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거울(5)
-------------- 575/952 --------------
단유가 돈을 잘 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새벽의 태도에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조금 부담스러울 정도로 존경의 시선을 보낼 때가 있다는 정도였다. 그리고 바쁜 와중에도 그때 샀던 책을 다 읽었던 모양인지, 단유에게 와서 ‘책 정말 재밌던데요?’라고 한마디 하는 선에서 그쳤다. 물론 말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말이 있다는 것을 단유는 알 수 있었다.
“아직 아르바이트 못 구했어?”
“···네.”
커피숍에서 번역 아르바이트 자리를 물어봤었던 새벽은 괜히 조르는 모양새가 될까 봐 말을 아꼈다. 속으로야 전전긍긍하며 혹시나 좋은 자리를 알선해주지 않을까 기다렸을 테지만 말이다.
“주소 알려줄 테니까, 한 번 찾아가 봐.”
“혼자요?”
“같이 가줄까?”
“아, 아니요. 혼자 갈게요. 자리 주선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형 시간 뺏을 순 없잖아요.”
역시나 속마음과 다른 말이 새벽의 입에서 나왔지만,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을 보면 모를 수 없다. 단유가 피식 웃으며 ‘같이 가줄게’라고 말하니, 두 손을 격하게 흔들며 괜찮다고 말한다.
“어차피 한 번 들려야 할 일도 있으니까, 시간 맞춰서 같이 가자.”
“고마워요, 형. 이 은혜 잊지 않을게요.”
“인사가 너무 빠른 거 같은데? 아직 아르바이트하기로 결정된 것도 아니잖아.”
“이렇게 마음 써주신 것만으로도 고맙다는 이야기죠.”
새벽은 홀로 상경하여 의지할 데 없어 외로울 뻔했던 자신의 삶에 대한 넋두리와 그런 자신을 구원(?)해 준 단유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으려 했지만, 단유는 사전에 눈치를 채고 입을 막았다.
“나 강의 들어간다.”
단유가 먼저 발걸음을 돌리니, 서둘러 옆에 붙으며 헤헤 웃는 새벽이었다. 교양 필수 과목들은 다 같이 듣는 편이긴 해도, 이 수업만큼은 두 사람이 각기 다른 클래스에 속했다.
“그런데 형은 이 수업 되게 쉽겠어요. A+는 맡아놓은 거 아닌가요?”
단유가 지금 들으러 가는 강의는 <고급영어>였다. 교양 필수인 대학 영어는 모두 4 클래스였는데, <기초영어>, <대학 영어 1>, <대학 영어 2>, <고급영어>로 나뉘었다. 입학 시 기록한 TEPS 성적에 따라 반이 나뉘는데, 단유는 처음으로 치는 TEPS에서 900점 이상의 고득점을 받아 <고급영어> 반으로 배정되었고, 새벽은 <대학 영어 1>로 배정되었다.
사실 이공계 학생들에게는 꽤 힘든 수업이었다. 서울대에 들어올 정도의 실력이니만큼 영어는 어느 정도 한다고 하더라도, 애초에 문과가 아닌 이과에서, 이과 과목을 공부하기에도 버겁던 아이들에게 영어는 그리 친숙한 과목은 아니었다.
더구나 <대학 영어1>을 들으며 말하기 교실 수업까지 들어야 했던 새벽은, 그보다 더욱 심화한 수업인 <고급영어> 클래스에 대해서는 몸을 떨 정도였다.
“나도 쉽지는 않아.”
“그렇겠죠. 영어를 모국어처럼 쓰는 사람이라도 쉽진 않을 거라던데.”
“그 정도는 아니고.”
다양한 텍스트를 분석하고 토론하고 발표하는 수업, 이라고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지만, 텍스트의 깊이나 분석 작업, 그리고 쏟아지는 과제물들은 영어 논문 초록을 수십 편 쓰는 것과 마찬가지일 정도였다.
“영어를 잘해도 열심히 하지 않으면 좋은 점수를 받기는 어려울 거야.”
하지만 단유의 말은 겸손에 지나지 않았다. 그간 번역한 서적들이 주로 인문학, 사회학 관련 서적들이었던 것도 해당 수업을 듣는 데 도움이 많이 될뿐더러, 언어의 장벽이 없는 단유였기에 수업을 듣는 데는 사실 큰 어려움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수업 중에는 언제나 그렇듯이 조용하게 지내는 편이긴 해도, 이미 몇 차례의 발표 수업이 지나면서 해당 클래스의 사람들은 단유의 실력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 중간고사 결과가 나오진 않았지만, 강사가 단유의 이름을 꼬집어 말하며 최우수였노라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단유는 <고급영어> 강의가 필수니까 듣는 거지, 사실 별 재미는 느끼지 못했다. 어렵고 지루하단 의미가 아니라, 자신이 대학에 와서 배우고 싶었던 학문과 거리가 멀다는 의미였다.
