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592화 (592/956)

사랑은 아무나 하나(2)-수정

-------------- 592/952 --------------

축제만 끝나면, 오롯이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해외 자산 이전과 이사도 마무리되었고, 축제 바로 전에 번역 작업도 끝을 냈다. 축제로 어수선했던 학교도 다시 평소의 일과로 돌아갔으니, 단유는 강의실과 도서관을 오가며 공부만 하면 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하은에게 준 선물이 스노우볼이 되었던지, 단유는 생각지도 않던 운전면허를 따느라 시간을 사용해야 했고, 중간고사 이후 쏟아지는 리포트들 때문에 꽤 바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중간고사가 있기 전의 리포트는 얼마 되지도 않았고, 있어도 그렇게 시간을 많이 요구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신입생들에게 ‘대학 리포트란 이래야 한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나마 번역 작업을 하느라 타이핑에 익숙했던 단유였기에 주제만 정확히 정해지면 빠르게 리포트를 작성할 수 있었다.

인터넷에서 익히 악명 높았던 조별 과제라는 것도 꽤 신경을 많이 쏟게 만들었다.

“혹시 조장 하실 분?”

한 강의실에서 3달 이상 함께 수업을 듣다 보니 이름은 정확히 모르더라도 대충 얼굴은 익힌 상황이다. 사실 얼굴을 모르더라도 모인 이들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같은 조에 꽤 유명한 이가 섞여 있으니 말이다.

“형이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오빠가 하세요. 이 중에 제일 연륜이 많으시니까 잘하실 거 같아요.”

이전의 조별 과제 당시와 다르게 이번의 학생들은 단유를 적극적으로 추천했고, 단유는 애써 거절할 핑계를 찾을 수 없었다. 거기다 지난번에 조별 과제를 한 번 경험했던 것이 도움되기도 했다.

“그럼 제가 조장할게요.”

“와아.”

조촐한 조장 취임 축하 박수가 지나가고, 단유는 빠르게 역할을 지정해주었다.

“이번 조별 과제는 발제와 해답을 동시에 해야 하니까, 브레인스토밍을 적극적으로 해야 할 거 같다. 시간 정해서 다 같이 모이는 시간을 갖고, 그 외는 각자 주어진 역할 대로 과제 수행을 하는 거로.”

“예.”

“그전에 서로 인사나 하죠.”

“안녕하세요. 저는 물리천문학부 1학년 강태준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단유를 제외한 네 사람이 서로를 소개했다. 자연대는 공대만큼이나 성비가 불균형적이기로 소문났는데, 특이하게도 단유의 조는 여자 둘에 남자 셋이라는 이상적인(?) 비율을 자랑했다.

“안녕하세요. 이유영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장하나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고, 이번 조별 과제에서 꼭 좋은 성적 받을 수 있길 바랄게요.”

유독 두 여자의 소개 타임에 다른 두 남자는 입꼬리를 떨어뜨릴 줄 몰랐다. 정직한 녀석들,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형네 조에 여자가 둘이라면서요? 아쉽다. 내가 형네 조에 들어갔어야 하는데.”

“여자 조원이 있다고 점수를 더 받는 것도 아니잖아.”

“그냥 기분이 좋잖아요. 형은 안 그래요?”

단유가 어깨를 으쓱거리자, 새벽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단유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상미 누나 같은 분을 친구로 두셨으니 눈에 찰 리가 없겠죠.”

“무슨 뜻이야?”

“솔직히 난 상미 누나가 무슨 연예인 줄 알았다니까요. 안 그래요?”

“모르겠는데.”

“자주 봐서 모르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아니면 제가 시골에서 올라와서 그런건지. 아무튼 상미 누나 정도면 거의 외모로는 탑 아닌가요? 우리 과에도 그 정도 외모 되시는 분은 없어 보이던데.”

“다른 건 모르겠고, 방금 네 발언은 총여(총여학생회)에 걸리면 분명 문제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본다.”

새벽은 입을 막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쓸데없는 데 신경 쏟지 말고, 공부나 해.”

