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570화 (570/956)

3년 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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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빛이 도는 세련된 헤어스타일을 한 승현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반갑다.”

마치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불알친구를 만난다는 듯 승현은 반가움을 가득 담은 미소를 지으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아무렇게나 걷어 올린 것 같은 소매 아래로 멋들어진 팔찌들이 길고 하얀 손목을 감싸고 있었다.

단유는 승현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반갑다.”

건넨 손을 붙잡지는 않았다. 악수를 거절한 단유의 행동에 살짝 머쓱한 표정을 짓던 승현은 이내 표정을 고치고 그의 왼쪽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여성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 여긴 고등학교 동창. 3년 만에 처음 만나는 건데, 이런 데서 다 보네.”

단유를 소개하는 승현의 말에 여성은 건성으로 고개를 까닥였다. 그 와중에 단유의 위아래를 훑던 여성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승현에게 물었다.

“엄청 친한 친구였나 봐?”

비꼬는 듯한 그녀의 말투는 단유의 행색이 초라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승현의 악수를 거절한 태도 때문에 불쾌했기 때문일까. 물론 단유는 별로 상관없었다. 남이니까.

“아, 뭐.”

친하냐고 물으면 딱히 할 말은 없다. 승현이야 단유를 오랫동안 봐왔다지만, 정식으로 대면한 것은 고작 두어 번이었으니까. 그 사실을 깨달으니 단유가 자신의 악수를 거절한 이유도 그런 친밀감의 온도 차 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승현은 다시 단유에게로 고개를 돌리고는 물었다.

“잘 지내냐?”

참 실속 없는 질문이다. 악수하고 반가운 척을 할 사이도 아닐뿐더러, 서로의 안부를 묻고 대화를 나눌 사이도 아니다. 단유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승현은 아닌가 보다.

“애들이 너 되게 궁금해하더라. 아, 맞다. 얘가 있잖아, 우리 수능 쳤을 때, 전국 1등이었거든.”

“전국 1등?”

여자가 놀란 듯 단유를 바라보았다. ‘전교 1등’만 해도 탄성이 나올 수식어건만, 수십만의 아이들 중 한 명만이 들을 수 있는 ‘전국 1등’은 결코 쉽게 듣기 힘든 수식어였다.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다시 단유를 바라보았다.

머리는 최근에 다듬었는지 깔끔한 편이지만 딱히 멋을 낸 스타일은 아니었다. 얼굴은 마른 편이었는데, 가만 보니 뭔가 색다르게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특히 렌즈를 낀 것처럼 새까만 눈동자는 어딘지 이질감을 느끼게 하였다.

하지만 단유의 인상이 별로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던 것은 그가 입고 있는 옷 때문이었다. 비록 시기상 여름이 다 지났다고 해도 아직까지는 더운 편인데, 눈앞의 남자는 언제 씻었는지도 모를 허름한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안에 받쳐 입은 하얀 티셔츠도 어쩐지 오래도록 세탁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낡은 티가 팍팍 나는 바지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전교, 아니 전국 1등이라고 하니 갑자기 사람이 달라 보인다.

“그럼 서울 대학교 다니세요?”

여자가 단유에게 처음으로 건넨 말이었다. 하지만 대답은 승현이 대신했다.

“아니. 얘 대학 안 갔어.”

“응?”

“그 일로 우리 학교 완전히 발칵 뒤집혔잖아. 학교 정문에 ‘전국 1등’ 이렇게 써서 플래카드를 걸려고 했었는데, 얘가 대학 안 간다고 해서는 난리가 났었지.”

그때 생각이 난다는 듯, 키득거리는 승현의 말에 여자는 혼란스럽다는 눈으로 단유와 승현을 번갈아 보았다. 그런 여자의 모습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웃음을 흘리며 승현이 물었다.

“그때 너 교장실에도 불려가고 그러지 않았냐?”

“잘 아네.”

단유의 무덤덤한 대답에 승현은 신이 나서 계속 이야기했다.

