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면 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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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야?”
“응.”
“···집 되게 넓다?”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는 명수의 표정에는 ‘비싸 보이는데?’라는 말이 담겨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표정도 비슷했다.
“청소하기 힘들겠다.”
하은도 한 마디 꺼냈다.
“괜찮아요.”
어차피 청소는 단유가 도맡아 할 거니까.
“자기 방 청소만 알아서 해주시면 돼요.”
단유는 특히 상미를 바라보며 말했다. 괜히 찔끔한 상미가 고개를 돌렸다.
“주방도 넓어. 지금 내 방보다 넓은 거 같은데?”
“집에서 요리하는 사람이 없어서 쓸 사람이 있으려나 모르겠다.”
명수도 숙소 생활을 하고 하은도 늦게 일어나 바로 학원을 나가다 보니 집에서 밥을 먹는 경우가 부쩍 줄어든 상황이었다. 그나마 집에서 시간을 자주 보내던 단유도 대학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니 주방의 가스레인지를 언제 켰는지 모를 정도다.
“식탁이 넓으니까 다 같이 모여서 밥 먹으면 좋을 거예요.”
식구가 늘어난다는 것은 기꺼운 일이다. 단유는 그랬다. 하다못해 컵라면을 나눠 먹어도 다 같이 함께한다면 기분 좋은 일이다.
한강을 조망할 수 있는 언덕에 지어진 이 집은 2개 층으로 나뉘어, 아래층의 침실 3개와 윗층의 침실 3개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일 넓은 방은 선생님이 쓰실래요?”
“음···. 아니 난 작은 방이 좋겠는데.”
“왜요?”
“청소하다 지칠 거 같아서.”
명수가 나섰다.
“난 제일 작은 방. 어차피 자주 오지도 못하는데 큰 방 가져봐야 소용없잖아.”
“아니지, 몸 쓰는 직업인데 집에서만큼은 편히 쉬어야지. 그리고 난 이 집에 얹혀사는 몸인데 내가 제일 작은 방을 쓸게.”
세 사람은 어떤 방이 가장 작은 방인지를 가늠하기 위해 1, 2층을 빠르게 돌아다녔다.
“나 여기서 길 잃어버리면 어떡해?”
명수의 실없는 소리에 피식 웃어버린 단유는 옆에선 중개사에게 물었다.
“바로 들어올 수 있나요?”
“그럼요. 계약 즉시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말끔한 정장 차림의 중개사는 공손한 태도로 단유의 질문에 대답했다.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하죠.”
“야, 야! 잠시만!”
2층에 있던 명수가 후다닥 뛰어 내려왔다. 단유의 팔을 붙잡고 끌어당기더니 목소리를 죽이고 물었다.
“진짜 이 집 하려고?”
“그러려고 온 거잖아. 다른 사람도 마음에 들어 하는 거 같고.”
“당연히 마음에야 들지! 아, 죄송해요. 잠시만 이야기 좀 하고요.”
“네. 천천히 이야기들 나누세요. 신경 쓰지 마시고요.”
중개사는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저었다. 명수는 눈인사를 보낸 후 다시 단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 집 얼마야?”
“120억.”
“헉!”
“눈알 튀어나오겠다.”
“나 진짜 눈깔 빠질라 그랬어! 아우, 눈 아파. ···야, 돈은 있냐?”
“응.”
“···진짜?”
“응.”
“···로또 맞았어?”
“요즘 로또 맞아도 100억 안 되는 거 몰라?”
“몰라.”
“어쨌든 로또 아냐.”
“그럼?”
“여행 다닐 때 돈 벌었다니까.”
“아니, 그러니까 무슨 수로 돈을 벌었냐고?”
“물건 좀 팔고, 주식도 좀 하고.”
“주식? 너 진짜였어? 지난번에 나한테 한 말, 진짜야?”
“응. 내가 언제 너한테 거짓말 한 적 있어?”
