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589화 (589/956)

얼마면 돼(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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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휘가 신입생들을 훑으며 인사를 할 때, 단유와도 자연스럽게 시선이 맞았다. 그 순간은 매우 순간이었고, 아무 일 없다는 듯 다른 사람에게로 시선이 넘어갔으나 단유는 그 짧은 순간에 위화감을 느꼈다.

사람을 경계하며 살아온 지난 세월을 경험했던 단유였기에 대휘의 눈빛에 서린 위화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의미는 읽어내기 어려웠다.

‘뭐지?’

대휘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을 때 옆에서 툭툭 치는 새벽의 팔꿈치에 정신을 차렸다.

“식사하세요.”

“아, 응.”

“왜요? 형의 미래의 모습 같아서요?”

단유는 쓴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숙취로 괴로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학생들을 데리고 수업을 진행했던 강사도 꽤 힘든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만 일 년에 단 두 번 있는 일탈의 기회를 탓할 수만은 없었기에 수업을 일찍 마치는 선에서 타협을 했다. 학생들은 강사에게 감사하며 강의실을 나갔다.

단유와 새벽도 금요일 마지막 수업이었던지라 가벼운 얼굴을 하고 건물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어젯밤 머물렀던 텐트 쪽으로 발길을 돌려 나가는 중이었는데 본부 앞이 시끌시끌해서 절로 시선이 갔다.

“형, 저기 한 번 가보죠?”

새벽이 강하게 호기심을 드러냈다. 이번 축제로 가장 신이 난 사람은 아마도 새벽일 것 같았다. 고등학교 생활하는 내내 공부만 했다는 새벽은 신대륙을 발견한 탐험가들이 저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3일 내내 들떠있었다. 잔디 마당 구석에 설치된 펀치 기계를 때리며 즐거워하고, 막걸리 많이 마시기 대회 같은 것도 하고 싶어 했다. 교정을 거닐다 뭔가 시끌벅적하다 싶으면, 무조건 달려가서 구경하고 참여할 수 있는 것이라면 참석하려 했다.

‘음···햄스터에 가까우려나?’

쳇바퀴 돌리는 게 뭐가 그렇게 신이 날까 싶지만, 햄스터는 지칠 줄 모르고 원통 위를 신나게 내달리지 않던가.

다가간 곳은 ‘관악 생존왕’이라는 부제가 붙은 관악 게임리그가 펼쳐지는 중이었다. 역대 축제에서 항상 빠지지 않고 실시했던 게임 대회가 이번 봄 축제에도 어김없이 등장했다. 게임은 그때 그때마다 달라지는데, 스타크래프트가 유행할 때는 스타크래프트 게임리그를 진행했고, 롤이 유행할 때는 롤 대회를 진행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배틀 로얄’ 게임이었다.

이번에는 제작사의 후원을 받아, 역대 최대 규모로 진행이 되었는데 아쉽게도 새벽은 예선전에 지원을 못했던 이유로 참여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무대 앞 잔디밭에 앉아 그냥 구경만 할 뿐이었다.

“우와, 아깝다. 에임 좋았는데 뒤로 돌아서 오는 걸 못 봤나 보네.”

새벽이 아쉬운 플레이 장면에 눈을 찡긋거렸다.

고등학교 때 몇 번 해보긴 했어도 잘하지는 못했고, 공부에 전념해야 했던 시기이기도 해서 게임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새벽이었지만, 우연히(?) 배틀 로얄 전문 인터넷 방송을 진행하는 상미와 함께 플레이를 하면서 재미를 알게 되었다. 새벽 정도의 초보자에게 꿀팁이 될만한 것들을 하나하나 알려주는 상미의 도움이 컸다. 그리고 무엇보다 승패가 나뉘는 게임에서 승리를 이어간다면 절로 재미를 붙일 수밖에 없다. 상미야 방송에서 실력을 인정받을 정도로 잘하는 축이었고, 단유도 생각보다 플레이가 좋아서 세 사람만으로도 승리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때 이후로 새벽은 게임에 눈을 떴다(?).

“형이 나갔으면 우승했을 건데.”

“나 그 정도까진 아닌데.”

“생각난 김에 피시방이나 갈까요?”

그냥 보고만 있으려니 몸이 근질근질했던 모양이다.

“나중에 공연 시작 전까지만 오면 되니까요.”

