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569화 (569/956)

3년 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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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었던 뒷머리가 싹뚝 잘려나가며 앉은 자리 아래가 긴 머리카락으로 쌓이고 있을 때, 단유는 나윤이 나온 프로가 대충 어떻게 흘러가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출연자들에게 어느 지역의 대표 음식을 먹게 하고, 그 음식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하는, 소위 먹방이라고 표현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생각해보니 나윤을 만날 때는 늘 식당을 갔었는데, 연습하며 소비하는 에너지에 비해 먹는 양이 늘 적었다.

“평소에 관리하지 않으면 안 되거든.”

그렇다고 아예 안 먹을 수는 없고, 먹어도 적게 먹어야 하니 나윤은 대신 맛있는 걸 먹고 싶어 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은 용인되지 않았다. 대부분 기획사 근처의 허름한 식당에서 빠르게 식사를 끝내야 했었기에 먹는 메뉴라곤 김치찌개, 혹은 된장찌개가 다였고, 가끔 연습을 쉬고 단유와 데이트를 한다는 명목으로 시내를 나가도 둘 다 돈이 없던 때라 먹는 데 많은 돈을 쓸 수가 없어 소박한 분식 메뉴 정도가 다였다.

“저건 먹기 힘들 텐데.”

미용사가 한마디 했다. 머리를 다듬는 손이 멈추지 않는 가운데, 언제 또 TV를 봤나 싶지만, 그렇다고 딱히 문제가 생기는 것 같지는 않아 단유는 입을 다물었다.

나윤이 먹을 음식은 홍어였다. 사실 단유도 먹어본 적은 없는 음식이라 그 맛을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발효 음식이고 자극적인 암모니아 냄새 때문에 쉽게 먹기 힘들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난 먹는 걸 구경만 해도 속이 울렁거려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미용사는 단유의 옆머리 커트를 마무리했다. 반대쪽은 아직 손대지 않아 비대칭인 단유의 헤어스타일을 거울을 통해 확인하더니 물었다.

“길이는 이 정도면 괜찮나요?”

“네.”

미용사는 귀 옆을 세심하게 정리한 후 반대편에 섰다.

“솔직히 저런 건 너무 심한 거 같아요. 홍어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텐데, 방송이라고 억지로 먹이고. 너무 가학적인 거 같아요.”

진심이 담긴 말이라 단유는 그녀를 흘깃 본 후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아 영상 속 인물들의 표정만 살필 뿐이었지만, 미용사의 말대로 나윤은 짐짓 먹기를 꺼리는 표정이 슬쩍 드러났다. 하지만 나타나기 무섭게 사라지며 남은 것은 아이돌스러운 표정이었다. 금방이라도 꿀이 쏟아질 것 같은 큰 눈, 이라는 자막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나윤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끝내 한 점을 집어 입에 넣었다. 곧 미간을 좁히며 찡그리는 표정을 짓는데, 그 표정이 웃기다고 다른 출연자들이 폭소하는 장면이 몇 컷에 걸쳐 교차로 연출되었다.

화면을 보느라 자기도 모르게 고개가 돌아갔던 모양인지, 미용사가 단유의 머리를 살짝 잡아주었다. 좌우의 균형을 확인하는지 거울을 보던 미용사가 다시 빗으로 머리를 넘긴 후 가위질을 시작했다.

“많이 좋아하시나 봐요?”

“네, 뭐.”

단유의 시원찮은 대답에 미용사가 넘겨짚었다.

“부끄러워하지 않으셔도 돼요. 요즘 아이돌 안 좋아하는 사람이 어딨다고 그래요? 사실 저도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이 있거든요. 원래는 별로 관심이 없다가 친구가 좋아하기 시작하면서 저한테 영업을 한 거거든요? 일 끝나고 집에 갈 때 심심해서 유튜브로 영상을 찾아봤는데, 한 번 보니까 계속 보게 되더라고요.”

