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 수리 마수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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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이 오해를 하는 듯해서 단유는 그의 오해를 풀어 주었다.
“얘 연예인 아니야.”
“아까 방송 어쩌고 하신다고.”
그 말에 상미가 유쾌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인터넷 방송이요. 저 스트리머거든요.”
스트리퍼 아니고요, 라고 덧붙이며 재밌다는 듯 깔깔 웃음 짓는 상미를 여전히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새벽이었다.
“두 분 언제부터 사귀신 거예요?”
“사겨?”
“누가?”
“······.”
단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단유의 고갯짓에 상미가 또 뿔이 난 듯 화를 내려는 찰나에 단유가 설명을 했다.
“얘는 그냥 친구. 그리고 얘 남자 친구 따로 있어.”
“두 분, 사귀시는 거 아니에요?”
“얘는 그냥 남자 사람 친구.”
“아.”
“잠깐, 그러면 너 아직도 여자친구 없어?”
“응.”
“서울대에는 여자가 없어?”
“왜 없어.”
“그런데 왜 연애를 안 해?”
“연애 같은 거 할 마음이 없어. 공부하느라 바쁘기도 하고.”
“와, 난 네가 이렇게 친구, 아니 동생도 데리고 오고 하니까 나름 사교성도 좋아졌구나 싶었는데, 아직 연애는 무리였던 거야? 이야, 우리 단유 다 죽었네. 한창때는 막 여자들이 들러붙고 그랬는데.”
“기억 조작하지 마. 나한테 무슨 여자가 들러붙어?”
“어라? 너 왜 딴청이야? 기억 되살려줘?”
“됐어.”
“아, 그러고 보니 우리 김단유씨는 눈이 높지? 일반인은 눈에 차지도 않지?”
“뭔 소리야?”
“그러니까 잘 나가는 여자 연예인들만···.”
“거기까지 해라.”
“흐미, 무서워라.”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 표정으로 깐죽대는 상미를 보며 한숨을 쉰 단유는 운동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니 남친 나왔다.”
그 말에 상미와 새벽의 시선이 모두 운동장으로 향했다.
예전에 새벽이 단유에게 서울에 올라와서 보고 싶은 것들을 나열한 적이 있었다. 그중의 하나가 월드컵 경기장이었고, 오늘 그 소원을 들어준 단유였기에, 연예인도 소개시켜 주려고 불렀나 싶었다. 그러나 다정한 두 사람을 보니 연인 사이가 아닌가 싶었고, 그래서 처음에 가졌던 자신의 망상이 남부끄러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얼굴을 붉히고 있던 새벽은 단유의 설명에도 괜히 얼굴을 들기 어려웠는데, 연예인인 줄 알았던 그녀의 진짜 남자 친구가 있단다. 그리고 그 남자 친구가 운동장에 나왔다고 하니, 호기심이 생겼다.
과연 이렇게 예쁜 여자를 여자친구로 둔 남자는 어떤 사람일까?
“누군데요?”
단유가 손가락을 들어 가리켰다.
“등 번호 23번의···.”
―와!
그때 마침 응원석에서 함성이 터져 나와 단유의 목소리가 묻혔다. 응원석에서는 힘차게 선수들의 이름을 연호했다. 반대편 응원석에서도 원정 선수들의 이름을 응원하느라 소리를 치는데 그 고성(高聲)들이 어울려 소음이 되었다.
새벽은 운동장 위에 나오는 선수들을 빠르게 훑으며 23번을 찾았고, 이내 운동장 가운데서 공을 차올리며 몸을 푸는 선수를 발견했다. 동시에 전광판에 선수들을 소개하는 영상이 나오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음악 소리 같은 것도 나오는 것 같은데, 응원단의 함성에 묻혀 제대로 들리진 않았다.
“저 선순가요?”
“응.”
멀어서 제대로 보이진 않지만, 얼굴이 까무잡잡하고 덩치가 꽤 있어 보이는 듯했다.
“잘하는 선수죠?”
