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거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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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온 뒤 가장 마음에 든 점이라면, 뭐니 뭐니 해도 수많은 장서가 보관된 도서관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중에서 보기 힘든 전문서적과 각종 논문들, 고서와 외국 서적들이 보관된 중앙도서관은 그야말로 보물창고였다.
사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에도 좋은 곳이라 반쯤은 피신의 목적으로 도서관을 찾은 이유도 없잖아 있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도서관에 가야 할 이유는 충분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했다.
“형도 시험 준비하시는 거예요?”
“무슨 시험?”
“뭐, 공무원 시험이라든가, 행정고시라든가, 외무고시라든가, 국회 공채 시험이라든가.”
“무슨 시험이 그렇게 많아?”
“형은 그런 시험 준비하는 거 아니에요?”
단유는 열람실 안을 돌아보며 물었다.
“저기 있는 사람들은 다 그런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이라고?”
“다는 아니겠지만, 꽤 될 걸요?”
자신도 저런 분위기에 동참해야 하는 게 아닐까 고민 중이라던 새벽은 ‘그래도 당분간은 프리하게 지내다 하려고요’라고 말을 맺었다.
도서관에 들어간 단유는 컴퓨터를 이용해 능숙하게 도서를 검색한 뒤, 논문을 모아놓은 장서관으로 이동하여 찾으려 했던 책을 서재에서 뽑아 들었다.
“이런 것도 봐요? 과제 때문에 보시는 거예요? 이런 과제 없었던 거 같은데?”
“그냥 보고 싶어서.”
단유가 뽑아 든 37페이지짜리 논문은 2000년에 발표된 중력파 관련 논문 중 하나였다. 중력파가 발견되기 전부터 중력파에 관한 실재적 고찰과 함께 이를 발견하기 위한 다양한 이론적 시도들이 있었고, 이 논문도 그중 하나였다. 해외의 명망 높은 교수들이 쓴 논문들이 더 가치 있다고 볼 법도 하지만, 때로는 비주류라고 불러도 무방할 이곳의 박사 학위 논문에서 주류에선 볼 수 없는 신선한 아이디어를 얻을 가능성도 있다. 그래도 한 나라에서 최고 수재라는 사람들이 모인 학교 아닌가? 그 사람들의 연구와 생각을 읽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와, 전부 다 영어네.”
단유가 훑어보던 논문을 어깨너머로 보던 새벽이 약하게 탄성을 질렀다. 그마저도 시끄러울까 봐 단유는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대며 주의를 줬다.
“영어가 문제가 아니구나.”
페이지의 반 이상은―새벽의 능력으로는 전혀 알아볼 수 없는―방정식들로 메워져 있었다.
“이거 다 알아보실 수 있어요?”
“설명되어 있잖아. 이건 입자 운동 방정식을 풀이해 놓은 거고, 이에 근거하여 뉴턴 퍼텐셜(Newtonian potential)이 민코프스키 텐서(Minkowski tensor)에서 어떤 수치로 상정될···.”
단유의 이어지는 설명은 반도 알아듣기 힘들었던 새벽은 두 손을 비비며 용서를 구했다.
“죄송해요, 형. 제가 잘못했어요. 그냥 조용히 할게요.”
단유는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너도 가서 보고 싶은 책 봐.”
“그런 책 없어요. 말했잖아요? 프리하게 지내고 싶다고. 1학기는 저한테 자유를 주고 싶어요.”
“그래, 그럼.”
자신이 새벽의 부모도 아닌데 이래라저래라 할 순 없는 일이었다. 단유도 이유는 다르지만,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여행을 떠나지 않았던가.
새벽은 잠시 둘러보고 오겠다며 단유의 곁을 떠났다. 논문만 모아놓은 이곳은 처음 들리는지 이것저것 호기심에 들춰 보는가 싶었는데, 금방 질린 얼굴을 하고 단유에게로 돌아왔다.
“배 안 고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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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를 알아보고 사인을 요청했던 그 날 이후부터, 새벽은 단유를 졸졸 쫓아다녔다. 1학년 1학기라서 의무적으로 들어야 하는 교양 강의도 겹치는 게 많아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거의 항상 단유와 함께 지내는 새벽이었다.
“저희 학교에서 서울대 온 사람이 몇 안 돼요. 그리고 다른 반이었어서 얼굴도 잘 모르고, 선배도 잘 모르고요. 그래서 3월달에는 거의 강제로 아싸(Outsider)로 지냈는데, 형 덕분에 혼밥은 면했네요. 사실 딱히 혼밥을 싫어하진 않고요, 고등학교 때도 혼밥 먹을 때가 많았는데, 이왕이면 형처럼 유명한 사람이랑 같이 식사하면 좋잖아요. 게다가 형은 아는 것도 많고, 모르는 거 있으면 바로바로 대답도 해주고, 재미있으니까요.”
