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면 돼(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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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대로 다 받는다’는 의미로 ‘주다’라고 부르게 된 이유는, 단유가 주는 술을 마다하지 않고 모두 받아 마신 탓이다.
“적당히 마셔. 억지로 안 마셔도 돼.”
오히려 단유를 끌고 온 진우가 걱정해서 단유를 말릴 정도로.
“괜찮아.”
“술 잘 마셔?”
“몰라.”
“몰라?”
“이렇게 마신 적은 처음이라서.”
“큰일 나는 거 아냐?”
“몰라.”
“몰라?”
무표정한 얼굴로 받는 술은 다 받는다. 그리고 누가 뭘 물어보면 단답형이긴 해도 다 대답한다.
“취한 거 아냐?”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 애도 아니고.”
건배 제의를 마다치 않고 꼬박꼬박 다 마셔대니 속이 걱정되어 새벽이 안주를 건네 주었다. 플라스틱 접시에 놓인 파전을 잘게 찢어, 그 중 한 조각을 입에 물려주었더니 볼을 씰룩이며 맛있게 먹는다.
“쟤 입만 입이고, 내 입은 입도 아니냐?”
“선배님도 드리려고 했습니다.”
새벽은 싹싹한 태도로 웃으며 접시를 건넸다. 새벽이 접시를 놓으니 다른 선배들이 단유의 속을 챙겨 주었다. 여자 선배들은 볼을 불그스레 물들인 단유에게 자신들 앞에 놓인 안주를 들어주니 그것도 사양하지 않고 잘도 받아먹는 단유가 귀엽다고 난리들이다.
“얘 이렇게 보니 꽤 괜찮네.”
“맨날 무뚝뚝한 얼굴로 다녀서 몰랐는데.”
오히려 지금이 더 무표정이지만, 술기운에 볼을 빨갛게 물들이니 색다르게 보였나보다. 아니면 다 같이 취해서 눈에 뭐라도 씌었던가.
단유가 텐트 안을 종횡무진 돌아다녔더니, 단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함께 얼큰하게 취하고 말았다. 취한 것 같은데, 멀쩡하게 돌아다니며 술을 주고받는 단유 덕에 선배들도 오기가 생긴 탓이다. 단유가 취해서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자고 다들 한 잔씩 하다 보니 어느새 술이 부족할 지경에 이르렀다.
“어, 술이 다 떨어져 졌네?”
“야, 과대. 술이 없다!”
과대는 서둘러 지갑을 열었다. 근처에 있는 후배들에게 시켜 술을 사 오게 하려 했는데, 어느새 옆에 단유가 서서 과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술 사올까요?”
“아뇨. 오빠는 술도 많이 드셨는데 그냥 쉬세요. 후배들 시키면 돼요.”
“저도 후밴데.”
“아, 그래도 오빠는 좀 쉬세요.”
“돈 필요해요?”
“네? 아니요. 과비 아직 많이 남았어요.”
“돈 필요 없어요?”
“네. 혹시 보태시려고요? 괜찮아요. 이런 건 사비로 계산하는 거 아니에요.”
“제가 많이 마신 거 같아서요.”
“선배님들이랑 나눠 드신 거니까요.”
“저 돈 많아요.”
“괜찮아요. 오빠.”
과대표는 대화를 빨리 마무리 지으려 노력했다. 가까이서 단유를 보니 어쩐지 얼굴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라, 시선을 피하며 덜 취한 후배들을 불러 함께 텐트를 빠져나갔다.
“형, 괜찮아요. 여기 앉아서 좀 쉬세요.”
“나 돈 많아.”
“알아요. 아니까, 좀 쉬세요.”
“야, 쟤 취한 거 맞지?”
“그런 거 같은데요?”
“술주정 참 요란하네. 돈이 얼마나 많길래 저러냐?”
“술주정인데 뭘 그렇게 진지하게 들어?”
평소 단유가 허름한 옷차림에 뚜벅이 생활을 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다들 단유의 말을 ‘주정’이라 치부했다. 사실을 아는―그나마도 굉장히 축소된 정도지만―새벽은 선배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단유를 데리고 텐트 밖으로 나섰다.
“형, 진짜 취하신 거예요?”
“···몰라.”
무표정한 표정에 초점이 살짝 풀려 있는 단유를 보며, 어쩐지 완전무결한 단유의 인간미를 본 거 같아 새벽은 조금 즐거워졌다. 자신도 텐트 안 분위기에 취해 술을 많이 마셨던 터라 잠시 쉴 겸 주위를 돌기로 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새벽은 자신의 전화인가 싶었는데 단유의 것이었다. 단유는 전화기를 꺼내 들고는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통화를 시작했다.
“응.···응.···응.”
그리고는 전화를 끊었다.