어쩌면 모니터의 음향을 줄인 게 실내 음악을 조용히 감상할 수 있도록 한 게 아니라, 미용사가 손님들에게 건네는 수다를 잘 들어주라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아는 얼굴이기에 본 것이지, 딱히 감정이 있어서 본 것은 아니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 보듯 감정이 식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제는 정리된 관계이기에 별다른 감정이 들지 않았을 뿐이다. 더군다나 앞으로도 볼 일이 없을 것인데, 스토리도 모르는 예능 프로를 계속 보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미용사가 가위를 수납장에 놓으니, 옆에서 대기하던 보조 미용사가 다가와 단유를 세면대로 안내했다. 의자에 앉아 등을 기대고 누우니 능숙한 손길로 단유의 머리를 감겨주기 시작했다. 이런 서비스를 받아본 적이 없던 단유는 생소한 느낌을 받음과 동시에 편하고 기분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하지 않게 두피 마사지라며 머리를 꾹꾹 눌러줄 때는 시원하다는 표현이 절로 입에 오를 정도였다.

‘다음에 명수랑 같이 와봐야겠어.’

자신이 그렇듯, 명수도 이런 미용실에는 온 적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단유는 머리까지 말려주는 친절함에 반쯤 감동했다. 다만 커트 비용이 자신이 생각한 것 이상일 때는 ‘역시’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1년에 두어 번(?) 커트를 한다고 가정하면 이 정도 비용으로 이런 서비스를 받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

단유가 한국으로 돌아온 것은 가을이 시작되기 전이었다.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여행을 선택했을 때, 하은에게 약속했던 것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여행이 끝나면 대학, 꼭 갈게요.”

처음에는 굳이 대학을 갈 필요가 있냐는 생각이었고, 하은도 굳이 단유에게 대학을 가야 한다고 종용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대화를 나누는 중에 하은이 은근히 비친 생각은, 적어도 이 사회에서는 ‘대학’이라는 타이틀이 있는 게 좋다는 것이었고, 사소한 문제로 어려움을 겪질 않길 바라는 하은의 마음을 읽은 단유가 결정을 내렸다.

정말 ‘대학’이라는 타이틀이 자신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하지만 오랜 시간 자신과 명수의 행복과 안녕을 위해 헌신한 하은을 위해서라도 그 정도 ‘수고’는 해줄 수 있다는 생각이었고, 어쩌면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자신이 정말 궁금해하는 배움도 얻을 가능성을 고려했다.

이왕에 갈 거라면 굳이 시간 낭비할 필요가 있을까?

오랜만에 학교에 갔더니, 몇몇 선생님들을 빼곤 단유를 알아봤다. 3년 전, 무려 전국 1등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던 졸업생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 진학을 포기하는 기행을 저지른 괴짜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널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구나.”

3학년 때 담임이었던 선생님은 단유의 손을 꽉 붙잡고 흔들었다. 머쓱한 웃음으로 대답을 미룬 단유를 데리고 자리로 향한 선생님은 단유가 준비한 서류를 받아 챙기고 응시 원서를 작성케 하였다. 단유가 꼼꼼히 서류를 채워 넣는 동안 선생님이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고 물었다.

“여행을 했어요.”

“여행? 어디?”

“여기저기요.”

“세계 여행을 했다는 거니?”

“네.”

혹시 대학을 가지 않은 걸 후회하지 않냐, 고 묻고 싶었지만 선생님은 그 질문을 속으로 삭였다. 후회한들 이미 지난 마당에 무슨 소용일까. 그저 선생님 본인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물음에 지나지 않는 것을. 제자의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참는 게 도리, 라고 생각했다.

그 사이 단유가 서류 작성을 마쳤다. 선생님은 오랜만에 만난 기념으로 밥이라도 같이 하고 싶었지만, 원서 접수 기간이라 졸업생들이 계속 찾아오기도 했고, 단유도 약속이 있다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바람에 인사를 나눠야 했다.

“나중에 다시 한번 찾아와. 그때는 선생님이 밥 한 끼 쏠게.”

“시험 끝나고 찾아뵐게요.”

단유가 나간 뒤, 지켜보던 선생님 한 분이 다가왔다.

“이번에 시험 친대요?”

“그런가 보네요.”

“천재들은 괴짜가 많다더니, 딱 그 짝이네요. 공부는 많이 했대요?”

“세계 여행을 하다가 며칠 전에 들어왔다네요.”

“그래요? 그럼 제대로 공부를 안 했다는 말이잖아요? 그럼 지난번보다 더 점수가 낮을 수 있겠네요?”

그럴지도 모르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단유’이기에 혹시 모를 일이다. 물론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지난번과 같은 결과는 기대하기 어렵다.

“아마 서울대는 갈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무슨 과를 지원한대요?”

“거기까지는 이야기를 못 했네요.”