“없지.”
“아무튼 이 집 살 돈은 충분해.”
“와, 진짜 넌 못 하는 게 없구나. 하다 하다 이제 주식도 해?”
“운이 좋았어.”
“···잠깐 생각 좀 하자.”
명수는 턱을 붙잡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드문 광경이라 단유는 흥미롭게 ‘생각하는 명수’를 지켜보았다. 의자라도 하나 들고 와서 앉혀 놓고 사진으로 찍어 보관하고 싶은 장면이다.
“내가 계약금 받아놓은 거 아직 그대로인 거 알지?”
“그래.”
“사실은 그걸로 좀 보태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발톱의 때만큼도 안 될 거 같다.”
“괜찮아. 넌 그 돈 잘 모아서 너 나중에 장가갈 때나 써.”
“넌? 넌 니 돈 이렇게 써도 되고?”
“응. 난 돈 많으니까. 말했잖아, 졸부라고.”
“그래도 너한테만 부담 주기 싫단 말이야.”
“그럼, 여기 가구들 살 때 보태면 되지.”
“하아. 그래. ···그런데 말이야. 너 돈 얼마나 벌었는데? 아니 지금 얼마나 있는데?”
단유는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는 경고를 한 뒤, 조용히 알려주었다. 순간 명수의 무릎이 풀썩 꺾일 뻔했다.
“거짓말 같은 거짓말이네.”
“뭐래.”
단유는 명수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고는 뒤돌아섰다.
“계약하죠.”
중개사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단유는 거실의 넓은 창으로 눈길을 돌렸다. 눈부시게 빛나는 한강 물결과 저 멀리 한남대교 위를 빠르게 지나가는 차들의 행렬이 눈에 들어왔다.
기온도 따뜻하고 하늘도 청명하니, 이사하기 딱 좋은 날이다.
이런 집은 처음 본다며 신기해만 했던 하은은 진짜로 매매 계약을 한다는 이야기에 놀라며 반대를 했지만, 단유와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단유의 결정을 일단 따르기로 했다.
거래는 택윤에게 위임하고 단유는 아파트로 돌아와 두 사람과 마주 앉았다.
“늦게 말씀드려서 죄송해요.”
“난 아직도 현실감이 없어.”
명수의 중얼거림에 하은도 동감했다. 그리고 무덤덤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단유를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도대체 그 큰돈을 어떻게 벌었는지, 들었지만 그래도 이해가 안 돼. 내가 아는 단유가 맞는지도 모르겠고. 그런데 저 얼굴을 보니 내가 아는 단유긴 한데.”
명수는 단유가 건넨 핸드폰을 보며 허탈한 표정을 짓다가, 하은에게 건네며 말했다.
“왠지 상상 이상의 숫자를 보니까 뭔가 허무해져.”
“······.”
단유의 침묵 뒤로 명수의 말이 이어졌다.
“딱히 널 뭐라 하려는 건 아닌데, 그래도 네가 이렇게 큰돈을 벌었다고 하니까 잘 됐다고 말하고 싶은데, 그럼 내가 돈 많이 벌려고 하는 이유가 없어지니까, 좀 허망하달까? 좀 그렇네.”
단유와 하은은 아무 말 없이 명수를 지켜보았다.
“어릴 때, 네가 신문 아르바이트해서 나 축구화도 사주고 그랬잖아? 나 아직 그 축구화 안 버리고 있는 거 알지? 박스에 보관해두고 있는 거.”
앞코가 뜯어져 발가락이 튀어나올 정도로 신었던 축구화였다. 뭐, 이제는 발도 커져서 억지로라도 신을 수 없는 신발이지만, 명수는 그 신발을 차마 버릴 수 없었다.
