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596화 (596/956)

사랑은 아무나 하나(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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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동기랑 같이 있다고 언질을 줬건만, 새벽은 유영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가까운 곳에 추천할 만한 식당이 있다며 앞장선 새벽의 걸음은 경쾌했다. ‘레이디 퍼스트’라며 먼저 식당에 들어가도록 문을 열어주기도 하고. 뒤따라 단유가 들어갈 때, 새벽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형, 고마워요!”

딱히 고마워할 필요까지는 없는데. 새벽의 인사를 넙죽 받기도 뭐해서 단유는 대꾸없이 식당으로 들어갔다.

같은 학부의 동기라 그런지 대화가 어렵지 않았다. 셋 모두 신입생들이었기에 대학의 강의를 들으며 느낀 소감들만 늘어놓아도 충분히 대화가 가능했다. 특히 새벽이 연신 유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대화를 주도해나가서 단유는 크게 부담을 느끼지 않으면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처음 만났을 때, 비정상적이라 할 만큼 높았던 새벽의 텐션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식사를 마쳤을 즈음에는 차분한 평소의 새벽으로 돌아온 듯 보였고, 유영은 잘 먹었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형.”

“응?”

“쟤 형 좋아하는 것 같은데요?”

아무리 경험 없는 새벽이라도 눈치가 아예 없진 않았다. 여러 주제를 들먹이며 대화를 주도하던 와중에 유영이 틈틈이 단유를 살피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자신과의 대화는 겉돌기만 한다는 것이 느껴지니 새벽으로서도 흥을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거 아냐.”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좋아한다’는 감정을 갖기엔 유영과 단유의 교류했던 시간이 너무 짧았다. 첫눈에 반한다는 말도 있지만,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일이 단지 첫눈에, 외모만을 보고 결정된다면 과연 그 사람의 진심을 신뢰할 수 있을까? 설령 유영이 단유 본인도 모르는 매력을 짧은 시간에 찾아냈고, 그래서 단유를 좋아하게 됐다고 한들, 단유는 그 마음에 동조해줄 의사가 없었다. 단유는 유영을 잘 모르니까.

예전 나윤과 ‘연애’를 할 때도 그랬듯이, 상대에게 호감 이상의 마음을 품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가능하다. 지금의 유영은 아니었다.

“지금 우리 과에 몇 안 되는 여신이 눈에 안 찬다는 말씀이시네요? 역시 형은 대단해요.”

그런 뜻은 아닌데, 애써 부정할 마음도 안 생긴다. 단유는 혀를 차며 돌아섰다.

****

“어머, 너 오늘 좀 늦을 거라며?”

“아, 일찍 끝났어.”

퉁명스러운 어조로 대답한 유영은 하이힐을 벗어 던진 후 방으로 들어갔다. 백을 바닥에 내려놓고 그대로 침대 위에 풀썩 드러누운 유영은 긴 한숨을 내쉬며 이불보를 쓰다듬었다. 실크 재질의 부드러운 이불보의 촉감이 마음을 달랜다.

“밥 먹었어?”

주방에 계시던 어머니의 물음에 유영은 ‘먹었어’라고 짧게 대답하곤 눈을 감았다. 오늘 하루, 평소보다 심력을 많이 낭비한 탓에 유난히 피곤함을 느낀다.

“왜? 무슨 일 있어?”

방에 들어간 딸이 나오지 않고 조용히 있으니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들어온 어머니다. 유영은 누운 상태에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근데 왜 그러고 있어?”

“······.”

“남자가 별로였어?”

유영이 벌떡 일어났다.

“얘, 평소에 안 입던 옷을 빼입고 싱글벙글하며 나가는데 설마 모를 줄 알았어?”

“알아도 모른 척하지.”

“그래서, 별로야?”

“아니.”

“그럼?”

쉽게 입을 열지 않는 딸의 곁에 앉은 어머니는 책상으로 시선을 던졌다.

책상에 작은 액자가 있었는데, 그 액자에는 한 남자아이가 무릎을 꿇고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유영이 중학생 시절 우연히 본 영상의 한 컷을 컬러 사진으로 프린트해서 액자에 끼워놓은 것인데, 주인공은 다름 아닌 단유였다.

어머니는 어린 시절의 유영이 저 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보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가디스R이라는 걸그룹의 데뷔곡을 귀에 딱지가 생길 정도로 들어야만 했었던 기억이다.

“지난번에 쟤가 너랑 같은 학교 다닌다고 자랑하더니, 쟤 보러 간 거지?”

“나보다 나이 많아. 오빠야.”

“몇 번 봤다고 오빠니?”

“아무튼.”

어머니는 입꼬리를 올리며 슬쩍 물었다.

