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 수리 마수리(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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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사장님 덕분에 식사 잘했습니다.”
“뭐, 이 정도를 가지고. 그리고 오늘의 식사는 다 이 친구 때문이니까 내 얼굴 봐서라도 잘 대해줘.”
“당연하죠. 저보다 나이 어리다고 사람 함부로 하는, 그런 사람 아닌 거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 그래. 그럼 다음에 또 보자고. 단유군도 조심해서 잘 들어가고.”
“오늘 고맙습니다, 대표님.”
대표는 단유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준 뒤 자리를 먼저 떠났다. 그렇게 배웅한 뒤, 택윤이 단유를 보며 물었다.
“괜찮으면, 커피라도 한잔할까요?”
“네.”
커피숍에 갈 줄 알았는데, 택윤은 단유를 데리고 어느 빌딩으로 들어갔다. 바로 택윤이 운영하는 PB센터였다.
불을 켜 실내를 밝히고 창가의 블라인드를 걷었더니, 강남의 화려한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잠시 후, 택윤은 직접 커피를 내려서 단유에게 건넸다.
“자, 여기요. 자랑은 아니지만, 일반 커피숍에서 마시는 것보다 나을 거예요. 좋은 원두를 쓰거든요.”
“감사합니다.”
택윤은 웃으며 앉을 것을 권했다.
“아까는 짧게 말했지만, 그래도 제 소개는 제대로 해야 할 거 같네요.”
어느 은행에 입사하여, 몇 년간 근무하고 PB로 일한 지는 몇 년이 되었으며, 어느 정도의 자금을 운용하고 있다는 말로 소개를 마친 택윤은 ‘신뢰와 정직’이 자신의 제 일 원칙이며, 고객이라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최선을 다하려 한다는 말로 PR을 마쳤다.
“사실은 단유 군을 만나기 전에 사장님, 아, 제가 그분을 사장님이라 부르는 것에 대해 의아해하실 수 있는데, 그분이 지금처럼 큰 회사를 만들기 전부터 알고 지냈거든요. 그때 대표님께서 자신은 ‘사장’이라는 호칭이 좋다며 개인적으로 그렇게 불러달라 하셔서 죽 그렇게 부르고 있어요. 아무튼, 그분께 넌지시 귀띔을 들었는데, 이번에 인세로 꽤 큰돈을 받으셨다고요? 그 돈의 관리를 위해 절 만나려 했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그것도 있지만, 따로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요.”
단유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택윤을 마주 보았다. 젊음과 패기는 옅어졌지만, 원숙함과 진중함이 자리 잡은 눈동자를 보며 단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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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가 된 책의 번역을 맡았다고 들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베스트셀러 순위표 끝자락에 겨우 자리 잡은 것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베스트셀러다. 그만큼 많이 팔렸고, 그래서 번역가로서 인세를 많이 받게 되었다고 들었다.
‘1억? 2억?’
대표에게 정확히 금액을 듣진 못했지만, 나름 추정은 해볼 수 있었다. 이제 20대 초반인 눈앞의 젊은이에게는 꽤 큰돈이겠지만, 택윤이 관리하는 자금들에 비하면 푼돈이다. 그렇지만 대표가 자랑스러워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의 번역가라면, 앞으로도 꾸준히 수입이 생길 여지가 있는 실력자라면, 고객으로 모셔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는 계산이 섰다.
그래서 단유가 컴퓨터로 가서 자신의 계좌를 보여주겠다고 했을 때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1분 후, 택윤은 입이 쩍 벌어졌다.
“이, 이게 뭐죠?”
바보 같은 질문이었지만, 자신이 그런 질문을 했다는 자각이 들지 않았다. 해외 은행 계좌로 추정되는 그곳에는 생각지도 못한 숫자가 적혀 있었고, 택윤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 겨우 꺼낸 말이 ‘이게 뭐죠’라는 말이었다.
“싱가포르 은행에 있는 돈이요.”
“그, 그러니까 이게···고객님 자산이란 말씀···이시죠?”
‘단유군’이 ‘고객님’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택윤은 여전히 정신없이 화면만 바라볼 뿐이었다.
‘달러로 4,483만···.’
한화로 약 500억 정도다. 번역으로 이렇게 많이 벌 수 있을 리 없다. 부모님의 증여일까?
그때 단유가 말했다.
“이 돈을 국내로 들여오고 싶은데요, 과세라든가 이런저런 문제들이 있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 문제를 처리해 주실 수 있나요?”
단유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비록 자신이 나름 강남에서 잘 나가는 PB라 해도 단일 자산가로서 자신에게 이 정도 금액을 맡긴 이는 없다.