“우리 학년에서 되게 유명한 이야기였어. 기자들이 우리 학교에 찾아오기도 했다더라고. 우리가 졸업하고 나서도 학교에 찾아와서 왜 그 학생은 대학에 가질 않았습니까, 라고 묻기도 하고, 심지어는 학교에 어떤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의심 때문에 조사가 들어오기도 했다더라고.”

마치 자신이 단유를 얼마나 잘 아는지 말하고 싶어 안달 난 사람처럼 승현은 떠들었다.

단유는 잠시 눈을 돌려 주변을 살폈다. 길 가던 사람들이 길 가운데에 우두커니 서 있는 자기들을 힐끔 살피며 지나가는 모습들이 보였다. 심하게 반가워하는 승현과 대조적으로 침착해 보이는 단유의 대비가 아무래도 눈에 띄는 모양이다. 하지만 승현은 그런 눈치를 못 챘는지 여전히 자기 이야기에 신이 나서 떠들었다.

“아무튼 그 뒤로 연락이 전혀 없어서 애들도 너 되게 궁금해하더라고. 그런데 이런 데서 이렇게 보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그치?”

왜 저렇게 신이 난 걸까?

“아무튼,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

말이 길어질 분위기를 느꼈는지 여자가 승현의 팔을 살짝 잡아당겼다.

“응? 왜?”

여자는 핸드폰을 들어 시계를 보여주었다.

“아, 그래. 알았어. 단유야, 전화번호 좀 가르쳐줘라. 우리가 지금은 약속이 있어서 그렇고, 내가 나중에 연락할게. 밥 한번 먹자.”

승현은 웃는 얼굴로 단유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이번에도 단유가 멀뚱히 서 있자, 승현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그러나 역시 이번에도 금세 표정 관리를 하며 핸드폰을 집어넣고는 지갑을 꺼내더니 명함을 한 장 꺼냈다.

“혹시 그러면 이거 받고, 나중에 연락 한번 해. 내가 밥 사줄게.”

승현은 단유의 손에 억지로 명함을 쥐여준 뒤, 윙크를 했다.

“꼭 연락해라.”

손을 흔들어 보인 뒤, 여자의 어깨를 감싸 안고는 인파 속으로 사라져갔다.

“오빠, 저 사람 진짜 전국 1등이야? 수능 점수로?”

“그렇다니까.”

“그런데···.”

승현은 여자의 뒷말을 짐작한다는 듯 진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받았다.

“고아야.”

“고아?”

“응. 그 때문인지 사교성도 좀 부족하고 그래. 그래서 고등학교 때도 친구가 없었거든. 한번은 친구들이랑 시비가 붙었는데, 어쩔 줄 몰라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중재해서 싸움이 일어날 뻔한 걸 막아주기도 했지.”

“키는 큰데 힘은 없나 봐?”

“그게, 고등학교 때는 그래도 덩치도 좀 있는 편이었는데 지금 보니까 좀 불쌍하게 변했나 보다. 먹을 것도 못 챙겨 먹는 눈치 같고.”

“얼굴이 좀, 그렇더라. 비쩍 마른 얼굴에다 눈은 좀···.”

“눈빛이 그렇지?”

“응. 되게 어두운 사람 같아.”

“없이 살아서 그럴 거야. 솔직히 아까 내가 핸드폰 번호 물어봤을 때, 걔가 가만히 있었잖아? 그때 내가 실수를 한 거지.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르는데 번호를 물으니까, 자존심 상할 수도 있겠다 싶었거든.”

“핸드폰 없는 사람이 있겠어?”

“있을 수도 있지. 너무 가난해서 한 달 요금도 버거워서 핸드폰 마련 못 하는 사람이 있지 않겠어?”

“불쌍한 사람이네?”

“불쌍하지. 같이 놀아줄 친구도 없으니까 맨날 책만 보는 거지. 그런데 또 저런 애들이 악바리 근성, 뭐 그런 거 있잖아? 그래서 전국 1등까지 한 게 아닐까 싶어.”