묻고 싶은 게 많았고, 그래서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지만 다음으로 미룬 상태다. 지금은 그저 천재성을 보였던 제자가 부디 그대로이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

오랜만에 돌아오니 할 게 많았다. 군대 간 채윤이를 보러 가고도 싶었는데 그러질 못하는 건 생각보다 할 일이 많은 탓이었다. 오전 중에 수능 원서 접수를 한 것도 그 중 한 가지였고, 이후 강남에 위치한 번역 회사를 찾아간 것도 한 가지였다.

“살이 빠졌나 보네?”

단유가 여행 간 것을 알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인 상곤은 단유와 악수를 나눈 뒤 마주 앉았다.

“다시 한국에서 지내는 거냐?”

“네.”

“견문은 많이 쌓았고?”

만족할 정도는 아니지만, 일단 지금은 충분하다고 여긴다는 단유의 말에 상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단유는 계속 번역일을 했다. 메일을 통해 일감을 받고, 다시 메일을 통해 번역본을 전달하였기에 다른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여행을 가기 전처럼 빡빡한 일정으로, 일 년에 3~4개씩 번역하던 작업을 1~2개 정도로 줄였다. 딱히 힘들어서라기보다는 여행이라는 목적에 좀 더 충실하기 위해 일하는 시간을 줄인 것이지만, 덕분에 쌓아뒀던 통장 잔고가 조금씩 줄어가고 있던 차였다.

상곤은 단유 앞에 책을 무더기로 내어놓았다.

“그동안 번역한 책들. 그리고 이건 이번에 진행할 거.”

‘번역-김단유’라고 적힌 책들을 한 권씩 살핀 단유는 상곤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챙겨 주셔서 고맙습니다.”

“당연한 건데 뭘. 그럼 이제 다시 예전처럼 일하는 거냐? 우리 대표님이 너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저를요?”

“니가 4개씩, 일을 맡아서 해줄 때 회사 입장에서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감수팀에서도 니가 맡은 작업물은 달리 손 볼 곳이 없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거든. 회사 입장에서는 짧은 시간에 많은 책을 번역할 수 있었으니 비용적인 측면에서도 확실히 이득이었고. 의뢰받은 출판사에게서도 신뢰가 높았단 말이지.”

“예전처럼 일해 보려고요. 돈도 필요하고요.”

“모아놓은 걸 다 쓴 거야? 여행하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이제 대학에 갈 거거든요. 대학 등록금도 필요하고 하니까 돈 벌어야죠.”

“정말 열심히구나.”

딱히 열심히, 라고 할 것도 없었다. 상곤이야 단유의 작업 속도에 매번 놀라움을 표했지만, 이제는 단유도 번역이란 일에 익숙해져서 예전보다 더 빨리 일을 처리할 자신이 있었다. 그럼에도 일감을 많이 받지 않는 건, 역시 자신만의 시간을 여유롭게 사용하고 싶다는 이유가 컸다.

상곤은 조그만 가방에 책을 담아주었다. 그리고 같이 식사라도 하겠냐고 제의했지만, 단유는 다음으로 미뤘다.

“아쉽네.”

“책은 빨리 번역해서 드릴게요.”

단유는 인사를 하고 회사를 나왔다. 어느새 해가 중천을 지나 서쪽으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며칠간 만나야 할 사람들, 처리해야 할 문제들을 해결하느라 시간을 많이 쏟았는데, 이제 겨우 정리가 끝이 났다. 주말에 강원도로 가서 군복무 중일 채윤을 만나러 가긴 하겠지만, 일단은 그때까지 집에서 편하게 책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수능이야 기억을 점검할 겸, 예상 문제집 몇 권 정도를 풀어보면 될 일이고, 이제부터는 오롯이 자신만을 위해, 속에 품고 다니던 포켓북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연구해볼 일만 남았다. 그리고 기대하건데, 그 정리가 끝나면 아마 단유는 새로운 마법을 손에 얻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 김단유 아냐?”

지하철을 타러 가던 도중, 누군가가 단유를 불렀다. 사람 많은 강남의 거리에서 단유를 알아보고 불러세울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 사람을 만날 확률은 또 얼마나 될까? 단유가 고개를 돌리니 하얀 셔츠를 멋들어지게 입고 있는 또래 사내가 히죽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야, 살이 너무 빠져서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는데, 눈빛은 여전하구나.”

우습게도 이 사람 많은 곳에서, 하필 만난 사람이 승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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