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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멤버 더 네임-559화 (559/956)

신속, 정확(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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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준 승현은 뒤에 선 아이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야, 술이나 한잔하러 갈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승현의 태도에 아이들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등 돌리고 서 있는 동영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지 못한 상황에서 대뜸 승현의 제안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탓이었다.

“응? 왜 대답이 없어?”

하지만 당장 눈을 맞대고 선 승현의 얼굴을 보며 버티는 건 더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 돈도 생겼으니까 가자.”

한 친구가 동조하자, 누구랄 거 없이 다들 가자는 분위기가 되었다. 승현은 코웃음을 짓고는 동영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질끈 눈을 감고 있는 녀석이 귀엽다.

“가자.”

승현은 동영에게서 떨어졌다. 동영을 지나 친구들 무리에 섞였다. 그제야 동영이 눈을 뜨고 뒤를 돌아보았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의 승현을 보며 동영은 이를 꽉 깨물었다.

만약 이게 교훈이라면 제대로 알겠다. 이 세상에는 힘만으로는 안 되는 것도 있다는 걸. 타고난 힘과 체력이 좋고, 빈번한 싸움 속에서 남에게 쉽게 지지 않을 정도의 기술도 체득했지만, 승현과는 그런 힘 싸움이 의미 없다.

“야, 동영아. 빨리 와.”

친구 중 한 명이 동명을 챙겼다.

“됐어, 새끼야.”

동영은 친구의 호의를 거절했다. 호의가 진짜 호의로 느껴지지 않은 까닭이다. 친구의 얼굴에 설핏 당황스러워하는 감정이 떠오르지만 동영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걔나 자신이나 비슷한 처진데 서로 동정해준다고 좋아질 건 없다.

****

평소보다 일찍 집으로 돌아온 단유는 가방을 던져두고 빈 거실로 나왔다. 호빵이 킁킁대며 자신의 존재감을 알렸다.

“알았어.”

싱크대 아래에 넣어두었던 사료를 꺼내 그릇에 소복이 담아 내주고 조금밖에 남지 않은 물통에도 물을 가득 채웠다. 수고했다는 한마디 말도 없이 사료에 코를 박은 호빵을 보다가 편하게 식사할 수 있게끔 자리를 피해주었다. 거실 소파에 앉아 꺼진 TV 화면을 보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피스텔에서 살 때보다 조금 더 넓어진 거실이고, 인테리어도 조금씩 바뀌었다.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그래도 3년을 살았더니 이제는 오피스텔에서 살 때보다 더 익숙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바깥이 훤히 보이는 전면 창에는 하은이 이사 오던 날 공들여 준비했다던 하얀 커튼이 창 양쪽에 얌전히 늘어져 있었고, 그 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에 TV 위에 걸어둔 액자가 눈부시게 빛이 났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하은과 명수 그리고 단유가 함께 찍은 ‘가족 사진’이었다.

하나하나 따져보면 분명 많은 게 달라졌다. 하지만 동시에 달라지지 않은 것도 있었다. 위치가 바뀌거나 할지언정 TV나 소파, 대형 가구들은 예전에 쓰던 것들을 계속 쓰고 있었다. 익숙한 것들이다.

하지만 이 익숙함 속에서 단유는 한 사람의 그림자를 느낀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신뢰를 근본적으로 고민하게 만든 사람의 그림자다. 그는 결코 나쁜 사람도 아니었고,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사람이다. 명수와 헤어질 뻔했던 것을 막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함께 살 수 있도록 금전적 지원까지 해주었다. 그뿐인가? 그는 하은을 두 아이 곁에 머물 수 있게 해주었다.

그에게도 사정은 있었을 것이다. 단유가 미처 헤아리지 못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두 사람을 떠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일방적이었다. 일방적이었기 때문에 두 아이는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을 뿐, 내심 힘든 시간을 겪어야 했다.

명수도 그랬고, 단유도 그랬다. 쾌활했던 명수는 한동안 더 웃으려고 노력했고, 단유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똑같은 일상을 살려고 했다. 평소처럼 공부하고,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고, 명수와 목소리를 낮추어 서로를 위로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났다. 당시 느꼈던 감정은 무뎌졌고, 우울하지도 않다. 하지만 그의 흔적과 그림자는 이 집 곳곳에 배어있다. 이사를 왔어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이런 집을 가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단유는 독립을 하게 된다면, 그림자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렇게 된다면, 사람을 신뢰할 수 있게 될까?

‘비약이 심하잖아.’

단유는 스스로의 마음을 꾸짖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오늘의 일은 시간을 두고 천천히 생각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냥 넘길 순 없다.

다양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에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한 계기가 되었다. 판단 착오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여전히 공부가 부족한 것이리라.

****

“다녀왔습니다.”

저녁 늦게 승현은 집으로 들어갔다. 하얀 앞치마를 두른 아주머니가 고개를 내밀고 승현에게 인사를 건넸다.