“직접 보니까 실망했어? 하긴 저건 연출된 장면이니까 멋있게 보일 수밖에 없었겠지. 그리고 시간도 많이 지났잖아? 나이가 들면 얼굴도 바뀌니까.”

“그런 거 아냐.”

“그럼?”

우물쭈물하더니 수줍게 고백한다.

“···더 멋있어졌어.”

어렵게 말을 뱉더니 입이 트였는지, 자신이 본 단유의 매력을 술술 털어놓는다.

“키도 크고, 얼굴은 더 잘생겨졌고, 어깨도 넓고, 눈도 되게 깊어. 말 안 하고 있을 때는 입술을 꾹 다물고 있는데, 되게 남자답고 멋있어.”

그 입술이 살짝 열리며 그 안으로 음료수가 들어가는 장면을 훔쳐보았을 때, 유영은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말도 조리 있게 잘하고, 똑똑하고, 배려심도 깊어.”

다른 조별 과제를 많이 경험해 보진 못했지만, 단유가 조장이었기에 이번 조별 모임이 순탄하게 진행된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어머니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완전히 빠졌구나, 빠졌어. 그런데 뭐가 문젠데?”

“나한테 관심이 없어?”

“아니, 왜? 우리 딸이 얼마나 예쁜데 어떻게 관심이 없대?”

“몰라. 그래서 신경질 나.”

“너 막 들이댄 건 아니지?”

“아냐, 안 그랬어. 그냥, 음료수만 사줬어. 자판기에서.”

“더 비싼 거 사주지 그랬니?”

“엄마, 나 놀려?”

“장난이야, 장난. 그런데 정말 왜 관심이 없을까? 객관적으로 봐도 우리 딸이 얼마나 예쁜데? 게다가 머리도 좋고.”

“엄마가 어떻게 객관적일 수 있어? 고슴도치도 자기 자식은 예쁘다는 말처럼, 엄마도 내가 엄마 딸이니까 예쁘다고 하는 거지.”

“아냐, 엄마 친구 딸들 다 봐도, 우리 딸이 제일 예쁘더라.”

“치.”

“그래서 실망했어?”

“실망 아니고, 그냥 조금 아쉬워서.”

“뭐가 아쉬워?”

“좀 더 적극적으로 해 보지 못한 게 아쉬워.”

“어이구, 우리 딸 아주 연애하고 싶어 안달 난 사람 같아?”

“그런 거 아닌 거 알잖아?”

“엄만 모르겠다. 알아서 잘해 봐.”

어머니는 끙, 소리를 내며 무릎을 짚고 일어섰다.

“엄마.”

“왜?”

“뭐 해줄 말 없어?”

“무슨 말?”

“조언 같은 거.”

“조언은 무슨. 네가 알아서 해.”

“엄마는 걱정도 안 돼?”

“걱정? 얘, 내가 언제 너한테 이래라저래라 한 적 있니? 그것도 다 경험인데 네가 알아서 해결해야지.”

유영의 어머니는 무간섭 원칙을 재차 천명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유영에게 공부하라는 등의 이야기는 일절 한 적이 없던 어머니다. 일찍 들어오라거나, 라면 많이 먹지 말라거나, 청소 좀 하고 살아라, 같은 잔소리도 없었다.

‘자기가 알아서 해야지’

그게 어머니의 소신이었다. 물론 그런 잔소리가 안 나오게끔 유영이 잘 행동한 것도 있지만, 어쩌면 그런 어머니의 교육 방침이 지금의 유영을 있게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머니의 자신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는 행동을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런 어머니를 평소에도 고마워했던 유영이지만, 오늘은 조금 미웠다. 유영의 시무룩해진 모습을 보고 어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 남자애, 인기 많아?”

겉으로 티 내는 사람은 없지만, 보면 안다. 같은 학부 내의 여자 아이들의 시선뿐만 아니라, 스쳐 가며 지나가는 타 전공 학생들의 시선도. 오직 단유 본인만 그런 시선을 모를 뿐. 아니, 진짜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지금까지 지켜본 바로는 딱히 다른 여자들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괜한 자존심에 뭉그적거리다가 뺏긴다?”

능글스러운 어투로 딸의 속을 찔러대는 어머니. 그리고 그런 어머니를 흘겨보는 유영의 표정에, 어머니는 웃음을 터뜨렸다.

“너희 아빠도 왕년에 얼마나 인기가 많았는지 아니? 만약에 엄마가 너처럼 꾸물대며 눈치만 봤으면 벌써 딴 여자한테 뺏겼을 거야. 그럼 넌 그 여자한테 엄마 소리했겠지?”

“아이참! 엄마도 주책이야!”

“그게 사실인걸?”

“모녀가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하고 있어?”

마침 아버지가 들어오다 딸의 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몸을 들이밀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팔짱을 끼며 ‘아무것도 아니에요’라고 대꾸하며 거실로 아버지를 끌고 나갔다.

