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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멤버 더 네임-594화 (594/956)

사랑은 아무나 하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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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을 한 상미가 체력을 회복하는 동안, 단유는 다시 창가로 가서 적들의 동태를 살폈다. 엄폐물에 몸을 숨겼는지 적팀은 보이지 않았지만, 오두막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을 거란 사실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어디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오두막을 빠져나올 수는 없었다.

“불리한데.”

상미가 지하실에서 올라와 다른 창문으로 바깥을 바라보며 말했다. 적팀은 단유네 팀이 이미 보스를 잡아 아이템 파밍을 끝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무리하게 진입작전을 펼치기보다, 밖으로 나왔을 때 기습을 해서 아이템을 뺏는 작전을 펼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둘 다 손핸데. 에바야.”

상대 팀은 파밍도 못 한 상태로 야외에서 엄폐물에 의지해 움직이지 못하고, 단유네도 비록 파밍은 했지만,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거나 다른 파밍을 하지 못하니 손해다. 이러다가 다른 지역에서 파밍을 모두 마치고 사냥을 시작할 다른 팀들에게 손쉬운 먹잇감이 될 수 있다.

상미는 오두막의 창으로 주위를 모두 살핀 후, 동쪽과 북쪽을 맡기로 하고, 단유에겐 나머지 지역을 감시하도록 오더를 내렸다.

“인내심 부족한 팀이 지는 거야. 혹시라도 저격이 가능하면 바로 머리 따.”

게임이라지만, ‘머리 따’ 같은 살벌한 표현도 서슴없이 하는 상미다.

“응.”

물론 게임이니까, 단유는 별 말없이 따른다.

2분여가 지났을 때, 인내심의 바닥을 느낀 건 다행히 상대 팀이었다. 단유가 바라보는 쪽에서 왼편 바위 뒤에서 움직임이 보였다. 대략 30m 정도로 추정되는 거리라 저격이 아니라 권총으로 사격해도 충분할 것 같았다. 이 게임은 저격을 하려 해도 배율이 뛰어난 편이 아니라 중거리 교전이 더 자주 있는 편이고, 권총을 많이 사용한다. 특히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연발을 쏠 수 있는 권총이 더 효과적이다. 안경을 해제한 뒤 보스몹에게서 얻은 헬멧을 착용했다.

적이 다시 얼굴을 빼꼼 내밀 때, 단유는 빠르게 조준하고 사격을 시작했다. 초탄에 머리에서 피가 터졌지만, 적은 죽지 않았다. 이어진 공격은 아쉽게도 바위에 맞고 도탄이 되었다. 그 사이 단유가 눈치채지 못한 방향에서 공격이 들어왔다. 단유의 체력이 쑥 빠지자, 상미가 즉시 오더를 내렸다.

“엄폐해.”

단유는 즉시 몸을 숙여 2차 공격을 피했고, 그 사이 상미가 교묘한 위치로 다가가 외부의 공격을 파악했다.

“왼쪽 바위랑, 오른쪽 비탈 아래네. 오케이, 체력 채우고 빠지자. 무조건 싸우는 건 답이 아니니까. 내가 먼저 앞장설 테니까, 그사이에 견제해주고, 특히 바위 쪽 견제해줘. 오른쪽은 각이 안 나온다, 내가 오른쪽으로 빠져서 견제 시작하면, 그다음에 내가 왔던 길로 나오면 돼. 앞에 덤불 이용해서 이동 경로 가리고. 알았지?”

상미는 침착하게 오더를 내린 후, 오두막의 문을 열었다. 기다렸다는 듯 총알이 쏟아지고 상미가 잠시 몸을 피한 사이, 단유가 창문으로 견제사격을 날렸다. 한 대는 맞을 각오로 열심히 총을 쏘는 사이에 오른쪽 비탈 쪽에서도 상미와 교전이 벌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견제 와중에 상미 쪽을 보니, 놀랍게도 한 대도 맞지 않고 목표했던 지점까지 내달리는 데 성공한 상미였다.

“지금이야!”