“그래도 부러운 건 사실이네요.”

“그런 게 부러우면 차라리 연애를 하던가.”

“날이 좋아서 그런지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하고 그렇네요. 그런데 형은 왜 연애 안 해요?”

“공부할 시간도 없는데, 연애는 무슨.”

“그래도 형은 키도 크고 얼굴도 되니까, 언제라도 연애할 수 있겠죠? 저는 키도 작고, 얼굴도 안되니까 아마 안 될 거야.”

이런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기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에 단유는 도서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새벽은 ‘대학에 오면 바로 여자친구를 사귈 줄 알았는데’라는 둥, ‘대학 다니는 동안 소개팅이라도 한 번 할 수 있을까’같은 시답잖은 말을 중얼거리며 단유의 옆을 따랐다.

도서관에 다다를 때쯤 뒤에서 단유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김단유?”

단유와 새벽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단유 맞지?”

단유는 순간적으로 미간을 좁혔다가 곧 상대의 이름을 기억해내곤 얼굴을 폈다.

“정유진.”

중학생 시절, 자유학기제 홍보대사 선발과정에서 만났던 그녀를 이 자리에서 이렇게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야, 너 정말 오랜만이다? 처음에 뒷모습만 보곤 너 아닌 줄 알았다?”

새벽은 동그래진 눈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시선을 돌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베이지색 블라우스와 검은 핫팬츠, 핑크색 양말에 하얀 운동화는 자연대에서는 보기 힘든 패션이었던데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조그만 얼굴이 평범해 보이지 않은 탓이다.

“그래, 오랜만이다.”

“거의 3년? 4년만인가?”

“그럴걸.”

“연락 한 번 하랬더니, 죽어도 연락을 안 해. 내가 연락을 해야 겨우 전화 받더니, 나도 모르게 전화번호 바꿨더라?”

“핸드폰을 바꿨어.”

“요새 누가 핸드폰 바꾸면서 전화번호를 바꾼다니? 너 일부러 전화번호 바꾼 거지? 나랑 연락하기 싫어서.”

“그럴 리가.”

“아무튼, 너 여기 다니는 거 맞지.”

“응.”

“어떻게 그동안 얼굴 한 번을 못 마주쳤지?”

“이번에 입학했거든.”

“이번에? 왜? 혹시 재수, 아니 삼수했어?”

“고등학교 마치고 여행 갔었어.”

단유는 짧게 대학을 늦게 입학한 이유를 설명했고, 유진은 입을 동그랗게 벌리며 감탄을 했다.

“대단하다, 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

“너도 여기 다녀?”

“그래. 너 때문에 여기 다닌다.”

“나?”

“중학교 때 봤던 네 모습에 충격받았잖아? 그냥 외모만 가지고는 성공할 수 없겠단 생각이 들어서, 공부도 잘하고 끼도 많은 배우가 되자는 욕심에 고등학교 때 꽤 열심히 했더란 말이지. 그랬더니 이렇게 서울대에 들어오게 되었지. 사실 점수는 잘 받지 못했는데, 운이 좋았어. 우리 과에서 거의 꼴지로 들어오다시피 했거든.”

유진은 부끄러울 수도 있는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으며 이야기했다.

“아, 나는 언론정보학과. 넌?”

“물리천문학부. 물리학과 지망이야.”

“우와, 역시 김단유는 뭐가 달라도 다르네. 소속사는?”

“없어.”

“전혀 없는 거야? 아니면 있었는데 그만둔 거야?”

“계약한 적 없어.”

“아깝다. 야, 혹시 생각 있으면 우리 소속사 들어올래? 내가 잘 말해줄게.”

“생각 없어. 그리고 너 도서관 가는 길 아니었어?”

“아니. 난 여기서 버스 타고 나갈 건데?”

“나는 도서관에 가야 하니까, 이야기는 다음에 하자.”

길 위에서 쓰잘데기 없는 잡담이나 하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단유의 태도에 유진이 고개를 저었다.

