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거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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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의 일상은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새벽에 일어나 운동을 하는 것도 똑같았고, 방에 틀어박혀 책을 파고드는 것도 똑같았다. 학교나 직장을 나가지 않으니 거의 집 안에서만 지냈고, 이제는 늙어서 기운도 없는 호빵을 옆에 끼고 소파에 앉아 책을 읽으며 유유자적하는 단유였다.
“부럽다. 내가 바랬던 삶이 바로 이 모습이었는데.”
점심을 함께 먹은 뒤, 집을 나서던 하은이 말했다. 단유는 스웨터에 붙은 보풀을 떼어내며 인사했다.
“잘 다녀오세요.”
“그래.”
단유가 돌아온 뒤 보였던 하은의 발랄함은 여름밤 하늘의 폭죽처럼 사그라들었다. 일상의 권태로움은 그 무엇으로도 이길 수 없는 강적과도 같았다.
하은이 나가고 나면, 단유는 호빵을 소파 위에 올려두고 청소를 시작했다. 단유가 온 뒤 가장 큰 변화는 사실 이 점이다. 하은이 게으른 성격은 아니지만, 그래도 혼자서 넓은 집을 청소하기에는 벅찬 게 사실이니까. 하지만 단유는 먼지 하나 용서치 않겠다는 결벽증 같은 청결도를 보였고, 늘 정돈된 집안은 마치 모델하우스를 보는 기분이었다.
청소가 끝나면 다시 호빵을 끼고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예전처럼 책상에 앉아 공부하기보다는 소파에서 반쯤 누운 상태로 책을 펼쳐 보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호빵은 단유의 배 위에 올라타 몸을 웅크리고 거실 창으로 들어오는 따뜻한 햇볕을 쬐며 낮잠을 자고, 단유는 모아뒀던 책들을 옆에 쌓아두고 마치 만화책을 보듯 읽어나갔다.
지금 단유가 읽고 있는 책은 ‘중력파’에 관련된 서적으로 ‘신카이 히사아키’라는 일본 오사카 공대의 교수가 썼는데, 얼마 전 회사로부터 받은 책이었다. 비록 단유가 의뢰를 받은 책은 아니지만, 단유가 이쪽 분야의 서적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던 상곤이 챙겨준 책이었다.
이 분야에 대한 관심은 사실 오래전부터 있었다. 정확히는 단유가 ‘공간 이동’을 재현하기 위해 공부를 하면서부터였다. 단유는 어느 날 갑자기 공간을 자유자재로 이동할 수 있었고, 어느 날 갑자기 그 능력을 잃었다. 아예 몰랐다면 모를까, 가능하다는 것을 체험한 단유로선 그 능력을 재현할 방법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마법이란 초현실적 능력이 아무리 초과학적인 영역이라해도 그 바탕은 철저하게 세계와 사물에 대한 본질의 탐구와 숙려(熟慮)에 기반하기에 지식의 습득과 연구는 필수다. 확장하면, 공간 이동이라는 이능(異能) 역시 충분한 지식과 연구만 있다면 얼마든지 구현 가능한 마법계 능력이라는 것을 단유는 믿었다.
그러나 ‘공간 이동’은 쉽게 이루기 힘든 마법이었다. 그에 관련된 지식을 얻으려 해도 당시 단유가 접근할 수 있는 정보가 한정되어 있었고, 현실적으로도 그 연구에만 매달릴 수 없었던 일들―학업이라든가―이 있었다. 특히나 ‘공간’이라는 주제에 한정해서도 단유가 얻어야만 하는 지식의 양이나 깊이가 가볍지 않아서 단시간에 이루기 힘들다는 것을 파악한 단유는 눈을 돌리기로 결정했다. 그가 배우고 익혀야 할 지식들이 많은데 한 가지에만 몰두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라는 계산 때문이었다. 덕분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몇 년 후 단유는 ‘환상 마법’이라는 새로운 영역에 한 발 디딜 수 있었다.
환상 마법은 지금까지 단유가 사용했던 마법 중 가장 유용하게 써먹은 마법 중 하나였고 여러 사람들이 그 혜택(?)을 누렸다. 하지만 환상 마법의 최대 수혜자라고 하면, 단유는 호빵이 아닐까 생각했다.
“킁.”
마치 단유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콧방귀를 뀌며 눈을 뜬 호빵이 단유의 배에서 내려왔다. 느릿한 걸음으로 급수기를 향해 가더니 꼭지 아래를 혀로 할짝댔다. 충분히 물을 보충했는지 호빵이 다시 단유에게로 돌아왔다. 그리고 소파에 앉은 단유를 바라보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심심하다는 뜻이리라.
단유는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앞뒤로 까닥였다. 곧 거실에 노랗고 빨간 공들이 통통 튀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호빵은 익숙하게 공들을 향해 쫓아갔다. 지금까지 느리게 걸었던 이유가 마치 이 순간을 위해 체력을 보전하고 있었던 것이라는 듯 달리고 뛰고 굴렀다. 공을 물거나 발로 잡으면 꽃잎이 날리듯 흩어져 사라졌다. 그리고 다른 곳에 또 다른 공이 생겼다. 그러면 호빵은 다시 공을 향해 달려갔다. 좁은 거실 안에서 뽈뽈거리며 뛰어다니는 호빵은 너무 신이 나서 어쩔 줄 모르겠다고 꼬리를 힘차게 흔들었다.
