콤플렉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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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었지만 승현의 얼굴에 슬쩍 떠오른 미소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단유는 불안감을 느꼈다. 그리고 승현이 동영의 어깨를 두드리며 자신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게끔 했을 때, 그리고 동영의 눈에 피어오른 불꽃을 보았을 때 불안감은 더 커졌다.
“닭고기 쌀국수는 어느 분이신가요?”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단유는 고개를 돌렸다.
“이건 저쪽이고요, 이건 제 거요.”
명수의 주문에 맞춰 점원이 그릇을 내려놓고는 물러갔다.
“숙주 넣을래?”
“됐어. 난 괜찮아.”
명수는 콧노래를 부르며 따로 나온 숙주를 젓가락으로 한 움큼 집었다. 서브로 나온 양파절임과 고추도 가득 집어넣고 젓가락으로 쓱쓱 휘저은 뒤, 탱글탱글한 면을 집어 올린다. 입김을 후, 불고는 입에 가득 채워 넣던 명수는 도로 면을 뱉었다.
“앗 뜨거!”
“내 그럴 줄 알았다. 그냥 봐도 뜨겁겠는데.”
“그럼 말을 해 주지.”
“설마 했지.”
찬물로 입안을 식힌 후, 이번에는 조금만 집어서 조심스럽게 입에 가져갔다. 요란스럽게 입을 움직이며 먹은 뒤, 다시 찬물을 마셨다.
“아직도 뜨거워.”
“천천히 먹자.”
“그래도 맛있어.”
“맛이 느껴져?”
“뜨거운 맛도 맛이잖아.”
“명수답다.”
“내가 나다워야지. 안 그래?”
히죽 웃으며 ‘너도 먹어’라고 권하는 명수다. 단유는 고개를 끄덕인 후 젓가락으로 맑은 국물을 휘저었다. 얇은 쌀국수 면이 젓가락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인다.
“이야, 이런 데서 다 보네?”
단유는 고개를 들기 전에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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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현은 단유와 눈이 마주친 후, 재미있는 생각을 떠올렸다.
“동영아.”
승현도 동영이 자신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음을 안다. 하지만 그래서 어쩔 건가? 동영은 자신에게 아무 짓도 못 할 건데. 하지만 승현은 그런 동영도 ‘친구’니까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내치지 않았다. ‘친구’는 언제나 쓸모가 있는 존재니까.
승현의 부름에 동영이 고개를 돌렸다. 콧구멍이 씰룩거리는 게 보였지만 모른 척해주었다.
“저기 봐.”
승현이 턱을 들어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동영은 거센 콧바람을 내뿜었다. 울컥하는 기분에 저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가서 인사 좀 하고 올까?”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어 승현을 바라보니, 승현은 예의 진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야, 너희들 먼저 가 있어.”
“응? 왜?”
“아, 여기 아는 사람을 만나서. 인사하고 갈 테니까 가서 놀고 있어.”
“어, 그래.”
친구들은 의심하지 않고 먼저 자리를 떠났다. 승현은 소리 없는 웃음을 지으며 쌀국수집으로 향했다.
“뭐해? 따라와?”
동영은 돌아보는 승현을 보며 도대체 무슨 의도인지를 짐작해보려 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따라오라니까?”
일단은 따라간다. 하지만 또 저 자리에서 이상한 짓을 요구하면 그때는 아버지고 나발이고 그냥 다 때려치우겠다, 고 다짐했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니, 마침 서빙을 하던 점원이 둘을 돌아보며 ‘어서오세요’라고 인사를 한다. 승현은 단유가 앉아 있던 자리로 걸어가 인사를 건넸다.
“이야, 이런 데서 다 보네?”
그러자 단유 대신 단유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아이가 고개를 돌려 반응했다.
“누구?”
“아, 나 얘랑 같은 학교 친구.”
“친구?”
승현은 짙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넌?”
“나도.”
“교복을 보니까 우리 학교는 아닌 거 같은데? 알아?”
동영에게 물으니, 동영이 힐끗 보고는 명수의 학교를 맞췄다.
“아, 거기구나. 그럼 두 사람은 어떻게 아는 사인데?”
“어릴 때부터 친구였어.”
“어릴 때부터?”
승현이 고개를 갸웃하다가 오랜 기억 속에 묻혀 있던 한 사람을 떠올렸다.
“아아. 걔구나.”
