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563화 (563/956)

콤플렉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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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순간이었지만, 단유는 승현에 대해 몇 가지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다. 첫째는 승현이 결코 단순 무식하게 시비를 거는 타입이 아니라는 점이다. 자세히 표현하자면,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끔 만들 줄 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명제인데, 단유가 보기에는 자신이 주도적으로 콘트롤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고, 동시에 자신에게 해를 가할 수 없는 상황이 되도록 연출한다는 점이었다. ‘손님’처럼 등장해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워하는 연출, 그리고 등장부터 지금까지 절대 흠 잡힐 만한 표현은 쓰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가게 안이라 지켜보는 눈들도 많은 상황이니 그의 이런 연출은 혹시 어떤 문제―가령 사소한 시비나 하다못해 거친 언사가 오가는 싸움과 같은 요소―가 생기더라도 자신을 변호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지난번 교실에서 있었던 일도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승현이 단유를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이전의 만남에서 승현이 보인 묘한 눈빛에서 가능성을 점쳐보긴 했었던 일이다. 하지만 확신할 수 없었던 일인데, 조금 전 승현이 명수를 보고 마치 예전 일을 떠올린 것처럼 반응한 것을 보면, 명수나 자신이 어렸을 때의 모습을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어떤 방식으로 알게 되었는지는 사실 추리하기 힘들지만, 이제껏 본인이 해왔던 행적들을 되짚어보면 불특정인들이 예전의 단유를 알아보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굳이 찾아보려 하진 않았지만, 인터넷에는 단유에 대한 영상이나 잡다한 사진들이 돌아다니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세 번째는 승현의 단유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었다. 선의에 바탕한 호의도 없으며, 악의적인 적대감도 느껴지지 않는 승현이 왜 단유에게 관심을 가지는가? 그런데 지금 신나게 웃으며 즐기는 모습을 보니 어렴풋이나마 승현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장난감.’

마치 진열장 속 꿈에 그리던 장난감을 바라만 보다가 우연한 기회로 그 장난감을 얻었을 때 보일법한 들뜬 표정이 지금 승현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이리라.

여기까지 생각이 정리되니 몇 가지가 더 요구된다. 왜 그는 자신을 장난감처럼 여기는지. 지금까지는 왜 아는 척을 하지 않았던 건지. 그리고 왜 지금 이 시점에서 이런 식으로 접근한 것인지.

툭 까놓고 이야기하고 호기심을 풀어보고 싶은 마음도 없진 않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특히 명수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승현을 바라보고 있는 이 시점에서는 말이다. 지금은 일단 조용히 이 사태를 넘기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다행히 단유는 이 순간 승현에게 줄 선물을 떠올렸다.

장난감을 갖고 놀고 싶어 하는 아이에게는 장난감을 주는 게 도리다. 그의 취향에 맞을진 모르겠지만.

****

어쩌면 오랫동안 이 순간을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승현은 기분이 좋았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꼼짝도 못 하고 있는 단유를 보고 있으니 역시 머리 좋은 녀석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생각도 들었다. 만약 동영이 같이 물불 안 가리는 녀석이었다면, 무슨 사고를 쳤을지 모르지만, 똑똑하고 사리판단 잘하는 녀석이니까 함부로 날뛰지 않는 것이다.

‘내 손바닥 안이야.’

일부러 협박할 필요도 없고, 은밀히 위협적인 언어를 입에 담을 필요도 없다. 공부 잘하는 거? 다 필요 없다.

‘모두 내 장기말들이니까.’

승현은 뜻대로 흘러가는 상황에 들떠서 조금 흥분할 정도였다. 명수가 자리를 비켜주고 동영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게걸음으로 좁은 통로를 지나 자리에 앉는 모습을 보며 더욱 기분 좋은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시스템을 로딩합니다.

‘응?’

갑자기 들려온 기계 음성에 놀라 승현이 눈을 크게 떴다.

―로딩까지 10초 남았습니다.

“뭐야?”

저도 모르게 그런 말이 나왔다.

―5초 남았습니다.

“······.”

입을 반쯤 벌린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바로 옆자리에 앉은 단유는 여전히 고개를 반쯤 숙인 채였고, 앞에 마주 앉은 명수는 불퉁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동영이는 자기가 들고 온 물을 마시고 있는데, 모두 뭔가 이상한 걸 들었다는 표정은 아니었다. 실상 이상한 건 그들을 어리둥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자신이란 걸 본인만 모르고 있다.

