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587화 (587/956)

얼마면 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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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중에 이사가 마무리되고 명수와 상미가 함께 고른 가구도 모두 집 안에 자리를 잡았다. ‘두 번 다시 쇼핑 같은 거 하고 싶지 않아’라며 투덜대며 축구단으로 향했던 명수는 아마 다음 주에나 와서 얼굴을 비칠 모양인데, 대신 상미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명수의 것까지 정리를 해주었다.

“어머 이런 것도 있었네.”

명수의 짐들 중에는 오래된 게임 시디들이 있었는데, 상미는 그런 시디를 발견할 때마다 보물을 발견한 듯 즐거워했다.

“내건 집에서 모두 내다 버렸거든.”

휴학을 결정했을 때, 부모님이 모두 버렸다고 했다. 부모님의 과감한 결정이 독립을 선언하는 데 도움이 됐다는 데, 축하해줘야 할지 안타까워해야 할지 몰라 단유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넓은 집으로 이사 오면서 걱정했던 것 중 하나는 호빵이 낯선 집에 적응을 못 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는데, 그 점은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다. 과장되게 표현해서, 이전 집의 3배쯤 되는 거실 위를 쉬지 않고 내달리며 즐거워하는 호빵을 보면 말이다.

“쟤 늙어서 못 움직이는 건 줄 알았는데.”

“청춘이네요.”

청춘, 아니 회춘한 호빵은 대리석 거실 위를 오래도록 기다려왔던 꿈의 놀이터인 양 누비고 다녔다. 그러다 목이 마르면 급수기에 가서 할짝거린 뒤, 다시 뛰어다녔다. 단유는 늙은 개가 흘리고 다니는 개털들을 보며 살짝 미간을 좁힐 뿐이었다.

“저 넓은 거실에 호빵 혼자면 심심하지 않을까?”

상미가 넌지시 새로운 동물의 입양을 추천했다. 어쩐지 조만간 새로운 동물이 이 집에 들어올 거란 예상이 됐지만, 역시 막지 않았다.

“청소만 잘해 준다면 난 상관없어.”

“나 청소 잘해.”

부디 자기 방 청소만이라도 잘해 주길.

하은은 새로 산 외제 차를 부담스러워하는 듯했지만, 잘만 타고 다녔다.

“학원에서 말야, 선생님들이 내 차를 보고 말이야, 완전 부러워하는 거 있지? 원장 선생님보다 더 좋은 차 타고 다닌다고, 돈을 그렇게 많이 벌었냐고 묻더라고? 내가 그래서 아니라고, 선물 받은 거라고 했더니 눈을 이렇게 뜨면서 막 막 남자 생겼냐고 묻는 거야? 내가 남자가 어딨니? 맨날 학원, 집, 학원, 집만 오가면서 일만 하는데 남자 사귈 시간이 어딨냐고, 남자 사귈 시간이라도 가질 수 있게 휴가나 주면서 말하라고 했더니, 자기들도 그래서 연애할 시간 없다면서, 막 그러는 거야. 그런데 우리 선생님들 중에 연애하는 선생님도 있거든? 그 선생님한테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은 연애 어떻게 하셨어요? 이렇게 물으니까 말이야···.”

단유는 진심으로 집에 상미를 데리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둘이서 저렇게 수다를 떨며 지내는 모습을 보니 한결 귀가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어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단유는 이전에 말한 바와 같이, 상미에게 ‘투자’를 했다. 최고급 방송용 마이크와 지향성 안테나, 마이크 스탠드, 인터페이스, 두 개의 최고급 모니터와 조명 장치는 물론이고 컴퓨터까지 모두 새 걸로 장만했다. 물론 사양은 잘 모른다. 이 부분은 상미에게 오롯이 맡겼는데, 나름 아는 지인 찬스를 사용하여 최고급으로 맞췄다고 했다. 일단 가격 면에서 생각 이상의 금액이 나오긴 했는데 그래 봐야 ‘졸부의 품격’에 흠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어쨌든 그런 장비들을 갖췄더니, 상미의 넓은 방도 별로 넓어 보이지 않는 단점이 있었지만, 상미는 개의치 않았다.

“내 원룸보다 넓은데 뭘 더 바라?”

단유는 볼을 긁적이며 다시 한번 당부했다.

“청소 제대로 하고, 특히 뒤의 케이블 쪽도 신경 써.”

“알았어, 알았어. 내가 제대로 한다니까?”

“다른 건 모르겠는데, 참 신용이 안 간다.”

“야! 그때는 내가 한참 스토커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그래서 방 청소를 제대로 못 하고 있을 때 네가 찾아와서 그런 거야. 나 원래 청소 잘해.”

“우리 중학생일 때부터 알고 지냈지? 내가 네 방에 한두 번 가는 거 아니었잖아?”

“야! 그때는 우리 엄마가 청소를 해서 그래. 우리 엄마, 얼마나 청소 못 하는데? 난 아냐, 난 잘해.”

