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속, 정확(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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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 비유지만, 이것은 일종의 전쟁 수행과도 같다. 직접 총 들고 전장에 뛰어들어 총탄을 피하며 진격하는 병사들도 고충이 있지만, 병사들이 나갈 길을 제시하고 다른 위험은 없는지를 전략적으로 검토해야 하는 작전병과의 장교도 고충은 있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고지를 향해 발을 내딛을수록 신경은 날카로워지고 조그만 숨소리에도 날선 반응이 앞선다.
‘고지 점령 이후, 전쟁은 끝이 날까?’
병사들은 고민하지만, 그 고민을 해결해 줄 사람은 없다.
주변의 병사들은 모두 고지만을 바라보고 한 걸음 내디딜 뿐이다. 무전을 통해 작전을 지시하는 본부에 대고 미래에 대한 전망을 하소연할 여유도 없다. 어디서 날아오는지 모를 피탄에 쓰러질까 걱정하는 부모님의 사진을 전투모 사이에 끼우고 전진 포복하는 병사의 심정으로 아이들은 하루하루를 견뎠다.
“대학만 가면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 그때까지는 참고 공부해.”
라는 말은 많이 듣지만, 그 말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란 걸 모르지 않는다. 그래도 마음 한편으로는 믿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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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수고했다.”
수고를 치하하기 위한 빈말은 아니었다.
“오늘은 되도록 일찍 자고 컨디션 관리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마지막 고지까지 단 한 걸음을 남겨둔 상황.
“마지막으로 할 말은 후회를 남기지 말자는 거다.”
단 한 걸음이지만, 그 한걸음에 담긴 의미는 크다.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공부한 것들, 그리고 모의고사를 통해 준비해왔던 것들은 바로 내일 모두 풀어야 한다.”
점심시간 전에 종례를 한다. 만약 방학식을 맞아 하는 종례라면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겠지만, 오늘의 종례는 그저 무거울 뿐이다.
“실수하지 말자. 이제까지 수없이 많이 연습했잖아. 그렇지?”
“네.”
다소 힘없는 대답. 하지만 선생님은 개의치 않았다.
“학생들이 시험에서 제일 많이 실수하는 게 뭔지 알아? 문제를 잘 못 이해하는 거? 보기를 헷갈리는 거? 제일 많이 실수하는 게 사실은 OMR 마킹하는 거야. 학교에서 시험 칠 때도 보면 꼭 번호 밀려서 마킹하는 애들이 나오는데, 그게 제일 억울하지 않니? 다 아는 문제인데, 맞게 답도 골랐는데, 마킹을 잘못해서 틀리면 너무 억울하잖아. 그렇지? 시간 부족하다고 제대로 확인도 안 하고 마킹하다 실수하지 말고, 꼭 번호 확인하고 마킹 실수 안 하게 조심하자. 알겠지?”
“네.”
“긴장해서 시험을 치르다 보면 시간이 모자랄 수도 있으니까, 시간 관리 잘하고.”
“네.”
결국 시험이란 빠르고 정확하게 답을 골라내서 표기하는 거다. 빠르게 풀고, 정확하게 답을 기입하자. 담임 선생님의 말씀은 이제까지 줄곧 들어왔던 이야기의 반복이었지만, 아이들은 허투루 넘길 수 없었다.
“자, 그럼 오늘은 이만하고, 내일 다들 파이팅하자. 알겠지?”
“네.”
“일찍 끝났다고 피시방 가는 놈들은 없길 바란다.”
“······.”
“이것들 봐라?”
그렇게 종례가 끝나고 아이들은 가방을 챙겨 교실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단유야.”
그 와중에 정원이 가방을 한쪽 어깨에 걸치고 다가왔다.
“시험 잘 봐라.”
“그래. 너도.”
정원은 뿌듯한 얼굴을 하고 돌아섰다. 단유는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은 뒤, 본인도 교실을 나왔다. 이미 운동장 갓길에는 집으로 가는 고3들로 가득 했고, 운동장에서 그 모습을 부러운 듯 쳐다보던 후배들은 체육 선생님의 일갈에 고개를 돌리지만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인파 속에 섞여 학교를 빠져나온 단유는 집으로 갈까 생각하다 이왕 일찍 나온 김에 명수랑 점심을 먹고 들어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명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희 끝났어?
“응.”
―우리도 방금 끝났어.
“그럼 밖에서 점심 먹고 들어갈까?”
―오케이!
가까운 번화가에 나왔더니, 교복을 입고 나온 무리가 적지 않게 보였다. 아무리 내일이 수능이라지만 당장 독서실이나 집으로 들어가 책 한 권 더 보겠다는 아이들보다는, 잠깐이라도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 피안(彼岸)을 하려는 아이들이 더 많았다. 남자아이들 뿐만 아니라 여자아이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은 표정으로 여자들은 서로 팔짱을 끼고, 남자들은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가게의 진열장들을 슬쩍 보면서 지나간다. 옷이든, 액세서리든 지금 당장 눈에 들어오는 게 있을 턱이 있나. 그냥 눈에 담아보는 것이리라.