“그런데 대학은 왜 안 갔대? 돈이 없어서?”

“그럴지도 모르지. 그런데 생각해봐. 전국 1등 정도면 대학에 장학금 받고 들어갈 수도 있지 않았겠어? 그런데도 왜 대학을 가지 않았을까? 돈 때문만은 아닌 거지.”

“그럼?”

“나도 모르지. 갑자기 대학 안 가겠다고 배짱부리면서 원서도 안 넣었다고 하니까. 성격 문제일 수도 있고, 돈 문제일 수도 있고.”

“오빠는 학교 다닐 때 쟤랑 친했어?”

“야, 쟤가 뭐냐, 쟤가. 그래도 나랑 친군데.”

“어쨌든.”

“그래, 뭐. 별로 친한 건 아니고, 내가 좀···뒤에서 봐주는 편이랄까?”

“오빤 그때도 되게 착했구나? 불쌍한 사람 보면 막 보살펴주고 싶고 그랬어?”

“조금 그런 게 있는데, 내가 무슨 성인군자도 아니고 다 도와주겠냐? 그냥 눈에 밟히길래, 조금 도와준 거지.”

“오빠, 난 오빠가 착한 사람이라서 좋긴 한데, 그렇게 살면 언젠가는 뒤통수 맞을지도 몰라. 세상에 나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아까 그 사람도 오빠 배경보고 한 번 비벼보려고 전화할지도 모르잖아? 속이 시꺼먼 사람일지도 모르는데, 동창이라고 다 받아주고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에이, 그래도 내가 지를 얼마나 도와줬는데 뒤통수를 치겠어?”

“어머, 이 오빠 진짜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 하네? 그러다 큰일 당한다고. 오빤 적당히 사람들을 경계할 줄도 알고 그래야 돼. 에휴, 이러니까 내가 오빠 옆에서 오빨 지켜줘야 하는 거야.”

“그래, 알아. 나도 그래서 니가 고마워.”

“고마우면, 고맙다고 티 좀 팍팍 내줘. 섭섭하지 않게.”

“알았어. 뭐 필요한데? 갖고 싶은 거 이야기해. 내가 다 사줄게.”

“정말?”

알콩달콩 커플은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단유는 마침 정류장에 도착한 버스에 올라탔다. 올라타는 사람들 때문에 밀리고 밀려 뒷자리까지 간 단유는 긴 팔을 뻗어 손잡이를 붙잡았다. 차가 출발하며 잠시 덜컹거렸지만, 단유는 흔들림 없이 서서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마침 코너를 지나 어느 가게로 들어가는 승현 커플이 보였다. 단유는 호주머니에 찔러 넣었던 명함을 꺼내보았다.

무슨 국회의원 공보담당 인턴 김승현이라고 적힌 명함이었다. 주변에 쓰레기통이 있었다면 버릴 텐데 정류장 근처에 쓰레기통이 없었다. 쓰레기를 길에 함부로 버리면 안 된다.

만약 시내 환경 미화를 위해서라면 더 많은 쓰레기통을 설치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 보는 단유였다. 물론 쓰레기통이 많으면, 그것을 관리 유지하는 비용과 인력이 많이 소요될 테니 무작정 늘릴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길에 쓰레기가 버려짐으로서 생기는 처리 비용을 고려하면 쓰레기통이 있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특히 사람들의 통행이 많은 곳이라면 비용보다 미화를 좀 더 신경 쓰는 게 옳지 않을까?

생각을 좀 더 확장해보면,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쓰레기는 더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사람을 줄일 수는 없으니, 사람들의 의식을 개선할 교육이 더 많이 필요하겠다.

쓰레기와 사회 환경 미화의 관계를 고심하다 보니 어느새 내릴 때가 되었다. 다음에 또 이에 대해 생각할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자칫 지루할 뻔했던 시간을 알차게 사용한 것 같아 썩 나쁘지는 않았다.