새벽은 주변 소음 때문에 목소리를 높여 물었는데, 상미에게도 들린 모양이었다. 상미가 몸을 살짝 기울여 새벽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잘해요. 첫해 때 신인상도 받았었고요, 지난 시즌에는 득점왕도 노려볼 만했는데, 아쉽게 두 골 차이로 받지 못했어요. 그래도 데뷔 3년 차에 그 정도 성적을 보인 선수가 드물다 할 정도죠. 국대의 차세대 스트라이커예요.”
자랑스러워하는 눈치가 빤히 드러난다.
“그리고 얘랑 둘도 없는 친구고.”
“네?”
축구 선수랑도 친해요? 라고 물을 뻔했는데 단유가 미리 설명해주었다.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죽마고우야.”
“우와.”
설명하는 동안에도 단유는 그 친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처음의 낯설었던, 그래서 서먹했던 분위기는 경기가 시작된 뒤 조금씩 옅어졌다. 경기를 응원하는 동안, 새벽도 단유네와 함께 FC 유나이티드를 응원하며 그들이 공격을 주도할 때마다 ‘골, 골’을 외쳤고, 위기에 처하면 탄식을 하며, 위기를 벗어나면 안도의 한숨과 함께 상미와 건배를 했다.
전반이 끝난 뒤, 남은 맥주를 털어 넣으며 새벽이 말했다.
“어쩐지 허전하네요.”
“뭐가?”
“해설이 없어서요.”
상미가 맑은 웃음을 터뜨리며 새벽의 말에 공감했다.
“나도 처음에 그랬는데, 이제는 익숙해. 오히려 쓸데없는 말이 끼어들어서 감상을 방해하는 것 같고 그래서 방송 중계 보다 보면 귀에 거슬리기까지 하는걸.”
“우와, 축구 정말 좋아하시나 봐요.”
단유가 한마디 거들었다.
“축구가 아니라, 지 남친을 좋아하는 거지.”
상미가 단유를 쏘아보며 말했다.
“내가 내 남친 좋아하는 데 뭐가 불만이야?”
“그럼 싸우지를 말든가.”
음료수를 홀짝이는 단유가 얄밉다는 듯 상미가 콧방귀를 꼈다.
“야! 사람이 사귀다 보면 싸우기도 하고 그러는 거지. 그런 것도 이해 못 해?”
“이해 못 했으면 너랑 지금 여기 이러고 있겠어?”
“얼래? 그럼, 너 만약에 명수랑 나랑 헤어지면 나 다시는 안 보겠다?”
“그건 비약이야.”
“비약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됐고, 가서 맥주나 더 사와.”
“알았어.”
단유는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 제가 사올게요.”
“아냐, 괜찮아.”
“아뇨. 제가 갈게요. 화장실도 갈 겸.”
“그래.”
새벽의 단호한 의지를 읽은 단유가 순순히 양보했다. 새벽이 상미에게 얼마나 사와야 하냐고 물었고, 상미는 ‘적당히’라고 대답했다. 아마 새벽은 그 ‘적당히’라는 단어가 지칭하는 수량의 한계선을 두고 심각하게 고민할 것이지만, 단유는 그대로 놔뒀다.
새벽이 자리를 비운 뒤, 단유가 물었다.
“요즘 뭐 안 풀리는 일 있어?”
“뭐? 왜? 내가 신경질 부려서 그래?”
날카로운 상미의 반응에 단유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널 모르겠어?”
그 말에 상미가 단유를 쏘아보다 이내 눈동자에 힘을 풀고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역시 우리 단유는 변하질 않는구나.”
단유는 말없이 상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뚫어져라 보고 있으면 부끄러워서 무슨 말을 해?”
“부끄럽긴. 너랑 나 사이에 그런 게 어딨어.”
“그것도 그렇네.”
상미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허탈한 듯 경기장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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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사람으로 북적이는 복도를 어렵게 뚫고 나가 긴 줄 끝에서 발을 동동거리며 기다려 산 맥주 4캔을 들고 다시 경기장 안으로 들어갔더니, 어느새 등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단유가 새벽에게서 캔이 담긴 봉지를 받아들며 ‘수고했다’고 한 마디 건네니 새벽이 씩 웃었다.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 줄 몰랐어요.”
