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564화 (564/956)

콤플렉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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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지로 끌려온 데다 분위기가 급변하면서 떠나지도 못하고 자리에 눌러앉은 마당이다. 게다가 맞은 편에는 자신에게 수치감을 느끼게 했던 단유가 앉아 있고, 옆에는 불편한 시선을 계속 건네는 명수가 있으니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저 고개를 처박고 묵묵히 국수를 흡입할 뿐이다. 아쉬운 점은 동영이 기억하기로 이 집의 쌀국수가 맛있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그 맛을 전혀 느낄 새가 없다는 것이다. 오로지 빨리 먹고 빨리 자리를 떠나는 것만을 생각하며 젓가락을 놀렸다.

명수와 단유도 다르진 않았다. 걱정했던 큰 사고는 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거북하다는 티를 팍팍 내며 식사를 하는 동영을 곁에 두고 하하호호 할 수만은 없었다.

“쌀국수 좋아하는데.”

명수가 작은 목소리로 투덜대며 자기 몫을 마저 끝낼 따름이다.

문자 그대로 ‘조용히’ 식사를 마무리한 후, 동영은 인사도 없이 자리를 떠났다.

“쟤도 대단하다. 나 같으면 그냥 나갔을 거 같은데.”

단유는 잠시 동영이 사라진 쪽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일단 나가기 위해서는 너한테 다시 길을 비켜 달라고 말을 해야 했는데, 그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을 거야.”

“비켜 달라고 하면 되지.”

“얌전하게 말하는 성격은 아닌 거 같으니까.”

하지만 준프로선수에 비견되는 명수의 덩치와 얼굴(?)을 보고 동영도 함부로 말을 꺼내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아예 입을 닫고 단유가 권한 대로 식사를 했겠지.

“아무튼 고맙다.”

단유의 뜬금없는 인사에 명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니가 보라고 했던 책에서 도움을 받았거든.”

단유가 문학책 번역에 도움을 받기 위해 일반 서적이 아닌 문학 서적들을 찾아 탐독할 때, 명수가 지나가며 툭 건넨 책이 있었다.

“이 책 한 번 봐봐.”

명수가 가을 대회 이후 남는 시간 동안 찾아 읽던 판타지 책이었다. 중학생일 때도 명수가 보라고 권유해서 봤던 무협지가 있었는데, 솔직히 단유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어서 보다 말았던 기억이 있었다.

“내가 요즘 읽고 감동받은 책이야.”

읽는 척이나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명수의 성의를 받아들였고, 이후 그 책을 읽었다. 수권의 시리즈로 엮인 책이었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설정에 단유는 책을 내려놓고 말았다.

“이게 왜 생기는 거야?”

“뭐가?”

“이런 현상이 주인공에게만 생기는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읽다 보면 이유가 나오나?”

명수가 턱을 긁다가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몰라.”

“모르는데 궁금하지 않아?”

“아니, 별로.”

“왜?”

“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거 같은데, 이건 그냥 재미있자고 읽는 책이잖아. 너무 심각하게 따져가면서 읽지 마. 골 아파.”

“감동 받았다며?”

“감동이지? 기연을 얻긴 했지만, 성공하기 위해서 주인공도 나름 노력하잖아? 노력하지 않는 자에게는 복이 없나니.”

“뭐래.”

독서 취향의 차이라 생각하며 단유는 남은 책을 명수에게 돌려주었다.

물론 단유 나름대로는 그런 설정이 만들어진 것에 대한 심리를 추정해보긴 했다. 이를테면, 어렸을 적에 부모가 자녀에게 장난감을 사주었을 때의 그것과 비슷할 것이란 생각.

어린 여자아이에게 바비 인형을 사주면서 패션센스와 여자의 외모를 가꾸는 방법을 연구하라고 이야기하는 부모는 없다. 마찬가지로 남자아이에게 로봇 인형을 사주면서 로봇의 원리를 파악해서 후에 과학자가 될 수 있도록 해라, 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부모도 없다. 그건 그저 아이들에게 그 인형을 가지고 즐길 수 있도록, 그래서 덜 투정부리고 부모가 덜 간섭해도 되는 시간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보는 게 맞다.

이유 없이 등장한 ‘초능력’과 ‘상태창’ 같은 설정은 주인공과, 주인공에게 감정 이입한 독자에게 쥐여주는 장난감일 뿐이다.

그리고 이를 응용해서 단유는 승현에게 장난감을 쥐여주었다. 한시적이고, 실제 아무런 효과도 없는 착각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당분간은 그 장난감을 가지고 노느라 단유에게 신경을 덜 쓰지 않겠는가?