“왔어요?”

“네.”

승현은 고개를 돌려 닫힌 방문을 바라보았다. 아주머니가 낮은 목소리로 일렀다.

“안에 계실 거예요.”

승현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금고처럼 닫힌 방 앞으로 다가갔다. 짧게 숨을 토해내고, 천천히 문을 두드렸다. 안에선 대답 대신 인기척으로 회답했다. 승현은 조심스럽게 얼굴이 온전히 보일 정도까지만 문을 열었다.

“저 왔습니다.”

방 가운데 커다란 책상을 두고 그 뒤에 앉아 책을 보던 중년인이 안경 위로 시선을 들어 승현을 보았다.

“늦었다.”

“죄송합니다.”

“밥은?”

“대충 먹었어요.”

중년인은 승현을 가만히 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밥 먹고 자라. 빈속에 자면 아침에 힘들 거다.”

“네, 그럴게요.”

승현은 할 말이 끝난 것처럼 보이는 중년인에게 고개를 숙이고 문을 닫으려 했다.

“적당히 해라.”

승현은 멈칫했다.

“네.”

승현의 대답을 들은 중년인은 다시 시선을 책에 두었다. 그것으로 대화는 끝이었다.

문을 닫고 나오는 승현에게 주방에 있던 아주머니가 손짓을 했다.

“금방 차려줄게요.”

먹지 않겠다고 할 수 없었다. 승현이 식탁으로 향하자, 아주머니는 미리 준비했던지 차가운 물부터 주었다. 잔을 받아 한 번에 다 들이켰다. 시원한 냉기가 뜨겁게 달아오르던 술기운을 조금 잠재워주는 것 같았다.

아주머니는 정갈하게 담은 반찬과 밥을 내어주고 버섯들깨탕을 국그릇에 담아 내려놓았다.

“아버지께서 저녁에 들깨탕을 드시고 싶다 하셨거든. 입에 맞을지 모르겠네.”

승현은 숟가락을 들어 탕을 한 입 먹었다. 그리고 이어 밥을 한술 뜨며 식사를 시작했다. 승현의 식사는 조용했다. 아주머니도 승현에게 말을 거는 대신, 퇴근 준비를 위해 다용도실로 들어가는 모양새였다. 식탁에 홀로 앉아 식사하는 승현은 집안에 내려앉은 침묵을 깨뜨리면 안 된다는 암묵적인 룰을 지키기 위해서 더욱 조용히 식사를 이어나갔다.

학교 급식실에서 밥을 먹을 때는 그래도 친구들의 재롱을 보며 즐겁게 식사를 하지만, 집에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했다가는 아버지의 묵직한 시선 아래 무언의 추궁을 받게 될 것이다.

식사를 끝내니 자연스럽게 아주머니가 주방으로 들어왔다. 역시 그냥 자리를 피해주려 했던 것 같았다.

“그냥 둬요.”

“네.”

이 집에서 승현은 절대 학교에서처럼 행동할 수 없었다. 일하는 아주머니에게도 깍듯이, 예의를 다해야 한다.

“옷은 밖에 내놔요. 내가 세탁해 놓을게요.”

“네.”

술 냄새 풀풀 풍기는 옷이니 씻지 않을 수 없다. 술자리에서 기분이 격해진 덕분에 좀 활달하게 마셨더니 술이나 안주 따위가 옷에 좀 묻기도 했다.

방에 들어가 샤워를 한 후, 침대에 몸을 던졌다. 푹신한 침대 스프링이 승현의 몸을 받아주었다. 실크로 된 겹이불이 몸에 감기며, 그제야 안락함을 느낀 승현은 여전히 뜨거움 입김을 길게 뿜어냈다. 밥을 먹었다고 해서 술이 금방 깰 리도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취한 모습을 집에서 그대로 드러낼 수 없으니, 눈에 힘을 가득 주고 정신력으로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이러니 술을 마셔도 즐겁지 않다.

몸을 돌려 천장을 바라보니 눈이 부시다. 불을 끄러 가야 하는데 귀찮다. 팔을 들어 올려 눈 위에 얹었더니 조금 낫다. 이대로 잠들고 싶었다.

승현은 꿈을 꾸었다. 아주 오래전, 자신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의 모습이었다. 당시에도 이 집에 살고 있었다. 당시에도 이렇게 조용히 지냈었다. 거실을 오갈 때, 방문을 열 때도 조심스러웠던 시기여서 승현은 되도록 집에서는 방 밖으로 나가질 않았다.