****

주말에 하은과 함께 시내로 나왔다. 단유는 그럴 필요 없다고 항변했지만, 하은은 꼭 사야겠다며 그를 데리고 백화점으로 갔다.

“그동안 이런 일이 있을까 봐 내가 부지런히 저축했었나 보다.”

단유의 예전 옷들은, 애초에 많지도 않았지만, 단유에게 맞지도 않아서 새 옷들을 살 필요가 있었다. 지금 단유가 입고 있는 옷도 여행 중에 산 옷이었는데, 허구한 날 같은 옷만 입고 다닌다는 걸 깨달은 하은이 억지로 단유의 손목을 잡고 끌었다.

“저도 돈 있어요.”

“네 돈으로 옷을 사 입을 생각을 하지 않으니까, 이렇게 억지로라도 데리고 나온 거야.”

“갖춰 입고 나갈 일도 별로 없는걸요.”

“그래도 옷은 있어야지.”

매장에 데리고 가서 이것저것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하은은 예전에 애들을 데리고 와서 옷을 사주던 기억이 떠올라 괜히 기분이 들떴다.

“이건 어떠니?”

“저만 사주면, 명수는요?”

“걔는 여자친구 있잖아.”

둘 다 단유에게 헤어졌다며 씩씩대며 성질을 내더니, 지금은 또 매일 통화를 하며 죽고 못 산다고 한다. 하은은 징글징글한 녀석들, 이라고 짧게 평했다.

“너 없는 동안에도 몇 번을 싸우고 헤어지고 만났는지 몰라. 그러고선 나한테 전화해서 어찌나 하소연을 해대는지.”

투덜대면서도 하은의 손은 병아리 감별사의 그것처럼 쉴새 없이 옷들을 들었다 놨다 바쁘게 움직였다.

“그리고 상미가 이런 데는 관심이 있는지 명수 옷은 잘 챙겨 주더라.”

단유는 멀찍이서 그저 하은을 바라만 보다가 하은이 손을 뻗으면 그녀의 손에 든 옷을 집어다 탈의실로 갔다가 나와서 품평을 듣는 일을 반복해야 했다. 그것은 꽤 피곤한 일이었지만, 동시에 즐거운 일이기도 했다. 몸은 힘들지만 하은이 신나 하는 모습을 보는 건 좋았다.

“너 혹시 키가 더 커진 거니?”

“음, 아마도요?”

“농구 선수 될 거 아니면 그만 커도 되겠다. 그리고 밥도 좀 팍팍 먹고. 도대체 무슨 여행을 했길래 얼굴에 살이 안 오른다니? 계속 굶고 다녔니?”

단유는 멋쩍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몇 시간의 쇼핑 끝에 두 손 가득히, 까지는 아니지만, 가을 내내 입고도 남을 옷들이 담긴 쇼핑백을 들고 백화점을 나올 수 있었다.

“겨울 오기 전에 한 번 더 오자.”

하은은 다음을 기약하며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고, 단유는 즐겁지만 고된 일을 마무리했다는 뿌듯한 표정을 지을 수 있었다.

“밥 먹고 들어갈까?”

“네.”

“뭐 먹고 싶은데?”

“선생님은요?”

“니가 먹고 싶은 거로 먹어.”

“음, 볶음밥 어때요?”

“···그냥 따라와라.”

하은은 단유를 데리고 고깃집을 데려갔다. 돼지 갈비를 푸짐히 시킨 뒤, 불판에 적당히 구워놓고선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그 사진을 명수에게 보냈다.

곧 명수에게서 ‘어떻게 자기만 빼고 그럴 수 있냐’며 징징대는 문자가 도착했고, 하은은 단유와 나란히 앉아 혀를 빼물고 놀리는 듯한 표정의 셀카를 찍어서 보냈다.

하지만 둘 다 명수가 그 사진을 보며 기분 좋게 미소 지으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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