“고마워서도 있지만 잊지 말자고 했던 거였거든? 너한테 받은 만큼 나도 너한테 해주고 싶어서. 빨리 프로에 데뷔하고 싶었던 것도, 더 빨리, 더 많이 돈을 벌고 싶어서였는데···. 이제는 내가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 계속 이렇게 받기만 하고.”
“명수야.”
“···응.”
“우리 예전에 그랬잖아. 서로에게 빚지는 거 없다고. 그거 빚 아니야.”
“······.”
“만약에 내가 그런 돈이 없다면, 그리고 만약 네가 집을 사야 한다면, 그래서 네가 모은 돈을 모두 털어야 했다면 어땠을까? 넌 아깝다고 생각했겠어?”
“아니지.”
“만약 내가 너한테 빚졌다고 말하면, 넌 뭐라고 했을 거 같아?”
“······.”
“똑같은 거야. 부채의식을 느낄 이유가 전혀 없어. 우리는 언제나 하나잖아. 너나 나나 왜 돈을 벌려고 했어? 서로 좋은 거 먹고 좋은 거 해주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 서로가 행복하게 지낼 수만 있다면, 이깟 돈 누가 내든 무슨 상관이야? 안 그래? 그리고 지금이야 내가 많이 벌었다지만, 나중에 너 유럽에라도 진출하면, 나보다 더 많이 벌 수도 있지 않겠어? 거기는 주급으로 30만 파운드도 받고 그런다며? 그럼 내가 지금 가진 이 정도는 우스울 텐데?”
명수는 대꾸 없이 식탁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너 돈 때문에 축구하는 거 아니잖아. 축구를 누구보다 좋아하고 잘하니까 하는 거잖아? 나도 네가 축구장 위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아. 그러니까, 괜한 생각하지 말고 계속 최선을 다해. 그리고 아시아 최초로 발롱도르 트로피를 들어 올리겠다는 각오로 하라고. 그게 나와 선생님이 바라는 명수 너의 모습이니까.”
단유가 하은은 바라보자, 하은도 고개를 끄덕이며 명수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명수 넌 좋아하는 거 해. 사람이 살면서 자기 좋아하는 거만 하고 살 수 없다지만, 좋아하는 거만 하면서 살 수 있으면 얼마나 행복하겠어? 다행히 넌 좋아하는 거 하면서 살 수 있잖아? 그래서 웃을 수 있잖아? 그 웃음을 위해서 단유나 나나 노력한 거잖니? 그렇다면 넌 돈으로 갚을 생각을 할 게 아니라, 계속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면 되는 거야.”
“선생님.”
“응.”
“그런데요.”
“응?”
“30만 파운드가 얼마예요?”
괜히 의기소침해진 명수를 달래느라 제대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었던 하은은 한참 후에야 단유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솔직히 나도 명수랑 비슷한 생각이긴 해.”
“허탈하다고요?”
“비슷한 느낌? 음···허탈하다기보다는, 내가 이제 뭘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지. 이제껏 너희를 돌봐야 한다는 의무감도 있었고, 그런 생각에 차곡차곡 돈을 벌었단 말이지. 물론 워낙 ‘소박한’ 녀석들이다 보니 돈 쓸 일도 별로 없다는 문제가 있었지만. 대학 등록금이라도 내 줄까 했더니, 서울대에 장학금 받고 들어가는 통에 돈도 많이 들지 않았고, 용돈이나 줄까 했더니 둘 다 이제는 나보다 더 돈도 잘 벌고 말이야. 그래도 사람이 살면서 목돈이 필요한 순간이 올 테니까, 그때를 위해서라도 돈을 모아야지 했는데, 명수는 이미 억대 연봉을 받고 있고 단유 넌···. 이건 뭐, 내가 끼어들 틈이 없네?”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말을 건네는 하은에게도 단유는 같은 취지의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 그동안 선생님이 저희 둘을 돌봐 주신 것만으로도 저흰 평생 갚을 수 없는 걸 받은 것과 같아요. 이깟 돈이 문제가 아니잖아요.”
