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면 돼(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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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봤어요? 저기, 도연이가 이쪽 보는 거 봤죠? 어, 또 본다?”
새벽이 손을 힘껏 저으며 어떻게든 자신을 어필하려 애를 썼다. 도연과 새벽 사이에 수많은 사람들이 손을 흔들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의 노력은 별 의미가 없겠지만, 어쨌든 자기만족이다.
반면 단유는 그저 무심한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인디 밴드의 무대가 종료된 후 커다란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동안 멋있는 공연을 펼쳐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함성이며, 동시에 뒤에 나올 팀에 대한 기대감이 가득한 함성이었다.
그리고 그 기대감에 부응하기 위해, 화려한 무대용 의상을 차려입은 리본 소녀가 등장하자 함성은 더욱 커졌다. 일치단결한 사람들의 함성 때문인지, 아니면 바로 옆에서 악을 지르는 새벽 때문인지 단유의 귀가 먹먹해질 정도였다.
무대에 오르자마자 진형을 갖추고 준비자세를 취하자, 곧바로 MR이 나오기 시작했고 이미 큰 함성이라 생각했던 것 이상의 함성이 관중들에게서 터져 나왔다. 그 함성에 보답하기라도 하듯 리본 소녀는 미소를 지은 채 안무와 노래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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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리본 소녀입니다.”
“와아!”
“첫 무대는 괜찮으셨나요?”
“네에!”
“감사합니다. 오늘 날씨가 참 좋더라고요, 그렇죠?”
“네에!”
“이런 날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이라는 서울대에 와서 여러분들과 함께 하게 되어 저희도 무척 기뻐요.”
“우와!”
리본소녀가 무슨 말을 해도 대답은 함성이었다. 단유는 옆에 선 새벽의 목소리가 쉬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이 분위기를 이어가기 위해 저희 다음 곡 불러드릴게요. 다음 곡은요, 작년에 여러분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우와!”
“「Do like that」입니다.”
사람들은 반주부터 떼창을 하며 노래를 즐겼고, 사람들의 열띤 환호가 더 신이 나는지 리본 소녀는 좀 더 격하게 안무를 펼치며 무대를 이어나갔다.
후렴부를 따라 부르는 새벽과 달리 단유는 팔짱을 끼고 무대를 지켜보았다. 아무래도 예전 일이 있어서 그런지 주로 시선이 도연에게로 쏠렸다. 확실히 무대에서 자신감과 여유가 생긴 표정이었고, 이전에 그녀가 고백했던 두려움이나 공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듯 보였다.
시간이 흐르며, 경험을 쌓으며, 성장한 것이리라.
그때 누군가가 자신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낯익은 얼굴을 보았다.
“맞구나, 단유?”
현(現) 리본 소녀의 스타일리스트이자 전(前) 갤럭시즈의 스타일리스트였던 도경이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얼굴에 단유도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옆에서 벌어진 일에 무슨 일인가 싶어 무심코 고개를 돌렸던 새벽은 단유가 아는 사람을 만났구나 싶어 다시 무대로 시선을 돌렸다. 리본 소녀의 한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다는 의지였다.
“오랜만이다, 너. 처음에 차 안에서 봤을 때는 긴가민가했는데 말이야. 신기하다, 이런 데서 널 만날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여기 학생이야?”
“네.”
“정말? 진짜 서울대생?”
“예.”
“와···. 아, 그러고 보니 너 중학생 때도 공부 잘한다고 했었지? 정말 너 난 놈이었구나? 아, 표현이 좀 셌나?”
“아뇨, 칭찬인데요. 고맙습니다.”
“혹시나 리본 소녀 애들 보러 온 건 아닐까 했는데, 서울대라니. 도연이가 들으면 되게 놀라겠다.”
“왜요?”
“어? 그냥, 그럴 거 같다고.”
단유는 무대로 슬쩍 시선을 보냈다가 다시 도경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누나는 이번에 꽤 오래 일하시네요.”
“그렇지? 아니, 저기 회사가 대우가 좋아. 경력도 인정해주고, 또 애들도 워낙 착해서 나도 일하기 편하고.”