어느새 거실에는 여러 개의 공들이 바닥과 벽을 오가며 돌아다녔고, 그 사이 각양각색의 나비들이 폴폴 거리며 날아다녔다.
단유는 그 와중에도 편안한 자세로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여유로운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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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고 느껴질 무렵, 모든 고3들이 두려워하며 기다리던 그 날이 왔다. 단유는 두 번째로 맞이하는 날이었지만, 역시나 두려움은 없었다. 학교 다닐 때보다 여유로운 나날들을 보내면서도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었던 탓인지, 시험 준비는 어렵지 않았다.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은 주변 사람들의 몫이었다.
“같이 가야 하지 않겠어?”
하은은 충혈된 눈동자를 하고 단유에게 물었다.
“저보다 선생님이 더 걱정이네요. 잠 못 주무셨어요?”
“어떻게 편히 잠을 자겠어?”
“저 못 믿어요?”
“세상에. 내가 너를 못 믿는다고 하면 도대체 누굴 믿을 수 있겠어? 당연히 널 믿지. 믿는 건 믿는 건데, 그렇다고 걱정이 되지 않는 건 아니잖아. 물론 니가 똑똑하고 공부 잘하는 아이란 건 알지만, 그래도 학원 같은 거 안 다니고 독학만으로 준비하는 건 좀 어렵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안 할 수 없는 거지. 게다가 그날 하루의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아무리 똑똑해도 망칠 수 있는 게 시험이잖니.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저 조금 전에도 운동하고 온 걸요.”
“그래, 확실히 몇 달 전보다 훨씬 보기 좋아진 얼굴이라서 안심은 된다만. 그래도 요 며칠, 날도 춥던데, 혹시라도 감기 같은 거 걸린 건 아니지? 감기약 같은 비상약이 집에 있던가?”
“저 감기 안 걸렸어요.”
“아, 그래? 아, 내가 감긴가 보다. 괜히 몸이 으슬으슬하네.”
“코도 빨개요.”
“아, 그렇구나. 야, 그럼 너 좀 떨어져라. 혹시 감기 옮으면 큰일 나. 지금은 아무렇지 않을지 몰라도 갑자기 시험 중에 열나고 머리 아프고 그러면 큰일이잖아. 목도리랑 마스크는 꼭 하고 가고. 목도리는 있지? 없나? 내 거 줄까?”
“방에 있을 거예요. 챙겨 갈게요.”
“또 뭐 챙길 거 없어? 책이랑 노트, 뭐 이런 건 필요 없나? 펜은? 연필이랑 지우개 같은 것도 챙겼어? 아, 점심은? 사 먹을 거니? 돈 있어? 잠깐, 내 지갑이 어딨더라?”
허둥대는 하은을 붙잡았다.
“괜찮아요. 다 준비했어요. 그리고 열이 좀 있는 것 같은데, 주무세요.”
“아냐, 아냐. 괜찮아. 그럼, 진짜 나 안 따라가도 되겠어?”
“저 잘 치고 올게요. 그리고 저녁때 학원으로 갈게요.”
단유는 오랜만에 정신없이 쏟아내는 하은을 안심시킨 후 집을 나섰다.
3년이나 지났지만, 고사장의 분위기는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여전히 날은 추웠고, 고사장 정문 주위에는 수험생들을 응원하러 온 후배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서 있다가 학교 선배들이 나타나면 큰 목소리로 응원의 목소리를 보내고 따뜻한 차를 건넸다. 가끔 사복을 입고 나타난 학생들도 선생님들이 알아보고 손짓을 하면, 후배들이 달려가 선배들의 손에 준비한 티슈와 간식을 쥐여주었다.
교실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학교 아이들끼리 모여서 수군대거나 혹은 몸을 웅크리고 책상에 엎드려 있거나, 또는 입술을 달싹거리면서 노트를 암기하는 아이들의 풍경은 그대로였다. 엄숙함과 긴장감이 뒤섞인 공기가 수험생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와중에, 중간자리인 단유는 한 손으로 턱을 받친 자세로 칠판 위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고등학생일 때보다 머리가 길어서 재수생이라는 게 티가 나는지, 아니면 가방도 없이 나타나 책상 위에 펜 두 자루만 올려놓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어선지 주변 아이들의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단유는 아랑곳하지 않고 시계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 때문에 어떤 아이들은 ‘저 시계에 뭐라도 있나’ 싶어서 눈을 살짝 좁히며 시계를 바라보기도 했다. 물론 그 시계는 평범한 시계일 뿐이어서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시험 포기한 사람인가?’
