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 수리 마수리(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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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저것 할 일들이 생겼지만, 일상을 미루고 할 수는 없는 법이다. 학교도 다녀야 하고, 번역일도 해야 했다. 일반인들은 결코 알 수 없는, ‘마법’이란 힘을 지녔지만, 몸을 두 개로 만들 수는 없는 법이다. 효율을 위해 우선순위를 정해야 했다.
‘우선.’
집부터 청소하자. 이사를 갈 예정이라고 해서 집 안의 청결 상태를 무시할 순 없는 법이다. 요 며칠 바쁘다고 일주일마다 하던 대청소를 건너뛰었더니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이렇게 많이 보인다.
‘환상 영화나 소설에서처럼 마법으로 청소하는 방법이 있다면 좋으려만.’
‘클린’이라는 단순한 시동어만 외우면 집 안이 깨끗해진다거나, 못생겼지만 일 잘하는 도깨비를 고용해서 집 안 청소를 맡겨 놓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단유의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이야기다.
그나마 바람 마법이라도 이용할 수 있어서, 진공청소기가 닿지 않는 부분까지 먼지를 빨아들여 청소할 수 있다는 점만이 유용했다.
집 안 청소를 끝내고 나니 학교에 갈 시간이 되었다. 대학이 고등학교보다 좋은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는 학교 갈 시간을 자신이 정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정해진 강의 시간은 있지만, 그래도 여유롭게 통학 시간을 정해서 갈 수 있으니 좋았다.
‘여기에 차가 있다면 더 좋을지도?’
자전거를 타기엔 학교까지 가는 길이 멀고 험했다. 그렇다고 타지도 않는 것을 집에 계속 두기도 그렇다.
‘새벽이한테 주면 괜찮으려나?’
새벽은 학교 근처에 자취방이 있으니, 자전거가 있다면 통학하기 좋을지도 모르겠다. 역시 문제는 자전거를 건네주는 방법이다. 학교까지 끌고 가기가 힘들어 타지 않고 있는 마당에, 어떻게 새벽에게 전달할까?
이럴 때, 어느 게임에서처럼 아무 곳에서나 인벤토리 같은 기능이 있다면 편리할 거 같기도 하다. 아니면 어느 소설에처럼 아공간 같은 능력이 있다면, 그래서 아무거나 막 집어넣고 다니다가 필요할 때 빼 쓸 수 있다면, 세상의 유통구조는 대격변을 치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단유의 마법은 그런 능력이 없다. 어쩌면 나중에, 단유의 마법 실력이 향상되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공간’과 ‘차원’에 대한 이론적 기반을 쌓고, 거기에 마법적 창의성만 쌓인다면 말이다. 하지만, 불가능에 가깝다. 평생을 두고 공부를 해도 ‘공간’과 ‘차원’에 대한 지식은 충분히 쌓기 힘들 것 같았다. 대학에서 공부하면 할수록, 지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한계는 선명해지고, 자신감은 떨어진다.
아인슈타인이 다시 태어난다면 가능할까? 아쉽지만, 단유는 아인슈타인이 아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자전거를 어떻게 새벽에게 줘야 하나.
―어, 형.
“어디야?”
―집이죠. 형은요?
“어, 혹시 너 자전거 필요하니?”
―자전거요? 어···있으면 좋죠. 왜요?
“집에 남는 자전거가 있어서. 필요하면 줄까 하고.”
―정말요?
“대신 네가 와서 가져가야 돼.”
자전거를 무상으로 양도하는데, 이 정도 수고는 본인이 감당해야지. 단유는 기분 좋게 통화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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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새벽을 만나 자전거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수업이 없고, 여유가 있는 날짜에 단유네 집으로 찾아와서 자전거를 가져가기로 했다.
“관리는 잘했으니까, 쓸만할 거야.”
“고마워요.”
오늘은 2학점짜리 강의 두 개를 듣는 날이었는데, 두 개가 연달아 있어서 무려 4시간을 이어서 수업을 들어야 했다.
“배 좀 채우고 가자.”
“네. 대신 오늘은 제가 살게요.”
“그래.”
새벽은 단유의 소개로 번역 아르바이트를 맡게 되었다. 번역할 것은 기계 설비의 안내 책자를 번역하는 것이었는데, 양이 많지 않아 보통 번역 아르바이트들이 도맡아 하는 것들이었다. 장당 금액을 산정해서 아르바이트 비를 받는데, 양이 많지 않아 큰 금액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더욱이 번역 아르바이트가 재택 아르바이트의 성격이 강해, 하려는 사람이 많다 보니 일감이 많지 않고 수당도 많지 않았다.