“너, 또 이렇게 도망가려고? 너 나 안 반가워? 난 되게 반가운데? 넌 모르겠지만, 넌 나의 멘토야.”

“멘토?”

“말했잖아? 너 때문에 서울대 오게 됐다고. 그런데 멘토가 이렇게 날 푸대접하면 되게 서럽다? 그리고 우리 친구잖아? 아냐?”

단유는 머리를 긁적이다 옆에 선 새벽을 보았다.

“여기 얘랑 같이 도서관 가야 하니까, 다음에 이야기하자.”

“여긴?”

“아, 안녕하세요. 이 형이랑 같은 물리학과 지망인 1학년 강새벽이라고 합니다.”

“말투에 살짝 사투리가 섞인 거 같은데?”

“김천에서 왔거든요.”

“아, 그렇구나. 현역?”

“네. 고등학교 마치고 바로 왔습니다.”

“그렇구나. 반가워요. 정유진이라고 해요.”

“네.”

속도 없이 히죽 웃는 새벽을 보며 단유는 고개를 흔들다 유진의 시선에 움찔했다.

“내놔.”

“뭐.”

“휴대폰.”

단유는 어기적거리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고, 낚아채다시피 핸드폰을 뺐든 유진은 곧 전화번호를 따낸 뒤에 돌려주었다.

“나 되게 바쁜 사람인 거 알지? 바쁘니까 이 정도로 해 줄게. 연락하면 전화 받고, 언제 한 번 따로 만나서 이야기 좀 하자. 어떻게 지냈는지 되게 궁금하니까. 전화 피하지 말고.”

“안 피해.”

“그 말, 꼭 기억한다? 어느 과인지도 들었으니까, 전화 안 받으면 자연대 동으로 쳐들어간다. 오케이?”

유진은 처음처럼 쾌활하게 인사를 보낸 뒤, 먼저 몸을 돌렸다.

“우와. 형.”

단유는 새벽의 풀린 눈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을 할지 익히 짐작한 단유는 새벽을 보채, 도서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니, 어떻게 형은 저런···누님도 알고 계시는 건가요? 혹시 형은 아는 사람들이 전부 저런 연예인급들인가요? 아니, 아까 소속사 어쩌구 하던데, 혹시 진짜 연예인? 정유진이라고 했나? 핸드폰 치면 나오려나? 어떻게 아시는 거예요? 중학교 때부터 알게 된 사이 맞아요?”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혼자 도서관엘 가는 거였는데.

****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했어. 얼른 타.”

이마에 맺힌 땀을 대충 수건으로 찍어 닦아낸 리본 소녀는 밴에 오른 뒤에야 한숨을 돌렸다.

“저희 행사 하나 더 남았죠?”

리더의 물음에 매니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것만 하면 오늘은 끝이다.”

“날이 점점 더워지는 것 같아요.”

“올해는 여름이 더 빨리 찾아오는 기분이야. 다음 주까지만 대학 행사하면 일단 당분간 활동 없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컴백 준비하는 건가요?”

“다음 주부터는 아마 레슨 시간이 두 배로 길어질 거야.”

“시간 잡혔어요?”

“보컬 레슨은 4시부터 8시까지. 댄스는 10시부터 새벽 2시까지.”

“새벽 2시까지지만, 연장될 가능성이 있다?”

“알면서 묻냐?”

“그럼 그 전까지 저희 먹고 싶은 것 좀 먹으면 안 될까요?”

“그러든지. 난 안 말린다.”

“저래놓고 나중에 연습실에 저울 가져다 놓으실 거죠?”

다음 행사 일정인 대학교에 가기까지 소녀들은 각자 먹고 싶은 음식들을 하나씩 대며 허기를 참아야 했다.

“다들 그냥 한숨 푹 자라. 체력 아껴야지. 카메라 없을 때 ‘비글돌’ 시늉하려 들지 말고, 카메라 켜져 있을 때나 끼들 부려 좀.”

“네이, 네이.”

“아, 그리고 다들 입 조심하고. 이번에 또 스포하면 너네 가만 안 둔다고 대표님이 직접 말씀하셨어.”

