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595화 (595/956)

사랑은 아무나 하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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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넌?”

“나? 나 뭐?”

“여러 사람 만나야 한다며? 너의 연애관이라면, 명수랑 헤어지고 다른 사람을 만나겠다는 소리 아냐?”

“에이, 난 예외.”

“왜?”

“가끔 이런저런 연애 할 필요 없이 자신의 짝을 찾는 사람도 있는 법이니까. 말하자면 로또를 뽑은 셈이지.”

“니가 그 정도로 명수를 생각하는 줄 몰랐다.”

“야, 까놓고 말해서, 이 정도면 로또 아냐?”

넓은 거실을 둘러보며 말하는 상미의 말을 일단 수긍했다.

“그리고···사람 일은 모르는 거지.”

“응?”

상미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손을 저었다. 그리고 방송이나 해야겠다며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단유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말했다.

“오늘 이야기는 다른 사람한테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뭐? 에이, 걱정 마. 나 입 무거워.”

상미는 눈을 찡긋거려 보인 뒤 방으로 쏙 들어갔다. 침묵이 내려앉은 거실. 어쩐지 불안한 이유는 뭘까?

****

―야! 너 연애 한다며?

시합을 준비 중일 명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상미 이 나쁜 기집애.

“연애 안 해.”

―왜? 왜 안 해? 해. 하라고 좀.

“내 연애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네 일이나 신경 써.

―네 연애도 내 일이야.

“그게 왜 네 일이야?”

―네가 행복해지는 길을 찾도록 돕는 게 다 내 일이지.

명수의 언변이 이렇게 좋아진 줄 몰랐다.

―예쁘냐?

“누구?”

―너 좋다는 너희 학교 선배.

“동갑이야.”

―어쨌든. 이야, 역시 우리 단유 부럽다 부러워. 한 명은 대학 선배고, 한 명은 연예인이라며? 확실히 달라? 응? 그래서 누가 더 좋아? 누구랑 사귈 거야?

더 이야기해봐야 속만 탈 거 같아서 그냥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상미에게 따지기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단유야?”

거실 소파에서 TV를 보며 사과를 깎던 하은이 불렀다.

“네?”

“너 요즘 인기 좋다며?”

요즘 입이 무겁다는 표현이 자신도 모르게 바뀌었나 싶었다. ‘인기쟁이네, 김단유’라며 놀리는 하은의 말을 흘려 들으며 상미의 방을 두드렸다.

“아, 왜.”

자고 있었던지 졸린 눈으로 문을 연 상미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말하지 말랬지?”

“뭘?”

“몰라서 물어?”

상미가 단유의 어깨너머로 바라보니, 재밌다는 얼굴로 이쪽을 뚫어져라 쳐다 보는 하은이 보였다. 팝콘 대신 사과를 아삭 깨물며.

“비밀이라고 했잖아요, 선생님!”

단유가 그 시선을 차단했다.

“니 말은 비밀이고, 내 말은 동네방네 소문낼 이야기야?”

“아니, 그게 아니고···. 야, 솔직히 단유 네 일은 선생님도 알아야 하잖아?”

“명수는?”

“뭐? 명수도 말했어? 아우, 입 싼 새끼.”

누가 누굴 지적하나? 단유가 팔짱을 낀 채로 쏘아보자 상미는 괜히 헛기침하며 시선을 돌렸다.

“친, 친구잖아. 가족 같은 친구라며? 다, 다 널 걱정해서 그러는 거지.”

“아무래도 내가 친구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우, 그래. 내가 잘못했어. 내가 입이 싸. 내가 아주 입이 방정맞아 그래. 미안하다!”

거실을 채울 정도로 까랑까랑한 하은의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단유는 이 층으로 올라갔다. ‘그래서 누굴 선택할 건데?’라고 묻는 하은의 질문도 못 들은 척하며.