“누구에요?”
“상미.”
“···아, 명수 형 여자친구분이요?”
“응.”
“왜요?”
“왜 늦게 들어오냐고.”
“네?”
단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고, 새벽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단유를 힐끔 쳐다보며 거리를 걸었다. 오늘, 서울대의 밤은 꽤 요란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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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서울대의 풍경은 언제나와 같았지만 지난 밤, 광란의 시간의 흔적들이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초췌해진 얼굴로 건물 복도를 돌아다니는 학생들과 ‘괜찮냐’고 물어보는 선후배들의 모습에서 끈끈한 정(?)을 느낄 수 있었다.
“괜찮아요.”
새벽의 눈 밑에 깊게 새겨진 다크 서클과 조커의 웃음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음산한 미소는 절로 동정심을 불러일으켰다.
“괜찮지 않아 보여.”
“형이야말로 괜찮아요? 어제 많이 드셨잖아요?”
“난 괜찮아.”
“그렇게 보이네요. 형 어제 기억은 다 나요?”
“응.”
“형 어제 취한 거 맞죠?”
“···몰라.”
무표정한 얼굴의 단유를 보며 새벽은 생각했다.
‘아직 덜 깬 거 같은데.’
둘은 해장을 하러 학생 식당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진우와 마주쳤다.
“어이, 괜찮아?”
“괜찮아.”
“멀쩡해 보이네.”
새벽이 끼어들었다.
“어제도 멀쩡해 보이긴 했어요.”
“아, 그렇지. 어디, 식당 가나?”
“해장하러요.”
“같이 가자. 친구한테 밥 한 끼 못 사주겠냐?”
진우는 단유의 어깨를 주먹으로 툭 치고는 히죽 웃어 보였다. 가는 길에 우연히(?) 마주친 물리학과 좀비들이 아는 체를 하면서 식당으로 향하는 무리가 점점 불었다.
“이거 2차 가는 분위긴데?”
“2차는 무슨. 2차는 오늘 저녁에나 하자.”
“오늘 저녁에는 공연 보러 가야지.”
“아, 맞다. 오늘 리본 소녀 나오지?”
“세상에 리본 소녀를 눈앞에서 볼 수 있다니, 꿈만 같다.”
기대감에 부푼 얼굴로 식당에 들어서는 학생들은 곧 식당 메뉴에서 해장 메뉴를 골랐다. 축제날이라서 그런지 학생 식당에서 특별히 육개장과 콩나물 해장국 등을 개시한 상황이었다.
“너희들 건 내가 사줄게.”
호기롭게 외친 진우의 말에 다른 선배들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덕분에 같이 따라 왔던 후배들은 선배들의 은혜로움―3천 원짜리 식권―에 깊이 감사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근데, 넌 왜 물리학과를 지원한 거냐?”
육개장을 먹다 말고 진우가 물었다. 사실 어제 술 한 잔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단유가 인기가 좋아서 오붓하게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 꼭 술 먹고 나눌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아, 어제는 친구가 된 것으로 만족했던 진우였다.
“물리학이 좋아서?”
단유의 모호한 대답에 진우는 피식 웃었다.
“새터에서 그렇게 대답하는 후배가 있었으면, 당장 사발을 들이켜라고 했을 거다. 솔직히 물리학 싫어하는데 물리학과에 온 애들이 있을까?”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지 고개를 끄덕여 진우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나랑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서울대 물리학과라고 하면 전국 최강이라는 자부심은 있단 말이야. 그런데 현실은 암울해. 학사만 하고 졸업하면 딱히 취업할 데가 없단 말이야. 싫든 좋든 대학원을 가야 하고, 대학원에서 또 수년간 욕받이 생활하면서, 아, 이건 오프 더 레코드다. 대학원 선배들 앞에서 이런 이야기하면 좋은 인상 못 받아. 아무튼, 대학원에서 석사, 박사는 따야 표과연(표준과학연구원)이나 국과연(국방과학연구소), 혹은 괜찮은 연구소로 갈 수 있단 말이지. 아니면 아무 관련도 없는 직종으로 취직하는 수밖에 없고.”
다른 선배가 진우의 말을 받았다.
“예전에는 서울대 명함으로 취업이라도 했지, 요즘은 것도 안 받아준다더라. 솔직히 3, 4학년 가면 수업이랑 실험에 치여 살게 되는데, 다른 애들처럼 여유롭게 스펙을 쌓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결국 취업하려고 나서면 다른 전공에 밀리는 일도 생기지. 암울하다 이거야.”
지난 밤, 괴성을 지르며 놀던 선배들과 동일한 존재들인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침착하게 암울한 미래를 덤덤히 이야기한다.