수다스러움은 하은을 통해 어느 정도 면역이 생겨서 참을 만했다. 그렇지만 몇몇 부분은 조금 이해하기 힘들었다.
“첫째, 난 유명한 사람이 아냐. 예전에 잠깐 뮤직비디오에 나온 적이 있었다지만, 내가 주인공은 아니었잖아. 그리고 두 번···.”
“형, 되게 유명해요. 지금도 봐봐요. 다들 형 쳐다보는데?”
단유는 주변을 살피고 볼을 긁적이며, ‘내일부턴 모자라도 쓰고 다녀야 하나’라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아무튼, 난 연예인도 뭣도 아니야. 그리고 두 번째. 내가 재미있다고?”
“형 되게 재밌어요!”
이보다 황당한 말은 근 10여 년간 들어본 적이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어디가?”
“아, 이게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는데요. 형이 막 웃긴 사람이라는 얘기는 아니고요, 그러니까, 형이랑 같이 있으면 즐겁다는 뜻이에요.”
“즐거워?”
“네!”
새벽은 진심이라는 듯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이유를 물을까 고민하다 말았다. 물어봐야 이야기만 길어질 뿐이고, 이유를 듣는다고 한들 단유가 거기에 대해 반론을 펼치거나 변명을 할 게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본인이 즐겁다는데 뭐라 하겠는가.
하지만 수다쟁이 본능은 상대의 요구 없이도 발휘된다.
새벽이 단유와 함께했을 때 즐거운 이유.
1.
드물게 신입생들이 찾아와 같이 밥 먹자고 조르는 경우가 있었다. 이는 새벽 때문에 생긴 일인데, 새벽이 늘 형, 형 하니까 ‘선배’인 줄 알고 접근하는 경우였다. 이런 일이 생기면, 새벽이 나서서 교통정리를 해야 했다.
“동기야. 같은 학번이라고.”
“근데 왜 형이라 그래? 동기면 말을 놔야지.”
“나보다 나이가 많은데, 어떻게 말을 놓냐?”
“동기끼리 위아래가 어딨냐?”
그러면 단유가 나섰다.
“가요, 밥 사줄게요.”
“정말?”
신입생 둘은 신이 나서 단유를 쫓아가고, 그 뒤를 새벽이 뒤따랐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잠시 후 식당의 테이블에 마주 앉아 식사를 시작하는데, 이때부터 신입생들은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게 된다. 단유는 서글서글한 성격도 아니고, 귀여운 후배들을 아끼는 선배 노릇을 할 이유가 없는 동급생이다. 그런 마당에 둘을 앞에 앉혀 놓고 무슨 이야기를 하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식사 때는 천천히 밥을 먹는 단유였다. 느릿하게 오물거리며 과묵하게 식사를 하는 단유를 앞에 두고 신입생 둘은 어색하게 숟가락을 놀릴 따름이다. 가끔 화가 났나 싶어 쳐다보면 단유는 평온한 표정으로, 식사 시작부터 마칠 때까지 한결같기만 하다. 그리고 이때는 새벽도 딱히 입을 열지 않고 단유의 식사 속도에 맞춰 조용히 밥을 먹었다. 다른 테이블의 요란함은 딴 세상 이야기라, 신입생 두 사람은 밥을 먹어도 먹는 기분이 나지 않았다. 체하지나 않으면 좋으련만.
그 후, 두 사람은 단유와 새벽 근처에 다가오는 일이 없다.
“가끔 걔들이랑 복도에서 마주치면 괜히 눈 돌리고 형을 못 본 척하면서 지나가는 거 알아요? 그런 것만 봐도 얼마나 재밌는데요?”
도대체 어디가 재밌냐고 묻지 않았다.
2.
교양 강의들의 경우, 수강생이 많기 때문에 강사의 입장에서는 개별적으로 리포트를 받기 곤란한 경우가 있어, 어쩔 수 없이(!), 학생들이 싫어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조별 과제를 냈다.
그러면 가끔 눈썹을 가지런히 다듬고, 컬러렌즈를 착용한 여학생이 짝을 지어 찾아와서는 함께 조를 짜서 발표수업을 하지 않겠냐고 제안을 건넸다.
새벽은 늘 단유와 함께 있으니 같은 조로 엮일 수밖에 없었고, 새벽 스스로도 원하던 일이니 거기까지는 별문제가 없다.
“오빠, 연예인이에요?”
“연예인 많이 알아요?”