단유는 재빨리 오두막을 나와 계단을 뛰어내린 후 바닥에 엎드렸다. 다소 낮은 지형이라 상대의 시야에서 몸을 숨길 수 있었다. 엉금엉금 기어 상미가 기다리고 있을 방향으로 향할 때, 상대도 다급함을 느꼈는지 접근하는 게 보였다. 단유는 앉은 자세로 변경함과 동시에 놀라운 마우스 컨트롤로 에임을 정확히 잡고 사격을 실시했다. 연달아 상대의 머리에서 피가 터져 나오는 이펙트가 나오면서 곧 킬로그가 올라왔다. 곧이어 상미와 대치 중이던 적도 상미의 권총에 드러눕고 말았다.

“나이스!”

상대의 시체에서 적당히 탄약과 회복 아이템을 보충한 뒤, 두 사람은 자리를 피했다.

“오더 괜찮았지? 내 오더만 잘 들으면 질 수가 없다니깐?”

키득거리는 상미의 목소리를 헤드폰으로 들으며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상미는 그 모습을 볼 수 없겠지만.

****

자화자찬을 멈추지 않는 상미의 오더대로 움직였더니 결국 1위를 달성하고 마무리를 짓게 되었다. 상미의 시청자들이 케미가 좋다며, 계속 게임 해달라고 조른다는데, 단유는 한 게임 이상 할 여력이 없었다. 정중하게 사양한 뒤, 게임을 종료한 후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펼치고 조별 과제를 위한 자료 수집에 들어갔다.

집중해서 과제를 이어가던 중 옆에 놔두었던 핸드폰이 떨기 시작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했던 집중력이 흩어지는 것을 느끼며 단유는 핸드폰을 집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닌 모양이다.

처음 보는 전화번호였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낯선 여자의 목소리에 단유는 잘못 건 전화일까 짐작해 보았다.

“네.”

―저기, 혹시 김단유씨 핸드폰 맞나요?

“네, 전데요. 누구시죠?”

―아, 나···도연인데요.

“도연?”

예상도 못 한 이름이었다.

―그러니까···리본 소녀의 도연이요.

“아, 예.”

평생 다시는 보지도 듣지도 못할 인연이라 생각했던 터라, 단유는 살짝 당황했다. 하지만 상대는 더 당황했던 모양이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저, 기억하시죠?

“네.”

단유의 단답형 대답에 상대의 말이 잠시 끊어졌다가 이어졌다.

―잘 지내셨어요?

시계를 보니 어느새 밤 열 시가 넘어선 시각이었다.

“네. 그런데 무슨 일로?”

―네? 아, 저, 잘 지내시는지, 그냥 궁금해서, 아니 그러니까, 인사차 전화해 봤어요.

“아, 예.”

―혹시 제가 잘못했나요?

“아뇨.”

―그럼 통화하기 불편하신가요?

단유는 책상 위에 놓인 책들과 쓰다 만 워드 문서 화면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아뇨, 괜찮아요.”

―정말요? 그럼 다행이네요. 그냥···전화해 봤어요. 그러니까, 지난번에 서울대에서 우리 봤었잖아요?

멀리서 슬쩍 본 건데? 뭐, 보긴 했으니까.

―오랜만에 얼굴 보니까 반갑기도 하고···가서 인사라도 하고 싶었는데, 스케줄이 있어서···우리 무대도 하고 그랬잖아요? 그래서 시간도 없었고요, 그래도 그냥 못 본척하기는 그렇고, 그래서 인사는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전화 했는데, 괜찮죠?

뭔가 굉장히 중구난방에 두서없는 이야기지만, 대충 이해는 했다.

“만나서 반갑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는 거죠?”

―네.

“저도 반가웠어요.”

―정말요? 그러시구나.

그리고 다시 말이 없어진 도연. 단유는 손가락으로 책상 위를 톡톡 두드리며 다음 말이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

―우리 무대 어땠어요?

고르고 고른 말이 무대에 대한 감상을 묻는 말이라.

“좋았어요.”

―그래요?