초등학생이 방 안에서 할 게 뭐 있겠는가. 책 읽는 취미라도 있으면 지금 이러고 있진 않았겠지. 승현은 대신 컴퓨터를 했다. 인터넷을 하면서 만화도 보고, 게임도 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어떤 동영상을 보게 되었다. 요즘 핫하다면서 링크된 영상을 눌렀더니, 그 영상에 자기 또래의 한 아이가 등장했다. 잘 생긴 아이였다. 이름도 잘 모르는 걸그룹과 함께 인터넷 방송을 했는데, 걸그룹보다 아이가 더 주목을 받는다며 소개글이 달려있었다.

영상을 본 후, 아래 댓글을 훑다 보니 아이의 신상이 소개된 댓글이 있었다.

‘고아.’

잘 생긴 아이는 고아였다. 그리고 한때 SNS에 스타처럼 인식되기도 했었다고 했다. 몇 년 전 사진이라며 링크된 글을 찾아가 보기도 했다.

신기했다. 같은 고아인데, 누구는 저렇게 인터넷에서 유명세를 떨치고, 누구는 집에서 옴짝달싹도 못 하는 신세다. 누구는 입양되어서 남부럽지 않은 집에서 살게 되었지만, 누구는 저 나이가 되도록 입양도 못 하고 보육원에서 살고 있단다. 그런데 저 아이는 유명―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데뷔를 한―걸그룹과 촬영을 하며 행복해 보이는데, 자신은 반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지도 못하고 외로움을 느낀다.

부러웠다. ‘김단유’란 아이가.

몇 년 뒤, 중학교에 올라올 무렵 승현은 다시 ‘김단유’란 아이의 이름을 듣게 되었다. 이제는 뮤직비디오에도 출연해서 연기한다. 방 안에서 그 영상을 몇 번이나 돌려 봤는지 모른다.

‘만약 저렇게 살 수 있는 것이라면, 입양되지 않는 게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했다. 자신감 가득해 보이는 눈빛이 부럽고 가지고 싶었다.

중학교 1학년 생활을 하던 중에 또다시 김단유란 이름을 들었다. 인터넷상에서 떠도는 영상을 본 이들 중에서 김단유가 예전에 유명했던 김단유 임을 모르는 이도 있었지만, 승현은 그의 과거를 모두 기억했다. 어떤 보육원에서 자랐고, 어떤 도서관에서 모델도 했으며, 어떤 걸그룹과 뮤직비디오도 함께 찍으며 친분이 있다고 소문이 났었다는 것까지 모두 기억하는 승현은, 단유의 새로운 영상에 눈을 빛냈다.

그는 승현이 알고 있는 이들 중 가장 따라 하고 싶은 이였다. 특히 같은 고아 출신이라는 점에서 더 마음이 끌렸다.

그 후, 승현은 변하기 시작했다.

****

승현과 단유는 이후로 볼 일이 없었다. 승현도 딱히 단유를 다시 보려고 하지 않았고, 단유도 교실 밖으로 나서지 않으니 두 사람이 다시 대면할 일은 별로 없었다. 급식실에서 우연히 시선이 맞을 때도 있었지만, 결코 시선이 오래 머무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동영은 달랐다. 과중반에서의 일은 넘고 넘어 일반 반에게까지 알려졌다. 누가 소문을 퍼뜨렸냐고 따질 수도 없었다. 의심 가는 이는 과중반에 남아 있던, 하지만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아이들 몇몇일 텐데, 그들을 찾아내기 위해 다시 과중반에 갈 순 없는 일이었다. 간다고 하더라도 찾을 수 있을지는 둘째치고, 승현이 곁에 있는 상황에서는 독자적으로 행동하기가 어려웠다.

‘어쩌면···.’

범인이 그들이 아닌 자신의 친구 중에 있을 수도 있다. 동영이 전교 1등한테 시비 털다 좆됐다, 는 식으로 포장해서 안주 삼아 떠들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고도 남을 일이었다.

진심으로 사과한 일도 아닌데, 깜도 안 되는 애한테 ‘좆됐다’는 식으로 시선을 받는 건 불쾌했다. 그러다 보니, 급식실이나 복도에서 우연히 단유의 얼굴을 보게 되면 얼굴을 구기며 노려보게 되는 것이다. 물론 단유는 본 척도 하지 않았다.

그게 자신을 우습게 보고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전교 1등이란 놈에게 어떤 배경이 있어서 자신이 함부로 덤벼들면 안 되는지는 모르겠다. 승현의 배경 정도라면 자신이 함부로 대들 수 없는 게 당연하다. 그리고 그런 승현이 대신 사과를 할 정도라면 전교 1등에게도 무시 못 할 배경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승현의 배경은 자신의 집안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배경이기 때문에 극한의 인내심으로 참을 뿐이다. 그러나 전교 1등은? 그녀석에게도 그런 배경이 있을까? 정말?

동영은 식판을 들고 지나가는 단유를 노려보았다. 아이들의 수군거림이 마치 자신을 두고 하는 이야기같다. 저기서 웃고 있는 녀석들은 자신의 이런 모습을 보고 비웃는 것 같다.

동영은 이를 악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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