그리고 갑자기 눈앞에 섬광탄이라도 터진 듯이 환해졌다가 원래의 시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상한 글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습니다.

‘뭐, 뭐야?’

눈동자를 굴려보아도 시야의 가운데에 뜬 글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곧 글자는 사라지고 이상한 그래프와 문자들이 시야 곳곳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분명 낯선 현상이지만, 묘하게 익숙한 이유는 그래프와 글자들이 이전에 본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HP, MP, Stat?’

야자 시간에 학교 대신 피시방에 가서 즐겼던 게임 속에서 보던 ‘상태창’과 유사한 모양의 디자인이었다. 더군다나 몇몇 단어는 영어지만, 대부분은 한글로 알아보기 쉽게 주석이 달려 있었다.

―공격력 10

―방어력 8

―민첩 11

―지능 6

때문에 직관적으로 이런 디자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다만 왜 갑자기 이런 디자인이 보이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튜토리얼을 시작합니다.

다시 들려온 기계 음성에 화들짝 놀란 승현이 고개를 좌우로 빠르게 돌리며 살펴보지만, 누구에게서도 이 음성을 들었다는 표시가 나지 않았다.

―사용자는 미션을 통해 수치를 강화하여 살아남으십시오.

“김승현. 왜 그래?”

오랫동안 초점 잃은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승현을 보고 의아한 마음에 동영이 그를 불렀다. 그제야 놀란 눈으로 동영에게로 고개 돌린 승현이 어버버 거리다가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하긴 갑자기 눈앞에 상태창이 나타났다느니, 미션을 하라는 소리가 들린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다. 꺼내봐야 미쳤다는 소리밖에 더 들을까?

―사용자의 지능이 낮으므로 우선 지능을 높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미션 : 조건에 맞는 책 3권을 정독하여 지능 수치를 올리십시오.

보상 : 지능 +1(권당), 보너스 스탯 +1

실패시 : 지능 ?0.5(권당), 연계 미션 불가.

내용을 이해하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그나마 밖으로 나가서 토끼 10마리를 잡으십시오 같은 미션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도대체 왜 책을 읽어야 한다는 건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자신의 지능이 ‘6’이라는 애매한 수치라는 게 불쾌했다.

어쩌면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일지도 모르겠다고 추측은 해 보지만, 그런 이유로 지능이 저런 수치라면 여간 부끄러운 게 아니다. 공격력이 10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도 솔직히 애매한 수치긴 마찬가지다. 비교 대상이 없으니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도 없고. 문득 맞은편의 동영을 보니 그의 힘은 과연 수치로 얼마나 될지 궁금했다. 그러나 상대를 바라본들 수치가 보이지는 않았다.

한 가지 더 이 미션을 받고 이해한 것은 스탯을 올리는 게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고작 책 3권을 읽기만 해도 지능이 1씩 오른다는 건, 향후에도 지능을 계속 끌어올릴 방법이 있다는 소리였다. 마찬가지로 힘이라든가, 민첩이라든가 하는, 계량화시키기 힘든 수치들도 게임처럼 올릴 수 있다는 말이다.

‘게임처럼!’

승현도 온라인 게임을 적지 않게 플레이해 보았다. 그리고 게임의 미션을 통해 얻는 보상에 대해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쩌면.

‘어쩌면 초인(超人)이 되는 것도 가능할지!’

하지만 마냥 낙관적으로 생각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왜 나한테 이런 게 보이기 시작한 거지?’

아무런 전조도 없이 시작된 이 현상을, 더군다나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모양인데, 자신에게만 보이는 이유가 뭘까?

‘선택받은 사람?’

그것은 쉽게 수긍하기 어려운 문제다. 자신은 선택받기보단, 선택에서 제외된 쪽이었기 때문이다.

―시간 내 달성하지 못할 경우, 실패로 돌아가며 ‘지능’ 스탯에 페널티를 받게 됩니다.

승현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만약 눈앞에 보이는 이게 말 그대로 게임 시스템을 차용한 것이라면, 보상만큼이나 페널티도 존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주어진 페널티는 승현을 뜨끔하게 만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애매한 6이라는 수치에 불안감을 느끼는 와중인데, 페널티까지 있다니? 솔직히 말해서, 승현이 평소에 ‘친구’라고 부르는 이들의 지능 수준으로 떨어진다면 살아야 할 가치가 없다고 느끼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건 그냥 저능아 수준이니까.

