번잡했고, 그래서 누구의 시선이었는지 알기 어려웠다. 하지만 즐거운 기분을 깨뜨릴 정도의 흉흉함이 느껴졌다.
상미를 따라온 또 다른 이유.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로 그녀를 쫓는 그 시선으로부터 친구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더라도 안심할 순 없으니까.
“야, 이쪽이래.”
상미의 부름에 단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닭이 홰를 치듯 팔을 휘젓는 상미를 보며 단유는 표정을 풀었다.
“1등 하자, 우리?”
“그게 마음대로 돼?”
“돼.”
“어떻게?”
“니 실력은 내가 인정하니까.”
니가 그걸 인정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단유의 말에 상미는 호탕한 웃음으로 단유의 등을 두드렸다. 그래, 하는 데까지는 해보자.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는 게 낫고, 이왕에 하는 거면 1등하는 것도 좋지.
지겹도록 1등만 해왔던 단유의 마음가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