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586화 (586/956)

얼마면 돼(2)

-------------- 586/952 --------------

이사는 이삿짐센터에 맡기고, 그 외 가구는 명수와 상미에게 맡겼다. 둘은 신혼집 꾸미는 기분이라며 신이 나서 돌아다녔다. 하은에게도 새집에 들어가는 김에 사고 싶어 거 있으면 사라고 말씀드렸더니, 하은은 부담스럽다며, 지금도 충분하다고 제의를 거절했다. 그래서 상미에게 따로 부탁했더니, 상미가 억지로 하은을 데리고 쇼핑을 나섰다.

“졸부 된 기념으로 졸부 흉내 좀 내 보세요.”

단유는 그렇게 손을 흔들어 배웅한 뒤, 학교로 향했다.

“형!”

자연대 앞에서 새벽이 자전거를 끌고 나타나 단유를 불렀다.

“이거 대박이에요. 완전 가벼운 거 있죠?”

“그래?”

“근데, 이거 너무 가벼워서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날아갈 거 같은 거 있죠?”

“새벽아, 바람이 어느 정도의 풍속으로 불어야 니가 날아갈 수 있는지 계산해 볼까? 너도 물리학과니까, 그 정도는 계산할 수 있지?”

“말이 그렇다는 거죠. 그만큼 가볍다고요. 이런 자전거 처음 봐요.”

“잘 타고 다녀.”

“네. 조심해서 쓰고 돌려드릴게요.”

“괜찮아. 너 가져.”

“예? 이거 꽤 비싼 거 아니에요? 제가 자전거 잘 모르긴 하지만, 비싼 자전거는 천만 원대도 된다고 알고 있는데, 이것도 그렇게 좋은 거 아닌가요? 저 그런 거 못 가져요. 염치가 있지.”

“괜찮아. 난 안 쓰는 거니까.”

“아뇨. 제가 아무리 그래도 그냥은 못 받죠. 나중에 돈이라도 벌어서 갚으면 모를까. 일단은 그냥 빌리는 거로 할게요. 그래야 저도 마음이 편해요.”

“그래. 그럼 편한 대로 해.”

그제야 씩 웃으며 목을 긁적거리는 새벽이다.

“자전거를 모른다고 했으니, 차도 잘 모르겠네?”

“차요? 그쵸, 뭐.”

아까보다 더 얼굴을 붉히는 새벽은 변명이라도 하듯 말을 이었다.

“차 싫어하는 남자 없다는데, 전 그냥 공부만 하느라고 그런데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거든요.”

아는 거라곤, 현대, 기아, 삼성, 벤츠 등등의 브랜드뿐.

“그게 뭐 어때서. 그 덕분에 서울대 들어온 거 아냐. 그리고 나도 잘 모르니까 너한테 물어본 거고.”

“인터넷에 자동차 동호회 커뮤니티 같은 데 가서 물어보는 게 제일 낫지 않을까요?”

새벽이나 단유나 인맥이 워낙 없으니, 주변에 이런 주제를 물어볼 대상이 없었다.

“아니면 동기들한테 물어볼까요?”

그게 쉬운 일이었으면 이미 단유가 물어봤을 테지만, 새터도 가지 않았던 단유라 친한 동기라곤 고작 새벽뿐이었고, 그 외는 모두 단유와 거리를 두고 훔쳐보기 바쁜 이들이었다. 반면, 새벽은 그래도 안면을 익히고 지내는 동기도 있고, 선배도 있었다. 그저 인사만 나누는 게 다였지만, 그래도 인사를 하고 대화를 나눌 정도는 된다.

새벽은 쇠뿔도 단김에 뽑으랬다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마침 자연대에서 강의를 듣고 나오는 동기 한 명을 찾았다.

“경수야.”

동기들과 함께 나오던 경수란 이가 새벽의 부름에 눈을 맞추고는 손을 들어 반가움을 표시했다.

“어이.”

“어디 가?”

“이제 밥 먹으러 가야지. 같이 먹을래?”

새벽이 고개를 돌려 단유를 바라본 뒤, 물었다.

