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거울(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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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멜라 메이어라는 작가는 ‘인간은 하루에 10~200회 정도의 거짓말을 한다’고 했으며, 누군가와 첫 대면을 하는 최초의 10분 동안 평균적으로 3회 정도 거짓말을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 말도 그 진실성에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지만, 아무튼 거짓말을 연구한 여러 학자들의 말에 근거해서 보자면,
“사람은 누구나 거짓말을 한다.”
라는 뜻이 된다.
이런 학자들의 연구가 아니래도, 대부분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타인에 대한 신뢰가 어렵다. 특히 낯선 사람이라면. 물론 오래 함께 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100% 신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거짓말을 하니까.
진실만을 말하는 사람이라고 한들, 쉽게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넌 너무 못생겼어.”
라고 대놓고 말하는 사람의 경우, 신뢰의 문제가 아니라 인성에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보이니까.
그래서 인간관계가 어렵다.
물론 이것이 좁은 관계망을 보유한 아싸들의 상황을 완벽하게 설명하진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그런 이유에서, 새벽은 단유라는 사람과 친밀함을 유지하며 지내게 되었다는 것에 기뻤다. 단유는 자신을 속이려 들지 않았고, 필요한 말은 반드시 하지만 그 외에는 말을 아끼는 신중함과 배려가 몸에 밴 남자였다.
게다가 키도 크고, 잘 생기고, 똑똑하다. 성적으로 남자를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단유는 평생을 두고 따르고 싶은 마음이 드는 훌륭한 형이었다.
그래서였다.
교정에 핀 벚꽃들이 모두 지고, 푸릇푸릇한 초록 잎들이 우거지기 시작할 무렵, 첫 중간고사가 끝났다. 그리고,
“영화 보러 가실래요?”
이제는 혼밥을 즐기지 않게 된 새벽이 단유에게 물었다. 만약 단유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그것도 남자에게 ‘영화 보러 가지 않을래’라고 묻는다면 조금은 이상한 눈으로 보지 않을까? 하지만―이미 일부 학생들에게―이상한 사람으로 낙인이 찍힌 단유는 그 말을 이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무슨 영화?”
“최근에 개봉한 영화들이 많은데, 가서 보고 고르려고요.”
단유는 새벽이 일주일에 한 번씩 영화를 보러 가고 싶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영화를 좋아하는 점도 있겠지만, 고등학교 시절 문화생활을 제대로 누리지 못했던 것에 대한 보상심리가 작용한 탓이리라.
강남으로 가자는 새벽의 말에 따라 지하철을 타고 이동했다. 왜 굳이 가까운 곳을 놔두고 강남을 가냐는 말에,
“강남에 한번 가보고 싶어서요.”
라는 시답잖은 이유를 대는 새벽이었다. 서울에 올라온 지 몇 달 되었지만, 여전히 관악산 주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새벽은 서울이라는 도시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가령, 부자의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이라는 강남과 문화와 연극의 중심지라는 대학로, 젊은 예술인들의 성지라는 홍대 거리를 꽤 가고 싶어 했다.
“여의도도 가보고 싶고, 신촌도 가보고 싶고, 월드컵 경기장도 가보고 싶어요. 아, 압구정도 가보고 싶고, 남산도 가보고 싶고, 명동도···.”
단유는 손을 들어 새벽의 말을 잘랐다. 그냥 두면 서울 전 지역의 명칭이 다 나올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수다쟁이의 본능은 쉽게 잠재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어릴 때 가요프로 보면서 되게 가보고 싶었어요. 공개 방송 같은 데 가서 좋아하는 가수도 보고 응원도 하고 그러잖아요? 그런 거 직접 보면 되게 좋을 거 같은데. 아, 같이 가달라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그런데 제가 고등학교 때 좋아하던 걸그룹이 리본 소녀였거든요? 요즘은 휴식기라서 방송에 안 나온다고 하니까 아쉽지만, 나중에 컴백한다고 하면 꼭 방송국 가서 보고 싶어요. 혹시 우리 학교 축제 같은 거 하면 연예인들도 오겠죠? 그때 리본 소녀 오면 대박일 텐데.”
한 달 뒤에 서울대학교 봄 축제가 열리긴 한다. 하지만 누가 올지는 모르고, 애초에 관심도 없었다. 그 시간에 책이나 보는 게 더 유용하리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사람마다 생각은 다를 수 있다.
“남산 타워는 가고 싶긴 한데 정말 혼자서는 가기 힘들 거 같아요. 어쩐지 거기는 관광지란 느낌이 강하잖아요? 서울 사람들은 잘 가지 않을 거 같고,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이나 외국 사람들이 들리는 곳 같은 느낌. 그래서 혼자 가면 되게 촌스러울 것 같고 그래서요 혼자 가긴 그래요. 하지만 이왕 서울에 왔는데 남산 타워랑 63빌딩은 가봐야 하지 않겠어요? 아, 롯데 타워도 가봐야 하는구나. 그런데 거기가 데이트 장소로 좋은 곳인가요?”