“잘됐네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때 무대가 끝나면서 대화를 잇기 어려울 정도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잠시 무대에 머물렀다가 다시 서로에게로 향했다.
“너 전화번호 바뀌었어?”
“아, 예. 얼마 전에 핸드폰 새로 사면서 바꿨어요.”
“아, 그렇구나. 그럼 번호 알려줘. 그래도 우리가 남도 아닌데 통화는 하고 살자고.”
단유는 순순히 번호를 알려주었다. 번호를 저장하며 도경이 피식 웃었다.
“코찔찔이 때 봤던 애가 이렇게 커서 서울대에 입학하다니. 세월 참 빠르다. 그치?”
“그런가요?”
“아, 도연이도 너 보면 되게 반가워할 텐데.”
“그럴 리가요.”
분홍색 원피스를 입은 도연이 마이크를 꼭 쥐고 해맑게 웃으며 관중들의 반응을 즐기고 있었다.
“아냐, 그때 이후로도 가끔 나한테 물어보더라고. 너 어떻게 지내는지 아냐고.”
물론 그건 잠시였고, 그 이후로는 활동이 바빠서 다른 이야기를 꺼낼 겨를이 없었다. 사실 살다 보면 이런 일은 자주 겪게 마련이다. 급속도로 가까워졌다고도 별 이유 없이 멀어지기도 하는 것.
“예쁘지?”
“···네.”
무대 위의 저들은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고, 예쁘게 보이기 위해 들인 시간을 고려하면, 안 예쁠 수가 없다.
“자주 연락하자. 가볼게.”
“예. 가세요.”
“공부 열심히 하고. 혹시 아니? 나중에 서울대생 도움을 받을 일이 생길지? 아, 너 무슨 과야?”
“물리학과요.”
“어? 그거 되게 어려운 과 아냐?”
“재미있어요.”
“와, 너 그렇게 말하니까 되게··· 좀 그렇다? 수능 만점 받은 애가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하는 거 같애.”
단유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도경도 자기 할 일이 있는데, 여기서 죽치고 있을 순 없었기에 그렇게 대화를 마무리하고 대기실로 향했다. 그 뒤를 지켜보다 다시 무대로 고개를 돌렸다.
마지막 무대와 앵콜 공연까지 마친 후, 격한 함성으로 그들의 마지막을 아쉬워하는 대중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퇴장하는 리본 소녀들은 곧장 밴으로 향했다. 짧은 거리에서 그녀들을 향해 온갖 구애의 함성을 보내는 팬들에게 짧은 목례와 손인사를 보낸 리본 소녀들이 밴에 오르고, 천천히 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행사 진행 요원들이 길 주위의 사람들을 뒤로 물리면서 밴이 서서히 나아갔고, 천천히 왔던 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새벽과 단유가 있는 부근까지 서행하던 중, 갑자기 창문이 내려가며 도연이 얼굴을 드러냈다.
“와아!”
사람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고, 도연은 손을 조그맣게 내밀고 흔들어 답례했다. 그 와중에 도연의 시선이 단유에게로 향했다.
“형, 형! 이쪽 봐요, 이쪽! 진짜, 대박!”
새벽의 호들갑에도 단유는 그녀를 조용히 지켜봤다. 도연은 단유에게 시선을 고정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팔짱을 끼고 있던 손을 풀어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 그냥 고개를 끄덕여주는 선에서 최대한 예의를 보였다. 도연이 좀 더 진한 미소를 짓는가 싶었는데, 창이 올라가며 차는 그들을 지나쳐갔다.
“와, 나 완전 가까운 데서 봤어. 봤어요?”
“응.”
“도연이 분명히 이쪽 본 거 맞죠.”
“그럴걸.”
“혹시 나 본 건가? 내가 아까 되게 크게 소리 지르고 손 막 흔들고 그래서 본 건가? 그런 걸까요?”
“그럴지도?”
새벽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발을 구르다, 주위의 온도조차 떨어뜨릴 정도로 심하게 차분한 단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형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뭐가?”
