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567화 (567/956)

3년 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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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익

휘슬이 울리고 관중석에서 함성과 탄식이 터져 나왔다. 운동장에 선 선수들 중 어떤 이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 가슴 속에서 터져 나오는 울분을 참아내고 어떤 이는 주먹을 불끈 쥐고 환희에 가득 찬 함성을 질렀다. 어떤 이들은 서포터즈가 앉은 관중석을 향해 달려가 팬들과 함께 승리의 기쁨을 나누고, 어떤 이들은 지친 발걸음으로 선수대기실을 향해 걸어갔다.

90분간 선수들이 흘린 땀과 열기가 서린 운동장 한편에서는 경기 결과에 희비를 표하는 사람들과 다르게 분주한 움직임이 일었다.

“이쪽에서 대기해 주세요. 슛 들어갑니다.”

대답 대신 짧은 고갯짓으로 의사를 표현한 선수는, 거친 호흡을 정리하기 바쁘다는 듯 콧바람을 연신 내뿜고 있었다.

‘경기 내내 슛했는데, 또 슛이야?’

제 딴에는 재밌는 언어유희였는지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카메라 앞에 선 미모의 리포터로 향했다. 경기 결과를 짧게 브리핑하던 리포터는 피디의 손짓에 맞춰 멘트를 전했다.

“그럼 이쯤에서 오늘의 수훈 선수인 인명수 선수를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인명수 선수?”

리포터가 명수가 선 곳으로 한 걸음 다가오는 동시에 카메라 감독은 줌아웃을 하여 두 사람을 한 화면에 담았다.

“오늘 경기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보여서 오늘의 선수로 뽑히셨는데요, 소감이 어떠신가요?”

“아무래도 오늘 경기가 이번 시즌 1위로 올라가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경기였기 때문에 더 중요하게 생각했고요, 그래서 조금 부담은 있었는데 그래도 이길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요. 개인적인 기록은 부차적인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네, 그 이야기도 하려고 했는데, 마침내 서울 유나이티드가 1위에 올랐어요. 서울 FC의 독주를 막아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게 되었는데요, 여기서 인명수의 선수의 활약이 돋보였다는 평가도 있어요.”

“어, 그런 평가는 조금 부담스럽고요, 제가 잘했다기보다는 저희 팀 동료들이 열심히 뛰어주고 밀어준 덕분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축구는 팀 게임이고 저 혼자 잘한다고 해서 잘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겸손하신 말씀 같은데요, 지금 25라운드까지 인명수 선수가 득점 1위를 하고 계시거든요? 2위와도 5골의 격차가 있을 정도니까요. 그 비결이 뭔가요?”

“어, 사실 골은 역시 동료들의 패스가 주요한 거 같은데요, 특히 저희 팀 주장이신 이찬성 선수의 어시스트가 득점 비결인 것 같습니다.”

“동료들을 돌려서 뛰어주시는 말씀 같아요. 그리고 한편에서는 말이죠, 인명수 선수의 기본기와 체력이 다른 선수들에 비해 뛰어나다는 말도 있어요. 풀타임 출장도 팀 내에서 가장 많을 뿐만 아니라 한 경기 최고 이동 거리가 많은 선수로 뽑히기도 하더란 말이죠? 그런 체력도 역시 골의 비결이 아닐까 하는데, 어떤가요?”

“어, 그것도 맞는 거 같습니다.”

거듭된 칭찬에 얼굴을 붉히는 명수를 향해 마이크를 들이밀었던 리포터는 피디의 손짓에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그럼 이제 남은 라운드 어떻게 임하실 건지 각오 한 말씀 부탁드릴게요.”

“어, 일단 1위에 올라온 이상 이 자리를 지킬 수 있게 더 열심히 뛰겠고요, 저희 팀을 위해 항상 경기장에 찾아주시는 서포터즈 분들을 위해서라도 멋진 경기 보여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오늘의 선수로 뽑히신 인명수 선수와 함께했습니다. 다음으로 서울 유나이티드의 감독님과 인터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피디의 손짓에 따라 옆에 서 있던 감독님과 자리를 바꾼 명수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가 토해냈다. 그리고 선수 대기실로 향해 걸어가자 코치 한 명이 다가와 등을 두들겨 주었다.

