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거울(2)
-------------- 572/952 --------------
교정에 심어진 벚나무에 하나, 둘 벚꽃이 피기 시작했다. 하늘하늘 거리는 하얀 꽃잎을 보고 있으면 감성이 메마른 사람이라도 나무 아래에 서서 시를 읊고 싶은 광경이다. 그러나 그 아래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시를 읊기보단 핸드폰을 들어 셀카를 찍고, 해시태그를 붙여 SNS에 올리기 바쁘다. ‘감성 폭발’하는 문장을 적어 놓고 뿌듯해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이곳은 바로 한국 제일의 대학교, 서울대학교다.
워낙 넓어서 셔틀버스를 타고 다니는 이들이 많다고 알려졌지만, 공강 시간에는 이렇게 유유자적하게 교정을 돌아다니며 산책을 즐기는 사람도 없진 않았다. 도서관에 가서 과제를 하는 것도 좋은 시간 때우기지만, 이렇게 날이 좋으면 도서관 안에 틀어박혀 있는 게 스스로에게 죄를 짓는 기분이다.
“내가 들었던 서울대는 이런 게 아니었는데.”
한때는―아마도 호랑이가 곰방대 물던 시절일 거로 추정한다―대학만 나와도 취업이 되던 시절이 있다고 하지만, 지금은 대학 졸업증과 한식 요리사 자격증 정도가 비슷하게 취급되는 시기다. 그래서 많은 대학생들이 입학하자마자 도서관으로 입주 경쟁이라도 벌이듯 틀어박혀 밤낮으로 책을 끼고 사는 게 대학의 현실이다. 고학점은 당연하고, 토익과 각종 자격증을 따기 위한 공부에 전념하는 학생들로 도서관의 불은 꺼질 줄 모른다.
최고 명문대라고 손꼽히는 서울대 역시 다르지 않았다. 사정을 잘 모르는 이들은 ‘그래도 서울대니까 다른 데보다 낫지 않냐?’고 하는데, 듣는 서울대생은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간다.
서울대생은 남들보다 훨씬 높은 기준점을 통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서울대 나왔다면서 이것밖에 안 돼?’라는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그건 개인의 자존심만 굽히면 어느 정도 용인될 수 있는 수준이다. 근본적으로 이 나라의 취업문이 좁아진 마당인데, 서울대라는 타이틀이 성골(聖骨) 취급을 받는 것도 아닌 이상 치열한 경쟁은 필수였다.
‘서울대 백수’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1학년 때부터 최선을 다해야 한다.
“고3만 끝나면 내 세상일 줄 알았는데, 여긴 새로운 지옥도로구나.”
“미친놈.”
두 남학생은 한숨을 내쉬며 파란 하늘을 바라보다 중도로 향했다. 가끔 커플인지 팔짱을 끼고 걷는 이들을 보면, 왜 자신의 두 팔에 안겨 있는 것이 귀여운 여자 친구가 아니라 무거운 전공 서적이어야 하는지 답답할 지경이다.
그들은 학기 초부터 각종 과제를 안겨준 교수님에 대한 뒷담화로 청춘을 소모하던 중이었다.
“어? 쟤, 걔 아냐?”
“응?”
친구가 턱짓으로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커다란 키의 훈남이라고 부를만한 사람이 가방을 한쪽 어깨에 걸고 느릿한 걸음으로 마주 오고 있었다.
“뭔데?”
“왜, 얼마 전에 대나무숲에 올라온 글 못 봤어?”
“잘 모르겠는데?”
그때 마주 오던 사내가 옆을 지나갔다. 둘은 입을 꾹 다물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지났다. 지나간 뒤 친구는 슬쩍 고개를 돌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3년 전에 전국 1등이 대학 진학 포기했다고 해서 난리가 났었잖아?”
‘난리’라는 표현을 썼지만, 실제로 난리가 난 건 아니다. 고작해야 ‘수능’이라는 이벤트에 목매달던 고등학생들에게나 충격적인 사건이었을 뿐이다. 다수의 사람들에게 그 사건은 의문과 호기심을 자아내게 했을 뿐이지만, 당시 고등학생들에게는 마치 무림 고수가 무림 제일 악당을 물리친 뒤 아무 일 없다는 듯 쿨하게 무림을 떠나는 모습처럼 보였다.
수능에서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아침부터 밤까지, 좌신합일(座身合一)의 자세로 책상에 들러붙어 있던 사춘기 소년들에게 이보다 멋있는 장면은 상상할 수 없었다. 3년 전 고 2였던 이 두 사람 역시 그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게 쟤, 아니 저 선배라고?”