“그럼 저 형이랑 같이 먹을래?”

“어? 어, 뭐. 그래.”

단유가 어려운 거지, 싫은 건 아니었기 때문에 경수는 조금 주춤거리긴 했지만 싫다고는 하지 않았다.

“차요?”

우연인지, 아니면 필연인지 모르겠지만, 식사 자리에 모인 이들 중 차에 대해서 잘 안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주워들은 거로는 ‘역시 벤츠가 튼튼해’, ‘BMW도 좋지 않나’, ‘국내 브랜드가 AS는 잘 되지 않을까’, ‘현대가 수출은 제일 많이 한다던데’, 정도였다.

“그런데 차는 왜요? 차 사시려고요?”

‘그렇게 안 봤는데, 차를 살 수 있는 정도의 재력이 있으신 분이셨던가요’라는 눈빛이었다. 단유가 평소 잘 차려입고 다니는 스타일은 아니어서 더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그냥 좀 알아보려고.”

두루뭉술하게 대답한 단유는 식사를 이어갔고, 새벽은 단유의 눈치를 살핀 후 다른 화제로 돌렸다.

“근데 축제가 이번 주야?”

“응. 요 앞 학생잔디에 무대 설치하는 거 봤지?”

“말로만 듣던 대학 축제라니. 내가 살던 동네에는 가까운 곳에 대학이 없어서 가본 적이 없었거든. 넌 대학 축제 가본 적 있어?”

“고1 때 친구들이랑 한 번 가본 적은 있지. 그런데 서울대 축제는 한 번도 안 가봤지만, 별로 기대하지 말라더라.”

“왜?”

“사람들이 그러던데? 그리고 너도 봐라. 당장 이번 주가 축제인데, 축제 분위기가 느껴지냐?”

학생들은 여전히 도서관과 강의실을 오갈 뿐이고, 대자보에 축제를 알리는 포스터가 붙어 있지만, 누구도 관심 있게 보는 이가 없다.

“그래도 축제면 연예인도 와서 노래 부르고 할 거 아냐?”

“저기 포스터 봐라.”

경수가 가리킨 손가락 끝에 벽면에 붙은 포스터가 있었다. 단유도 그제야 벽에 붙은 포스터를 봤다.

「세상이 바뀌니 축제가 바뀐다」

뭔가 시의성을 담은 문구인 듯한데 그다지 센스가 느껴지지 않는다. 문구 아래 축제에 참여하는 가수 다섯 팀의 얼굴이 십자가 형태로 배열되어 있었다. 그중 한 팀에서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리본 소녀가 와?”

새벽이 놀란 얼굴로 ‘진짜냐’고 되묻고, 경수나 다른 동기들이 이제 알았냐며 핀잔을 줬다.

“나 리본 소녀 팬인데!”

“누구는 아닐까 봐?”

“리본 소녀 때문에 수능 망칠 뻔 했다이가, 나는.”

“넌 리본 소녀 중에 누가 좋아?”

왁자지껄 떠드는 와중에 단유만 조용히 식사를 이어나갔는데, 새벽이 들뜬 얼굴로 단유를 향해 물었다.

“형도 리본 소녀 알죠?”

“야, 리본 소녀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 그렇죠?”

경수도 단유의 대답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단유는 먹던 걸 삼키고는 대답했다.

“알긴 알지.”

“그래요? 그럼 별로 안 좋아하는?”

“특별한 감정은 없어. 노래를 많이 들어보지도 않았고.”

“와! 진짜요? 작년에 리본 소녀 노래가 거의 수능 금지곡 수준이었는데.”

부산에서 올라왔다는 친구 하나가 밥풀을 튀기며 자신이 그 노래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말했다. 실상은 자신이 그만큼 리본 소녀를 좋아했다는 고백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부산 친구의 말에 격하게 동의하는 걸 보면, 작년에 나왔던 노래가 꽤나 히트를 했던 모양이다.

“한 번도 안 들어봤어요?”

“응.”