“대학원을 가도 사실 비슷해. 거기까지 가면 다른 대학에서 온 애들이랑도 경쟁해야 하고, 여기 있는 동기, 선배, 후배들이랑도 경쟁을 해야 하니까. 대학원도 나름 치열한 세계거든. 허구헌날 연구실에 박혀서 데이터랑 싸워야 하는데, 사람 만날 시간도 없고, 다른 걸 따로 준비할 시간도 없어. 석박사 못 따면 말짱 황이다, 이거야.”
숙취를 해소하기 위해 숟가락을 쉴 틈 없이 놀리던 신입생들의 움직임도 점차 느려졌다.
“이런 거 다 감안하고도 물리학이 좋다! 막 이러면 그러면 진짜 물리학이 좋은 거야. 물리학 아니면 아무것도 하기 싫고,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굶어 죽어도 물리학이다! 이래야 물리학이 좋아요, 라고 할 수 있는 거야. 알겠어?”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물리학이 좋아?”
진우의 물음에 단유는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뒤 대답했다.
“물리학을 배워야만 해.”
“왜?”
“필요하니까.”
“그러니까 왜?”
“그래야···세상의 진리를 알 수 있으니까.”
과중반에서 반을 정할 때도 그랬고, 대학 전공을 정할 때도 수학과 물리학 둘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었다. 그것은 단유 본인의 선호도 문제도 문제이거니와 마법이라는 능력을 끌어올리는 데 유효한 학문을 배우고자 하는 의지도 고려되었다.
그리고 결국 물리학을 선택한 것은 그런 점들을 모두 고려하여 선택한 결과다.
물리학은 삼라만상의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그리고 그 진리는 단유가 추구하는 마법적 지식의 근원이기도 하다.
더불어서, 비록 지금은 불가능하지만, 언젠가는 자신의 의지로 ‘그 세상’으로 가보고도 싶었다. 이 우주의 어딘가에 존재하는지, 아니면 전혀 다른 차원의 세상인지 불명확하지만, 물리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그 길을 찾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 결정을 위해 3년이란 시간을 보냈다. 이제는 단유는 자신이 선택한 결정에 따라 우직하게 나아가는 것밖에 없었다.
단유의 대답에 테이블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곧, 진우가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대박!”
진우의 뒤를 이어 다른 선배들도 감탄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손뼉을 쳤다.
“너는 그냥 천상 물리학자네, 물리학자. 세상의 진리를 알기 위해 물리학을 배운다! 모르긴 몰라도 최근 10년 내에 그런 대답을 한 신입생은 니가 유일할 거다.”
“존경스럽다! 다들 박수.”
단유의 동기들도 다들 수저를 놓고 단유에게 박수를 보냈다. 뜬금없는 박수 소리에 다른 테이블에서 식사하던 이들이 고개 돌려 돌아볼 정도였다.
열심히 박수를 치던 진우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멋있다, 김단유! 친구야! 멋있어. 진심을 담아 말하는데, 부디 그 마음 변치 않길 바란다. 우리 서울대 물리학과에도 이런 친구가 있어야 하지 않겠어?”
머쓱해진 단유가 볼을 긁적였다.
“너희들도 잘 들어. 물리학, 좋아. 재밌어. 이 세상 모든 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이 물리학 아니냐? 그렇지? 그런데 말이야, 안타깝게도 현실은 이 중에 30%만 그 길을 걸을 수 있게 한단 말이지. 나머지는 모두 물리학과 동떨어진 길을 걷게 될 거야. 섬뜩한 일이지. 그래도 지금은 자부심을 가져. 너희는 서울대 천체물리학부의 물리학과를 지망한 학생들이야. 그렇지? 한국? 좁다 이거야. 세계로 가자 이거야. 응?”
그때 진우의 등 뒤로 누군가 나타났다.
“뭐냐, 갑자기. 하도 시끄럽길래 뭔가 해서 봤더니 진우 너였구나.”
“아, 선배님.”
진우는 벌떡 일어나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 뒤를 다른 사람들도 앞다퉈 일어나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아무렇게나 자란 턱수염을 하고 나타난 이는 진우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됐어, 밥 먹다 말고 웬 소란인가 싶어 본 거야. 여기는 신입생들?”
“네, 선배님. 인사해, 여기는 하늘보다 높고 높은···.”
“야, 야. 오버 좀 그만해. 무슨 말만 하면 이렇게 오버야? 반갑다, 난 조대휘라고 한다. 석사 준비 중이다.”
“반갑습니다, 선배님!”
신입생들이 모두 고개 숙여 인사했다.
“반가워.”
대휘는 싱긋 웃는 얼굴로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를 받았다. 신입생들을 천천히 둘러보며 잘들 먹고 가라며 인사를 건네고는 사라졌다. 단유는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