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591화 (591/956)

사랑은 아무나 하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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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 조교가 학부생들 휘트스톤 실험 보고서 들고 왔는데요, 책상 위에 놓고 가겠습니다. 네. 전원 제출했다고 합니다. ···예? 아, 예. 알겠습니다. 검토 끝내고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네? 아, 예.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예, 교수님. 들어가십시오.”

통화를 마친 대휘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핸드폰을 호주머니에 쑤셔 넣으려 하는데, 갑자기 벨이 울렸다. 화면을 보니 교수님의 전화라 혹시 교수님께서 따로 하실 말씀이 있으셨던가 싶어 지체하지 않고 곧 전화를 받았다.

“예, 교수님. ···아, 죄송합니다. 말씀 끝나신 줄 알고···. 아닙니다. 잘못했습니다. 네. 아닙니다. 불만은요. 제가 성격이 급해서 실례를 했습니다. 네, 교수님. 들어가십시오. 예···.”

교수님이 먼저 전화를 끊으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통화가 종료되었다는 화면이 뜨는 것을 확인 후, 대휘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렇게 시다바리 짓이나 할 줄은 몰랐다.

자신은 천출도 아니고, 서울대 학부를 졸업한 라인이지 않은가? 고작 막내라는 이유로 자기 공부할 시간도 버려가며 심부름이나 하려고 이 짓을 해야 한다는 게 아주 불만스러웠다. 게다가 꼬장꼬장한 교수는 택도 없는 예를 지키라며 사사건건 시비다. ‘시비’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대휘는 핸드폰을 차마 집어 던지고픈 마음이었지만, 최신형 스마트폰의 가격이 무시무시한 관계로 그저 힘주어 쥐었다가 얌전히 호주머니에 집어넣을 따름이다.

“후우.”

오늘도 새벽까지 연구실에 붙잡혀 있다 가야 할 것 같다. 학부생들 실험보고서야 소수의 얼토당토않은 것들을 제외하곤, 거의 비슷비슷한 수준이라 딱히 신경 쓸 건 없지만, 저 많은 양을 일일이 체크해야 한다는 귀찮음에 대휘는 뒷머리를 신경질적으로 긁었다.

****

“주말 잘 쉬셨어요?”

“친구 면회 갔다 왔어.”

하은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3시간을 달려 강원도의 한 군부대로 찾아간 단유는 오랜만에 채윤을 만나 회포를 풀었다. 병장이 된 채윤은 그 동안 면회 한 번 오지 않은 단유에게 섭섭하다는 시늉을 하며 반가움을 표시했고, 단유는 넘칠 정도의 먹을거리들을 선물하여 미안함을 드러냈다. 아무튼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면회요? 아, 군대요?”

“응.”

“저희 동기 중엔 군대 간 애들이 없어서 잠깐 생각했네요. 아, 형은 군대 다녀오셨어요?”

“아니.”

“언제 가실 건데요?”

“나 안가.”

“네? 정말요? 왜요?”

“5급이야.”

“5급···이 뭔데요?”

“전시근로역. 쉽게 말하면 민방위.”

“그럼 면제에요?”

“면제는 아니지만, 면제랑 비슷해.”

“와. 신의 아들이셨네요?”

“정 반대다.”

단유는 입꼬리를 씰룩이며 걸음을 옮겼다. 새벽도 눈치가 있어서 더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강의를 들으러 가던 중, 자연대 실험동 근처에서 대휘를 만났다. 지난 축제 때 안면을 익힌 사이라 단유와 새벽이 먼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어? 어, 그래. 신입생들, 맞지?”

“네. 지난주에 식당에서 인사드렸습니다.”

“그래, 그래. 기억난다. 강의 들어가는 거야?”

“네.”

“그래, 수고해라.”

딱 그 정도의 인사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후배는 선배에게 인사하고, 선배는 적당히 아는 척을 해주고.

“다크 서클 장난 아닌데요? 저 선배?”

“왜? 네 미래 같아?”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아직은 먼 미래. 새벽은 신의 아들이 아니라 군대도 가야 하고, 군대를 다녀오고 다시 학사 졸업을 한다 치면, 6년은 더 지나야 실감할 미래다.

****

오늘 수강해야 할 수업들을 모두 듣고 나왔을 때는 오후 4시를 겨우 넘긴 시각이었다. 볼 일이 있다며 새벽과 헤어진 단유가 향한 곳은 집 근처의 운전학원이었다. 하은과 함께 드라이브를 하던 중에 면허를 따라는 독촉이 있었고, 이를 승낙한 단유였다.

