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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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저것 하다 보니 어느새 6월이다. 그 사이 조별 과제는 무사히 마쳤고, 교수님께 호평을 받으며 그간의 노력을 보상받을 수 있었다.
“다 오빠 덕이에요.”
“뭘, 전부 여러분들이 잘해주신 덕분이죠.”
“내가 발표를 잘해서 그래요. 그쵸?”
“네. 발표 잘하셨어요.”
서로의 노고를 치하하는 시간은 짧게 끝내고, 뒤풀이 겸으로 함께 점심을 먹는 것으로 조별 활동의 끝을 맺었다.
“다음에 또 같이했으면 좋겠네요.”
PPT를 맡았던 남학생의 소감에 다른 이들도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그중 유영은 단유를 지긋이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는 모양새였다.
“기회가 된다면요.”
나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조별 활동이 자신의 공부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도 할 수 없어, 단유는 그렇게만 말했다. 그리고 유영과 눈이 마주쳤다. 눈을 반짝이는 유영이 살짝 부담스러웠지만, 언제나 그랬듯 단유는 옅은 미소로 거리를 지켰다.
이제 남은 것은 기말고사다.
첫 기말고사였지만, 수업의 난이도를 생각하면 그렇게 어려운 편은 아니다. 죽어가는 얼굴을 하고 도서관에 틀어박혀 있는 선배들에 비하면 말이다. 하지만 1학년 1학기부터 학점 관리에 들어간 신입생들도 없지 않아, 새벽까지 개방된 열람실에서 허옇게 뜬 얼굴로 책을 보다가 잠을 쫓기 위해 도서관 앞마당을 서성이는 좀비 같은 사람들도 종종 볼 수 있다고 했다.
“너도 그중 하나고?”
“그렇죠, 뭐.”
피곤을 눈두덩에 덕지덕지 붙인 새벽이 하품을 크게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형은 공부 많이 하셨어요?”
“대충.”
“긴장도 안 되나 봐요.”
“긴장해서 시험 보면 망쳐. 알잖아?”
“알아도 안 되는 일이 있어요. 저는 형처럼 강심장도 아니라고요.”
“열심히 했으니까, 잘할 거야.”
“고마워요.”
시험은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어렵고, 힘들고, 피곤하다. 아무리 단유라고 해도 시험의 부담감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그래서 강의 별 기말고사가 끝날 때마다 안도와 해방감을 느꼈다. 큰 산, 까지는 아니더라도 언덕 하나를 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였다. 단유가 잠시나마 경계심을 풀었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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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씨발 더러워서 못 해 먹겠네.”
“더러워도 어쩌냐? 입에 풀칠하고 살려면 이렇게라도 해야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이게 사는 거냐?”
대희는 작은 소주잔을 꽉 움켜쥐고는 부들부들 떨다시피 했다. 마주 앉은 친구가 쳐진 눈꼬리를 문지르며 술을 따라주었다.
“어쨌든 너랑 나랑 이렇게 술잔 기울이며 살고 있지 않냐?”
“씨발, 날이 갈수록 입에 걸레만 물고 살게 되는데, 이게 사는 거야?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게 이런 건 아니잖아.”
풀 길 없는 분노를 안고 사는 게 도움이 될 리 없다. 술에 털어 넣으라는 충고를 친구가 건넨다.
“됐다. 계속 곱씹을수록 기분만 좆같아지니까 그냥 술이나 마셔.”
“크으.”
친구는 대희가 얼굴을 찡그리는 걸 보며 함께 잔을 비웠다.
“술맛 좋네. 안 그러냐?”
“좋긴···, 쓰기만 쓰다.”
“왜 그런 말 있잖아? 인생보다 쓴 술은 없다고.”
“쓴맛도 질린다, 질려.”
친구는 젓가락으로 앞에 놓인 파전을 먹기 좋게 갈기갈기 찢었다.
“어쩌겠어. 흙수저로 태어난 게 죄지. 그래도 우리가 준희보다는 낫지 않냐? 준희, 걔는···.”
“야, 걔 이야기는 꺼내지도 마라.”
슬쩍 대희의 눈치를 보는 친구.
“왜? 불쌍하냐?”
친구의 물음에 대희는 짧게 혀를 차며 자신의 술잔에 술을 채웠다.
“내 인생도 처참한데 다른 사람 신경 쓸 틈이나 있어? 신경 쓰기 싫어.”
“걔도 참 독해. 어떻게 싫다는 소리 한 번을 안 하지?”
“안 하긴.”
“했냐?”
대희는 대답 대신 술을 털어 넣었다. 입가에 묻은 소주를 엄지손가락으로 훑으며 입을 열었다.
“···됐다, 이 이야긴 그만하자.”
“하긴. 걔도 여잔데 그런 대접 받으면서 한마디 안 했을까.”
친구의 중얼거림에 대희는 목소리를 깔았다.
“그만하라고. 그리고 입조심 해. 여기 듣는 귀가 얼마나 많은데.”
“야. 여기 시끄러워서 들리지도 않아.”
“그래도 조심하라고, 새끼야.”