해가 떨어질 때쯤, 축제의 하이라이트인 연예인 축하 공연이 있을 예정이었다. 그리고 무려 ‘리본 소녀’가 등장할 예정이었기에, 이 공연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새벽 뿐만이 아니었다. 오늘 하루동안 단유가 돌아다니며 가장 많이 들은 단어가 아마도 ‘리본 소녀’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사람들의 기대심은 크게 오르는 중이었다.

반면에 그런 사람들과 기대심의 척도가 다른 단유는 아무래도 흥이 나질 않았다.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친분을 쌓는다는 목적이 없었다면, 축제 자체의 재미도 못 느꼈을지 모르겠다. 그나마 이 축제에서 재미있는 점이라면, 평소 무뚝뚝하기만 하던 사람들의 면면에 떠오르는 생경한 미소들을 구경하는 재미였다. 그런 미소를 만들기 위해 축제를 진행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그런데 형.”

“응?”

“아까 점심 때 식당에서 한 이야기 정말이에요?”

“어떤 거?”

“···세상의 진리를 알기 위해 물리학과를 선택했다는 말이요.”

“응.”

“사실 저도 물리학을 좋아해요. 좋아는 하는데, 잘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아니 원래 예전에는 잘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제가 비록 지방에서 올라오긴 했지만, 그래도 서울대 들어와도 잘 할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생각이 조금 꺾였거든요. 당장 형만 해도, 솔직히 형보다 잘할 자신이 없기도 하고요.”

시선을 떨군 채로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새벽을 흘깃 본 단유는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낙성대로를 따라 심어진 가로수에 푸른 잎들이 눈 앞을 가득 메운다.

“물리학을 전공 후에 삼성 반도체 연구소에 들어가고 싶었어요. 거기 리소그라피(Lithography) 개발팀 있잖아요?”

꽤나 구체적인 진로를 잡아놓은 새벽이다.

“반도체 산업은 앞으로도 계속 발전할 테고, 특히 반도체 생산의 1인자인 삼성이니까, 거기 들어갈 수 있다면 꽤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죠.”

평소 막 상경한 시골 총각이 이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모든 것에 신기해하던 새벽이지만 확실히 자기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그 길을 정직하게 나아가는 인재였다. 역시 서울대에 들어온 사람들 중 평범한 사람은 없구나, 라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그런데 솔직히 고백하면 형만큼 물리학을 좋아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속물적일 수 있지만, 물리학은 선택된 사람들만 공부하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물리학 전공자들 중에서도 일부만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요.”

진우가 했던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반드시 물리학으로 성공할 거다, 라는 자신감이 있었으니까 물리학과를 지원할 수 있었어요. 그러니 물리학을 좋아하냐고 물으면 전 물리학과를 좋아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모르겠어요. 자신감도 점점 떨어지고. 얼마 전에 도강했던 수리물리학 수업을 생각하면, 그런 걸 계속 들어야 하나 싶은 생각도 들고 그걸 듣고 내가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그래요.”

새벽이 돌아보며 말했다.

“좋아하는 것만 하고 살 수는 없잖아요?”

단유가 말없이 있자, 새벽이 피식 웃었다.

“그래서 이렇게 현실 도피를 하려고 피시방을 가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피시방을 가는 이유가 너무 거창하네.”

“그런가요?”

하지만 단유는 새벽의 질문에 정직하게 대답하기 곤란했다.

물리학은 이 세계를 구성하는 물질의 근원을 추적한다. 분자에서 원자로, 원자에서 핵으로, 핵에서 양성자와 중성자로, 다시 쿼크(quark) 렙톤(lepton)으로. 이 최소의 물질을 완벽히 이해한다면?

지금 고작(?) 탄소라는 원자의 이해 정도로도 남들은 상상도 못 할 마법을 구사하게 되었는데, 만약 물질의 이해도가 격을 달리할 만큼 높아진다면 어찌 될까?

물론 이 이야기를 새벽에게 해 줄 수 없으니, 단유는 씁쓸한 미소로 새벽을 위로했다.

“오늘은 새벽까지만 놀자.”

“···지금 농담하신 거예요?”

“······.”

“완전 아재 느낌인데?”

하은에겐 잘 먹히던데.

****

게임에 너무 빠졌던 새벽은 자신을 자책하며 서둘러 피시방을 나왔다.

“늦겠어요.”

“안 늦어. 7시에 시작이라며?”

“앞에서 보려면 서둘러야 하거든요.”

정류장에 갔더니 사람들이 많이 줄 서 있는데, 빈차가 와도 다 타기 힘들 것 같았다. 다른 이들도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걸어서 후문 쪽으로 가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자전거 있었으면, 빨리 갔을 텐데.”