“쟤들은 뭔데 이 시간에 여기 있는 거야?”
“내일 수능이잖아?”
“아, 그렇구나. 요즘 사는 게 바빠서 수능이 내일이란 것도 몰랐네. 뉴스를 볼 틈이 있어야지. 그런데 내일 수능이면 여기서 놀고 있을 게 아니라 집에서 책 하나라도 더 봐야 하는 거 아냐?”
“지들이 알아서 하겠지.”
“우리 때는 수능이 엄청 어려웠잖아. 저러고 있을 시간이 어딨었어? 안 그래?”
지나가던 연인들이 나누던 대화가 흘러들어 왔다. 전쟁 같은 시간을 겪었던 경험자들에게 전쟁 같은 시간을 맞이한 아이들은 동정의 대상도, 공감의 대상도 아니었다.
남들 다 겪는 일인데 새삼스럽긴, 이란 반응이 대다수다. 이미 전쟁을 겪은 이들의 여유로움일 수도 있겠다. 하긴 당사자들에게나 전쟁 같은 고통이지,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매년 반복되는 일상이기도 하다. 늘 수능 전날이면 이곳으로 와서 최후의 만찬과도 같은 휴식을 취하고 마지막 전투를 준비하러 떠나니까. 동시에 전투가 끝난 뒤, 다시 돌아와 매상을 올려줄 최고의 고객들이다.
길가에 마련된 벤치에 앉아 그 광경을 지켜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짚어보던 단유의 등을 누군가가 툭 쳤다. 돌아보니 명수였다.
“오래 기다렸어?”
“아냐, 나도 금방 왔어.”
“뭐 먹을까?”
“먹고 싶은 거 있어?”
“오늘 같은 날은 뭘 먹어도 소화가 잘 안 될 거 같은데.”
“엄살은.”
“야, 아무리 나라도 긴장이 되거든?”
명수는 수능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대학을 가지 않기로 했으니까. 아니 대학을 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
가을 대회에서 명수는 문자 그대로 화려한 활약을 펼쳤고, 학교에 우승컵을 안겨준 일등 공신이 됨과 동시에 프로 구단의 적극적인 러브콜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는 몇몇 에이전트 회사에서 접근을 하기도 했다. 확실히 에이전트의 도움을 받으면 향후 활동에 도움을 많이 받을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쉽게 선택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아직 시간이 많으니까, 좀 더 시간을 두고 선택하겠다고 미뤄둔 상태이긴 하지만 마땅히 이에 대해 조언을 구할 만한 곳이 없어 난감한 상황이다.
하지만 다소의 곤란함을 제외하면, 명수는 그야말로 해피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중이다.
“나만 잘하면 되는 거 아냐?”
본질은 그렇다. 축구선수가 축구만 잘하면 되지 않겠는가? 명수의 단순하지만 명쾌한 기준은 그의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요인이 될지도 모르겠다. 나머지 문제는, 솔직히 단유나 하은이 조금만 도와주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명수의 행복이 곧 가족의 행복이니까.
“시험을 치는 건 난데, 왜 니가 긴장을 해. 내가 실수할까 봐?”
“아무리 네가 단유지만, 사람이란 게 실수를 할 때도 있잖아.”
“어감이 이상한데?”
“기분 탓이야.”
“아무튼 네가 결승전에서 헛발질해서 사람들을 웃기게 만들었던 것 같은 실수를 내가 할 수도 있다는 거지?”
“···뭐지? 엄청 구체적인 말로 날 깐 것 같은데?”
“기분 탓이야.”
간단하게 먹자는 명수의 제안에 따라 먹을만한 음식점을 둘러보다 가까운 쌀국수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식사가 나올 때까지 두 사람은 가벼운 사담을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내일 너 어디 갈 거야?”
“그야···너 응원하러 가야지?”
“잠시 머뭇거린 걸 보니 역시 걸리는 게 있지?”
“···야, 솔직히 잘 모르겠다. 이건 어느 축구팀을 갈 거냐를 고르는 거보다 더 어려운 문제라고.”
한 사람은 자신의 가족이며, 평생의 친구이다. 또 한 사람은 자신이 평생에 걸쳐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다.
“우정과 사랑을 놓고 고민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
“이상한 소리 하지 마.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삼각관계인 줄 알겠어.”
“삼각관계라면 삼각관계지. 둘 다 나를 엄청나게 좋아하잖아?”
단유가 미간을 좁히자, 명수가 헤픈 웃음을 터뜨린다.