결국 오롯이 혼자 고민해야 할 문제였음을 재확인한 단유는 번잡한 기분도 떨칠 겸, 집을 나섰다. 어차피 오늘 학교에서 조별 과제를 위해 조원들과 만나기로 했었기 때문에 조금 일찍 나간다는 생각으로 서둘렀다. 세미나실에 들어가 과제물을 검토하다 보면 복잡한 마음도 정리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으며.

그러나 세미나실에는 이미 선객이 있었다.

“일찍 오셨네요?”

그것도 1시간 뒤에 만나기로 되어 있던 조원 중 한 명이었다.

“제가 할 말이네요. 왜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같은 조에 속한 두 명의 여학생 중 한 명이었다. 단유가 세미나실에 들어오는 것을 보며 엉거주춤 일어서 인사를 하는데, 평소와 옷차림새가 사뭇 다른 느낌이다. 하늘하늘한 검은색 주름 스커트에 캘리그라피가 디자인된 푸른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진한 눈썹과 어울려 시크한 매력을 도도히 드러낸 그녀가 살짝 상기된 얼굴로 대답했다.

“제가 맡은 부분을 아직 다 끝내지 못해서요.”

“많이 남았어요?”

“아뇨, 금방 다 해가요. 여기 이 부분만 마저 하면 돼요.”

“그거하고 출력도 하셔야 하죠? 그럼 조금 있다가 저랑 같이 복사실 가요. 어차피 저도 제 부분 복사해야 하니까.”

“아, 네.”

여학생은 다시 자리에 앉아 앞에 놓인 노트북 위에 손을 올렸다. 단유는 여학생의 작업이 끝나길 기다리는 동안 자신도 출력해 온 부분을 읽으며 수정할 부분은 없는지 검토했다. 몇 장 되지 않아 검토는 빠르게 끝났고, 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 슬쩍 여학생에게로 시선을 던졌는데, 마침 단유를 보고 있었던지 여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황급히 시선을 모니터로 돌리며 손가락을 빠르게 놀리는데, 얼굴에 긴장이 서려 있다.

“저기요.”

“네?”

“불편하시면 제가 잠깐 나가 있을까요?”

“아뇨, 괜찮아요. 그냥 계셔도 돼요.”

“불편하시면 말씀하세요.”

“정말 괜찮아요.”

여학생은 다급히 변명하며, 마치 아무렇지도 않다는 걸 과시하듯 손가락을 더 빠르게 움직였다. 단유는 용지를 내려놓고 들고 온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과제를 위해서 빌렸던 책인데, 꽤 볼 만한 내용이라서 어차피 시간도 남으니까 한 번 더 보자는 생각으로 펼쳤다.

타자를 치는 소리와 책장을 넘기는 소리만이 존재하는 세미나실의 고요한 분위기가 집중을 도왔다. 그렇게 한참 재밌게 읽던 중에 단유를 부르는 나직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저기, 오빠.”

“네?”

“목마르지 않으세요?”

“저요? 괜찮은데요.”

“아, 그래요.”

단유는 괜찮다는 미소를 지어 보인 뒤,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다시 단유는 책에서 시선을 뗐다.

“제가 목이 말라서요. 음료수 사 올까 하는데, 뭐 안 드실래요? 제가 살게요.”

“괜찮아요.”

“저 혼자 마시기 그래서 그래요. 혹시 탄산음료 좋아하세요?”

“즐기지는 않아요.”

“아, 그럼 이온음료?”

“···같이 가서 고르죠.”

세미나실 바깥에 음료수 자판기가 있었기에 멀리 갈 필요는 없었다. 투입구에 지폐를 넣은 뒤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단유에게 뭘 마실 건지 물어보는 여학생이다. 단유는 ‘아무거나’라고 말하려다 또 별 의미 없는 말을 주고받을 것 같아 주황빛의 오렌지 맛 탄산음료를 눌렀다. 캔커피를 고른 여학생이 배출구에서 음료수를 꺼내 단유에게 건넸다.