“형처럼 책을 번역하는 게 아니면, 큰 수익은 바라기 어렵더라고요.”
“그럴 거라고 하더라. 그래서 보통은 다른 일들을 하면서 부수입으로 번역 아르바이트를 한다던데.”
“네. 저도 그래야 할 거 같아요.”
과외 자리는 계속 알아보는 중인데, 쉽게 찾기가 어려웠다. 아무리 서울대생이라고 해도, 낯선 사람에게 과외를 맡기는 경우가 적다는 이야기였다.
“과외도 인맥이 없으면 안 되나 봐요.”
부모님한테 손 벌리는 행동을 부끄러워하는 건 아니지만, 모처럼 부모님의 그늘에서 벗어난 마당에 자기 힘으로 서울 생활을 이어나가고 싶다는 새벽의 결심은 칭찬할 만 했다.
하지만 칭찬 이상의 도움은 단유로서도 방법이 없다.
“열심히 해.”
그냥 응원하는 수밖에.
5월쯤 되니, 이제 학사 내에서 눈에 익은 인물들이 많이 늘었다. 수업을 들으러 가던 중에 지나다 만나기도 하고, 오후 수업을 끝내고 식사를 하다가 또는 동기들의 손에 이끌려 술자리에 갔다가 만나기도 하게 된다. 마주 오는 마른 인상의 선배 둘도 그렇게 얼굴을 익혔다.
“너희 수업 다 끝났냐?”
‘너희’라는 표현에 새벽이 얼른 대답했다.
“네, 선배. 어디 가세요?”
“우리 피시방 간다. 같이 갈래?”
서울대 다니는 학생들이라고 24시간 공부만 하지도 않을뿐더러, 남들 즐기는 건 똑같이 즐긴다. 게임도 좋아하고, 술도 좋아하고, 술 마시고 피시방 가서 밤새고 학교 와서 조는 일들도 종종 볼 수 있다.
마침 수업도 끝난 참이라 새벽은 마음이 동했다. 앞으로 3년, 아니 군대까지 고려하면 그 이상도 얼굴을 맞대고 지낼 선배들이다. 아, 어쩌면 졸업 후에도 끈끈한 관계를 유지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무리 본인이 아웃사이더임을 자처하더라도, 선배, 동기들이 아는 척을 하는데 무시할 순 없다.
“형 같이 가실래요?”
단유에게 물었더니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난, 개인적으로 볼 일이 있어서 가봐야 돼.”
“아, 그래요?”
새벽은 아쉽다는 눈으로 단유를 바라봤고, 선배―라고 하지만, 단유보다 어리거나 동갑이다―들은 어정쩡한 시선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사실 재수생이나 삼수생들이 들어오면 나이 때문에 관계가 애매해지곤 한다. 어느 유명 체육대학처럼 선후배 관계를 엄격히 지키며 군기 잡는 유형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냥 느슨한 것만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음에 같이 하죠.”
단유는 예의를 갖춰 말했고, 두 선배는 가벼운 손짓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단유가 떠난 뒤, 선배들과 새벽은 후문으로 향했다.
“중간고사는 잘 봤어?”
선배 중 한 명이 물었다. 딱히 할 말이 없어 물어보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새벽은 성의껏 대답했다.
“네.”
잘 봤으니까. 특히 단유와 함께 듣는 수업의 경우에는 단유의 족집게 강의가 도움이 많이 되었다.
“고등학교 때랑 많이 다르지?”
“네. 아직도 적응 중인 거 같아요.”
“어려운 거 있으면 뭐든 물어봐. 후배 무시하는 선배는 없을 테니까.”
“네.”
“아, 너 실험1 언제 들어? 월요일?”
물리학 실험은 좋은 조원들이 도와줄수록 점수 따기 좋다. 좋은 조원들이란 일반적으로 경험이 많은 선배들을 말한다.
“화요일이요.”
“아, 그렇구나. 같은 수업이면 많이 도와줄 건데.”
“다음 학기 때 많이 도와주세요.”
“그래.”
별 의미 없는 대화가 지나고, 새벽은 괜히 따라가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단유와 함께 있을 때는 어떤 대화를 해도 배울 게 있고, 느끼는 게 있었는데 이 선배들과 함께하니 알맹이 없는 대화만 길어지는 기분이다. 선배들도 그런 생각이었는지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누는 중이고.
“아, 너 게임은 좀 하냐?”
“조금요.”
“우리 배틀로얄 할 건데, 할 줄 알아?”
“네. 잘하지는 못하지만 조금 할 줄 압니다.”