단유는 나직이 한숨을 쉬고, 돌아섰다. 등 뒤에서 상미의 변명은 계속 이어지지만 어쩌겠는가. 단유가 좀 더 부지런하게 움직이면 된다. 그게 편해지는 길이다.

****

재미없는 축제로 ‘서울대 축제’가 뽑히지만, 그래도 축제라고 학교 곳곳에서 축제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학생 잔디에 가설된 무대에서는 학내 동아리 모임의 소규모 공연이 이어졌고, 중도와 학생회관 사이의 아크로에서도 소소한 이벤트들이 펼쳐지며 지나가던 학생들이 참여를 하거나 구경을 하느라 떠들썩했다. 굳이 축제 분위기를 비교해보겠다며 다른 학교에 가지 않는 이상―그리고 실제로도 다른 학교에 가는 경우는 드물다―학생들은 나름의 재미를 찾으며 축제를 즐겼다.

그렇지만 축제라고 강의를 휴강하는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 정상적인 수업이 진행됐고, 바깥의 떠들썩한 분위기와 격리시키기 위해 창문들을 모두 닫았다. 5월이지만 수십 명의 학생들이 창문을 닫은 교실에 앉아 수업을 들으니, 답답한 공기도 공기지만, 열기가 슬슬 올라와 괜히 노곤해진다.

교수님이라고 뭐 다를까. 특히 백발의 노교수님은 기력이 부족해 평소의 까랑까랑한 목소리도 오늘은 나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문제는 다음과 같이, n이 무한대로 갈 때, finite series가 주어져 있고, 그 series에서 n번째 턴을 n으로 표시할 수 있을 때, 이거의 n을 무한대로 보내는 극한을 취했을 때, 그 극한이 finite한 값으로 존재하면 우린 그 series는 infinite series가 converge 하다고 얘기합니다.”

느리지만 또박또박 적어 내려가는 칠판 위의 여러 공식들은 학생들의 의식을 점점 안드로메다로 보내고 있었다. 이론적으로, 교수님이 설명하시는 공식들은 실제로 안드로메다로 향하는 로켓의 궤적을 연구할 때 이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지금 수업의 난이도를 n으로 지정하고, 그 n이, 무한대까지는 아니더라도, 100에 가깝게 다가간다면 말이다.

“무슨 말이에요?”

새벽이 조용히 물었다.

“지금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100년이 지나도 넌 간단한 로켓 궤적 하나도 계산해내지 못할 거란 이야기지.”

모이 쪼는 새처럼 고개를 끄덕이던 새벽을 팔꿈치로 깨워서 졸지 말라고 친절을 베풀었는데, 새벽은 눈 사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이렇게 대꾸했다.

“제 평생에 로켓 궤적 따위를 계산할 일이 있을까요?”

틀린 말은 아니라 단유는 홀로 수업에 집중했다.

강의를 끝내고 교수님이 강의실을 나가자, 학생들도 겨우 생기를 되찾고 강의실 뒷문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잠에 취해 비몽사몽 하는 사람들도 있어, 뒷모습이 사뭇 좀비 영화 속 엑스트라들 같다. 그중 한 사람이 새벽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 강의는 다시 듣고 싶지 않네요.”

“다시 듣기 싫으면 지금 열심히 들어. 학점 안 나와서 재수강하면 너만 고생이야.”

새벽의 어깨를 툭툭 치며 지나가는 물리학과 선배의 조언이었다. 그렇게 지나가나 싶더니 우뚝 서서 돌아본다.

“어? 그런데 너 1학년 아냐? 1학년이 왜 이 수업을 듣지?”

“도강이요.”

“와, 이 수업을 도강하는 신입생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네.”

선배는 피식 웃으면서 새벽과 단유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단유에게서 시선이 멈췄다.

“너구나?”

“네?”

“소문 자자한 전국 1등.”

“아, 예.”

“야, 그냥 말 놔. 너, 나랑 같은 나이야.”

“아.”

“너 그거 알아? 우리 때 넌 거의 연예인급이었다는 거.”

단유는 대답 대신 머리를 긁적였다.

“서울대 들어온 동기들 중에 연예인 이름은 몰라도 니 이름 모르는 애는 없었을 거다. 그런 애를 이렇게 직접 만나다니. 지금 막 사인 받고 싶어지는 거 알아?”

살짝 얼굴이 상기된 듯 한 선배는 지난 3시간의 피로가 한 번에 날아간 듯 보였다.

“야, 너 다음 수업 있냐?”

“아니요, 없어요.”

“말 놓으라니까. 괜찮아. 아무튼, 수업 없으면 커피나 한잔하자. 괜찮지?”

“응.”

“그래, 그래.”

엉겁결에 선배와의 차담회(茶談會)가 이루어졌다.

“너희 교양 수업 하나가 휴강이어서, 전공수업을 도강했다고? 와, 골 때리네. 하필 도강을 해도 수리물리학을 도강하냐?”

1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갔다가 이제 막 복학했다는, 서진우라는 이름의 선배가 혀를 내두르며 감탄하자, 새벽은 오해 말라며 ‘전부 이 형이 시켰어요’라는 뜻으로 단유를 손짓했다.