“진짜로요? 대한민국에서 ‘두락댓’ 안 들어본 사람이 있을 줄이야! 어디 외국에라도 있었어요?”

“응.”

“어? 진짜로요?”

부산 친구는 상대의 말을 잘 믿지 못하는 성향이라도 있나 보다. 무슨 말을 해도 ‘진짜’냐고 되묻는다. 어쨌든 거짓말을 하지 않는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네 발음 왜 그렇게 저렴하냐? 두락댓이 뭐냐?”

경수의 말에 동기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야, 내 정도면 괜찮은 편이다. 내 친구들 중에는 내보다 더 저렴한 애들이 얼매나 많은데.”

“지역 특색이냐?”

“마, 지역 차별 발언이다, 그거.”

“우리는 ‘뚫어대’라고 불렀는데. 후렴에 그렇게 들리잖아? 뚫어대, 뚫었대.”

“그렇게 부르니까 존나 야하게 들리네.”

“우리는 수능 끝나고 교실에서 걔네 뮤직비디오만 계속 돌려 봤다. 장난 아니었다고. 우리 반에 꼴통이 있는데 갑자기 교탁 앞에 나가서 웨이브 추면서 뚫어대, 뚫어대 하면서 부르니까 애들 전부 넘어지고 그랬다.”

‘축제’에서 ‘리본소녀’로, ‘리본소녀’에서 ‘Do like that’의 발음으로, 그리고 ‘고3 수능 이후의 교실 풍광’에 대한 화제로 흘러가는 이야기의 흐름을 단유는 따라잡을 수가 없어, 그저 식사를 빨리 마치는 쪽으로 자신의 길을 정했다.

한편으로는 리본소녀의 ‘도연’과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나눴던 그때가 떠오르기도 했다. 동기들의 이야기로 추정해보면, 아마도 작년에 크게 성공했던 모양인데, 그렇다면 ‘무대 공포’로 어려워하던 도연이 자신의 증상을 잘 극복해낸 모양이다.

잘된 일이다.

차는 택윤에게 부탁했다. 애초에 그러려고 했었는데, 마침 자전거에 관해 이야기를 하다가 말이 나온 김에 물었던 것일 뿐인지라 별로 큰 기대는 하지 않았고, 나름 돈 많은 이들과 교류가 많은 택윤이 좀 더 아는 바가 많을 거라 생각해서 부탁을 했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차량 중에 좋은 차를 사고 싶어요.”

모호한 주문에도 택윤이 소개해 준 딜러는 웃으며 카탈로그를 펼치고 차 하나를 짚었다. 이미 택윤에게 가장 좋은 차로 골라주라는 언질을 받았기에, 딜러는 스스럼없이 몇 개의 차를 선택해 단유에게 보여주었다.

“이건 어떠신가요? 벤츠에서 나온 이 차는···.”

설명을 듣던 중에 단유가 말을 잘랐다.

“주세요.”

“네?”

“저 차 잘 몰라요. 차 전문가시라면서요? 전문가가 고른 차니까 좋은 차겠죠. 주세요.”

“어, 저기, 그래도 고객님께서 제대로 선호하시는 디자인이나 뭐 그런 게 있지 않을까요?”

단유는 볼을 긁적였다.

“디자인에 따라 선호도가 많이 다른가요?”

“네, 그런 편이죠. 사실 여성 분들이 좋아하는 차, 라고 해도 워낙 종류가 많고 선호도가 달라서 딱 이 차다, 라고 고르기 어렵거든요.”

하은 몰래 선물해주고 싶었던 것인데, 명수의 축구화를 고르는 것처럼 쉽게 고를 수 있는 게 아닌 모양이다. 예전에 명수 축구화를 고를 땐 제일 잘 나가는 거 주세요, 하면 매장 직원이 망설임 없이 ‘이거요! 이게 제일 잘 나가요’라고 골라줬는데 말이다.

“그럼 이 카탈로그 제가 가져가서 일단 고르도록 할게요. 가져가도 되죠?”

“아, 그럼요. 가져가셔도 됩니다.”

“그리고 이 중에서도 추천할 만한 차 있으면 체크 좀 해 주실래요?”