친구는 고개를 끄덕이며 파전 하나를 집어 오물거렸다.
“사람들은 알려나 모르겠다. 저명하신 교수님의 실체를.”
대희는 고개를 저었다.
“저명은 개뿔. 서울대 교수가 뭐 별거 있는 줄 알아? 서울대? 그것도 다 옛날 말이다. 요즘 서울대 별거 없어. 점점 더 별거 없어지는 중이고. 지방 삼류대학이랑 서울대랑 차이도 없어.”
친구는 키득거리며 대희의 말을 부정했다.
“야, 아무리 그래도 서울대다. 지금 여기서 얘 서울대 대학원 다닌데요, 라고 소리쳐봐. 사람들이 다들 널 다르게 볼걸? 아니, 서울대생이 왜 이런 허름한 데 있대? 이러면서. 무슨 말인고 하니, 아직까지도 서울대의 명성은 여전하단 소리고, 넌 그 명함 하나로도 앞으로 살길이 막막하진 않다는 희망이지.”
“그거 다 지랄인 거지. 학교 안에서 얼마나 많은 일들이 벌어지는데. 학교 명성 더럽힌다고 자기들끼리 쉬쉬하고, 소문내지 말라고 협박하고···.”
대희의 소주잔은 비기가 무섭게 채워지고 또 채워졌고, 밤이 깊어갈수록 그의 푸념은 끝날 줄 몰랐다.
****
서울대 내부를 들락날락하는 차량의 수는 하루 1만 대를 훌쩍 넘는다. 통학용 버스는 기본이고, 교수들의 차량과 학생들이 끌고 온 차들, 그리고 택시, 버스, 화물차, 승합차들로 좁은 학내 도로가 비좁을 정도다. 그에 비해 주차 시설은 턱없이 부족해, 민원이 많이 들어오기도 한다.
이런 사정이니 도로 위에서 어떤 사고가 나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 나올 법하다. 물론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주의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긴 하지만, 사고는 일방의 조심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학내 도로의 규정 통행 속도는 시속 30㎞. 그러나,
“아저씨, 좀만 빨리 가주세요.”
“네.”
택시 기사를 채근하는 학생들의 주문에 ‘규정 속도를 준수해야죠’라고 대답할 이는 별로 없다. 시속 40~50㎞로 달리는 차들로 인해 언제라도 사고가 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야, 조심해!”
주차장에서 자전거를 빼서 나가려는 새벽을 붙잡으려 했지만, 코너를 돌아오던 차의 속도가 더 빨랐다. 새벽이 너무 놀라 페달에서 발을 뗐지만 달려오던 차는 그보다 더 빨리 자전거 앞바퀴를 치고 지나갔다.
끼익, 브레이크 밟으며 차가 급제동하는 소리와 쾅, 부딪히는 소리가 거의 동시에 나며 새벽은 뒤로 튕겨 나갔다.
“새벽아!”
단유가 달려가 새벽의 상태를 살폈다.
“으으.”
무릎께를 붙잡고 신음을 흘리는 새벽은 이를 악물고 있었는데 고통이 꽤 심한 듯 보였다. 시선을 내려 살피니 청바지 위로 모래에 쓸린 자국과 올이 나간 사이로 배어 나온 짙은 핏물이 보였다.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있어.”
“아, 아파요.”
“조금만 참아, 바로 119 전화할게.”
그 사이 택시 기사가 차에서 내려 단유의 뒤로 섰다.
“학생 괜찮아요?”
새벽은 신음을 참는 듯 이를 악무느라 대답할 겨를이 없었고, 단유는 119에 신고하느라 대답할 수 없었다.
“여기 서울대고요, 공과대 31동 앞이거든요? 네, 교통사고인데, 자전거에 타고 있다 부딪혔습니다.”
단유는 신고를 마치고 새벽에게 물었다.
“다리 말고 다른데 다친 데는 없어? 머리는?”
“···괜찮은 것 같아요.”
‘아, 이거 참’ 곤란하다는 듯 새벽을 내려다보던 택시 기사가 핸드폰을 꺼내 회사에 전화를 걸 때, 택시 뒷문이 열리며 감색 정장 차림의 20대 중반 혹은 그 이상으로 보이는 여자가 내렸다. 그녀는 다가와 새벽을 슬쩍 보곤 기사에게 말했다.
“아저씨.”
“네, 네?”
“여기서 내릴게요.”
“아, 예.”
“계산해주세요, 얼른.”
카드를 눈앞에서 흔들어 보이는 여학생은 짜증 난다는 얼굴을 하고 새벽과 단유를 쳐다보았다.
“예, 금방 해드릴게요.”
기사는 카드를 받아 상체를 택시 안에 들이밀었다. 그 사이 여자는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어, 아빠. 나 다 왔는데, 여기 앞에서 사고가 나서. 아니, 난 안 다쳤고. 응. 그냥 교수회관으로 가서 기다릴 걸 그랬어. 괜히 아빠 있는 데로 간다고 하다가 사고 나고 말이야. 짜증 나게.”