“글쎄?”
“아, 안 가보셨어요?”
“응.”
“나중에 시간 되면 같이 가보실래요? 형도 혼자 가긴 그렇잖아요? 그쵸? 아, 남자 둘이서 가긴 좀 그런가? 뭐, 63빌딩은 밥 먹으러 가기도 한다던데. 거기 식당 음식이 좋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거기 가면 좀 비싸려나? 비싸겠죠?”
지하철을 타고 강남을 향해 가는 동안, 새벽은 자신이 꿈꿨던 서울 판타지를 두서없이 털어놓았고, 덕분에 가는 길이 심심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심심한 편이 더 좋았으려나?
강남에 도착하여 역을 빠져나왔을 때, 새벽은 이렇게 감상평을 털어놓았다.
“사람 진짜 많네요.”
역을 빠져나오는 동안에도 강남역 아래 지하상가를 가득 메운 인파를 보며 놀람을 감추지 못하는 새벽은 들뜬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바빴다. 반면 일 때문에 자주 이곳을 다녔던 단유는 여상한 얼굴로 새벽을 이끌었다.
“여기 자주 오셨어요?”
“자주는 아니고 가끔.”
“역시 강남은 사람이 많네요.”
“서울 최고의 번화가 중 한 곳이니까.”
역을 나와 5분쯤 걸으니 극장이 나왔다. 매표소에 서서 개봉작들을 살피는 새벽의 표정은 이름난 평론가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미리 예약할 걸 그랬네요. 이렇게 사람이 많이 올 줄 몰랐어요. 평일인데.”
가장 빨리 볼 수 있는 영화도 2시간은 기다려야 했다. 결국 새벽은 단유의 동의 아래 액션 블록버스터 영화를 하나 골라 표를 샀다. 사실 가장 인기 많은 영화는 감성 멜로 영화였는데, 남자 둘이서 보기엔 좀 그렇지 않냐, 는 새벽의 주장이었다.
그 후 커피숍에 가서 시간이나 때울까 하다가, 강남을 구경하고 싶다는 새벽의 말에 두 사람은 강남을 돌아다니기로 했다. 단유도 강남을 돌아다닌 적은 없었고, 늘 같은 길로만 걸었던지라 주변 지역의 지리 같은 건 알지 못했다. 극장이 있는 거리에서 중앙대로를 건너 반대편 거리로 가면, 유흥가 거리가 나오는데 술집들은 아직 문을 열지 않은 곳이 많았지만, 점심시간 영업부터 하는 음식점들이 많아서 그곳도 사람들이 꽤 많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다른 번화가 거리와의 차별성을 느끼기 힘들었는지 새벽은 풀이 죽은 반응을 보였다.
“아, 저기가 그 유명한 클럽이네요.”
눈에 확 띄는 커다란 간판 주변은 조용하기만 했다.
“역시 해가 지고 왔어야 하는 거네요.”
“그렇겠지.”
교보생명 건물까지 걸어간 두 사람은 지하층의 서점에도 들렀다. 역시 번화가의 중심에 있는 서점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무척 많았고, 제대로 책을 살펴보기도 힘들어 보였다. 대충 둘러보고 빠져나가려는데 뒤에서 단유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단유야.”
단유가 뒤를 돌아보니 상곤이 눈을 번쩍 뜨고 다가오고 있었다.
“혹시나 했는데, 맞구나!”
“안녕하세요.”
“그래, 어쩐 일이야? 여긴?”
“얘랑 영화 보려고 강남에 왔다가 시간이 남아서 잠시 돌아다니던 중이에요.”
단유의 손짓에 새벽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저, 강새벽이라고 합니다.”
“반갑네요. 그럼 그쪽도 서울대생?”
“네.”
“두 사람 친한가 보네. 둘이서 영화 보러 올 정도면.”
“아, 예. 그런데 오해하지 마세요. 저 혼자 영화 보러 가기가 심심해서 억지로 형을 데리고 온 거거든요. 강남도 처음이고. 제가 시골에서 올라와서, 서울이 아직 낯설거든요. 그런데 역시 강남이 사람이 많긴 많아요. 혼자 왔었으면 길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르겠더라고요.”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말에 상곤이 살짝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이내 웃음을 터뜨리며 새벽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괜찮아요. 오해 안 해요.”
단유는 두 사람이 언급하고 있는 ‘오해’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었지만, 괜히 누군가의 수다 본능을 자극할까 봐 호기심을 억눌렀다. 대신 상곤에게 어떻게 이 시간에 여길 왔는지 물었다.
“당연히 출판된 책 때문에 왔지. 이번에 인문학 서적 베스트 20에 들었다고 해서 말이야.”
고작 베스트 20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매 분기, 매달마다 쏟아지는 엄청난 서적들 속에서 베스트 20을 차지한다는 것은 결코 가볍게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잘됐네요.”
“잘 됐지. 너한테도 잘 됐고.”
“저요?”
“네가 번역한 책이거든.”