“연예인 이렇게 가까이 봤는데?”
“그냥.”
“···아 맞다. 형은 연예인 많이 봤었구나.”
“뭘 또 많이야.”
“예전에 가디스R도 직접 보고 그랬잖아요.”
“옛날이야.”
“옛날이라도. 와, 형 지금 모습 보니까 진짜 다른 세상 사람 같아요. 마치 ‘연예인? 그까짓 거’ 막 이런 모습이에요.”
단유는 새벽의 어깨를 두드려준 뒤 다시 무대로 고개를 돌렸다. 이미 무대에는 또 다른 공연팀이 올라와 무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계속 여기 있을 거야?”
“아니요, 다 봤는데요.”
“그럼, 가자.”
“아, 예.”
두 사람은 곧 학생 잔디 행사장을 빠져나와 자연대 텐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축제의 마지막 밤, 마지막 일탈을 위해 그들의 남은 에너지를 끌어모아 분출하고 있었다.
단유는 도연과의 만남도 그 일탈의 연장선상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내일이 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자연스럽게 잊혀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다시 다른 축제를 옮겨 다니며 무대를 펼치듯, 그래서 지난 무대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듯, 자신에 대한 것도 금방 잊혀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새로운 무대 위에서, 자신은 평화로운 일상 속에서 서로의 길을 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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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걔 맞아요?”
“맞더라니까. 내가 가서 이야기까지 했다고.”
“누구 이야기에요?”
“예전에 도연이가 교육부 주관 홍보 영상 찍은 적 있잖아? 그때 같이 찍었던 애.”
“아, 그 잘생긴 애? 그때 중학생이라지 않았나?”
“그때 중학생이었으니까, 지금은 대학생이지.”
“와, 그런데 그냥 대학생도 아니고 서울대학교 학생?”
“그렇지.”
“대박. 완전 공부 잘했나 보다.”
“그때도 꽤 똑똑하다고 소문났던 애야. 내가 걔를 중1 때 봤는데···.”
도경의 이야기가 이어지던 와중에 도연은 잠시 스쳐 지나가며 봤던 단유의 얼굴을 떠올렸다. 차마 이름은 부르지 못하고 그저 손만 흔들었는데, 그가 알아봐 주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오히려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다. 만약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면 조금 감흥이 식었을지도 모르겠다.
‘변한 게 없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이 참 그렇다. 시간이 가면, 누구나 사람은 변한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변하지 않는 모습을 꿈꾸기도 한다. 그 모습 영원하기를.
그런데 그 소년은 남부럽지 않은 모습으로 자랐을 뿐 아니라, 그 시절의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찰나의 순간이라 정확한 판단이라고 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여자의 감’이 말한다.
그는 변하지 않았다고.
“누구 이야기를 하는 거야?”
지금 리본 소녀를 맡은 매니저는 맡은 지 이제 2년째였고, 당시의 매니저는 부장으로 진급한 뒤 자신들과 후배 걸그룹과 보이그룹 각각 1팀씩을 총괄 관리하고 있다. 그래서 현 매니저는 단유를 모른다. 도경은 친절하게 ‘김단유’란 아이의 필모그래피를, 자신이 그의 개인 매니저인 양, 줄줄 읊으며 리본 소녀와 또 어떤 관계였던지를 이야기했다.
“도연이 무대 공포증을 고쳐 줬다고?”
“고쳐 줬다기보다는 고치는 데 도움을 준 거죠.”
“그게 그거지. 그럼 도연이가 늘 말하는 고마운 사람이 걔야?”
“걔지?”
도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눈에 담기 힘들 정도로 수많은 도시의 불빛들이 별빛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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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밤, 서울대 재학생들은 그들의 마지막 축제를 화려하게 불태웠다. 그리고 물리학과 학생들은 밑 빠진 독 채우듯 술로 위를 채워 불태웠다. 불꽃이 타고 남은 검은 재가 흩날리듯, 검은 하늘이 물러가고 어슴푸레한 새벽이 찾아온 뒤에야 귀소 본능을 발휘했다.