“수고했다.”

“고맙습니다.”

“숨 쉬어.”

“네.”

명수는 히죽 웃으며 심호흡을 몇 번 했다. 처음 인터뷰를 할 때는 너무 거친 숨소리 때문에 엉망이 되기도 했었다. 앞으로 인터뷰할 일이 많아질지도 모른다며, 인터뷰할 때는 최대한 짧게 숨을 고르면서 말을 하는 습관을 기르라는 코치의 조언에 따랐더니, 그나마 듣기 좋은 인터뷰가 되긴 했지만 반대로 평소의 긴 호흡을 이어나가질 못하니 숨이 턱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인터뷰를 하다 보면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곤 했다.

“들어가서 씻고 나와.”

“네, 코치님.”

명수가 대기실로 들어서니 선수들이 명수에게 하이파이브를 건넸다.

“수고했어, 새끼야.”

“오늘 너 미친 줄 알았다.”

다들 나잇살 꽤 먹은 이들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냥 동네 개구쟁이들처럼 순박하게 웃으며 익살스럽게 명수의 머리를 헝클어뜨리거나 가슴을 툭툭 치며 그의 공로를 치하했다.

“고맙습니다.”

팀에 들어온 지는 3년이 넘었지만, 나이로는 거의 막내급인지라 명수는 고개를 꾸벅 숙여 가며 그들의 인사를 받았다.

“잘했다, 명수야.”

팀의 고참이자, 주장인 찬성이 명수에게 다가오더니 볼을 꼬집었다. 명수와 나이 차가 무려 10살이다 보니 명수를 마냥 어리게만 보는 찬성이었다.

“주장 덕분이죠.”

명수는 오늘 3골을 넣었고, 그중 찬성의 어시스트가 2개였다.

“짜식.”

찬성은 명수의 엉덩이를 툭툭 두드려준 뒤 샤워실로 들어갔다. 명수도 샤워하기 위해 로커에서 샤워 도구를 꺼내 들었다. 그러다 핸드폰이 눈에 들어와 무심코 집었다. 화면을 들여다보니 문자가 하나 와 있었다.

―오늘 수고했다.

명수는 발신자를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여보세요?”

수화기 건너편에서 뭐라고 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라커룸 안이 너무 시끄러워서 대화가 되질 않았다. 명수는 얼른 복도로 나왔다.

“여보세요?”

다시 물으니, 그제야 목소리가 들린다.

―수고했다고.

“야, 이···. 들어왔으면 들어왔다고 말을 할 것이지, 이게 뭐냐?”

―뭐긴 뭐야? 그냥 들어왔다고 생존 신고한 거지.

“2년 동안 연락 한 번 안 하다가 이제 와서 생존 신고?”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잖아.

“선생님한테 그 말 한번 해봐라.”

―그렇지 않아도 조금 전에 선생님한테 한 소리 들었어.

“벌써 했어?”

―솔직히 연락을 드리면 너보다 선생님한테 먼저 했을 거라고 생각해야 하지 않아?

“하긴···. 아, 그런데 오늘 내 경기는 본 거야?”

―봤으니까 수고했다고 말했지. 명수 너, 안 본 사이에 다시 멍청해진 거 아니지?

“말도 안···. 잠깐 무슨 소리야? 다시 멍청해지다니?”

―웃자고 한 소리야. 심각하게 듣지 마.

“넌 웃겨도 난 안 웃겨.”

―MVP씨, 기분 좋은 날인데 그냥 웃어.

“···안 본 사이에 너 성격 이상해진 거 같다?”

―내 성격이 왜?

“이렇게 농담을 하는 애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내가 농담을 했다고? 무슨 농담?

“방금 나보고 멍청···. 아 놔!”

웃음소리가 들려오자 한껏 과장되게 목소리를 높이던 명수도 피식, 하고 웃음을 흘렸다.

“어딘데?”

―아, 나? 여기 경기장.

“뭐? 여기 있다고?”

―너 경기 끝나고 바로 숙소로 가야 하지? 가면 보기 힘들 거 같아서 여기로 왔어. 씻고 나오면 잠깐 얼굴 보자.

“야! 왔으면 왔다고 말을 해야 할 거 아냐!”

―얼른 씻고 나와. 여기까지 땀 냄새 나는 거 같아.