“그래서 내가 간다고 했잖아.”
“에이, 그건 아니죠. 고생을 해도 제가 하는 게 맞아요.”
“어머, 말 예쁘게 하는 거 봐. 단유 니가 인복은 있나 보다. 저런 착한 동생도 얻고?”
상미의 말에 새벽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헤헤, 웃음을 흘렸다. 그때 다시 각 팀의 응원단이 내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운동장으로 선수들이 나오고 있었다. 전반전 스코어는 1:1. 스코어도 스코어지만, 전반전에 두 팀은 치열하게 싸움을 벌이며 경기장을 누볐고, 때문에 직관 온 관중들의 응원 열기도 드높아진 상황이었다.
당연히 처음으로 경기장을 찾은 새벽도 경기에 꽤 몰입했다.
“시작하나 봐요.”
상미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후반엔 꼭 좀 골을 넣었으면 좋겠는데.”
전반에 얻은 한 골도 명수의 도움이 있었기에 얻을 수 있었지만, 상미는 명수의 발로 넣은 골을 보고 싶었다.
후반 10분여가 지났고, 선수들은 여전히 활발하게 뛰어다녔다. 두 팀 다 교체 선수가 없었고, 선발의 체력들을 감안하면 이제 점점 지치는 선수가 나오지 않을까 싶은데, 그래도 아직까지는 걸어 다니는 선수가 보이지 않았다.
두 팀의 서포터즈 석 역시 아직 지치지 않았다는 듯, 목에 핏대를 세우며 응원가를 불렀고, 그 열기가 옆으로 전염되어 동쪽과 서쪽의 관중석에 앉은 이들도 눈을 반짝이며 경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FC유나이티드의 골키퍼의 선방으로 위기를 한 차례를 넘긴 후였다. 골키퍼는 품에 안은 공을 힘껏 던졌고,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공은 센터 라인 근처에 있던 미드필더의 가슴에 맞고 떨어졌다. 그 즉시, 주변에 있던 상대 팀 선수가 압박하기 위해 달려왔는데, 미드필더의 볼 처리가 먼저였다.
“막아!”
상대 팀 감독인지 코치인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보다 앞서 중앙 미드필더가 찬 공은 바닥의 잔디를 스치며 나아가 왼쪽으로 굴렀다. 가장 먼저 그 공을 잡은 선수는 FC 유나이티드의 레프트 윙어였다. 한 번의 터치로 공의 속도를 줄이는 대신 진행방향을 전면으로 바꾼 뒤, 공을 쫓아가는 윙어의 옆을 상대 팀 수비수가 쫓아 막았다.
사이드라인을 따라 나란히 달리던 두 선수가 공을 차지하기 위해 어깨 싸움을 벌였고, ‘반칙, 반칙’을 외치는 응원단의 소리가 경기장을 덮었다.
“저거 반칙이에요?”
“아냐. 저 정도 몸싸움은 봐주는 편이야.”
갑작스럽게 드리블을 멈춘 FC유나이티드의 윙어. 그러나 수비수도 빠른 반사 신경으로 진로를 막고 나아가지 못하게 앞에 섰다. 결국 윙어는 뒤로 공을 돌려야 했는데, 뒤에서 쫓아오던 미드필더가 원터치로 공을 중앙, 페널티 에어리어로 보냈다.
그 절묘한 패스가 마침 가운데로 침투하던 명수의 발에 걸렸다. 그러나 그곳에는 이미 상대 수비수가 3명이나 서 있던 상황.
여기서 명수 타임이 시작됐다.