단유를 처음 알게 된 영상 속에서 단유와 함께 나왔던 아이. 익살 궂은 장난꾸러기 같은 모습이 살짝 보였지만, 승현의 시선은 단유에게 집중되어 있어 흐릿한 잔상으로만 남았던 아이. 게다가 그때와 지금의 모습은 사뭇 달라서 당시의 얼굴을 온전히 기억했다고 하더라도 알아보기 힘들었을 모습이다.
“응?”
명수가 되물었지만, 승현은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 아냐. 아무것도.”
그리고 승현은 얼른 단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 우연히 만난 것도 신기한데, 같이 밥이나 먹을까? 내가 쏠게.”
단유가 고개를 들고 승현을 바라보았다. 적의는 없다. 하지만 호의도 없다. 꿍꿍이가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 행동의 목적과 이유는 알 수가 없다. 승현 같은 사람을 만나 본 기억이 적어도 단유에게는 없었다. 그래서 이런 표본에 대한 관찰이 부족했고, 따라서 정확한 추리가 어려운 것이다, 고 단유는 판단을 내렸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관찰. 실증적인 실험과 면밀한 관찰만이 정확한 답을 도출해낼 수 있다. 제일 좋은 건 피실험자이며 관찰자인 자신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좋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가정한다면 가장 가까이에서 미시적인 변화마저 관찰하고 기록하는 게 결과를 예측하고 검증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아니다. 오늘은 명수와 편하게 어울린 뒤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고, 그 일정에 방해를 받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이왕 아는 척을 해 왔으니, 자신도 그에 어울려주며 승현이란 사람이 어떤 인간인지 살펴보겠지만, 내일부터다.
아, 내일은 수능이던가?
“내일 시험인데 이러고 있어도 돼?”
단유의 말에 승현이 웃음을 지었다.
“내일 시험인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아, 넌 내일 시험이 별로 부담스럽지 않은가 보네? 하긴, 너 정도면 걱정 안 하겠다.”
국수 그릇에 젓가락을 찔러넣은 채로 명수는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날 선 말들이 오가는 건 아니지만, 친구라고 보기엔 두 사람 사이가 꽤 멀어 보인다. 학교가 다르고, 최근 자신의 주변 일들로 바빠서 단유와 오래 이야기를 나눈 일이 없지만 저런 친구가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을뿐더러, 명수가 아는 단유는 아무나 친구로 인정하지 않는다. 번드레하게 생긴 모양새지만 어딘가 냄새나는 구석이 있는 아이처럼 보였다.
이럴 때는 직접 물어보면 된다.
“야. 친구 맞아?”
단유는 순간 고민했다. 보아하니 명수는 조금이라도 심기가 틀리면 일어설 모양새였다. 그리고 지금 시점에서 어떤 문제가 생기면, 명수에겐 치명타로 작용할 수 있다. 자신이야 사실 대학을 가든 말든 상관이 없다지만, 명수는 아니다. 명수는 무사히 졸업하고 프로에 입단을 해야 하는 몸인데 이 시점에서 불명예스러운 일에 휘말리는 것은 말려야 한다.
“명수야.”
“응?”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으니, 일단은 개인적으로 상황을 마무리해야 옳다.
“나 잠깐 얘랑 나갔다 올게.”
명수의 눈에 불안이 스치고 지나갔다.
“별일 아냐. 잠깐 이야기만 하고 올게.”
그때 옆에서 코웃음소리가 들렸다.
“왜 이래? 왜 나가서 이야기를 해? 그냥 여기서 해.”
단유가 몸을 천천히 틀며 승현을 보자, 승현은 여우같이 얄미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한 가지는 알겠다. 승현은 머리가 나쁘지 않다. 그는 분명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끔 만들 줄 안다. 지금이 주도권을 가지고 유리하게 끌고 나갈 수 있는 상황임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
단유가 뭔가를 더 말하기 전에 승현은 단유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멀뚱히 서 있는 동영을 보며 말했다.
“너도 저기 앉아.”
명수의 옆자리를 가리키는 승현에게 명수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앉으라고 안 했다?”
명수도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누구의 동의도 없이 멋대로 와서 ‘친구’를 자칭하고, 멋대로 합석하는 이가 단유의 친구일 리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수야.”
단유는 즉시 명수를 말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명수에게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왜?”
“넌 그냥 가만히 있어.”
명수가 발끈하려는데, 승현이 먼저 웃음을 터뜨렸다.
“왜들 그래? 친구들끼리 밥 먹자는 건데.”
“왜 그러는데?”
“뭐가?”
“왜 친한 척을 하는 건데?”