어쩐지 아쉬워하는 어투라 단유는 조금 더 신경 써서 답변했다.

“호흡이 잘 맞는 것 같았어요. 서로의 안무도 잘 들어맞고. 굳이 제가 이런 말을 안 해도 당시 관중들의 열렬한 환호 소리를 들으면 알 수 있지 않나요?”

―그렇긴 한데, 단유씨는 또 어떻게 느끼셨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래서요. ···저는 어땠어요?

“좋았어요. 이제는 전혀 무대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던데요? 오히려 즐기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었다.

―정말요? 다행이다.

그나저나 도연은 아까부터 존댓말을 쓰고 있다. 예전 도연과 함께 연기 레슨을 받던 중에, 서로 친해지기 위해 말을 놓겠다고 한 뒤로 계속 하대를 했었는데. 역시 오랜만의 통화라 어색해서 그런 걸까?

“안 바쁘세요?”

―우리? 바쁘죠. 아직 대학 행사철이라 계속 돌아다니고 있거든요. 그래도 곧 끝나니까. 물론 끝나도 바쁘긴 할 거예요. 저희 곧 컴백이거든요.

“아, 그래요?”

―아, 맞다. 근데 이거 비밀이거든요? 컴백하는 거? 그러니까 그때까지 인터넷이나 다른 사람한테 리본 소녀 컴백한다고 알려주시면 안 돼요.

“네.”

―꼭이요.

“네.”

그리고 또 한참 동안 말이 없다.

―그럼···저기, 다음에 또 통화해요.

“네.”

―들어가세요.

“네, 수고하세요.”

어쩐지 급하게 통화를 마무리하는 분위긴데, 오히려 그게 낫다. 서로 접점이 없다 보니 말을 길게 끌 화제가 없으니까.

핸드폰을 내려놓고 보니, 어느새 10분이 훌쩍 지났다. 별로 한 말도 없었는데. 단유는 잠잠해진 핸드폰을 잠시 바라보다 키보드 위로 손을 올리고 다시 타이핑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손을 떼고 길게 숨을 토해내는 단유. 바보가 아니라면, 그리고 아주 무지한 경우가 아니라면, 정상급 연예인이라고 할 도연이 자신에게 전화를 건 이유가 단순히 안부를 묻기 위해서가 아니란 건 알 수 있었다. 다만 도연이 단유 본인에게 어떤 이성적 감정을 느껴서 충동적으로 전화한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자신에게 매력이란 걸 느낄 수나 있을지 모르겠고,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단유는 도연에게 별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탓이다.

좀 더 과장하면, 오후에 만났던 유진도 비슷하지 않을까?

‘도대체 왜 나한테?’

무인도에 갇혀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을 때, 남자 한 명이 찾아와 평생 둘이서 함께 지내야 한다고 주장하면, 여자는 어쩔 수 없이 그 남자를 데리고 평생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할까? 아니면 남자를 부려서 좀 더 안전하고 아늑한 생활을 영위하려 할까?

지금 단유가 보기에 도연과 유진은 딱 무인도에 떨어진 여자 같았다. 그 남자가 비록 이상형이 아니더라도 이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남자이기에 어쩔 수 없이 같이 살아야 하는데, 그래도 호기심이란 게 있으니 이 남자는 어떤 남자일까, 운을 떼보는 정도랄까? 딱 그 정도로 보였다.

그렇다고 매정하게 대하기엔, 두 사람 모두 단유에게 친절하고 상냥했다. 그 성의를 무시하는 것도 예의는 아닌 듯하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단유는 잠시 고민하다, 문득 천상천하 유아독존 격으로 자찬하던 상미의 ‘오더’를 떠올렸다.

일단 과제를 마무리하고 난 뒤, 상미에게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냈다.

―방송 끝나면 연락 줘.

잠시 후, 답문이 왔다.

―전화 줄게.

그리고 30여 분 후, 상미에게서 전화가 왔고, 두 사람은 거실에서 조우했다.

“무슨 일인데?”