“그러죠. 그럼···.”

딜러는 몇 개의 차량에 체크를 해 주었고, 단유는 카탈로그를 챙겨 매장을 나왔다.

“뭘 골라?”

“차요. 이 중에서요. 여기 체크된 게 좋대요.”

“왜 골라?”

“사려고요.”

“누구 차?”

“선생님 차요.”

“왜?”

“선물이요.”

“무슨 선물?”

“그냥 선물이에요.”

“생일도 아닌데?”

“네.”

“왜?”

“···졸부라서요?”

그제야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하은은 카탈로그를 뒤적거리다 덮었다.

“마음에 드는 게 없네.”

“그럼 이것도요.”

단유는 다른 카탈로그를 꺼내 펼쳤고, 하은은 흥미롭다는 듯 카탈로그를 뒤적이다 덮었다.

“여기도 없어.”

“더 있어요.”

단유는 다른 카탈로그도 내밀었다. 하은은 역시 몇 번 뒤적거리다 고개를 저었다.

“없어.”

“자동차 전문가가 추천한 차들인데요?”

“마음에 안 들어.”

“그럼 마음에 드는 차는 있어요?”

“봐야 알지.”

“그럼 날 잡아서 보실래요?”

“아니.”

“왜요?”

“귀찮아.”

“그럼 차를 어떻게 사요?”

“차 들고 오라고 그래, 여기로.”

“어떻게 그래요?”

“되게 해.”

“뭐예요, 지금?”

“졸부 흉내.”

“아, 예.”

단유도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후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다음날. 단유는 집으로 한 사람을 초대했고, 출근하기 전인 하은은 편한 복장으로 있다가 갑작스럽게 손님을 맞이해야 했다.

“안녕하세요, 딜러 한재현이라고 합니다.”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하은은 겨우 미소를 지으며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양해를 구했다. 현관 옆 방문을 신경질적으로 두들겼고, 가방을 챙기던 단유가 나왔다.

“네?”

“니가 불렀니?”

“아,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하은은 잠시만 더 기다려달라고 부탁한 뒤, 단유를 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닫아건 뒤, 단유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뭐니?”

“부르라면서요.”

“뭘?”

“카탈로그만 가지고 고르기 어렵다고 하시니까, 사람을 불렀죠.”

“아이고, 머리야.”

이마를 짚는 하은을 향해 진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단유.

“아마 차도 끌고 왔을 걸요?”

“뭐?”

놀란 눈이 되어 단유를 바라보는 하은에게 말했다.

“일단, 옷부터 갈아입으시는 게 좋겠어요. 그 옷 입고 나가시면 창피하실 테니까.”

“너!”

단유는 하은의 손길을 피해 문을 열고 나갔다.

“거실에 앉아 계세요. 선생님이 곧 나오실 거예요.”

“아, 예. 알겠습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단유는 하은에게 차를 선물할 수 있었다.

“선생님, 그동안 낡은 차 끌고 다니셨잖아요. 바꿀 때 돼서 바꾼 거니까 마음 푸세요.”

“고맙네. 아주 고맙네.”

“그럼 새로 차도 뽑은 김에 주말에 드라이브나 가죠.”

“드라이브?”

“강원도로.”

“강원도? 왜?”

“채윤이 면회 가려고요.”

“기사 대용이냐?”

“선생님도 같이 가서 보면 좋으니까요.”

“이 녀석이! 야, 그러지 말고 니가 운전해서 가!”

“저 운전면허 없잖아요.”

“여태 면허도 안 따고 뭐 했어!”

“여행 다녔죠.”

“꼬박꼬박 말대꾸하는 거 좀 봐? 내가 만만해?”

“에이, 제가 어떻게 선생님을 만만하게 봐요? 저 선생님 되게 존경하는 거 아시면서?”

“존경한다는 녀석이 매번 이렇게 사람 골탕 먹이니?”

“그래서 안 가시려고요?”

“······.”

“채윤이도 선생님 보고 싶어 할 텐데?”

결국 주말 드라이브가 결정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