“잘 마실게요.”

“네.”

캔이 열리며, 음료 입자에 녹아있던 이산화탄소의 용해도가 줄어들고, 캔 내부 압력이 줄며 음료 입자에서 이산화탄소가 떨어져 나와 음료의 위로 솟아오른다. 작은 방울들이 수면에서 공기와 접촉하며 터지는 미세한 소리들을 들으며 한 모금 마시니, 시원할 뿐 아니라 감미료의 강한 단맛과 오렌지 맛을 내는 성분이 혀를 자극했다.

틱틱거리는 소리에 돌아보니, 손톱이 길어 음료수를 열지 못하는 여학생이 눈에 들어왔다.

“따 드릴까요?”

“아, 예. 부탁드릴게요.”

단유는 자신의 음료를 건네고 그녀에게서 캔을 받아 가볍게 열었다.

“여기요.”

“고마워요.”

단유는 자신의 음료를 받아 다시 한 모금을 마시며 세미나실로 이동했고, 여학생은 그 뒤를 따랐다.

다시 세미나실로 돌아온 단유는 시계를 보며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음을 확인한 뒤, 책을 펼쳤다. 홀짝거리는 소리 없이 커피를 음미하는 여학생의 배려 덕분에 책에 집중할 수 있어 좋았다.

“저기, 오빠.”

“응?”

“저, 다했는데요.”

“아, 그래요. 그럼 같이 복사실 가죠.”

“네.”

세미나실이 있는 건물의 지하층에 복사실이 있었기에 두 사람은 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갔다.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 사이로 콧노래가 들린 듯해서 뒤를 돌아봤더니, 여학생이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뭐가요?”

“아니, 그게···그···제가 맡은 부분을 다 끝냈더니, 기분이 좋아서 저도 모르게···.”

“괜찮아요. 신경 거슬려서 본 거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세요.”

여학생은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오빠.”

“네?”

“오빠, 저··· 아니에요.”

문득, 무슨 말을 하려다 멈추면 듣는 상대방이 얼마나 답답한지 아냐며 분개하던 명수의 모습이 떠올랐지만, 단유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겠지, 라는 생각이었기에 관심을 끊었다.

출력과 복사를 모두 마친 후 다시 세미나실로 왔더니, 남학생 한 명이 들어와 있었다.

“조장님, 일찍 오셨네요? 유영이 넌 언제 왔어? 내가 늦은 건 아니지?”

쾌활한 웃음으로 인사를 건네며 유영의 옆자리에 앉는 남학생은, 역시 노트북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물었다.

“아까.”

“이야, 다들 부지런들 하시네. 나도 나름 일찍 온다고 온 건데 말이야. 아, 조장님은 다 하셨어요?”

남학생은 파워포인트를 맡았기에 따로 자료 수집을 맡기지 않았다. 단유와 유영, 그리고 또 다른 학생이 고생하는 동안은 홀가분했겠지만, 오늘 모인 자료들로 발제문이 만들어지면, 그 내용을 토대로 파워포인트를 만드느라 앞으로 고생 좀 해야 할 테다.

“네.”

“잠깐 봐도 돼요?”

“여기.”

“···와, 형 되게 내용이 많은데요?”

“취합하다 보면 대부분은 버리게 될 거지만, 그래도 미리 준비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요.”

“와, 역시 조장님은 뭔가 다르네요.”

넉살 좋게 웃음 짓던 남학생은 유영에게로 고갤 돌렸다.

“네 거도 좀 보자.”

“거기 앞에.”

턱짓으로 책상 앞에 놓인 복사물을 가리키는 유영. 남학생은 히죽 웃으며 복사물 1부를 집어 살폈다.

“요점만 넣은 거야.”

단유와 비교해 수집된 내용이 많지 않은 까닭에 미리 변명처럼 이유를 늘어놓는다.

“잘했네, 뭘.”

