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 수리 마수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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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상미를 재우기로 했다.
“내일 다시 올게.”
“응.”
힘 빠진 목소리로 단유를 배웅하는 상미를 뒤로하고 단유는 집을 나왔다. 건물 입구를 나와 집으로 향하는 대신, 주위를 한 번 둘러보기로 했다. 5층짜리 신축 빌라 3동이 붙어 있었는데, 입구에는 카메라도 달려 있어 건물에 누가 들락날락하는지 알 수 있었다. 문도 자동문으로 되어 있어 방문자는 입주자들이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열리지 않았다.
비싼 방범 장치가 설치된, 나름 좋은 빌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심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집 밖을 아예 나서지 않는다면 모를까, 집 밖으로 나오게 되면 위험해질 수밖에 없다. 1층의 주차장에도 카메라는 달려 있지만, 주차장 옆 담벼락에 몸을 숨기면 카메라에 걸리지 않는다.
건물과 건물 사이는 좁지만, 아예 틈이 없는 건 아니어서 성인 한 명이 몸을 굽히고 숨으면 신경 쓰지 않는 한 알 수가 없는 구조였다.
좀 더 멀리 걸어서 주변을 탐색한 후에야 단유는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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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단유는 샤워를 한 뒤, 간단하게 토스트로 속을 채우고 집을 나섰다.
“집 잘 지켜.”
“킁.”
현관에서 호빵의 배웅을 받으며 나온 단유는 핸드폰을 열어보았다. 집에 잘 도착했다는 새벽의 메시지가 마지막 수신 문자였다. 단유는 주소록을 검색한 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잘 들어갔어?
“응. 넌 푹 쉬었고?”
―그럼. 기분 좋게 푹 잤다. 상미는?
“집에 잘 데려다줬어.”
―고생 많았어.
“고생은.”
이어 단유는 상미가 하고 있는 고민에 대해 전했다. 상미는 한참 시즌 중이라 정신없을 남자 친구를 방해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말을 하지 않았지만, 단유는 명수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떤 새끼야? 그 새끼?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불같이 화를 내는 명수였다.
“아직 몰라.”
―상미는 어떤데? 많이 힘들어 하지?
“응.”
―보기보다 마음이 여린 애라서 혼자 속앓이 많을 했을 건데. 난 그것도 모르고 나 혼자 기분 좋다고 꿀잠이나 처자고 있었네.
“자책하지 마. 너 그러지 말라고 상미가 말을 안 했던 거니까.”
잠시 말이 끊어지고 씩씩거리는 콧소리만 들렸다.
“그렇게 싸우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면서도 너희 둘, 서로를 끔찍이도 아끼는구나.”
―내가 내 여자 아끼는 게 뭐가 이상해?
“보기 좋다는 말이었어.”
―아무튼. 그럼 어떻게 할 건데?
“일단 내가 조금 알아보고 난 뒤에 내 선에서 처리할 수 있으면 처리하려고. 그리고 너한테도 그 정도는 알려줘야 할 것 같아서.”
―너밖에 없다.
“고마우면, 계속 열심히 해. 네가 잘 돼야 나도 잘 되는 거야.
―오케이, 그럼 다음에 골 넣으면 네 이름 불러줄게.
“그런 짓은 하지 말고.”
―김단유, 사랑한다! 고 외쳐줄까?
“닥쳐.”
―내 진심을 왜 몰라주는 거야?
“닥치라고.”
전화를 끊은 후 단유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솔직히 명수에게 알려주기 전까지 고민을 많이 했다. 하지만 어떤 가정 속에서도 단유는 명수에게 알려야 한다는 결론만 도출할 수밖에 없었다. 여자 친구에게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어느 남자가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분노가 치밀어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더욱이 시즌 중인 선수의 멘탈 관리 차원에서도 이런 이야기는 신중해야 했다.
그러나 멘탈이라는 측면에서 명수는 강하다. 보통 강한 게 아니다. 그렇게 강하지 않으면 오늘날 이렇게 축구선수가 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힘써주겠다고 했으니, 명수도 안심할 테고 말이다.
일요일,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빌라 주변은 한적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자동차 주행음이 흐릿하게 들려올 뿐 인적 드문 거리는 시간마저 정지된 것처럼 고요했다. 그 정적을 깨고 나타난 단유는 자박거리는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빌라 주위를 살폈다.
어두운 밤에 볼 때랑 또 다른 느낌이었다. 회색빛의 드라이비트 외장재는 화재에 취약하다고 알고 있는데, 그럼에도 저 외장재가 쓰인 이유는 역시 값싼 비용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겠지만, 만약 어떤 사람이 악의를 품고 불을 지른다면, 저 외장재는 불쏘시개 역할을 하며 금방 건물을 불덩이로 만들 것이다.
또 상미가 머무르고 있는 4층은 반대편 건물 옥상에서 쉽게 노출되는 문제가 있었다. 길 하나를 두고 반대편에는 일반 상가가 서 있는데, 그 상가에서는 옥상 문을 단속하고 있지 않아서, 누구나 쉽게 올라갈 수 있었다.