단유는 도대체 어떤 여자인지 궁금했다. 바로 앞에 사고가 난 당사자가 누워있는데, 비록 가해자는 아니더라도, 사고 피해자 앞에서 ‘짜증 난다’는 식의 말을 하는 건 너무 예의 없지 않은가.
“내려온다고? 여기, 잠시만. 저기요.”
단유는 가만히 지켜봤다.
“내 말 안 들려요?”
“···왜 그러시죠?”
“여기 정확한 위치가 어떻게 돼요?”
이곳 학생은 아닌 모양이다. 그리고 저 정도 장성한 딸이 교수회관으로 가려 했다면, 아버지는 교수인 모양이다.
택시 기사가 다가와 카드를 내밀자, 신경질적으로 낚아채면서 단유를 쏘아붙였다.
“이봐요? 왜 사람이 묻는데 빤히 쳐다만 봐요? 예의 없게? 혹시 여기 학생 아니에요?”
“맞는데요.”
“그런데 여기 어딘지 몰라요? 아니면 사람이 묻는 말을 그렇게 씹는 게 예의에 어긋난다는 거 몰라요?”
“여기 제 친구가 다쳐서 누워있는 건 안 보이세요?”
“댁이 다친 건 아니잖아요? 왜요? 내가 그 학생을 치기라도 했어요? 사과라도 해야 돼요?”
여자가 독한 어조로 쏘아내다 귓가에 들고 있던 핸드폰에서 상대방이 뭐라고 한 모양이었다.
“응? 아, 몰라. 이상한 애가 말도 안 하고. 여기가, 아, 여기!”
여자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손을 번쩍 들고 흔들었다. 여자의 시선을 쫓아보니 백발의 남성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단유도 익히 눈에 익은 이였는데, 다름 아닌 물리학과 교수님이셨다. 지난 수리물리학 도강 시, 교탁 앞에 서 계시던 모습을 뵌 적이 있었다.
“주아야.”
“아빠.”
“어디 안 다쳤어?”
“응. 난 괜찮아.”
교수님의 시선이 바닥에서 신음을 흘리는 새벽과 그를 옆에서 지키는 단유에게로 옮겨졌다.
“자네들은? 괜찮나?”
“보시다시피 제 동기가 차에 부딪혀서 119에 신고를 한 참입니다.”
여자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아 말이 곱게 나오질 않았다. 교수님도 단유의 날 선 어투가 거슬렸는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러나 단유에게 뭐라고 하는 대신 옆에서 어쩔 줄 모르는 택시 기사에게로 시선을 옮긴 뒤 물었다.
“어떻게 사고가 난 겁니까?”
“아, 저기 제가 저쪽에서 내려오는데 저쪽 골목에서 자전거가 갑자기 나와서요. 이쪽이 내리막이기도 해서 속도가 조금 붙긴 했는데 너무 갑작스러워서 채 피하질 못했네요. 죄송합니다.”
“거, 보니까 택시 하루 이틀 운전하신 분도 아니신 거 같은데 조심 좀 하시지.”
“죄송합니다.”
택시기사는 도대체 왜 저렇게 허리를 굽혀 사과하는 걸까? 누구에게?
“아빠.”
“응.”
“나 아까 차 설 때 무릎을 조금 다쳤나 봐. 무릎이 시큰거리네.”
“그래? 너 병원 가서 검사받아봐야 하는 거 아니니?”
“그래야 하나?”
“거기 학생.”
콕 집어 묻는데 대답을 피할 수 없었다.
“네.”
“119 불렀다고 했지?”
“네.”
“주아야, 조금 있다가 119 오면 그거 타고 가보자.”
“근데 아빠. 나중에 가면 안 돼?”
“왜?”
“오늘 모처럼 빼입고 왔는데, 이대로 병원 가기 아깝잖아.”
“인사는 나중에 해도 돼. 아빠가 말 잘해 놓을게.”
“괜히 안 좋게 보시는 거 아냐?”
“안 좋게 보긴. 사고가 났는데 불가항력인 걸 어떡하겠어?”
저 모습만 보면, 상심에 빠진 딸을 다독이는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이다. 그들 앞에 자교 학생이 다쳐서 쓰러져 신음을 흘리고 있고, 옆에서 진땀을 흘리는 택시 기사가 있다는 상황만 배제한다면.
“아니면 아빠가 차 가지고 올까? 차라리 그게 더 나을까?”
“응. 나 무서워서 다른 차 못 타겠어.”
“그럼 기다리고 있어라. 금방 차 갖고 올 테니까.”
“응, 아빠.”
그때 새벽이 단유를 불렀다.
“형.”
“응, 왜?”
“자전거요.”
“자전거 뭐?”
“저거 저대로 두면 안 되는데.”
“신경 쓰지 마.”
“안 돼요. 비싼 거잖아요. 누가 가져가면 어떡해요.”
그새 자신이 구급차를 타고 가면 방치된 자전거를 누가 들고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나 보다. 단유가 나뒹굴던 자전거를 잠시 바라볼 때였다.
“오빠!”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유영이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