“잘됐네. 그럼 한 사람만 더 구해서 가자.”
“없으면 삼쿼드?”
새벽은 단유의 부재를 아쉬워하며 선배의 뒤를 따랐다.
한편, 단유는 학교를 나와 강남으로 향했다.
“여, 어서 와라.”
“안녕하세요.”
“볼수록 얼굴이 좋아지네. 공부 열심히 하는 거 맞아?”
“공부도 하고, 먹기도 잘 먹고 그렇죠.”
“역시.”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 앉도록 권유한 상곤은 준비한 책들을 단유에게 건넸다. 단유는 짧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 뒤, 말을 꺼냈다.
“그런데 여쭤볼 게 있는데요.”
“뭐?”
“혹시 아시는 PB분 계신가요?”
“PB? 왜? 아, 이제 너도 돈 좀 벌었으니까, 관리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거야?”
“그런 것도 있고요. 그냥 아무 은행에나 가서 상담해 볼까 하다가 이왕이면 잘 아는 분께 소개받는 게 더 좋을 거 같아서요.”
상곤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말했다.
“글쎄? 나도 무슨 PB를 만나서 자산 운용할 정도는 안 되고 해서 아는 사람이 별로 없네. 건너건너 물으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런가요?”
“아, 잠시만. 우리 대표님한테 물으면 아실지도 모르겠네. 한 번 물어봐 줄까?”
“네, 그렇게 해주세요.”
“잠시만 기다려봐.”
상곤이 전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상곤과 단유는 대표실로 이동했다.
“오랜만에 보네?”
“안녕하세요.”
“늘 유 팀장이랑만 이야기하다 가니까, 얼굴 보기가 어려워?”
“앞으로는 들릴 때 인사드릴게요.”
“아냐, 그냥 웃자고 한 이야긴데 뭘.”
너털웃음을 짓는 듬직한 외형의 대표는 곧 단유의 이야기를 듣고 한 사람을 추천했다.
“역시 똑똑한 친구라 그런지 돈 관리를 제대로 할 줄 아는구먼. 목돈 생겼다고 이것저것 과소비하는 젊은 애들에 비하면 확실히 달라.”
“감사합니다.”
“잠시만 기다려봐.”
대표는 전화를 건 뒤 이야기를 나누다, 단유에게 물었다.
“오늘 시간 돼?”
“저는 괜찮습니다.”
“이 친구가 오늘 괜찮다는데? 오랜만에 저녁 같이 하는 건 어때? 시간 괜찮아? 아, 그래? 알았어. 그럼 거기서 보자고.”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품에 집어넣은 대표가 말했다.
“내 그동안 자네한테 밥 한 끼 제대로 사준 적 없어 마음에 걸렸는데, 이참에 같이 식사나 하자고. 밥 먹으면서 인사 나누면 더 좋을 거야.”
“고맙습니다.”
“고맙긴. 우리 회사에서 자네 역할이 얼마나 컸는데. 이번에 베스트셀러 건도 솔직히 자네가 워낙 빠르게 작업을 마쳐준 탓에 시기에 맞출 수 있었던 거라고. 자네 공이 커.”
이어지는 공치사에 아무리 단유라도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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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김단유군. 우리 회사에서 번역 일을 하지.”
“반갑습니다.”
“여기는 공택윤. 모르긴 몰라도 우리나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실력의 자산 운용가.”
“칭찬이 과하십니다, 사장님.”
“내가 아는 사람들은 다들 자네가 최고라 하니, 그런 줄 아는 거지.”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보기 좋은 미소를 짓는 40대 초반의 사내는 짙은 청색 정장에 단정하게 빗은 머리를 하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공택윤이라고 합니다.”
“말씀 낮추시죠. 제가 한참 어립니다.”
“천천히 낮추도록 하죠. 그리고 어쩌면 제 고객이 될 수도 있으니 실례는 하지 말아야죠.”
“허허, 역시 매너가 몸에 밴 사람이야.”
대표의 너털웃음이 실내를 가득 메우는 중에 문이 열리며 식사가 들어왔다.
“모처럼 자리를 냈으니, 마음껏 먹으라고. 일 이야기는 나중에 둘이 따로 하도록 하고.”
“네.”
식사 자리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꽤 괜찮은 편이었다. 호탕함을 주무기로 삼은 대표는 단유를 편안하게 배려했고, 공택윤이라는 사람은 겸손했지만 입담이 좋았다. 그래서 낯선 자리임에도 단유는 여유롭게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공택윤이라는 사람에 대해 관찰의 시선을 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