무려 수능인데 저렇게 여유로운 자세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째깍거리며 지나가는 시계를 보니 무수한 단상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처음 만들어보았던 목제 시계의 시제품도 떠오르고, 시계탑의 분침이 덜컥거리며 움직이던 광경을 바라보던 기억도 떠올랐다. ‘공간’의 영역이 ‘시간’의 영역과 분리될 수 없는 ‘차원’계임을 인지했던 순간의 기억도 떠오르고, 이곳과 ‘저곳’의 시간 왜곡을 처음 깨달았을 때의 충격도 떠올랐다.
다른 장소지만 같은 장소인 ‘교실’에서, 3년이 흘렀지만, 그때와 똑같은 시각에, ‘수능’이라는 시험을 반복하는 행위에 대해 잠시 고찰하기도 했다.
사실 일상에서도 이와 같은 일은 반복되고 있다. 매일 매일 다른 하루지만, 같은 시간에 일어나 출근하고, 어제와 같은 공간에서 어제와 같은 일을 하며, 하루를 반복한다. 그리고 어제와 분명히 다른 내용의 TV를 오늘도 똑같이 바라보다 잠이 드는 하루를 사람들은 반복한다. 하은이 가끔 토로하는 권태는 이런 반복에서 오는 것일 테다.
물론 매일 수능을 보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은 일생에 단 한 번만 경험하는 이벤트일 테니, 일상과 비교하는 것은 억지스럽긴 하다.
‘상상은 자유지.’
딱히 수능에 목을 매는 것도 아니고, 필요성을 전혀 못 느낀다, 까지는 아니지만 인생의 전환점, 정도로 중요성을 느끼지도 않으니 긴장도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몇몇 사람들처럼 엎드려 잠을 자는 척을 하고 싶지도 않아, 그냥 시계를 바라보며 시간을 때울 단상(斷想)들을 조각(彫刻)하거나 조합(調合)해 볼 뿐이다.
그리고 이런 단상에서 혹시라도 좋은 아이디어를 얻는다면, 그것 또한 이득이다. 여행하는 동안 얻은 노하우라고도 할 수 있다.
시험이 시작된 뒤에는 생각을 잠시 묻어두고 시험에 집중했다. 3년이 지났지만,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그동안 교육 개혁이라도 일어나서 갑자기 수학 시험에서 전단사함수가 튀어나온다거나, 과학에서 열 물리(Thermal Physics) 문제가 나오는 게 아닌 이상은 말이다.
그리고 그런 난이도라면 단유가 어려워할 게 전혀 없었다.
그해 수능에서 단유는 또다시 최상위 점수를 얻었다.
“아깝다. 혹시나 이번에도 만점 받나 했는데.”
명수의 말에 단유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만점 받아 뭣하게.”
“너 혹시 일부러 틀린 거야?”
“그건 더 어이없는 소리지. 뭐하러 일부러 틀려.”
“그럼 진짜 못 풀었다는 소리야?”
굳이 따지면, 못 푼 게 맞았다. 지문과 문제가 서로 다른 답을 묻는 외국어 영역 문제나, 문제 자체에 오류가 있어서 어떤 답을 써도 틀리게 되는 문제 같은 건 무슨 용을 써도 맞출 수 없었으니까.
“그런 면에서 보면, 오히려 3년 전의 내가 미숙했던 거야.”
그 당시에도 그런 문제가 있었는데, 그때는 그런 문제를 푸는 게 익숙해져 버렸던 단유였고, 그래서 맞출 수 있었다.
“그럼 그거 뭐야, 그 뭐 신고하는 거 있잖아?”
명수는 단어가 정확히 생각나지 않는다는 듯 더듬거리며 말했지만 단유는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이의신청?”
“그래, 그거. 그거 해야 하는 거 아냐?”
아직 신청 기간이 아니라서 하진 않았지만, 단유는 아직 이의신청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결정하지 못했다. 틀린 건 틀렸다고 말해야 하지만, 굳이 자신이 나서서 가르치듯 떠벌릴 필요가 있을까 싶은 생각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 외에도 이의신청을 할 사람은 수백, 수천 명일 테니 단유가 한들 티도 나지 않겠지만 말이다.
“근데 너 이러고 있어도 돼?”
“가야지.”
명수는 무릎을 짚으며 일어섰다. 이제 K리그 클래식 마지막 라운드가 시작될 예정이었다. 명수네 팀인 서울 유나이티드는 작년 챌린지에서 승급하여 올해 클래식 라운드에서 놀라운 성과를 이룬 팀이었다. 명수의 덕, 이라고 표현하면 조금 과장이지만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는 정도여서 많은 사람에게서 기대를 받는 중이었다.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오늘 경기 잘해라.”
“당연하지. 오늘 너를 위해서 해트 트릭 한다.”
“야, 그걸 왜 나를 위해서 하냐? 네 여자친구를 위해서 한다고 해야지.”
“그야, 상미한테는 당연히 그렇게 말해놨지.”
“박쥐 같은 놈.”
단유는 명수의 등을 찰싹 때려주었다. 명수는 히죽 웃으며 손을 흔들고 대기실로 뛰어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 단유도 돌아섰다. 이제 관중석에 가서 친구의 활약을 지켜볼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