“됐고, 내일 상미한테 가서 응원 좀 해 줘. 내 몫까지.”
“넌?”
“내가 걱정이나 되냐?”
“아니. 단유를 걱정하느니, 세계 평화를 걱정하지.”
“계속 내 이름을 묘한 어감으로 부르는데, 조금 거슬린다?”
“이미 네 이름은 그런 거야.”
명수가 핸드폰을 들어 흔들었다. 여태까지도 중학교 때 친구들과 단톡방에서 대화를 나누며 관계를 이어나가고 있다. 그 대화 중에 단유의 이름은 특정 상황에서 특정한 의미를 지니는 보통 명사처럼 활용되기도 한다.
“아, 생각난 김에 메시지나 보내야겠다.”
명수가 핸드폰을 두드려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걸 보며 단유는 가게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간이 좀 지난 탓인지, 교복을 입은 아이들의 모습도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거리를 방황하는 아이들도 눈에 띄었다.
그러다 낯이 익은 한 사람을 발견했다.
“지금 가면 당구장 되게 썰렁하겠다.”
“문이나 열었으려나?”
재잘대면서 걷는 아이들 무리의 뒤에서 승현은 느긋하게 걸음을 걸었다. 종례가 끝나자마자 아이들을 모아 옹벽으로 가 여유롭게 담배 타임을 가질 때, 당구장에 가서 짜장면이나 시켜먹자고 제안하니 아이들은 모두 찬성했다. 하긴 누구의 제안인데 거절할까?
마지막까지 알뜰하게 삥을 뜯어낸 친구의 노고를 치하한 뒤, 당구장으로 향하는 아이들은 내일이 수능이든 말든 상관이 없는 처지였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그 말을 문자 그대로 실천하는 아이들이었다.
번화가로 나가니 몇몇 아이들이 아는 척을 하기도 했다. 다른 학교 아이들이지만, 평소 어두운 골목에서 종종 교류를 갖기도 했다.
“당구 한판?”
“콜?”
수학은 못 해도 당구는 기가 막히게 잘하는 아이들이었다.
“3-5?”
3쿠션 1개 3천 원, 빈 쿠션 1개 5천 원으로 하자는 내기에 아이들은 동의했다. 처음에야 3-5지만, 나중에는 ‘5-7’ 혹은 ‘1만 빵’이 될 수도 있다. 돈이야 어차피 있다가도 없는 거고, 없다가도 있는 거다. 재밌자고 하는 거다. 재밌자고.
문득 승현이 고개를 돌려 동영을 바라보았다. 입술을 비틀고 있는 동영을 보니 웃음이 났다. 그 날 이후로, 꽤 시간이 지났지만 동영은 승현에게 말을 거는 일이 부쩍 줄었다. 물론 대놓고 반항한다거나 거부 의사를 밝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따라준다는 느낌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태도를 일일이 지적할 마음은 없었다.
그게 동영의 한계니까.
승현은 동영을 보면서 생각한다. 역시 사람은 힘만 갖고 사는 게 아니라는 것을. 제 딴에야 주먹 좀 쓴다고 목에 힘주고 다녔겠지만, 사람이라는 건 ‘사회적 동물’ 아닌가? 사회적 관계를 무시하고 독불장군처럼 지낼 순 없는 법이다. 만약 그러고 싶다면 돈이라도 많던가.
그런 점에서 동영은 승현보다 돈이 없다. 가진 돈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집에 돈이 없다. 애들 코 묻은 돈을 삥쳐서 담배나 겨우 사 피우는 주제다. 술집에서 승현이 카드를 긁으면 거절 못 하고 마셔야만 하는 녀석이다. 무엇보다 동영의 아버지는 승현의 아버지에게 고개를 숙여야만 한다.
그래도 꼴에 자존심은 있어서, 가끔 눈에 힘을 주고 승현을 바라볼 때도 있지만 승현의 눈에는 그저 귀여운 하룻강아지의 앙탈로 보일 뿐이다. 하룻강아지는 강아지다. 귀여워 해주면 그만이다.
“가자, 동영아.”
그래서다. 일부러 동영의 등을 툭툭 쳐주며 말을 거는 것은. 다른 아이들이 보기에는 동영을 챙겨주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동영은 입술을 씹으며 참아내야 했다. 그도 승현의 제스쳐가 무슨 의미인지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넌 내 아래야.’
생각날 때마다 자신의 위치를 각인시키는 승현의 행동에도 동영은 아무런 반항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위치를 모르지 않으니까.
승현은 동영의 꿈틀대는 표정을 보며 웃음을 지어 보인 후,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가 바로 근처에 있는 가게의 창가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단유와 시선을 마주쳤다.
‘김단유.’
재미있다. 승현의 한쪽 입꼬리가 깊이 파이며 짙은 웃음을 자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