아쉬워하며 새벽은 단유를 재촉했다.

“형은 리본 소녀 안 보고 싶어요?”

“딱히. 보더라도 굳이 앞에서 볼 필요까지는 있나 싶고.”

“에이, 진짜 형이 리본 소녀를 몰라서 그래요. 리본 소녀 공연은 앞에서 봐야 한단 말이에요.”

새벽만 유난을 떠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모양이다. 주위에 걸어가는, 아니 뛰어가는 이들 중에는 교복을 입은 남, 녀 학생들도 눈에 띈다.

이윽고 학생 잔디에 도착했을 때는, 서울대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었는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다행인 점은 아직 리본 소녀의 공연이 시작되지 않았다는 점이고, 안타까운 점은 그럼에도 이미 학생 잔디 전체가 사람들로 가득해 마땅히 끼어들 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시 늦었네.”

새벽은 아쉬워하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나마 무대에 가장 가까운 곳을 찾아 가려는 새벽과 단유는 결국 무대 왼편의 비탈길 쪽으로 향했다. 무대가 멀지는 않지만 불가피하게 측면만 구경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차라리 무대 옆에 설치된 모니터로 무대를 구경하기 위해 군중들의 뒤쪽으로 가는 게 좋지 않겠냐 했더니, 그래도 가까이서 보는 게 좋다고 새벽은 비탈길을 골랐다.

“게다가 저기는 대포들 때문에 구경하기도 힘들어요.”

통칭 대포 카메라라고 부르는, 600㎜ 초망원렌즈를 붙인 카메라를 든 팬들의 무리 때문에 그 뒤는 무대를 제대로 구경하기 힘들어 보이긴 했다.

“아직 안 왔나?”

마침 가까운 쪽에 설치된 대기실을 까치발로 기웃거리던 새벽의 말에 단유도 고개를 돌렸다.

“음, 없나 보네.”

“보여요?”

“응.”

“정말 제가 형만큼 키가 컸으면.”

부럽다는 눈으로 단유를 쳐다보던 새벽은 다시 무대로 시선을 돌렸다. 무대 위에는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인디 밴드의 공연이 진행 중이었는데, 사람들이 밴드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걸로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때 뒤쪽에서 분주한 움직임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더니 커다란 밴이 천천히 길을 따라 오는 중이었다.

“왔다!”

누군가의 외침에 주변 사람들의 고개가 미어캣처럼 돌아갔다. 사람들이 주변에 많아 밴은 속도를 내지 못했고, 느릿한 속도로 지나가느라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새벽은 입을 벌린 채 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대박. 처음 봐.”

단유는 아무 말 없이 밴을 쳐다보다가 무대로 시선을 돌렸다. 조금 멀리 떨어져 있긴 했지만, 사람들의 환호성이 그 무대에까지 들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대에서 열심히 연주하는 이들에게 이 환호성은 별로 달갑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지금 무대의 주인공은 자신들인데 말이다.

다시 한번 커다란 함성이 터져서 고개를 돌렸더니, 대기실 근처에 선 밴에서 여리여리한 소녀들이 내리고 있었다. ‘소녀’라는 표현하니까 이상하긴 하다. 다들 단유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그때, 그 소녀들 중 한 명이 단유가 있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우연은 아니었다. 그녀는 정확히 단유를 인지하고 있었으니까. 물론 단유도 그 소녀를 익히 잘 알고 있었고.

“우와, 이 쪽 쳐다봐요!”

새벽은 격앙된 목소리로 환호를 보내며 허공에 손을 저었다.

혹시나 했다. 차가 천천히 지나가며, 길가에 선 사람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고, 그래서 무심코 그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중에 눈에 익은 얼굴이 하나 들어왔다. 주변 사람보다 키가 큰 그 사람은 예전보다 성숙한 이미지긴 하지만 몰라볼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사람을 여기서 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기에 비슷한 사람이라도 본 걸까 싶었다. 차창에 검게 썬팅이 되어 있어 잘못 본 건가 싶기도 했다.

그런데 내려서 돌아보니, 그 사람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리가 있어도 얼굴은 알아볼 수 있었다.

“뭐해?”

매니저가 어깨를 툭툭 치며 대기실 안으로 들어갈 것을 종용했다.

“아, 네.”

대기실로 들어와 도연은 생각했다.

‘진짜 걘가? 여기 왜? 설마 나 보러?’

무대에 대한 긴장이 사라지고 대신 물음표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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