조금 더 떨어진 곳에는 6층짜리 건물이 있었는데, 거리는 멀지만 그곳 비상계단 통로에서 빌라를 바라보면, 웬만한 시력이면 그 안에서 무엇을 하는지 다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였다.
원룸의 유일한 창문이 사생활을 보호하기 힘들다는 점은 조금 곤란하지 않나 싶었다. 환기를 위해서라도 가끔은 창문을 열어야 할 경우가 있을 테니 말이다.
주위를 적당히 살핀 후에야 단유는 상미의 집으로 향했다.
벨을 누르고 기다리니 안에서 누구냐고 묻는 소리가 들렸다.
“나야.”
“나가 누군데.”
“단유.”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일단 들어가자.”
전자식 도어락이 풀리는 소리가 난 후, 문이 천천히 열렸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상미를 보며 단유는 혀를 찼다.
“너 너무 한 거 아냐? 일요일이잖아? 어제 술도 마셨잖아? 그럼 좀 쉴 시간을 줘야 하는 거 아냐?”
“10시 넘었어.”
“야! 난 12시에 일어난다고!”
“너 어제 잠든 시간이 2시야. 8시간 이상 잤다고.”
“술 마셨다고, 술! 피곤하다고!”
“그런 애교는 명수한테나 보여줘.”
“···이게 애교로 보이냐?”
싸늘한 목소리. 하지만 단유에겐 통하지 않았다.
“보니까 집에서는 밥을 안 해 먹는 거 같은데, 나가자. 해장은 시켜줄게.”
“아이 씨! 기다려봐. 씻고 나올게.”
“그럼 나 컴퓨터 좀 보고 있을게.”
“아, 그럼 내가 켜 줄게.”
“나도 컴퓨터 쓸 줄 알아.”
“아.”
상미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욕실로 들어갔다. 단유는 컴퓨터를 켠 뒤, 설치된 프로그램들을 살폈다. 백신 프로그램 하나 깔려있지 않은 깨끗한(?) 컴퓨터였다. 오로지 게임과 방송이라는 목적에 충실한 컴퓨터.
우선 백신 프로그램을 1년 결제하여 설치한 뒤, 컴퓨터를 스캐닝했다. 스캐닝하는 동안, 단유는 주변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간단하게 세안을 하고 머리를 감은 상미가 수건을 머리에 둘둘 마르고 나와 말했다.
“대박.”
씻느라 욕실에 들어가 있던 고작 20여 분 만에 집 안이 깨끗해졌다.
“빨래는 저기 바구니에 뒀고, 소소한 것들은 저기 화장대랑 서랍에 적당히 넣어놨다.”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던 것들을 정리한 것도 정리한 것이지만, 바닥도 쓸고 닦았는지 광이 나는 듯 보였다. 침대보는 마치 호텔의 그것처럼 정리되어 있고, 화장대와 수납장 위의 물건들은 열과 오를 맞춰 도열한 상태. 행거에 걸려 있던 옷들도 가지런하게 줄을 맞춰 마치 백화점 진열···.
“오버하지 마.”
단유의 말에 상미가 여기저기 둘러보며 감탄하던 것을 멈췄다.
“단유야.”
“···왜?”
“너 같이 살자.”
“미쳤어?”
“아니면 청소 알바라도 할래?”
“···진짜 너랑 명수는 천생연분이다.”
“왜?”
“헛소리 레벨이 똑같애. 됐고, 여기 와서 네가 받았다던 쪽지 좀 보여줘.”
“나중에 하자.”
단유가 돌아보니, 상미가 배를 슬슬 만지며 히죽 웃고 있었다.
“배고파.”
중국집에 시켜먹자는 상미를 억지로 끌고 나온 단유는 가까운 식당을 향해 가던 중 전화를 받았다.
“일어났어?”
―네, 형. 목소리 들으니까 밖이신 거 같은데요?
“응. 상미랑 같이 밥 먹으려고.”
―누나랑요? 설마···.
말끝을 흐리는 새벽에게 물었다.
“너는 밥 먹었어?”
―네? 아뇨. 저도 지금 일어났어요. 어제는 너무 피곤해서 잘 들어갔다는 연락도 못 드려서, 그래서 별일 없이 잘 들어왔다고 알려드리려고 전화 드린 거였어요.
“그래, 알았어.”
―근데, 형 혹시 어제 그 누나랑 같이···.
“이상한 쪽으로 생각하지 마. 얘 해장시켜 주려고 온 참이니까.”
―아, 네. 저기, 그럼 저도 가도 돼요?
“여기? 밥 먹으러?”
―서두르면 금방 나갈 수 있어요.
낙성대에서 여기까지 2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다.
“그래, 오고 싶으면 와. 정확한 주소는 문자로 보내줄게.”
―네.
전화를 끊으니 상미가 어제 그 친구냐고 물었다. 그렇다 하니,
“걔가 너 엄청 따르는구나?”
라고 말한다.