이런 과목은 그냥 아침에 눈 뜨고 일어나 TV를 켜고 듣는 아침 뉴스와 다를 바 없었다. 그냥 귀에 들어오니까 듣는 거다.
따지고 들면 교양 강의라는 게 다 비슷하지만, 그래도 고급수학이나 고급 물리학은 고등학교 때 배우지 못했던, 흥미로운 주제로 공부할 수 있어서 좋았다.
“조화진동자(harmonic oscillator)에 대해서 지난 시간에 알아봤는데요, 조화진동자의 에너지 준위는 E=(n+1/2) \hbar \omega로 표시하고···.”
임의의 시스템 온도 상에서 평균 에너지를 구하는 문제를 두고 강사의 열띤 설명이 이어질 때, 단유는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이건 겨우 교양이지 않은가? 앞으로 이보다 더 심화한 문제와 맞닥뜨리며 배우게 될 것들을 생각하니 즐겁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학에 오길 잘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
세 가지 다른 엔트로피 Clausius, Boltzmann, Shannon이 서로 어떤 연관 관계가 있는지를 생각하며 교정을 걷던 무렵, 누군가가 단유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물광 이랬던가? 번들거리는 이마와 광대 부근에 시선이 절로 가도록 하는 화장을 한 여성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 옆에는 무지 티셔츠에 물 빠진 스키니 청바지를 입은 여성이 다소곳이 서 있었다.
“저희가 설문 조사를 하고 있는데요, 시간 괜찮으시면 잠시 설문지 작성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단유는 고개를 끄덕여 그들의 부탁을 받아들이니, 고맙다며 자리를 잠시 옮기지 않겠냐고 물어왔다. 근처에 벤치가 있어 그쪽이 어떻겠냐고 물었더니 여자들은 괜찮다고 말했다.
벤치에는 단유와 물광 여인만 앉고 스키니 청바지는 서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앉으시라 권했더니, 괜찮다며, 자신은 서서 기다리겠노라 대답했다. 편한 대로 하시라는 의미에서 단유도 더는 권하지 않고, 물광 여인이 건넨 설문지를 받아 읽기 시작했다.
「엘로X 아카데미에서 실시하는 기독교 인지도에 대한 설문입니다」
첫 번째,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신앙생활을 하신 경험이 있습니까?
이 질문을 보며 단유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희미한 광륜(光?) 속 존재였다. ‘빛’이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그게 빛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하얀 배경이었던지 정확하진 않았다. ‘존재’가 있었던 것 같지만, 꿈에서 본 걸 착각하는 것일 수도 있고, 어떤 책에서 읽었던 것을 공상으로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런 이미지가 무의식중에 순간적으로 반짝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아래에 보기가 있는데 기독교 계통의 종교가 있는지, 아니면 다른 종교 계통인지, 무신론자인지를 세세히 묻고 있었다.
첫 질문에서 체크를 하지 않고 오래 설문지를 들여다보는 것 같으니, 옆에서 보충 설명이 들어왔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되고요, 그냥 생각나시는 대로, 대신 솔직하게만 작성해주시면 고맙겠어요.”
“네.”
“지금 혹시 믿으시는 종교 있으세요?”
“아니요.”
“그럼 어릴 때 혹시 믿으시던 종교가 있으셨나요? 어릴 때는 부모님 따라서 가기도 하잖아요?”
“없어요.”
“아, 그러시면 네 번째에 체크하시면 돼요.”
길고 하얀 손가락 끝이 가리키고 있는 부분에 단유는 브이(V)자로 체크를 했다.
두 번째,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존재하냐, 안 하냐. 증거가 있으면 믿겠다, 존재에 대해 알아보고 싶다. 네 가지 보기 중에 고르면 되는데 이건 쉽게 골랐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알아보고 싶으신 거네요?”
“네.”
비단 하나님 뿐일까? 부처님도 알고 싶고, 알라도 알고 싶고, 브라흐마, 비슈누도 알고 싶다. 아마테라스 오오카미, 일광보살, 제우스 등등 알고 싶은 신화적 존재들은 널리고 널렸다.
어릴 적에 멋모르고 교회를 따라간 적도 있었지만, 그래서 정확히 알지 못해 쉽게 흥미를 잃었던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종교도 자신이 배워서 머리에 새길 지식의 한 페이지다.
단유가 생각하기에 종교는 인류의 창의성이 극단적으로 발휘된 영역의 하나였다. 초월적 존재를 상정하고, 그 존재에 대해 신화적 스토리를 만들어낸 뒤, 그 스토리에 스스로 빠져들어 ‘믿음’이란 형태로 개인, 사회, 국가를 함몰시키기까지 했다. 종교의 탄생과 발전에서 쇠락해가는 과정에 이르는 이야기는 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며, 인간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길잡이였다.
“잘됐네요. 저희도 하나님에 대해,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에 대해 공부하고 있거든요. 특히 그분의 가르침은 워낙에 방대하고 깊어서 혼자서는 하기 힘들어요. 그래서 다 같이 함께 공부하면 더 잘 알 수 있죠.”