“어딘데?”

―주차장. 기다리고 있을게.

“너 딱 기다려!”

명수는 얼른 전화를 끊고 샤워실로 뛰어들어갔다.

****

텀블러에 꽂아 넣은 빨대를 물고 음료수를 마신 후, 다시 마우스를 잡은 ‘군필 여고생’이 모니터에 시선을 둔 채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조금 더 전략적으로 진행해볼게요. A팀과 B팀으로 나눠서 플레이하고요, 브리핑 확실하게 하세요. 각자 수급한 무기들이 뭔지 이야기해주시고 적을 발견하면,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교전은 피해 주세요. 최대한 전투를 피하고 지형을 먼저 선점하는 쪽으로 가서 방어선을 펼치도록 하죠.”

‘군필 여고생’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흘러 들어갔다. 곧이어 쓰고 있던 헤드폰에서 화답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알겠습니다.

―먼저 에코 지역 가실 건가요?

“예. A팀 B팀 모두 에코로 가서 A는 오른쪽, B는 왼쪽으로 돌아갈게요.”

‘군필 여고생’의 오더에 따라 멤버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여고생이 보고 있는 모니터의 오른쪽에 놓여있던 또 다른 모니터에 띄워 놓은 창에서 채팅들이 주르륵 떠올랐다.

―군필 여고생님, 진짜 군필이심?

―혹시 여장교 출신?

―현역 아님?

―군필 여고생님은 여고생이십니다.

―또 한 번의 승리를 기원하며 후원합니다.

후원금이 들어왔다는 효과음에 ‘군필 여고생’이 슬쩍 창을 확인한 후, 감사 인사를 전했다.

“코코콩님, 1억 후원 감사합니다!”

보통 게임이 끝나고 결과에 후원이 나오는데, 게임 시작 전에, 그것도 만 원씩이나 후원을 준다는 건, 게임 결과에 따라 더 큰 후원이 뒤따를 수도 있다는 의미라 생각할 수 있다.

“빡겜 한 번 해볼게요.”

‘군필 여고생’이 필승을 다짐하며 키보드와 마우스를 조작했다.

“브라보 방향 300m 적 발견.”

처음의 오더대로 교전을 피하기 위해 팀은 엄폐 후 기다리기도 했고, 때로는 교전도 벌였다. 위험도 있었지만, 적절한 오더가 작은 승리를 맛볼 수 있게 해줬다.

―MP40에 탄약 110발 찾았어요.

‘군필 여고생’은 전략 무기 습득 보고를 받은 즉시, B팀에 무기 배치를 지시했다.

“이제 알파로 갑니다. 알파 영역 진입 후에는 A팀은 즉시 교전, B팀은 배후를 맡습니다.”

―콜.

몇 가지 위기 상황을 큰 어려움 없이 넘기고 차분히 앞으로 나아가는 ‘군필 여고생’을 향한 찬사가 채팅창을 도배했다.

‘이런 분위기라면 가볍게 1등 하겠는걸?’

‘군필 여고생’은 기분이 좋아지면서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긴장이 너무 풀리면 망칠 수도 있으니까, 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고 다시 눈에 힘을 줬다.

얼마 후, 적들을 해치우며 킬로그(Kill log)를 쌓던 ‘군필 여고생’ 팀은 1위를 목전에 두게 되었다. 그때 핸드폰에 불빛이 들어왔다. 무음으로 해놓아서 방송 마이크를 통해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어가지 않았지만, 혹시 중요한 연락이 올지도 몰라 모니터 아래쪽에 놔두었던 핸드폰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핸드폰 액정에는 문자가 도착했다는 메시지가 떠 있었다.

‘신경 쓰이네.’

하지만 일단은 게임을 마무리하는 게 중요하다고 여겨 잠시 틈이 생겼을 때 손을 뻗어 핸드폰을 엎어놓았다.

“북동쪽, 덤불 이어진 쪽에 적 있어요.”

―확인.

“혹시 모르니까 B팀은 동쪽 봐주시고, 야호님은 견제해주세요. 제가 도랑 타고 올라가서 양각 잡을게요.”

―둘이 올라가는 게 좋지 않아요?