“왜 둘만 재미있는 얘기를 해? 나도 우리 딸이랑 이야기 좀 하자.”

“됐어요. 저녁 먹었어요?”

“아직 안 먹었지.”

“밥 차려드릴게요.”

거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유영은 다시 침대에 엎드렸다. 그리고 어머니가 남기고 간 마지막 말을 떠올리며 복잡해진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애를 썼다.

****

다시 주말이 지나고 한 주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주말 경기를 끝낸 명수가 집으로 찾아왔다.

“오늘은 하루 자고 갈 거야.”

“그래도 돼?”

“주말 경기 모두 승리한 보상.”

그중 토요일 경기에서 명수는 다시 한번 투데이MVP를 따냈다.

“그건 뭔데?”

“이거?”

명수는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함박웃음을 지으며 상자를 개봉했다.

“이번에 새로 나온 최신형!”

게임기였다. 당연히 상미가 제일 반겼다.

“나 이거 사려고 했는데! 깜빡하고 예약을 못 해서 조만간 용산에라도 가야 하나 싶었는데!”

“훗. 이게 그 유명한 예약 특전판이다, 이거야!”

“대박. 언제 했대?”

미래적 디자인의 깔끔한 게임기는 장식용으로 선반 위에 두어도 될 것 같다.

“오늘 이거랑 이거 하려고 가져왔지롱.”

게임 타이틀을 흔들어 보이는 명수의 모습에 단유는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거실 TV에 게임기를 설치하고 곧바로 게임에 들어갔다. 시리즈물로 유명한 대전 게임이었는데, 오프닝 영상이 화려해 명수는 눈을 떼지 못했다.

“TV가 크니까 기분 난다.”

“너 그냥 쉬는 게 낫지 않아?”

단유가 소파 앞 테이블에 콜라를 내려놓으며 물었더니, 명수는 ‘이게 쉬는 거야’라고 짧게 대답한다. ‘본투비(Born to be) 게이머’ 명수다운 대답이다.

“너도 앉아서 구경해. 조금 있다 시켜줄게.”

“됐어. 너희들끼리 해.”

커플은 각자 게임 패드 하나씩을 붙잡고 게임을 시작했다.

“안 봐준다?”

“내가 할 소리네요. 너 기억 안 나? 이 게임, 내가 가르쳐줬어.”

“그래도 피지컬은 내가 좀 더 좋지.”

“네 피지컬은 운동장에서나 쓸 데 있지, 여기서는 내가 더 낫거든?”

“그래 오늘 아주 끝장을 보자.”

손가락들이 쉴새 없이 버튼과 스틱 위를 움직이며 캐릭터를 조종했고, 각자의 캐릭터들은 상대의 빈틈을 노리는 공격과 놀라운 타이밍의 방어로 공격을 무효화시키는 액션들을 선보였다. 이런 곳에 쓸 만한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용호상박이다.

“아싸!”

“아, 한 끗 차이다.”

“웃기지 마라. 저게 무슨 한 끗이냐? 내 체력이 반이나 남았거든?”

“내가 어제까지 경기하다 와서 피곤해서 그래.”

“그럼 단유 말대로 아주 쉬던가.”

“콜라로 도핑하고.”

앞에 놓인 콜라를 벌컥벌컥 마신 명수는 트림을 거하게 하고는 다시 패드를 붙잡았다.

“컴온!”

두 사람의 게임은 무려 하은이 돌아올 때까지 이어졌다.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온 하은이 두 사람을 보며 혀를 찼다.

“밤샐 거니?”

“적당히 하다 자야죠.”

명수의 말에 하은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 말했다.

“그래 적당히 하다 자라. 대신 조용히 하던가, 아니면 올라가서 자던가.”

“네? 무슨?”

상미의 얼굴이 붉어졌지만, 거실이 어두워 제대로 본 사람은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새벽 운동을 하러 나온 단유는 소파 위에서 기절한 채 쓰러진 두 사람을 발견했다. 서로 머리를 맞댄 채로 자고 있는 두 사람을 보니 웃음이 났다. 그 와중에도 게임 패드를 놓지 않고 있는 두 사람. 마치 14살, 그 시절의 아이들을 보는 것 같다. 몸만 컸지 여전히 아이들이다. 그래도 편안해 보이는 표정을 보니, 왠지 기분이 좋다.

‘나이가 들어도, 함께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연인이라.’

어쩌면 그래서 두 사람은 천생연분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저런 관계가 어쩌면 단유가 바라는 이상적인 연인 관계인지도 모르겠다. 서로 편안하게 마주 앉아서 밤새 양자장론의 스핀-통계 정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양자역학적 동일 입자의 성질에 대해 의견을 교환해보는 건 어떨까, 잠시 생각하며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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