경고를 잊지 않고 던진 매니저는, 체력 보존을 위해 잠들 자라며 종용한 뒤 침묵을 지켰고, 갓 행사를 마친 소녀들도 피곤함에 못 이겨 하나둘 눈을 감기 시작했다.

노을이 지며 오묘한 색으로 물든 하늘을 바라보던 도연은 잠이 오지 않았다. 한동안 잊고 지냈는데, 며칠 전 우연히 봤던 그 얼굴이 떠오른 탓이다. 아무 감정이 없었다면, 그냥 잘 지내는구나 생각하고 말았을 텐데, 이렇게 계속 생각이 나는 이유는 단순한 호기심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그동안 회사 몰래 다른 보이 그룹 아이돌과 연애를 했던 멤버가 없던 건 아니다. 하지만 도연은 한눈팔지(?) 않았다. 잘생기고 노래 잘하고 춤 잘 추는 소년들을 보면서도, 누군가와 계속 비교하게 되었다. 그 ‘누군가’는 자기 앞에서 춤을 추지도, 노래를 부르지도 않았지만, 그 누구보다 멋있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쉽게 잊히지 않았다.

특히 그 사람이 자신에게 해줬던 말들, 충고들로 인해 크게 도움을 받았다. 나이보다 성숙하고 진지했던 언행들이 그를 존경하게 만들었고, 그를 잊지 못하게 했었다.

‘게다가 서울대생이라니.’

뇌섹남? 표현이 어울릴지 모르겠지만, 섹시한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도연은 저도 모르게 볼이 붉어지는 기분이었다.

‘그 당시 목소리도 좋았던 것 같은데.’

문득 도연은 도경이 그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음을 떠올렸고, 언니의 전화로 한 번 전화해볼까, 충동을 느꼈다. 뒤를 슬쩍 돌아보니 도경은 챙겨온 무대 의상들의 정리를 끝내고 잠이 든 상태였다. 유리창에 머리를 기대로 잠든 도경을 보며, 나중에 몰래 부탁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

“여기야.”

단유는 주위를 둘러보다 곧 손을 번쩍 들고 해맑게 웃는 유진을 보며 살짝 혀를 찼다. 곧 다시 만나서 회포를 풀자던 유진의 말에 그러마 했지만, 이렇게 빨리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던 탓이다.

“야, 솔직히 가능했다면 어제 그렇게 놔주지도 않았어. 어제는 내 개인 스케줄이 정해져 있어서 시간 빼기가 어려웠으니까 그냥 얌전히 보내준 거야. 고마워해.”

“고마워해야 할 상황인 건가?”

“아님 말던가. 아, 여기는 와봤어?”

“아니.”

“여태 여기도 안 와 보고 뭐했대?”

대학 내에 있는 카페테리아였는데, 단유는 처음 들린 곳이었다. 주위에는 빈테이블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학생들이 자주 찾는 곳이라고 했다.

“나 올해 입학한 신입생이거든?”

“아, 그렇지? 계속 깜빡하네. 그럼 내가 선배네? 기분이다! 먹고 싶은 거, 마시고 싶은 거 다 말해. 내가 쏜다.”

“나도 돈 있어.”

“이럴 때는 선배가 사주는 거야. 비록 직속 선배는 아니더라도, 학번이 위면 무조건 선배인 거 알지? 그래도 오래전부터 친구여서, 차마 존댓말 쓰라고는 못 하겠다. 고맙지.”

“무척.”

“짜식. 변한 게 하나도 없어요. 하나도. 됐고. 너 생각보다 유명하더라? 서울대 대나무숲에도 네 이야기 많이 올라왔던데? 내 친구들도 널 알더라? 과도 다른데. 아무튼 이제껏 뭐 하고 지냈는지 소상히 밝히도록.”

“왜?”

“궁금하잖아?”

“별로 의미 있었던 일 같은 건 없으니까 신경 쓰지 마.”

“또, 또 비싸게 군다. 입 한 번 열면 어디 덧나냐?”

단유는 옅게 한숨을 쉬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