세 번째, 성경은 어떤 책으로 알고 있나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기록된 예언서, 라는 1번 보기는 웃음을 짓게 한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고 그 가르침을 공부한다는 사람들이 보는 앞인데 경솔하게 행동할 순 없는 법이다.
이스라엘의 역사서, 라는 2번 보기도 재미있다. 구전으로 내려오던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며, 기록자도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의, 전문 역사가들도 아닌 이들이 기록한 책이다. 역사적 증명의 가치를 지닌 책도 아닌 마당에, 역사서 운운하는 것은 조금 이상하다. 마치 환단고기가 역사책이냐 아니냐를 두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신중하시네요.”
물광 여인은 은근하게 말을 건넸다. 지금까지 설문 조사를 핑계로 만난 사람들 중, 이보다 꼼꼼하게 설문지를 읽고 체크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앞에 선 스키니 청바지 여인도 앞에서 기다리기보다는 벤치에 앉도록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모처럼 마주 앉은 청년에게 빨리하라고 재촉할 순 없는 일이다. 요즘 시대에 이렇게 길거리 전도를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갈수록 야박해지고 심지어는 면전에서 모진 소리도 거침없이 내뱉는다. 물론 고작 그런 이유로 전도를 포기할 정도의 가벼운 신앙심은 아니었기에, 꿋꿋하게 웃으면서 전도에 전념했다. 가끔은 이렇게 자신들을 거부하지 않고, 마주 앉아서 귀를 기울여주는 착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힘이 난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의 교회에 들어와 준다면 더더욱 고맙고, 뿌듯하다. 또 한 명의 병든 이들을 회개시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끔 했다는 보람이 있다.
여인은 자신의 이타적인 면이 손해를 많이 보는 성격임을 알지만, 남들을 도울 수 있다면 행복했고,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나 존재하는 이유가 된다고 생각했다.
여인의 말에도 단유는 천천히, 꼼꼼하게 설문을 읽고 문항을 체크했다. 성경에서 어머니 하나님에 대한 말씀을 본 적이 있냐는 질문은 의아하기 그지없었지만, 마침 없다라는 문항이 있어 체크를 했다.
“어머니 하나님에 대한 말씀은 성경에도 나오는데, 다른 종교의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부분이죠.”
“왜요?”
“함께 공부하면 아시겠지만, 간단하게 설명해 드리자면···.”
물광 여인이 눈을 빛내며 설명을 하는 동안, 단유는 그녀의 눈에 서린 광기를 읽었다. 독실한 신자의 흔들리지 않는 믿음은 때론 광기로 해석될 수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광기, 그것은 이성의 독(毒)이다.
마지막까지 체크를 하고 건네니, 밑에 연락처를 적어달라고 했다.
“적지 않으면 안 되나요?”
“적어 주시면 고맙죠.”
“왜요?”
“이 설문지가 저희가 연구하고 있는 부분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으니, 그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서라도 연락처를 알면 좋겠고요, 또 여기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알아보고 싶다고 하셨는데, 저희가 그에 대한 공부 자리가 있거나 알려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을 때, 간단하게 연락드릴 수 있으니 그쪽 분도 편하지 않겠어요?”
“죄송하지만, 제가 평소에 혼자서 집중해야 할 일이 많은데, 아무 때나 연락이 온다면 꽤 신경이 쓰일 것 같네요.”
“연락 아무 때나 하진 않을게요.”
“그럼 그쪽 분 연락처를 주시겠어요?”
“네?”
“이 설문지가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이유로 감사 인사를 받기는 제가 부담스러우니 받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만약 제가 필요할 때, 그러니까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이란 분의 존재에 대해 알고 싶거나 공부하고 싶을 때는 제가 먼저 연락을 드리도록 하죠.”
“그러지 말고, 서로 알려주는 건 어떨까요?”
“앞서도 말씀드렸듯, 제 연락처로 아무 때나 연락 오는 것은 불편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설령, 그 빈도가 제가 지금 예상하는 경우보다 낮다고 하더라도 말이죠. 그렇지만 만약 필요하다면 제가 먼저 연락드릴 의향은 있으니까 그쪽 분의 연락처를 주십사 부탁드리는 겁니다.”
“저기···저도 좀 그런 게, 그래도 전 여자잖아요? 그쪽 분이 정중하고 예의 바르신 분이란 건 알지만, 그래도 남자시니까 아무 때나 전화할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저만 알려드리긴 그렇고, 서로 알려주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럼 서로 알려주지 말죠.”
단유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일어섰다.
“저기, 잠시만요. 그러지 마시고 시간 되시면 저희랑 함께 공부방이라도 한 번 가보지 않으실래요? 여기 후문 쪽에 저희 공부방이 있는데요, 거기서 분위기도 좀 보시고, 못다 한 이야기도 좀 더 하시죠?”
물광 여인이 단유의 소매를 붙잡았고, 스키니 청바지의 여인이 한 걸음 다가서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