“거길 따라간 너도 대단하고.”

“저도 뭐, 시간이 남아서. 그리고 이렇게 빡셀 줄은 몰랐죠.”

“최 교수님이 원래 빡세게 수업하기로 유명하신 분이야.”

시원한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고 시작한 이야기는 주로 단유에 대한 감상과 질문들이었다. 서울대는 당연하고 어느 과로 지원할지 궁금했었는데, 돌연 진학 포기를 선택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랐다는 이야기와, 3년이 지나 자신과 같은 과를 다닌다는 것에 또 한 번 놀랐다는 이야기에 새벽은 새삼 신기하다는 눈으로 단유를 훔쳐봤다.

“축제 재미없지?”

“글쎄요? 제대로 축제를 즐겨본 적이 없어서.”

그 원흉은 역시 ‘골 때리는’ 단유 때문이었지만, 단유는 어깨를 으쓱댈 뿐이었다.

“사실 1년만 다니고 바로 군대를 갔던 까닭에 축제라곤 봄 축제랑, 가을 축제 한 번씩만 경험해 봤을 뿐이지만, 지금 이 정도면 지금까지 서울대에서 열렸던 축제 중에 가장 큰 규모일 거야.”

“이게요?”

“아, 이럴 게 아니라 물리대 주점이나 가자. 이럴 때 다 같이 모여서 서로 인사하고 안면 트면 얼마나 좋아?”

마이 페이스 경향이 좀 있는 선배였다. 자기가 목마르니까 커피 마시자고 하고, 이제 ‘화제의 인물’인 단유를 데리고 다니면서 소개해주며 화제를 끌어모으려는 치기를 보인다. 선의로 행하는 일이기도 하거니와, 선배들이나 동기들과 ‘축제’를 핑계로 얼굴을 익히는 것도 앞으로의 생활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단유는 어울려 주기로 했다.

“여기는 나랑 같은 복학생이자 동기, 박철형. 여기는 그 유명한···.”

“알아, 김단유.”

“안녕하세요.”

“야, 그냥 말 놔. 나랑 말놓기로 했거든. 너도 괜찮지?”

“괜찮아. 우리가 무슨 군기 잡는 학과도 아니고. 게다가 무려 전국 1등이신데.”

‘전국 1등’ 타이틀은 쉽게 잊혀 지지 않을 모양이다. 다들 공부 하나에 자존심이 있는 분들인지라, 그들 중 최고였다는 과거의 기록이 인상적이었나보다. 선배들이 단유를 대하는 태도를 보며 새벽은 어쩐지 굉장한 사람과 함께 다녔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 전에도 대단하다고 느끼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라는 느낌이랄까?

진우의 소개로 여러 사람과 통성명하며 단유는 새터 때 했어야 할 것들을 지금 하게 되었다.

“술 한 잔은 받아주라.”

“그래, 우리가 선배라고 젠체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술 한 잔은 괜찮잖아? 혹시 술 한 잔만 마셔도 몸에 이상 생기고 그래?”

“그건 아니고.”

“그럼 마셔.”

그렇게 작은 소주잔을 든 단유는 망설임 없이 입안에 털어놓았다.

“오오, 잘 마시는데?”

“재수할 때 술 좀 마셨던 거 아냐?”

“진학 포기하고 결정을 후회하면서 혼술한 거?”

“인정? 어, 인정.”

나이가 같거나, 많거나, 적은 선배들은 단유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환호했다. 정말 그들 말대로 ‘연예인’ 보듯 했다.

“후배님도 한잔해.”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덩달아 새벽도 소주잔을 기울였다.

술은 참 신기하다. 술을 마시니 평소 어렵게 느끼며 멀찍이 있던 이들이 다가와 말을 걸고 술잔을 나눈다. 술을 마신다는 행위 하나로 공감대가 형성되기라도 한 걸까?

사람들은 단유에게 궁금한 게 많았고, 똑같은 걸―왜 대학을 안 갔었냐, 3년 동안 뭐 했냐, 군대는 안 가냐. 앞으로 뭐 할 거냐―몇 번이고 물었다. 단유는 똑같은 대답―그냥요, 여행이요, 안 가요. 몰라요―을 몇 번이고 반복하고, 똑같은 소주잔을 연거푸 들이켰다.

사람들은 불콰해진 얼굴로 웃음을 터뜨리고 소리를 높이고 노래를 부르다가, 고개를 숙이거나 옆 사람과 속삭이거나 입을 틀어막고 텐트를 빠져나간다.

“이게 축제야!”

라는 듯 다양한 군상의 면면을 드러낸다.

물리학과에서 설치한 텐트 안에서 웃고 떠들며 시간을 보내는 사이에, 밤이 깊었다. 멀리 학생 잔디에 설치한 무대에서 들려오는 흐릿한 음악 소리를 배경으로 이어지는 술자리는 멈출 줄 몰랐다.

따뜻한 밤바람이 불어오는 5월의 대학 축제 둘째 날이 지나는 가운데 물리학과 학생들은 단유에게 새로운 별칭을 붙여주었다.

“주다, 이것 좀 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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