그 말에 새벽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하지만 상곤과 단유의 대화에 섣불리 끼어들진 않았다. 묻고 싶은 말이 많을 테니 입이 간지러운 모양이지만, 당장은 해결할 방법이 없다.
“작년 말에 인세 계약을 했던 책 있지?”
“예. 중국 공산당의 비밀(Secret of China’s Communist)이란 책이었죠.”
“마침 한중 문제가 얽히면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졌던 게 요인인지 책이 많이 팔렸어.”
“그런가요?”
“너 나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알지?”
지금까지 단유는 번역물을 맡을 때 매절 계약을 했었다. 사실 이건 회사 측에서 단유에게 특혜를 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회사 입장에서는 책이 많이 팔릴 것 같다는 예상이 될 때 매절 계약을 하고, 책이 많이 팔리지 않을 것 같으면 번역가와 인세 계약을 맺는 게 유리했다. 그런데 단유의 경우에는 거의 매절 계약을 했다. 단유가 남들과 다른 속도로 번역을 완료하기도 했고, 그 결과물도 꽤 깔끔하기에 회사가 단유에게 성의를 보인 측면이 있다. 비록 단유가 어리기도 하고, 겉으로 드러내기 힘든 경력을 가졌기 때문에 단가가 높진 않았지만, 그래도 어린 단유가 벌어들이기 힘든 금액이 책정되었었다.
그러다 단유가 서울대 입학이 결정된 뒤, 상곤과 미팅을 할 때 상곤이 직접 인세 계약을 추진했다.
“내가 선견지명이 있었던 거지.”
회사 입장에서는 비용을 아낄 수 기회를 날려 아쉽겠지만, 단유를 아끼는 상곤은 뿌듯한 마음도 없잖아 있었다.
“그렇네요. 감사드립니다.”
“쯧쯧, 그러면 안 돼. 무턱대고 감사라니. 네가 정확히 얼마를 벌게 될지 알고 난 뒤에 감사해야지.”
“베스트 20이면 많이 팔렸을 테고, 그러면 수익도 많이 나겠죠.”
“정산을 해봐야 하겠지만, 다음 달 통장 한 번 봐라. 그리고 나 큰 거 안 바란다?”
“네. 꼭 좋은 거로 보답할게요.”
상곤은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리며 단유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다른 일정이 있어서 바쁘다는 말로 인사를 건넨 후, 상곤이 떠나자 곁에서 눈치만 보던 새벽이 입을 열었다.
“형, 번역도 해요?”
“응.”
“무슨 번역이요?”
말이 나온 김에 보자며 인문 서적 코너로 향했다.
“우와. 대박.”
새벽은 극장 근처 커피숍에서 책을 살피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서점에서 책을 보자마자 번역가에 ‘김단유’라는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을 보고 놀라더니, 곧 지갑을 열었다. 영화 시간이 아직 조금 남았지만, 번화가에 대한 호기심보다 책에 대한 호기심이 더 강했던 새벽은 극장 근처로 자리를 옮겼고, 커피숍에서 책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번역가 김단유의 이력이 적힌 면을 보며 감탄했다.
“형 되게 많이 하셨네요? 언제부터 하신 거예요?”
“예전부터 했어.”
“우와. 그런데 왜 물리학과를 지원하신 거예요? 이 정도면 어문학부로 가셔도 될 거 같은데?”
“니가 리본 소녀를 좋아한다고 해서 방송연예과를 지원하진 않은 거랑 비슷한 이유 아닐까?”
“그래도 이 정도면···번역가로서 자리매김한 거나 마찬가지 아니에요?”
“그 정도는 아냐.”
“그리고 아까 들어보니까, 베스트 20이라면서요? 이 책? 그러면 돈 많이 버는 거 아니에요?”
“들었으니 알겠지만, 정산 나올 때까지는 나도 모르는 일이지.”
“인세 계약이라고 했죠? 인세 얼마나 받는데요? 아, 이런 건 물어보면 안 되나? 보통 계약은 업계 비밀일 테니까. 그래도 형 대박이에요. 형은 못 하시는 게 없는 사람 같아요. 아, 그런데요. 혹시 거기 아르바이트 같은 건 안 구해요? 저도 영어는 조금 하는데. 번역 아르바이트 같은 거 하면 돈 좀 벌 수 있나요? 형처럼 책 한 권을 번역할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조금씩 아르바이트로 하는 건 괜찮지 않을까요?”
“한 번 물어봐 줄게.”
고등학교 때부터 번역을 했느냐, 번역할 때 어려운 점은 없느냐, 대학 생활하면서 번역하기에 시간은 모자라지 않느냐, 같은 질문들이 쏟아질 때 단유는 대답 대신 핸드폰의 시간을 보여주었다.
“영화 시간 다 됐어.”
모든 질문에 일일이 대답할 필요는 없다. 대답하기 곤란한 것들이 있으면 화제를 돌리는 것도 한 방법이다. 혹은 진실의 반만 보여주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