가장 가까이 있던 수비수가 명수에게 어깨를 들이밀었다. 피하더라도 앞뒤로 자신을 도와줄 수비수들이 붙어 있기 때문에, 공을 조금이라도 빼는 순간 뺏을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나보다. 그러나 공을 향해 고개를 떨구고 있던 명수도 주변의 상황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던지, 공을 빼지 않았다. 대신 수비수와의 몸싸움에 밀리지 않기 위해 힘을 줬고, 상대 수비수는 오히려 균형을 잃지 않는 명수의 힘에 놀란 눈치였다.
그게 틈이었다. 명수는 오른발을 교묘하게 흔들어 공을 굴렸고 앞에 선 수비수 사이를 뚫었다. 그리고 두세 걸음 앞까지 나와 각도를 좁힌 골키퍼마저도 한 호흡에 뚫었다. 그런 명수의 무브는 놀라웠으나, 덕분에 골대로 공을 찰 만한 각도가 나오질 않게 되었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때, 명수가 몸을 비틀며 공을 찼다. 균형을 잃고 바닥에 쓰러지는 명수를 바라보는 시선은 없었다. 대신 모두의 시선이 그의 발을 떠난 공의 궤적을 쫓았고, 모두의 주목을 받은 공은 회전 없이 날아가 반대편 포스트를 맞고 튕기면서 골망을 흔들었다.
―와아!
경기장을 뒤흔드는 함성 속에 FC유나이티드 선수들이 명수에게로 뛰어갔다. 명수는 잔디와 흙이 잔뜩 묻은 유니폼을 털 생각도 않고 벌떡 일어나 경기장 사이드로 뛰었다. FC유나이티드의 서포터즈들과 마주한 명수가 두 주먹을 흔들며 세리머니를 펼치자 더 큰 함성이 터져 나왔다.
“우와, 대박!”
새벽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왁왁 소리 지르는 상미를 따라 함께 소리를 질렀다. 흐뭇한 표정으로 박수를 보내는 단유를 붙잡고 ‘대박 아니에요, 형?’이라고 외치는 새벽의 모습에 단유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하하하!”
결국 2:1로 승리한 FC 유나이티드 선수들은 경기장 위에서 찾아온 서포터즈와 관중들을 향해 박수를 보내며 선수 대기실로 들어갔다. 그들이 모두 운동장 위를 떠날 때까지 관중들은 박수를 보내주었다.
그때, 명수가 W석 쪽으로 달려오더니 손을 흔들었다. 새벽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상미를 바라보니, 역시 상미가 두 손을 크게 흔들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명수가 양손의 검지로 단유네 쪽을 가리키고 엄지를 들어 보인 뒤, 대기실로 들어갔다.
“형, 오늘 완전 대박이에요. 축구가 이렇게 재미있는 경기인 줄 몰랐어요. 앞으로도 자주 보러 와야 할 거 같애요. 제가 서울 사람은 아니지만, 앞으로는 FC유나이티드 팬이라도 할까 봐요. 특히 형 친구분이요, 인명수 선수분 팬 해야겠어요. 어떻게 그렇게 공을 잘 차요? 나 완전 메시 보는 줄.”
쉴새 없이 떠는 새벽의 수다 본능이 드디어 터졌다. 그래도 오늘은 그냥 두기로 마음먹었다. 명수를 칭찬하는 이야기는 아무리 많이 들어도 질리지 않으니까.
“형은 되게 자랑스럽겠어요.”
그 말에 상미가 의아하다는 눈으로 물었다.
“왜?”
“저렇게 멋있는 축구 선수를 친구로 두고 있잖아요? 부러워요.”
상미가 풋, 하고 실소를 지었다.
“너 웃긴다.”
“왜요?”
“명수 쟤는 오히려 전국 1등까지 하고 서울대에 들어간 단유를 자랑스러워할걸?”
“서울대에 들어간 거로요?”
고작 그런 이유로? 라는 얼굴을 보며 상미는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서울대에 들어간 게 안 자랑스러워?”
“자랑스럽긴 하지만, 저분은 스타시잖아요.”
“와, 명수가 스타 소리도 다 듣네. 이상하다, 그치?”
“뭐, 이제 스타 소리 들을 때도 됐지.”
단유는 담담하게 대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