“선배 아니고.”
“그럼?”
“그때 대학을 안 갔는데, 이번에 다시 수능치고 들어왔대.”
“대박.”
새삼스러운 눈으로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친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진짜야?”
단유는 전공을 고르는 데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처음에 대학을 가냐 마냐를 결정할 때는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이라는 생각이었지만, 이왕에 대학에 들어가게 되니 무엇을 배워야 할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간이 되는 한에서, 지정된 전공과목 외에 다른 전공과목도 수강해서 배울 수 있다는 것은 들어 알았지만, 그래도 주전공이라는 이름으로 집중해서 배울 과목이니 절로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당장 배워야 하는 학문 분야를 지정한다면, 역시 물리와 화학이다. 그러나 개인적 취향을 고려한다면 수학과나 컴퓨터학과도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마법으로 극복할 수 없는 분야이기에 관심이 쏠리는 의학 쪽도 선택지에 두고 고민했었다.
점수가 좋으니 아무거나 골라도 되는구나, 라며 부러워하는 친구들―군대 간 채윤과 휴학 후에 인터넷 방송에 집중하고 있는 상미―에게서 대학 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보다가 결국 물리천문학부의 물리학 전공을 선택하게 되었다.
처음에 단유는 눈에 띄지 않는 학생이었다. 외모의 문제가 아니라, 특별히 주목받을만한 사건이 없는 학생이란 이야기였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도 참여하고 선후배간의 만남이라는 자리에 나가서 인사도 했지만, 몇몇 사람들에게서 ‘잘생겼네’라는 덕담을 듣는 정도 외에는 별일이 없었다. 조금 과묵하다는 정도와 나이를 따지니 사수생 정도라고 알려졌을 뿐이다.
그런데 서울대학교 대나무숲, 이라는 SNS 페이지에 글이 올라왔다.
―물리천문학부 신입생 김단유, 혹시 3년 전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주인공 아닌가요?
우연히 단유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던 한 학생이 익명으로 글을 올린 것이다. 의혹의 제기에 댓글이 붙기 시작했고, 곧 단유의 나이와 출신학교가 공개되면서, 긴가민가하는 반응이 이어졌다.
―같은 고등학교 출신인데, 저분은 저희 선배님이 맞습니다. 당시 우리 학교가 발칵 뒤집혔었죠.
단유는 모르지만, 단유를 기억하는 동문 후배의 증언이 이어지면서 사람들은 단유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여기서 뜻밖의 일들이 이어졌다. 사람들은 ‘김단유’라는 이름을 인터넷에 검색했다. 혹시 그의 개인 SNS 계정이라도 찾으면, 그가 당시 사건의 주인공인지 쉽게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리고 인터넷 검색창에 단유의 이름을 집어넣으니 단유의 개인 페이지는 찾을 수 없고, 대신 원치 않았던 기사들과 커뮤니티 글들이 검색되었다.
“가디스R 뮤직비디오에 나왔었다고?”
“갤럭시즈는 또 누구야?”
“노래도 불렀었네?”
“와, 대박! 힘이 장난 아닌가 봐? 아니면 격투기 같은 거 배운 건가?”
단유가 지난 세월 남긴 흔적들이 고스란히 수면 위로 떠올랐다. 너무 예전이라 지금과 비교하면 유치하기 짝이 없는 뮤직비디오에 여러 컷으로 출연하기도 했고, 『초전박살! 길거리 싸움 고수』라는 민망한 제목으로 단유가 광종을 제압하는 영상이 나오기도 했다.
“김단유.”
“네.”
강의실에서 출석을 부르면 다른 사람을 부를 때는 관심 없던 사람들이 단유의 이름이 나오면 모두 단유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소문 속의 인물이 어떤 사람인가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픈 마음에서일 것이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강사님이지만, 일순간에 바뀌는 강의실 분위기를 감지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물었다.
“무슨 일이죠?”
물론 누구도 대답할 수 없었다. 흘깃대는 시선과 소곤대는 목소리가 신경 쓰였지만, 다들 강사님과 눈이 마주치면 ‘무슨 일이시죠’라고 딴청을 피우는 눈치였다.
“강의 진행하겠습니다.”
1학년들이 필수로 들어야 하는 교양강의를 맡은 강사는 굳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시간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단유 역시, 딱히 수업을 듣는 데 방해하려는 게 아니라면 그 정도 시선쯤은 무시할 수 있었다. 바로 옆자리에서 수업 시간 내내 힐끔거리며 자신의 얼굴을 마치 멸종동물을 발견한 것 마냥 들여다보는 동기의 시선은 솔직히 조금 거슬렸지만 참을 수 있었다. 강의가 끝난 뒤에 붙잡고 물어보면 되니까.