“어서 오세요. 수강하러 오셨어요?”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접수 안내원이 상냥하게 물었다. 단유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접수원의 친절에 응대했다. 안내원의 도움을 받아 등록 서류를 작성하여 제출하고 기다리는 동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 바깥에서 한 아주머니와 중년 사내가 말다툼을 하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가르치려면 똑바로 가르쳐요! 왜 욕을 하고 그래요?”

“오죽하면 욕을 하겠냐고요! 아주머니가 이대로 차 몰고 나가면, 사고가 날 게 뻔하니까 그러지 말라고 가르쳐 준 거잖아요?”

“어이가 없네? 내가 사고 내는 거 봤어요? 봤어?”

“안 봐도 뻔하잖아요! 신호등 보라고 몇 번을 말해요? 빨간 불 몰라요? 빨간 불?”

“처음 연습하는 거니까, 헷갈릴 수도 있잖아!”

“빨간 불을 어떻게 헷갈려?”

“헷갈려? 당신 지금 반말이야? 반말하는 거야, 나한테?”

“당신이 먼저 했잖아! 이 사람이···.”

“당신? 당신? 언제 봤다고 당신이야, 당신이!”

“···나 참 기가 막혀서.”

“기가 막히긴 누가 기가 막혀? 내가 더 기가 막혀, 내가. 내가 내 돈 주고 배우는데, 아저씨는 내 돈 받아서 가르치는 사람 아냐? 어디서 막말이야, 막말이.”

“이 아줌마가···. 아줌마, 내가 가르치는 사람인 걸 알면 말을 들어야 할 거 아냐! 신호 지키라고, 악셀 밟지 말라고 하면 그대로 하면 되잖아! 왜 하란 건 안 하고, 하지 말란 건만 계속 해!”

“왜 소릴 질러, 왜! 왜! 아주 이러다 한 대 치겠다, 치겠어?”

지켜보는 몇몇 사람들과 나서서 말리는 몇몇 사람들로 인해 시끌벅적해지는 상황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으니, 뒤에서 단유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안내원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등록 다 됐는데요’라고 말한다.

“사실 저런 일 잘 안 일어나는데. 저희 강사님들 전부 친절하시거든요?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네.”

“가끔 인터넷에 저희 강사님들 불친절하다는 글도 올라오는데, 그거 전부 오해에요. 일부 사람들이 괜히 앙심을 품어서 그래요. 사실 요즘 운전 면허 따기가 쉽지 않다고 하잖아요? 법이 엄해져서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시험 합격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그래서 강사님이 좀 더 타이트하게 가르쳐주시는 건데, 그걸 오해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단유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안내원이 건넨 접수비 내역서를 확인했다. 그 모습을 보고 안내원이 또 입을 열었다.

“그래도 저희 학원 수강생들 합격률이 주변에서 제일 높은 편이에요. 그만큼 저희 강사님들 가르치시는 실력도 좋으시고요, 여기 차들도 웬만큼 관리를 해서, 사고도 잘 안 나요. 다른 안 좋은 학원들 가면, 차가 안 좋아서 연습생분들이 차 운전하기 힘들다고 하는 경우도 있거든요.”

혹시라도 접수 취소를 할까 걱정했던 걸까? 단유는 내역서를 곱게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어디로 가면 되죠?”

“잠시만 기다리시면, 강사님이 오실 거예요. 아, 최 선생님. 이쪽이요.”

문을 열고 들어서는 중년 강사가 안내원의 부름에 다가왔다.

“여기는 오늘 등록하신 김단유씨고요, 여기는 최필연 강사님. 저희 학원 최고 베테랑 강사세요.”

간단히 목례와 악수로 인사를 갈음하고, 단유는 강사를 따라 사무실을 나왔다. 바깥에는 여전히 아주머니와 강사가 침을 튀기며 다투는 중인데, 말리고 중재하는 사람들이 끼면서 아까보다는 소란이 잦아든 상황이다. 특히 강사였던 중년 사내는 동료로 보이는 이들에게 두 팔이 잡혀 끌려가는 와중에, 옆에서 다독이는지 더는 입을 열지 않고 대신 얼굴만 붉힌 채였다.

단유의 시선을 눈치챈 최 강사가 변명처럼 말했다.