“괜찮아?”
“윽. 괜찮아요.”
“데려다줄게.”
“아니요.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비틀대며 자연대 건물 뒤편의 주차장으로 향한 새벽은 주차장 구석에 거치되어 있던 자전거를 꺼내려 했고, 단유는 서둘러 새벽을 막았다.
“음주운전이야.”
결국 새벽을 부축하여 그의 자취방에 데려다준 후에야 단유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늦은 새벽, 문을 열고 들어서니 서늘하리만큼 넓은 거실이 단유를 반겼다.
“킁.”
“깨웠어?”
“킁.”
“미안하다. 들어가서 자.”
호빵은 단유의 발밑에서 꿈지럭거리다 코를 몇 번 킁킁대더니,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거실을 질러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급수기를 몇 번 핥고는 이전 집에서부터 쓰던 자신의 방석 위에 올라가 자세를 잡고 엎드려 단유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술 냄새가 좀 나나?”
들어오기 전에 바람을 이용하여 몸에 밴 냄새를 조금이나마 덜고자 했으나, 향기 분자가 배인 옷이 고작 바람에 탈취가 되진 않는다. 단유는 2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계단으로 향하는데,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렸다.
“단유야?”
“···응. 안 자고 뭐 해?”
“방송 중이지.”
“그럼 계속해.”
“윽, 술 냄새. 취했냐?”
“다 깼어.”
술도 마시면서 익숙해지나 보다. 조금 어질어질하긴 해도 그저께처럼 정신이 나가지는 않았다.
“알았어. 너무 늦게 다니지 말라고. 걱정되니깐.”
“누가 할 소리.”
“난 집 밖으로 나갈 일이 별로 없으니까.”
“···스토커 때문에?”
“응? 아, 그것도 그렇지만, 원래 잘 안 나가. 내 생활 리듬이 좀 그래. 그리고 이미 집에 먹을 거 천지고 배고프면 시키면 되니까, 굳이 나갈 일이 없잖아? 생리대도 몇 달 치 거를 한 번에 사놨고.”
“야.”
“알았어, 알았어. 얼른 들어가 자.”
상미는 손을 삐죽 들어 올려 보이고는 방으로 쏙 들어갔다. 단유는 잠시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위층으로 올라가려다, 계단에서 발을 떼고 상미네 방으로 다가갔다.
문을 두드리니, 안에서 ‘들어와’란 허락이 떨어졌다. 방으로 들어가는 대신, 문만 살짝 열었다. 벌써 이어폰을 끼고 마우스를 잡은 상미의 모습이 보였다.
“어, 왜?”
“···잠깐 이야기 괜찮아?”
“어, 괜찮아. 지금 잠시 쉬는 시간이야.”
상미는 이어폰을 귀에서 빼내곤 앉은 채로 몸을 돌렸다.
“거기 있지 말고 들어와.”
“그냥 별 이야기 아니고 물어볼 게 있으니까.”
“뭔데.”
“스토커, 요즘은 안 보여?”
상미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내가 잠시 방송 안 했잖아? 이사도 하고 그러면서 며칠 쉬어서 그런가, 안 나타나네. 이럴 줄 알았으면 괜히 겁먹었던 거 같애.”
“다행이네.”
“응. 어쩌면 스토커 아니고 그냥 장난일 수도 있겠다 싶어.”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다시 나타나면 꼭 연락해.”
“알았어. 그러니까 걱정 그만하시고 올라가서 쉬세요. 집주인님.”
“집주인은 무슨.”
“아, 네. 투자자님.”
단유는 피식 웃으며 방문을 닫았다. 그러나 곧 웃음은 사라지고, 단유의 미간에 주름이 깊게 팼다. 이런 식의 대응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뭔가 일이 생길 때까지 기다려야 하다니. 일이 생기기 전에 무슨 조치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자신의 ‘권능’이 아무리 초월적이라 해도 이런 사소한 위협에 대응을 못 한다면 무소용이다. 어쩐지 자신의 능력이 모자라 이런 불안감을 느끼는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