“혹시 이 사람이 맞으세요?”
동기도 참을성을 발휘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강의가 끝나자마자 단유에게 붙더니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단유는 동기의 얼굴을 한 번 보고 그가 내민 핸드폰으로 시선을 던졌다. 거기에는 인터넷 기사 페이지가 로딩되어 있었는데, 3년 전 단유가 대학 진학을 포기한 일을 보도한 기사였다.
“네.”
부정할 이유가 없는 물음이었다.
“그럼 이것도요?”
구형 핸드폰으로 찍은 조악한 화질의 영상 속에 어린 시절의 단유가 담겨 있었다. 이런 쓸모없는 데이터를 여전히 품고 있는 인터넷이라니.
“맞아요.”
“그럼 이것도 맞으시죠?”
세 번째 들이밀 때부터 예상은 했는데, 역시나 가디스R의 뮤직비디오였다.
“네.”
“사인해주세요.”
지체없이 노트를 들이밀며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동기에게 단유가 물었다.
“왜요?”
“어, 유명인이시잖아요? 저 유명한 사람 처음 보거든요. 사실 제가 지방에 있다가 와서요, 서울에서는 연예인도 많이 만난다고 하던데, 형처럼 유명한 사람은 처음 보거든요. 아, 혹시 예의에 어긋나는 일인가요?”
악의 없는 동기의 대답에 단유는 물끄러미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다 주위를 슬쩍 둘러보았다. 다음은 내 차례, 라고 노트를 들고 있는 모습에 단유는 이마를 짚었다.
“저 유명한 사람 아니에요.”
“왜요? 뮤직비디오에도 나오고 노래도 내셨잖아요? 리모트요. 저 그 노래 되게 좋아했어요. 중학교 때요. 핸드폰에 집어넣고 계속 들었거든요. 원곡보다 더 많이 들었어요.”
처음 받아보는 리액션에 단유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팬이에요!”
반짝이는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
사인이 없다는 말로 자리를 피했는데, 다음 강의도 동기와 함께였다.
“이름이 뭐예요?”
“강새벽이에요, 형.”
경북 김천에서 올라왔다는 새벽은 자기 살았던 곳은 서울에 비하면 촌이나 다름없다며, 자신의 고향을 디스했다.
“디스가 아니라 진짜 별거 없다니까요.”
서울에 올라온 지 이제 겨우 2달밖에 되지 않았다며, 기숙사에 들어가진 못하고 낙성대역 근처에서 자취방을 얻었다고 묻지도 않은 말을 털어놓았다.
단유로서는 정확히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새벽은 뭔가 모르게 들뜬 얼굴로 단유 옆에서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단유가 한마디 하면 맞장구를 치며 열 마디로 대답하는, 소년 같은 청년이었다.
‘청년, 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어린 티가 많이 나긴 하지만.’
새벽은 서울에 올라오면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영화관을 가고, 한 달에 한 번은 뮤지컬이나 연극을 관람하고, 콘서트장 같은 곳도 가보려고 했다고 말했다.
“김천에 극장이 없어?”
“에이, 그럴 리가요. 극장은 있는데요. 고등학교 다닐 때는 공부하느라고 보고 싶은 영화도 제대로 못 보고 그랬잖아요. 그래서 이제 마음껏 보러 다니려고요.”
그래서 지난 두 달간 무슨 영화를 봤었냐고 물었더니, 아직 본 영화가 없다고 대답하는 새벽이었다.
“왜 못 봤는데?”
“돈이 없어서요.”
용돈을 받긴 하는데 그 용돈으로 영화를 보려니 충분치가 않더라는 이야기와 함께, 과외나 아르바이트를 해 볼까 생각 중이라면서, ‘명색이 서울대생’인데 아르바이트는 어떻게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 주말에는 인근 지역을 돌아다니며 아르바이트를 찾는 중이라는 대답이 이어졌다.
어쩐지 하은 선생님에게 소개해 주면, 종일 떠들어도 끝이 나지 않을 호적수가 되리라 생각하며 단유는 고개를 돌렸다. 다행인 점은 교수님이 들어오면 수다 모드가 꺼지고 열공 모드가 켜진다는 점이었다. 만약 수업 중에도 수다 본능을 이겨내지 못하는 학생이었다면, 얼굴을 굳히고 접근 금지를 요구했을지도 모르겠다.
“형! 같이 점심 먹어요.”
어쨌든 이 일로 단유에게 밥친구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