“몇백 억이나 되는 돈을 ‘이깟’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단유가 많이 성장했구나.”
“아니, 그런 게 아니고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선생님도 이제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시면 좋겠어요.”
“하고 싶은 거?”
단유는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선생님, 아직 젊으시잖아요. 그런데 저희 때문에···.”
단유는 쉽게 말을 잇지 못했지만, 하은은 대충 단유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뭐, 그래서 나보고 빨리 시집가라고, 그 말 하고 싶은 거니?”
“···비슷해요.”
“어머, 얘 좀 봐?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거거든? 너도 내가 노처녀라고 놀리는 거니? 어머나, 세상에. 그래, 이제 나이도 먹고, 돈도 많이 벌었으니까 선생님이 만만해 보이고 그러지? 같이 늙어가는 처지다, 이거지? 그래 아주 맞먹어라, 맞먹어.”
“농담이 아니라, 정말 이제는 선생님도 선생님의 삶을 찾으셨으면 좋겠어요.”
“이제 돈 벌었으니까, 떨어지라고?”
“아이, 참. 선생님.”
“에휴. 이제는 늙었다고 말도 안 받아주네. 서러워서 살겠나.”
과장된 제스처로 한숨짓는 시늉을 하던 하은이 픽, 코웃음을 쳤다.
“됐어. 무슨 말 하려는지 알겠으니까 내 걱정은 그만해라. 선생님도 다 생각이 있거든? 선생님이 연애를 하든, 결혼을 하든 알아서 할 거야. 그리고 지금 다니는 학원? 억지로 하는 거 아니야. 알잖아? 나 선생님 소리 듣는 거 좋아해. 애들 가르치는 것도 좋아하고. 너만큼 똑똑한 애들은 아직 만나지 못했고, 앞으로도 만나지 못할 거 같지만, 그래도 혹시나 너 같은 아이들을 만나 가르칠 수 있다면 그것도 나름 뿌듯한 일일 거라고 생각해. 그래서 계속 학원 출근할 거야. 선생님도 이제 경력 좀 쌓여서 나름 나 찾는 학원 많다? 내 실력 인정해주고, 나도 보람을 느끼는데, 내가 싫어할 이유가 어딨어?”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니가 갑자기 우리 같은 일반인들은 꿈도 못 꿀 돈을 들고 와서 명수나 나나 잠시 얼이 빠졌던 거뿐이야. 따지고 보면 말이야, 단유 너잖아? 불가능을 모르는 사나이? 뭔들 못 하겠어? 그냥 당연히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인데, 우리가 미리 준비가 안 됐던 것뿐이야. 그런 거야.”
자상한 표정으로 단유를 바라보는 하은. 그래서 고맙고 감사하다. 뭐든 이해해주려고 하고 받아주려 하니까. 세상 어떤 부모도 하은 같지는 않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말이야, 너 계속 번역 일은 할 거니?”
“네.”
“그것도 좋아서 하는 거지?”
“네.”
“그럼 됐어. 너도 좋아하는 일 다 하면서 살아. 아, 이제 내가 뭐라고 안 해도 되겠구나. 돈이 철철 남아도는 데. 에구, 비루한 내 삶이나 챙겨야지. 안 그래? 어린 제자들에게 걱정 안 끼치려면 내가 잘해야 하는구나. 내가 잘해야 돼.”
“선생님.”
“아유, 이제 내가 선생님 소리 들을 날도 얼마 안 남았네. 고작 하루 먹고 하루 사는 제가 어찌 선생님 소리나 듣겠어요?”
“선생님.”
“응?”
“집 청소 잘하면 용돈 드릴 수 있는데.”
“야!”
단유는 빠르게 자리를 벗어나 방으로 숨어 들어갔다.
“안 튀어나와!”
킁, 하고 호빵이 귀여운 기침을 뱉는 소리가 들렸다. 평화로운 하루가 또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