“어, 그게 어떤 식으로 들여오느냐에 따라 비용이 다릅니다.”
비용이란 표현에는 세금도 포함되어 있었다. 해외 자산을 국내로 들여오거나 혹은 그 반대의 경우도 여러 번 해 보았고, 그래서 방법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 방식이다.
금액이 많지 않다면 그냥 국세청에 신고하고 세금 낼 거 다 내고 정상적으로 반입, 반출을 하면 되지만, 금액이 커서 세금을 많이 내야 한다거나 이중과세 국가와 거래가 되어야 하는 경우에는 보통 편법을 이용한다. 편법은···.
“아뇨. 그냥 정상적으로 해주세요. 뒤에 말 나오는 일이 생기면 귀찮을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하시면 세금을 많이 내셔야 할지도 모릅니다. 사실 세금은 조세컨설팅을 받으시는 게 좋겠지만, 간략하게 설명해 드리면 해외 재산의 경우 외국환 거래규정에 따라 국세청에 알려지게 되고, 국세청은 반입된 자금의 출처를 조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조사에 따라 소득세 과세대상인 경우 종합소득세를, 증여 재산인 경우 증여세를 과세합니다.”
자산 신고를 해야 하고 동시에 반입자금에 대한 출처를 소명해야 할 의무가 생긴다.
“알아요.”
복잡하고 귀찮은 서류 작업과 발품팔이가 이어져야 하는데, 단유는 그 과정에 소요되는 시간과 노력이 아까웠다. 그래서 PB를 찾은 것이고.
“돈은 문제가 안 돼요.”
단유는 자신이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귀금속 판매로 인한 사업 수익과 그에 대한 증빙 서류도 이미 구비해 뒀다. 귀금속을 어떻게 취득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비밀. 굳이 신고할 필요가 없는 문제다.
그리고 해외 주식 거래를 통한 수익.
택윤은 이야기를 다 들은 후, 잠시 생각을 짚어보다 입을 열었다.
“역시 조세컨설팅의 도움을 받는 게 좋겠다는 게 제 개인적인 입장입니다만, 적어도···150억 정도의 세금은 예상하셔야 할 거 같습니다.”
“그런가요?”
단유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고민이 많이 되겠지. 한국보다 더 많은 과세를 물리는 나라도 없진 않지만, 한국도 꽤 많은 세금을 내야 한다. 버는 돈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100억, 200억의 세금을 내야 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다들 아깝다고 생각할 것이다.
“한 가지만 여쭤볼게요.”
“네.”
“해외 주식 투자로 인한 매도 차익에 대해 양도소득세만 부과되고 금융 종합소득세는 내지 않아도 되는 거죠?”
“그렇죠. 대신 22%의 세금이 부과되는 거죠.”
“그렇군요. 그럼 그만큼 벌면 그만이네요.”
“네?”
“아니에요. 그럼 그냥 진행해 주세요. 그리고 조세컨설팅, 그거 필요하면 받고요, 컨설팅 비용은 나중에 청구해주세요. 세금이랑 그런 것도 알아서 다 처리해 주실 수 있죠?”
“네? 네.”
“그럼 PB님은 수수료를 얼마나 드려야 하죠?”
“어, 그러니까 컨설팅 수수료와 대리업무에 대한 수수료를 각기 따로 계산해서···.”
단유는 어렵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30분 전이라면 애가 뭘 잘 몰라서 그러는구나 싶었겠지만, 지금은 그냥 부자의 여유로 보인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죠. 오늘 컨설팅 비용은 나중에 일괄 정산해서 내도 되죠?”
“···그럼요.”
“일단은···한 일주일 정도 뒤에 다시 찾아올게요. 그때 다시 보죠.”
“일주일이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일은 그때까지···.”
“일단 해외 자산 신고는 빨리해야 한다면서요? 그거만 처리해 주시고요, 국내로 들여오는 일은 일주일 뒤에 다시 말씀드려야 할 거 같네요.”
“아, 예. 알겠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단유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택윤도 벌떡 일어나 단유보다 더 깊이 허리를 굽혔다. 허리를 들었을 때는 이미 뒷모습을 보이며 사무실을 빠져나가는 단유였다.