“나를 보고 싶은 건지, 너를 보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고 말하려다, 괜히 상미 어깨에 힘만 잔뜩 들어가게 만들까 봐 말을 말았다.
“안녕하세요.”
“오? 되게 빨리 왔네?”
“네. 차가 안 막히더라고요.”
두 사람이 서로 한 마디씩 나누는 걸 지켜보다 단유는 착석을 권했다. 새벽이 도착한 시간에 맞춰 육개장 그릇이 나왔다.
“네 거 먼저 시켜놨어.”
“고맙습니다.”
“타이밍이 절묘했어?
“그렇네요.”
“먹자.”
상미가 화사하게 웃으며 권하니, 새벽이 싱긋 웃으며 숟가락을 들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먹는 두 사람과 달리 느긋하게 식사를 마친 단유는 티슈로 입 주위를 닦고, 물을 마시며 고개를 돌렸다.
맛은 괜찮은 편이긴 한데, 또다시 와서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가게는 아니었다. 그냥 주위에 있으니까, 가끔 생각나면, 혹은 지나가다가 충동적으로 한 번 들릴 정도의, 평범한 가게였다.
그리고 그런 가게에 들어와 있는 손님은 단유네와 또 다른 한 사람. 점심을 먹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니, 가게에 손님이 많지 않은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건너 테이블에 홀로 앉은 손님은 상미처럼 전날 기분 좋게 한잔하고 난 뒤, 숙취 해소를 이해 일찍 찾아온 것일 수도 있다.
나이도 대략 30대에서 40대 사이로 추정되는데, 입은 옷이나 외형은 단정한 편이었다. 솔직히 지나가다 만나도 너무 흔해서 눈길조차 주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니, 식사 중에 단유네가 있는 테이블을 한 번씩 훔쳐본 것은, 그저 젊은 애들 셋이서 이른 아침부터 해장국을 마시는 모양새가 특이해서일지도 모르고, 상미와 새벽의 만담 같은 대화 소리가 자신의 식사 시간을 방해해서 눈치를 준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 먹었어?”
두 사람이 포만감을 느끼며 배를 두드리는 모습을 보고 물었다.
“일어나자.”
단유는 두 사람이 일어서기 전에 얼른 계산을 마쳤고, 두 사람이 이런저런 미안함을 드러내기 전에 가게 밖으로 내몰았다. 가게를 나오기 전, 살짝 눈이 마주쳤는데 단유는 ‘시끄러워서 죄송합니다’라고 짧게 말을 건넸다. 사내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뭔데?”
“아냐, 아무것도.”
상미가 가게 안을 쳐다보려 하자, 단유가 막았다.
“왜?”
“괜히 찾아가 쳐다보면 시비 거는 모양새가 되잖아. 진짜 별거 아니었어.”
상미는 고개를 갸웃하며 걸음을 옮겼다.
“새벽이 넌 어떡할래?”
“저도 가도 돼요?”
“비록 금남의 집, 이런 건 아니지만. 처녀 혼자 사는 집에 시커먼 남정네 둘을 들이는 게 쉬운 일은 아닌 거 알지?”
“불편하면 전 그냥 가볼게요. 괜히 와서 밥도 얻어먹었는데, 불편 끼치면 제가 죄송해요.”
“아냐, 괜찮아.”
상미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손을 저었다.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커피 한 잔 마시고 가. 괜찮아.”
“괜찮나요?”
새벽은 단유의 눈치를 살폈고, 단유는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집주인이 괜찮다는데 뭐 어때.”
집에 돌아와, 작지만 넓은―새벽의 자취방과 비교하면 넓었다―원룸과 마이크가 설치된 컴퓨터를 보며 새벽은 감탄했다.
“엄청 깨끗하시네요! 역시 여자 방이란 이런 거군요.”
상미가 쓴웃음을 지으며 찬장에서 커피 믹스를 꺼냈다.
“믹스 괜찮지?”
“네. 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방송하시는 거네요. 몇 시간이나 하세요?”
“대중없어. 10시간을 할 때도 있고, 20시간을 할 때도 있고.”
“그렇게 오래요?”
커피포트에 물을 올리고 기다리는 동안, 상미는 인터넷 방송에 큰 관심을 보이는 예비 애청자 새벽과 문답을 나눴고, 단유는 컴퓨터를 열고 스캔 된 기록들을 살폈다. 다행히 별문제는 없어 보였다.
“상미야, 내가 여기 백신 프로그램 설치해 놨거든. 자동으로 바이러스나 악성 프로그램을 잡아주니까, 절대 지우지 마.”
“그거 설치하면 컴퓨터 느려지는 거 아냐?”
컴퓨터 성능에 저하가 오면 방송 송출 퀄리티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상미의 말이었다.
“그래도 보안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으니까. 자칫해서 진짜 악성 프로그램에 걸려서 네 컴퓨터 전부 날려버리면 뭐로 보상받을래?”
“알았어.”
수긍하는 상미에게 단유가 물었다.
“네가 받았다는 쪽지 보여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