단유를 흘깃 보았다. 전교 1등을 밥 먹듯이 하는 단유는 과연 지능이 어느 정도 수준일까? 만약 자신이 지능 수치를 올려서 단유 수준이 된다면?

사용자 위주의 시스템은 아닌지 설명도 불친절하지만, 지난 경험을 통해 추측해 본바, 어쨌든 이 시스템에 따라 움직였을 때 얻을 보상이 결코 가볍지 않을 것 같다. 그렇다면 지금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번에는 지능 수치를 올리지만, 다음 ‘연계 미션’에서 체력 혹은 힘 수치를 올릴 수 있다면?

승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하다. 급한 일이 있었는데, 깜빡했네. 잘들 놀고. 아, 계산은 내가 하고 갈게. 오케이?”

그리고는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 우선 당장 가까운 서점에 가서 책을 골라야 했다.

“뭐야? 저거?”

명수가 고개를 돌리고 사라진 승현의 뒤를 보다가 단유에게로 몸을 돌려 물었다. 단유는 그저 어깨를 으쓱거려 보일 뿐이었다. 명수는 마침 옆에 앉은 동영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동영은 아주 난감하고 머쓱한 상황에 직면했다. 솔직히 오기 싫었고, 마주하고 싶지 않은 얼굴과 마주한 상태인데, 정작 자길 끌고 온 녀석은 한동안 바보 같은 표정만 지으면서 원맨쇼를 하다가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면서 자리를 떠났다. 때문에 홀로 남겨진 동영은 난감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게다가 명수가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데, 여기서 무슨 말을 꺼낼까? 속이 탄다.

물잔을 들었더니 이미 비었다. 아까 자리에 앉자마자 물을 한 번에 다 마신 탓이었다.

‘조금 남겨둘걸.’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 난국을 타개해야 하는가 고민하던 찰나에 점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음식 나왔는데, 어느 분···?”

동영이 고개를 들었더니 점원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 명수도 자신을 쳐다보고 있고, 단유도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냥 털고 일어날까?’

씩씩하고 용감하고 당당하게 벌떡 일어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가게를 빠져나가면 모양 빠져 보이진 않겠지?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나가면 뒤에서 비웃음을 던지지 않을까?’

입을 막고 자신을 쳐다볼 사람들의 표정이 그려지기도 했다. 아무 말 없이 일어서는 것도 바보같이 보일 것 같다. 아니, 이미 자신의 표정이 바보처럼 보일 것 같다.

“저기 놔 주세요.”

단유의 목소리가 들렸다. 점원이 그 말에 따라 동영의 앞에 그릇을 놓아주었다.

“그건 그냥 가운데 놔주세요.”

그렇게 그릇을 놓고 점원이 돌아섰다.

“먹고 부족하면 덜어 먹자. 이왕 사주고 갔는데 남기면 아깝잖아?”

단유의 말에 명수가 불만스럽다는 듯 툴툴댔다.

“꼭 이렇게 같이 먹어야 하냐?”

그게 자기를 두고 하는 말 같아 동영도 뿔난 목소리로 대답하려는데, 단유가 먼저 선수를 쳤다.

“밥 아직 안 먹었지?”

동영을 바라보며 묻는 단유의 말이 신호라도 된 듯,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너무 커서 가게 안의 사람들이 모두 들었을 것만 같았다. 얼굴이 시뻘게진 동영이 아무 말 못 하고 있을 때, 단유가 젓가락을 집었다.

“먹자.”

명수는 말없이 젓가락을 저어 국수를 먹는 동영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조금 전 상황을 복기해보면, 승현이 한참 단유와 친한 척을 하다가 갑자기 입을 반쯤 벌리고 허공을 멍한 눈으로 쳐다보더니 어딘가에 홀린 듯 다급하게 가게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동영이 혼자 얼굴이 심각해졌다가 시뻘개졌다가 하더니 단유가 ‘먹자’라는 말에 젓가락을 들고 국수를 먹기 시작하는 것이다.

뭔가 자기만 모르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도무지 그게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치 최면에 걸린 사람들마냥 움직이는 두 사람과 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자연스럽게 식사를 재개한 단유를 보며 명수는 머리를 긁적였다. 단유가 잔을 집어 물을 마시려다 그 모습을 보았다.

“왜?”

“응? 아, 저기 조금 이상해서.”

“원래 그래.”

“응?”

단유는 빙긋 웃고 계속 먹으라는 시늉을 보였다. 서로 만족할 만한 선물을 건네준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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