“허···.”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택윤은 잠시 멍하니 사무실 입구를 바라보았다. 한 모금만 맛보았을 뿐인 커피는 차갑게 식어 있었고, 사무실 바깥으로 요란한 머플러가 뿜어내는 배기음 소리가 지나갔다. 끙, 앓는 소리를 내며 힘겹게 일어나 자신의 책상으로 향한 택윤은 서랍에서 시가와 라이터를 하나 꺼냈다. 강남에 개인 사무실을 오픈한 뒤, 대박이 터지면 하나씩 피우겠노라고 생각하며 모셔놨던 시가였다. 첫 고객을 받았을 때, 개인 통산 수익률 최고점을 찍었을 때 한 번씩 피웠다. 그리고 오늘, 자신이 맡은 고객들 중 단일 자산으로 최고인 고객을 만났다. 정확히는 고객이 되어줄 사람이지만, 아마 큰일만 없다면 자신의 고객이 되어주리라.
“후.”
창을 열고 담배 연기를 뿜었다. 화려한 불빛의 강남이 짙은 연기에 가렸다.
택윤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지만 그는 일주일 뒤 단유가 들고 올 폭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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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도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단유는 조금 무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일주일간 학교를 빠졌다.
“역시 돈이 문제야.”
일상의 리듬이 깨진 것은 돈 때문, 이라고 단유는 생각했다. 그래도 앞으로 편하게 지내려면, 그러니까 일상을 지키려면 지금 바짝(?) 벌어놓는 게 편하지 않을까 싶었다.
컴퓨터를 켜고, 트레이딩 프로그램을 실행한 뒤, 옆에는 노트와 펜을 두고 준비했다. 기억해야 할 몇 가지를 노트에 적고, 가끔 암산으로 헷갈리는 것들도 노트에 짤막하게 기록하여 실수하지 않게 주의했다. 몇몇 기업들의 이름과, PER, PBR, PCR, EPS, BPS 등등은 물론이고 단유가 개인적으로 고민해서 만든 여러 가치 평가 기준 수치들을 계산하고 비교하고 선택했다.
주식은 수학을 잘한다고 해서 잘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정확한 기업분석은 기본이고, 시황에 따른 변화를 잘 캐치해야 한다.
쌀 때 매수해서 비쌀 때 매도한다.
원칙은 간단하다. 간단한 원칙임에도 어려운 것은, 주식의 가격이 언제 오르고 내릴지를 알 수 없다는 점이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한, 이 원칙은 도박에 가깝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주식은 수학적 원리에 기반한다. 확률과 통계다. 오를 확률이 높은 주식에 투자하고 고점이라 여겨지는 부분을 통계적으로 예측하여 판매하면 된다.
물론, 이 역시 도박이다.
어렸을 적, 하은, 명수와 둘러앉아 포커를 해 본 경험이 전부인 단유였지만, 도박이 어렵진 않았다. 어쨌든 수학적으로 접근하면 된다. 오를 확률이 높은 종목을 선택하고, 수익을 볼 수 있는 구조를 계산하여 베팅, 아니 투자한다. 설령 돈을 잃는다고 해도 아쉽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또 벌면 되기도 하거니와, 결국 확률의 문제이니까 잃는 것도 가능한 경우인데 배신당했다거나 하는 감정을 느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만약 이름난 도박사가 단유의 이런 마음을 알았다면, 멘탈이 좋다고 칭찬했을지도 모르겠다. 안타깝게도 단유는 그런 도박사를 알지 못했고, 그래서 그런 말을 들을 기회가 없었다. 그런 칭찬을 듣는다고 좋아할 단유도 아니지만 말이다.
일주일 후, 단유는 다시 택윤을 만났고, 다시 계좌를 보여주었다.
“어?”
숫자가 늘어났다. 그냥 늘어난 게 아니라 무시무시하게 늘어났다.
‘일주일 만에?’
택윤의 눈빛에서 어떤 말을 하려는지 읽은 단유가 겸손하게 대답했다.
“운이 좋았어요.”
그렇다. 결국 확률에 근거한 투자였고, 그래서 그 확률에서 좋은 결과를 얻었다면, 그건 단유가 운이 좋았던 때문이다. 단유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택윤은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주식 투자로···일주일 만에 이렇게 벌었다고요?”
택윤은 무릎 꿇고 빌어서라도 그 투자 기법을 배울 수 없냐고 청하고 싶었다. 이성의 끈을 놓았다면, 당장 그렇게 했을지도 모른다.
“세금 낼 돈은 충분히 벌었죠?”
세상에. 세금 낼 돈을 벌기 위해 돈을 번다? 이런 경우가 세상 천지에 또 있을까? 택윤은 또 한 번 입을 다물지 못하고, 담담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단유를 멍하니 바라볼 뿐이다.
“무슨 마법이라도 부린 거 같네요.”
겨우 꺼낸 택윤의 말에 단유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마법은 안 썼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