“저 사람이 원래 다른 사람한테 막말하는 스타일은 아닌데, 조금 흥분했나 보네요. 아실는지 모르겠지만, 요즘 운전면허 시험 난이도가 올라가면서 자동차학원에서도 꽤 엄격하게 지도를 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잖아요? 그래서 조금 다그쳤던 모양이에요. 그게 다 수강생 분들이 시험을 잘 통과할 수 있게 하려는 거거든요. 아시죠?”

“그렇군요.”

단유의 말에 강사가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실 시험 합격하는 거 어렵지 않아요. 강사가 말하는 것만 잘 지켜 주시면 되거든요. 대부분 그걸 잘 안 지켜서 떨어져요. 머리가 나쁜 사람들도 아닌데, 시험장에서는 금방 까먹는단 말이죠. 수강생분들은 그저 저희가 알려주는 노하우대로 따르기만 하면 운전 시험 합격하는 거, 껌도 아닐 겁니다.”

아주머니도 당사자가 물러났으니 더 화를 내지 못하고, 그저 씩씩대며 자리를 떠났다.

“요즘 김여사, 김여사 하는 말 들어보셨죠? 그게 다 저런 아주머니들 때문이에요. 자기 성격대로만 하려고 하니까. 그런데 운전이라는 게 혼자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물론 운전자 본인 원칙을 지켜가며 운전해야 하는 게 맞는데, 운전이란 건 다른 자동차들도 함께 신경을 써야 하는 거란 말이죠. 그래서 전방 주시가 중요하고, 사이드 미러를 틈틈이 확인하면서 주위 상황을 계속 체크해야 하는 거예요. 신호를 지키는 건 당연한 거고, 운전 중에 핸드폰 쓰지 말라고 하면 하지 말고, 사이드 미러나 숄더 체크 같은 건 수시로 해줘야 사고도 안 나고 안전하게 운전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저런 아주머니들은 그런 걸 잘 못 해요. 그저 자기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는지, 그런데 자기가 잘하지도 못해요. 깜빡이도 안 켜고 차선 변경하거나, 급정거, 급출발 같은 거, 다 저런 분들이 하는 거죠.”

그래도 같은 강사 편이란 걸까? 강사의 편을 드는 것 같은데, 어쩐지 자기 말을 잘 들으라고 돌려 말하는 기분이다. 듣는 거야 단유가 잘하는 것이니까 별문제가 안 되는데, 문제는 다른 사람에 대한 근거 없는 험담을 들어야 한다는 게 문제다.

“강사님들은 대체로 말씀을 험하게 하시는 편인가요?”

“응?”

“수강생들이 잘 합격할 수 있도록 엄하게 가르치고, 그 과정에서 말씀도 험하게 하시는 편이냐는 물음이었습니다.”

“아니, 그렇진 않죠. 저희도 친절하게 하는데, 가끔 저런 분이 계시면 이제 조금 엄하게 한다는 거지, 말을 막 하진 않죠.”

“알겠습니다.”

“그리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사실 운전이라는 게 목숨이 걸린 문제잖아요? 안 그래요? 운전 잘못해서 사고라도 나면 죽을 수도 있어요. 자신의 목숨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목숨도 위험하다고요. 그러니 운전은 늘 조심해서 해야 하는 거예요. 자신의 운전 실력을 자만하지 말고 늘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건데, 그걸 저희들이 알려주는 거죠. 까먹지 말라고. 모르면 사고가 나요. 사고가.”

단유의 물음이 버르장머리없는 젊은 놈의 말대답처럼 느껴졌던 모양이다. 강사의 태도가 조금 까칠해졌다. 그렇지만 그 강사의 주장은 솔직히 틀리다고 지적할 부분은 없었기에, 단유도 수긍했다. 대신,

“도로교통법 시행령 제71조에 따르면, 학원의 귀책사유에 해당하면 잔여 교육시간에 해당하는 수강료 전액을 반환하도록 되어 있다더군요.”

“네?”

“기능 강사, 학원 등의 무성의 역시 학원의 귀책사유가 될 수 있다고요.”

“뭡니까?”

강사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고, 저 아주머니도 강사님 표현처럼 ‘몰상식하게’ 보일 정도로 목소리를 높이는 것보다 깔끔하게 반환 청구하고 학원을 떠났으면 될 일이다, 이거죠. 강사님 말씀처럼 모르니까 그런 거겠죠.”

그랬으면 괜히 사람들 모인데서 목에 핏줄 세우며 자존심 대결을 할 이유도 없을 건데 말이죠, 라는 단유의 말에 강사는 헛기침을 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 뒤로 조용히, 학원 첫날 강의를 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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