****

식당을 나간 승현이 향한 곳은 당장 책을 볼 수 있는 곳, 서점으로 갔다. 소규모 서점들은 자리를 잃어가는 추세라지만 이곳 서점은 나름 큰 편이고,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곳이었다. 사람들이 자주 오가는 통로에 우두커니 서서 책 한 권을 정독해서 볼 수는 없는 일이었고, 혹시라도 상태창에 변화가 생길 때 그 변화를 들키고 싶지 않아서 승현은 책을 샀다. 평소 직접 책을 사본 일이 거의 없었고, 문제집도 ‘친구’들이 사다 준 걸 썼기 때문에 서점에서 책을 산다는 게 여간 어색한 게 아니었다. 그래서 베스트셀러라고 적힌 책 3권을 아무렇게나 집었다.

“4만 2천원입니다.”

승현은 책 한 권만 사기로 했다. 서점을 나오면서 생각한 것은 집에 책이 많다는 것이었고, 그렇게 생각하니 방금 산 책 한 권도 돈이 아까웠다. 그렇다고 다시 들어가서 환불하기도 어색해서 그냥 책을 든 채로 집으로 향했다.

주방 아주머니만 집을 지키고 계셨는데,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곧장 자기 방으로 들어간 승현은 책을 펼치고 읽기 시작했다. 중간에 문자가 와서 확인하니 친구들이 당구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일이 있어서 못 간다고, 가방은 나중에 챙겨 달라고 문자를 보내놓고 독서를 재개했다.

무슨 내용인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일단 책 한 권을 끝까지 읽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계속 책을 들여다봤다. 중간에 잠이 오는 걸 억지로 참으며 읽었다. 생각이 딴 곳에 있어서 그런지, 갑자기 주인공이 밤에 빈 공터에 나가서 눈물을 흘리며 독백을 할 때는 무슨 내용인가 싶었다. 처음에 읽을 때는 어느 자동차 수리공장에서 일하는 수리공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는데, 어느 순간 주인공은 여자를 만나고 배신당하고 복수를 꿈꾸고 있었다.

‘이런 걸 사람들이 많이 읽는다고?’

꾸역꾸역 읽어나갔고 마침내 책을 완전히 읽었다. 승현은 뿌듯한 마음과 기대감을 품고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창밖은 해가 져서 어둑했다. 나름 책을 읽느라 집중했던 모양인지, 그제야 바깥의 생활 소음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뭔가를 이루었다는 알림 소리도 없었고, 미션 진행이 몇 퍼센트가 진행되었다는 확인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상태창도 보이지 않았다. 책을 읽을 때는 독서에 집중하라는 뜻에서 상태창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인가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책 한 권을 다 읽었음에도 상태창이 보이지 않으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혹시 세 권을 마저 읽지 않으면 안 되는 건가?’

아니면 저렴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지능 수치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방금 읽은 책이 잘 이해되지 않는 것도 그런 지능 때문인가 싶은 의심마저 들었지만 애써 지웠다.

승현은 두리번거리며 읽을 책이 있는지를 보았지만 아쉽게도 자신의 방에는 책이 없었다. 아버지의 방이나 형의 방에 들어가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허락 없이 방에 들어가는 것은 안 된다. 일단 거실에 나가서 혹시라도 책이 없는지 봐야겠다.

그렇게 수능 전날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

수능 날이 밝았다.

“오늘도 운동 가게?”

명수가 눈을 끔뻑거리며 물었다.

“왜?”

“아니, 그래도 오늘은 좀 긴장하지그래?”

“왜 그래? 새삼스럽게.”

하긴 천하의 단유가 수능이라고 긴장을 할까 싶은 마음도 들었다. 긴 팔에 두꺼운 트레이닝복을 입고 집을 나서니 유난히 차가운 새벽 공기에 명수는 코가 간지러웠다.

“에취!”

코를 문지르며 단유를 바라보았다.

“야 괜히 오늘 무리하다가 감기 걸리는 거 아냐?”

단유는 걱정말라는 뜻으로 명수의 어깨를 두드려준 뒤, 가볍게 뛰기 시작했다.

“오늘 진짜 안 가도 되지?”

명수의 말에 단유는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상미 보면 대신 인사나 전해줘. 시험 잘 보라고.”

평소보다 기온이 내려간 날씨라 두 사람은 좀 더 빠르고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마치 겨울처럼 하얀 입김이 입 밖으로 삐져나오고, 이마에 송글 땀이 맺혔다. 대화를 멈추고 30여 분 정도를 열심히 뛰었더니 등이 흠뻑 젖을 정도가 되었다. 그 후에야 다시 집으로 돌아오던 두 사람은 동네 근처에서 분홍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여자가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편의점에 들렀던지 하얀 봉투를 손에 들고 마주 오던 여자는 두 아이를 아무 감정 없이 흘깃 본 후 시선을 돌렸다.