“삼수했다면서요? 왜 삼수했어요? 재수했을 때는 어땠는데요?”
“싸움도 잘해요?”
조별 과제를 하기 위해 온 건지, 단유의 사생활을 캐묻기 위해 온 건지 분간이 안 될 때가 많았다. 당연하게도 단유는 충실하게 답변했다.
“아니요.”
모든 질문의 대답은 그 한마디로 정리되었다. 후속 질문이 이어졌지만 단유는 최대한 단답형으로 대답했다. 연예인은 아니지만, 연예인보다 더 까다로운 사람, 이라는 인상을 받을 무렵, 조장을 뽑자는 이야기가 나온다.
“오빠가 조장해요.”
라고 하면, 이번에도 단유는 고개를 흔든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도 들어봐야죠.”
“오빠가 나이가 많으니까 오빠가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다른 사람도 그렇게 생각해요?”
새벽은 침묵을 지키고, 다른 조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2학년도 있었지만 단유보다는 나이가 한 살 어리다.
“그럼 오빠 하는 거죠?”
“아뇨.”
이번에도 단유는 고개를 흔든다.
“왜요?”
“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간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여전히 단유는 사람들의 시선에 띄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단유의 성향을 모르는 사람들은 단유의 단호한 대답에 입을 벌리고 바라볼 뿐이었다.
새벽이 ‘하기 싫다는 사람 억지로 권하지 말자’고 거들었지만, 여학생들의 눈에 서늘한 빛이 서린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처음 단유에게 함께 조를 편성하자고 제안했던 아이가 나섰다.
“무슨 이유에서 하고 싶지 않다는 건지는 몰라도, 무작정 하기 싫다고 나서시면 너무 책임감이 없는 거 아닌가요? 그럼 저희가 어떻게 오빠를 믿고 역할을 분담할 수 있겠어요?”
논리적 비약이 심하다고 지적하는 대신, 단유는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이유를 설명했다.
“제가 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단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조장을 하고 싶지 않다는 거예요. 학우분의 말씀처럼 이 조별 과제는 각자 자신이 맡은 부분을 책임감 있게 해내고 그걸 통합해야 완성될 텐데, 그러기 위해서는 각 부분을 조율하고 통합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조장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여러분은 그런 능력의 유무를 따지지 않고, 그저 제가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조장을 맡기려 하셨잖아요. 그래서 조장 직을 반려한 겁니다.”
여학생은 입을 다물었다. 괜히 나섰다가 돌멩이로 뒤통수를 맞은 얼굴이 돼서는 주변의 눈치를 살피기 바빠졌다. 그 여학생을 구해준 것은 같이 단유에게 찾아왔던, 갈색 머리의 여학생이었다.
“제가 듣기로는 오빠가 전국 1등도 했었다던데요? 솔직히 그 정도면 저희 중에 제일 똑똑하신 분 같으니까, 지영이가 그렇게 권한 거예요.”
“여러분도 수능을 쳐 봐서 아시겠지만, 수능은 그저 고등학교 때 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했나, 교과서를 얼마나 충실히 이해했나를 테스트할 뿐이에요. 수능 잘 쳤다고 좋은 조장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무리라고 보는데요. 만약 그 가정이 옳다면, 여러분도 충분히 좋은 조장이 될 자격이 있는 거고요.”
갈색 머리도 입을 다물었다. 남은 사람은 2학년 선배와 두꺼운 안경을 끼고 눈치만 살피는 1학년 남학생 한 명뿐이었지만, 두 사람 다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어쨌든 다들 수능 고득점자고, 머리 좋기로 유명했던 이들이다. 여기서 단유와 말로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오지 않는다.
“그럼 조장은 누구로 하죠?”
갈색 머리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가 단유를 노려보며 물었다. 이때 새벽은 나중에 SNS에 익명의 악성루머가 올라올 거라고 짐작했다.
“그걸 왜 제게 묻죠?”
갈색 머리 혼자 고군분투하는 게 안타까웠는지, 지영이라는 이름의 여학생이 참전했다.
“그럼 여기서 무슨 이야기를 하죠? 그냥 이렇게 서로 멀뚱멀뚱 지켜만 보다가 헤어지나요? 과제는 어떻게 나누고, 각자 무엇을 맡을지 의논하려고 모인 거 아니었나요?”
“저도 그렇게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아까 두 분이 계속 저에 대한 이야기만 물으시길래, 그렇게 사담(私談)이나 나누려고 모인 건 줄 알았네요.”
모인 사람들은 물론, 나름 단유와 붙어 지내며 단유를 어느 정도 알았다고 생각했던 새벽까지도 놀란 얼굴로 단유를 쳐다보았다.
‘뒷끝 장난 아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