단유는 자신의 상황을 상미에게 설명했다. 상미는, 처음에는 놀란 듯하더니 점점 입꼬리가 길게 말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단유의 현 상황에 대한 브리핑이 끝났을 즈음에는 웃음소리가 잇달았다.

“그러니까, 연애복 터진 김단유를 구원해달라, 그 소리네?”

“연애복은 무슨.”

“야, 그 정도면 연애각이지, 뭐냐? ···이거, 이제 보니까 자기 인기 많다고 자랑하러 온 거네? 그치?”

단유가 말없이 소파에서 일어서자, 그제야 말리는 시늉을 했다.

“미안미안, 하도 오랜만에 네가 여자 때문에 고생하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말이야.”

“오랜만?”

“왜, 예전에 너 첫 여자친구 사겼을 때. 그때도 너 고생 좀 했잖아?”

“별로 그런 기억 없는데?”

“에이, 아니긴. 그때 그 언니 보겠다고 맨날 그 회사에 조르르 달려가서 밥 사주고 선물 사주고 그랬잖아? 그것 때문에 아르바이트도 하고 그랬잖아?”

“밥은 서로 번갈아가면서 샀고, 선물 산다고 돈 쓴 기억은 안 나고, 아르바이트는 그것과 전혀 별개의 문제였고.”

“아무튼. 이야, 이거 당장 명수한테 전화해서 자랑해야 할 일 아닌가?”

단유가 다시 일어서자, 농담이라며 다시 말린다. 농담 한 번 더 하면 대화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놨더니 얼른 손을 저으며 미안하다고 용서를 구한다. 그 와중에도 입꼬리가 내려올 줄 모르니 후회만 늘어난다.

“내 지혜를 구한다 이거잖아? 나 되게 비싼데?”

“얼마면 되는데?”

“에이, 내가 친구한테 돈을 받을 수야 있나?”

“그럼?”

“조만간 오프라인 대회가 있는데, 그때 나랑 같이 가자.”

“너랑 같이하는 동료들 있잖아?”

“실력이 너만 한 애들이 있었으면 벌써 했어. 아무튼, 대회 도와주기. 콜?”

“그래, 콜. 이제 이야기해봐.”

만면에 미소를 띤 상미가 손가락을 하나 꺼내 들었다.

“둘 중 한 사람과 진짜 사귀는 거야.”

“······.”

단유는 할 말을 잃고 득의양양하게 웃는 상미를 덤덤히 지켜보았다.

“이제 연애할 때도 됐잖아? 안 그래? 괜찮은 사람으로 골라봐. 연상, 동갑. 취향은 어느 쪽인데? 아 혹시 연하? 그러면 신입생들 중의 한 명 골라서 유혹해.”

아주 갈수록 가관이다. 단유의 인상이 찌푸려지는 것을 보고 상미가 전혀 그럴 의도가 아니란 사실을 항변하기라도 할 모양인지, 끝까지 들어보라며 단유를 옆에 앉혔다.

“둘 다 좋은 사람이라며.”

“응.”

“얼굴도 예쁘고?”

“응.”

“한 사람과 연애를 하면, 다른 사람에게는 굳이 모진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떨어져 나갈 거잖아? 그럼 넌 오직 한 사람에게만 신경을 쓸 수 있다는 거지.”

“그게 전략이야?”

“전략이지. 야, 다 떠나서 말이야. 너 아직 20대 초반이야. 팔팔한 나이에 여자 친구 하나 없이 책에만 파묻혀 있다는 게 얼마나 슬픈데. 적극적으로 움직여. 넌 그래도 돼. 그리고 연애가 별거니? 솔직히 나도 명수랑 사귀고는 있지만, 이러다가 마음이 안 맞거나 멀어지면 헤어질 수도 있는 거야. 너도 마찬가지고.”

단유는 이마를 짚었다. 그러나 상미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너무 고지식하게 굴지마. 연애도 인간관계의 하나야.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피할 필요가 없어. 여러 사람 만나면서 살아봐야 나중에 진짜 자신과 잘 맞는 남편, 혹은 아내를 만날 수 있다고들 하잖아. 옛말 틀린 거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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