“저쪽에서도 저희랑 비슷한 생각으로 언덕을 크게 돌아서 올 수 있어요. 저쪽에서 돌면 동쪽으로 완전히 빠져서 올 수 있으니까, 나올 때까지 확인할 수 없고 나오면 우리는 완전히 드러나는 지형이에요. 그러니까 제가 미리 위로 가서 한쪽을 자르고 난 뒤에 포위하는 게 좋아요.”

―오케이. 일단 그렇게 할게요.

“둠둠님, 혹시 저격 각 나오나요?”

―나오면 쏠게요.

“일단 그렇게 해주세요. 그럼 제가 올라가서 확인하고 신호 보낼게요.”

‘군필 여고생’이 조종하는 캐릭터가 웅크리기 자세로 슬금슬금 기어서 나아가기 시작했다. 틈틈이 방향을 전환하여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는 적은 없는지 확인하면서 나아가던 ‘군필 여고생’은 총소리와 동시에 피가 튀며 캐릭터 체력의 3분의 2가 사라지는 것을 확인과 동시에 엎드리기로 자세를 전환했다. 살짝 머리가 드러났을 때 리드 샷을 맞은 모양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위치 확인.

브리핑과 동시에 아군 지역에서 총소리가 들렸고, 곧이어 저격 담당인 ‘둠둠’의 킬로그가 모니터 한쪽에 떠올랐다.

“나이스 샷.”

―나이스.

팀원들이 화답하고 동시에 ‘군필 여고생’은 상황을 파악했다.

“왼쪽 없고요, 오른쪽 언덕으로 돌아가는 거 같아요. 동쪽 바위 부근 째주시고요, 둠둠님도 그쪽으로 가주세요. 야호님은 저랑 같이 올라가도 되겠어요.”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팀원들에 의해 곧 적들이 소탕되기 시작했고, 마침내 화면에 승리를 나타내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동시에 채팅창도 승리를 축하하는 메시지가 줄을 이었다.

그제야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팀원들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남기던 ‘군필 여고생’은 엎어두었던 전화 메시지를 확인해보았다.

―오랜만에 인사한다.

“이 새끼···.”

순간적으로 거친 말을 쏟을 뻔했던 ‘군필 여고생’은 방송 중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얼른 수습했다.

“죄송한데요, 저 이만 방종해야 할 것 같습니다.”

채팅창에서는 갑작스러운 방종에 무슨 일 있냐고 걱정하는 메시지와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방종이냐며 항의하는 메시지들이 뒤섞여 올라왔다. 그리고 가지 말라는 메시지와 함께 후원금이 들어오거나, 수고했다며 응원하는 메시지와 함께 후원금이 들어왔다.

“후원해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방종하게 돼서 죄송하고요, 나중에 오늘 못한 만큼 방송하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해요.”

‘군필 여고생’은 미안하다는 마음을 담아 사과를 한 뒤, 방송을 끝냈다. 그 후, ‘군필 여고생’은 핸드폰을 들고 통화를 시도했다.

―어.

“어? 어? 2년? 3년 만에 전화해서 한다는 소리가 어?”

―문자 보냈잖아.

“문자도 성의 없이 이따위로 보내놓고 나한테 좋은 소리 들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미안.

“···어딘데?”

―방금 명수 만나고 나서 집으로 가는 길.

“집이면, 선생님 계신 곳?”

―그 집 말고 다른 집 있어? 아, 너 명수랑 헤어졌다며?

“그 이야기는 또 어디서 들었는데? 명수가 그래?”

―어. 조금 전에 네 안부 물었더니 명수가 그러더라. 헤어졌다고.

“내가 찼어.”

―좀 봐주지 그랬어.

“봐주긴 뭘 봐줘. 됐고, 너 이리로 와라. 아니면 내가 갈까?”

―잠깐 시간 있으니까 보고 가지 뭐. 어디로 가면 돼? 예전 그 집 그대로야?

“아냐. 나 독립했어. 주소 찍어줄게.”

―알았어. 가서 다시 연락할게.

그렇게 통화를 마무리했다. ‘군필 여고생’, 아니 상미는 3년 만에 얼굴을 보게 된 친구와의 만남을 기대하며, 욕실로 들어갔다. 방송하는 동안에는 얼굴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어서 씻지도 않고 있던 참이었기에, 이렇게 만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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