“척이라니? 난 정말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 그러니까 저번에도 먼저 가서 사과를 한 거잖아. 사과가 부족했어? 진짜, 진짜 진심으로 미안하다니까. 혹시 그 날 이후로 쟤가 시비 건 적 있어? 없었겠지만, 만약 있었다고 해도 내가 대신 사과할게.”
“왜 네가 사과하는데? 네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원래 친구가 잘못하면, 친구가 대신 사과해주기도 하는 거야. 알잖아? 너희들도 그런 친구 아냐? 친구가 잘못하면 대신 사과하고 용서를 빌고, 그런 친구 맞잖아?”
명수는 여전히 테이블 옆에 서서 콧바람만 씩씩 내뿜고 있는 동영과 승현을 번갈아 보다가 단유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뭐야, 얘들? 너한테 무슨 짓이라도 한 거야?”
“아냐, 신경 쓰지 마.”
“어떻게 신경을 안 써?”
“여기요!”
승현이 손을 번쩍 들었다.
“여기···이거 2개 주세요.”
멀리서 보고 있던 점원이 빠르게 다가와 물었다.
“닭고기 쌀국수요?”
“아무거나요. 그냥 2개 빨리 주세요. 배고프니까.”
승현은 아무렇지 않게 주문을 마친 후,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뿌듯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너 빨리 앉아. 계속 그러고 있으면 나만 뻘쭘하잖아?”
동영이 명수의 옆자리에 앉기 위해서는 명수가 자리를 당겨 앉아서 들어갈 틈을 주던가 해야 했지만, 명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야, 서 있는 김에 물이나 좀 떠다 줘라.”
동영의 눈에 시퍼런 빛이 서리는 듯했다.
“아, 네 것도 같이 가지고 떠와.”
승현을 잠시 바라보던 동영이 등을 돌렸다. 그리고 정수기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것을 확인한 후, 승현은 명수에게로 손을 뻗었다.
“인사가 늦었네. 반갑다. 김승현이라고 한다.”
명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팔짱을 끼었다.
“뭐하는 거냐, 지금. 왜 시비 걸고 지랄이냐?”
“시비라니? 교우 관계를 다지자는 거잖아?”
능글맞은 승현의 태도에 명수도 참을 수 없었다.
“꺼져, 새끼야.”
명수의 거센 발언에도 승현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왜 이래? 그냥 같이 밥 먹고 이야기나 하자는 건데. 혹시 아냐? 이야기하다 보면 잘 맞아서 죽마고우가 될지?”
“죽마고우는 무슨 얼어 죽을. 야, 김단유. 일어나자.”
지들이 일어나기 싫다면 우리가 일어나면 그만 아닌가? 하지만 승현은 그런 명수의 태도에도 유유자적이었다. 오히려 단유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말했다.
“왜 흥분하고 그래? 그냥 앉아서 밥만 먹자고. 내가 쏜다니까?”
“너랑 같이 먹기 싫다고. 그리고 그 팔 내려라.”
“응?”
승현은 단유의 어깨에 걸친 팔을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묻는 시늉을 했다.
“혹시 내가 불쾌하게 했어? 불편했어? 아, 내가 잘못했네. 난 친해지고 싶어서 그랬는데, 불편했다면 내가 사과해야지. 응, 그럼.”
과장되게 팔을 번쩍 들고 놀란 척을 하다 다시 단유의 어깨에 팔을 올리는 승현.
“난 말이야, 사람을 참 좋아하거든? 특히 공부도 잘하고 인기 많은, 응? 우리 단유 같은 친구가 참 좋단 말이야. 아마 난 공부도 못하고 못생겨서 그런 가봐. 원래 나한테 없는 걸 가진 사람이 부러운 법이잖아? 그래서 너랑 참 친하게 지내고 싶은데, 내가 말을 잘못해. 이게 부족해서.”
승현은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려 보였다.
“이게 안 되니까, 내가 나도 모르게 실례를 하기도 하지만, 결코 의도한 바는 아니란 거지. 그런 건 이해해 줬으면 좋겠네? 왔냐? 앉아, 거기. 야, 좀 비켜줘라. 친구가 앉을 자리가 없어서 서 있는 게 보기 좋니? 옆에 사람들도 보고 있잖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우리가 무슨 사고라도 치는 줄 알겠다. 얌전히 밥만 먹고 간다니까?”
동영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는 게 보인다. 명수는 복잡한 심경으로 동영을 보다가 한발 물러섰다. 동영이 멈칫하다 재차 자리를 권하는 승현의 말에 순순히 따랐다.
승현의 입꼬리가 올라가며 깊어지는 보조개를 보며 명수가 인상을 쓸 때였다.
“후우.”
단유는 길게 숨을 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