“야.”

“왜?”

“저 여자는 뭐하는 여잘까?”

“뭐?”

“아니···이 시간에 여길 지날 때마다 보니까 궁금하잖아?”

“그게 왜 궁금한데?”

“그냥 자주 보니까.”

단유는 풉, 하고 터지는 웃음을 억지로 참는 시늉을 하자 명수가 의아해했다.

“왜?”

“너 이러는 모습을 상미가 알면 뭐라고 할지 궁금해서.”

“야! 그냥 해 본 말이지. 내가 진짜 관심 있어서 그런 거 아니잖아?”

“예전에는 상미 말고 다른 여자한텐 눈 한번 깜짝 안 하더니 이제 다른 여자에게 눈 돌리는 거잖아? 설마···.”

“설마 뭐? 뭐?”

단유는 대답 대신 뜀박질에 속도를 더 붙였다.

“야! 왜 대답 안 해? 내가 뭐했다고! 야! 야!”

얼굴이 붉어진 명수가 쫓아왔다. 단유는 붙잡히지 않기 위해 더 빨리 뛰었고, 덕분에 두 사람은 일찍 집에 도착했다. 그리고 단유는 기분 좋게 명수를 상미에게 보낼 수 있었다.

하은이 졸린 눈을 참고 일어나 배웅하겠다며 거실로 나왔다. 단유는 자신을 안아주며 등을 두드려 응원해주는 하은에게 열심히 하고 오겠다고 대답한 뒤 집을 나섰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시험장을 가는 동안 버스 안은 비교적 한산했다. 척 봐도 시험을 보러 가는 학생이라는 게 티가 나는 아이들이 고개를 꾸벅거리기도 하고 창에 머리를 기대고 바깥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기도 했다.

적막감과 긴장감이 묘하게 감도는 버스를 타고 시험장에 도착하니 교문 앞엔 수많은 학생들이 열을 지어 길가에 서 있었다. 소리 지르고 작은 북을 치며 마치 축구 경기 응원하듯 흥을 돋우는 이들도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종이컵을 학생들에게 건네주는 이들 사이를 걸어가니 어떤 무리가 파이팅을 외치며 박수를 치는 소리가 들렸다.

“선배님!”

옆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처음 보는 얼굴의 학생이 종이컵을 건넸다. 처음 보지만, 교복을 입고 있으니 같은 학교 학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힘내세요.”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네는 후배에게 단유는 ‘고맙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후배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 보인 뒤, 다시 다른 종이컵을 들고 뒤따라오는 학생들에게 똑같은 미소와 똑같은 인사말을 건넨다.

“단유야.”

이번엔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익숙한 목소리라 돌아보기도 전에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선생님.”

“오늘 긴장하지 말고 잘해.”

“네.”

담담하게 대답하는 단유를 보며 담임 선생님이 피식 웃었다.

“하긴 네가 긴장이라는 걸 할까 싶다마는 직접 보니 역시 단유구나 싶다.”

어떤 의미로 ‘단유’라는 단어를 이해하고 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듣고 싶은 대답은 아닐 것 같았다.

“잘 봐라.”

“네.”

단유는 인사를 하고 다시 교문을 향해 걸었다. 단유네 학교 학생 말고도 다른 학교 학생들도 어우러진 터라 시험이 열릴 학교의 교문 앞은 꽤나 번잡했고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그 교문을 지나 시험장에 들어갔더니 교문 밖의 소란과는 완전히 격리된 침묵과 긴장이 맴돌았다.

몇몇은 책상에 엎드려 눈을 붙이고 있지만, 몇몇은 노트나 문제집을 보고 있었다. 무려 고등학교 전 학년에 걸쳐 배운 교과목을 시험 치는 마당에 그런 공부가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마는, 그래도 안 보는 것보다는 마음이 편할 것이다. 자기 위로 차원에서 노트를 보며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도 전략이라면 전략이다.

단유는 가방을 옆에 걸어두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시험장에 오는 동안 문자가 연이어 들어왔는데, 정신없던 주변 때문에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시험 잘 봐. 사랑하는 우리 단유♡

라고 간지러운 문자를 보낸 것은 상미였다.

―명수는?

―지금 같이 있지. 역시 우정보다 사랑이야. 그치?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시험 잘 쳐라.

―너도 잘 봐. 끝나고 뭉치자. 콜?

상미는 여전하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단유는 미소를 지었다.

그 외에도 채윤에게서 온 문자도 있었고, 심지어는 멀리 지태에게서 온 문자도 있었다.

―만점 받아라.

이렇게 시간 맞춰서 문자를 보내주는 정성을 생각하면 역시 친구들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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