단유는 어쩐지 유영의 태도가 갑자기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역시 물어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자신은 고작 조장일 뿐이고, 잠시 후에 있을 회의 때 취합할 내용들과 발제문을 어떻게 작성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자신의 몫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어 또 한 사람이 세미나실로 입장했다. 이번에는 두 여학생 중 다른 한 명이었는데,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모두에게 인사를 하고는 유영과 단유의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너 오늘 되게 멋있게 입고 나왔다? 오늘 무슨 소개팅이라도 있어?”

“소개팅은 무슨. 그냥 주말이라 기분 좀 낸 거야.”

복장에 맞게 시크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유영의 말에 여학생이 입꼬리를 내렸다.

“학교 오면서 무슨 기분이니? 난 오늘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귀찮아 죽는 줄. 아, 오해하지 마세요. 조 모임 오기 싫었다는 소린 아니에요.”

“아뇨, 괜찮아요.”

“야, 나도 그렇더라. 오늘처럼 날이 좋으면 학교가 아니라 놀이공원을 갔어야 했는데.”

남학생이 히죽 웃으며 여학생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다른 한 사람 마저 오면 빨리 이야기 끝내고 나가죠.”

“빨리 끝날까요?”

“노력해보죠. 다 같이.”

이윽고 모든 조원이 모였고, 단유의 주도하에 회의를 진행했다. 미리 유영의 몫까지 검토를 끝냈던 단유 덕에 회의는 빠르게 진행되었고, 발표를 맡은 여학생과 파워포인트를 맡은 남학생에게 주요 포인트를 정확하게 지시해주며 회의를 마칠 수 있었다. PPT가 완성되면 다시 모여서 마지막 준비를 끝내는 것으로 약속을 정한 뒤, 모임을 마무리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짐을 챙겨 세미나실을 나와 인사를 나눴다. 주말에 학교에 남을 이유가 없기에 다들 통학 버스를 타러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초록빛 잎새를 닮은 바람이 슬며시 다가와 온기를 나눠주고 지나가는 거리를 걷다 보니 괜히 오늘은 그냥 걸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 그냥 걸어갈게요.”

단유의 말에 조원들이 돌아보며 인사했다.

“네, 조장님.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조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단유는 후문 쪽으로 걸어갔다. 보도 옆으로 푸른 잔디가 자란 둔덕을 감상하며 걷고 있을 때, 뒤에서 빠르게 따라붙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기도 전에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오늘 모인 이들 중 하이힐을 신은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으니까.

“오빠.”

그러고 보니, 다른 사람은 모두 ‘조장님’이라고 부르는데 그녀만 단유를 ‘오빠’라고 호칭했다. 단유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바람에 흩날리는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다가온 유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식사하셨어요?”

회의를 세 시간 정도 한데다 두 사람은 모임이 있기 한 시간 전에 같이 세미나실에 있었으니 식사를 했냐는 물음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 텐데 왜 저렇게 물을까, 라는 생각을 잠시 해보며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같이 식사하실래요?”

“배고프세요?”

“네? 아, 저···조금요.”

“그럼, 후문 쪽 식당에 가서 같이 식사해요.”

저녁을 먹기엔 아직 조금 이른 시간이었지만, 그렇다고 못 할 정도는 아니라 상관은 없었다.

“근데, 한 사람 더 불러도 돼요?”

“네? 누구요?”

“후문 쪽에서 자취하는 앤데, 같은 학부 동기예요.”

“아, 오빠랑 자주 같이 다니던···.”

“새벽이요.”

“아, 예. 뭐, 그래요. 괜찮아요.”

“그럼 전화해볼게요.”

단유는 핸드폰을 꺼내 들고 통화를 시도했다. 등 뒤에서 조금 긴 한숨 소리가 들린 것도 같지만, 지금 걷는 길이 비탈길이라 하이힐 신고 걷기에 조금 불편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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