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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멤버 더 네임-558화 (558/956)

신속, 정확(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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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로 돌아간 단유는 그들을 잊고, 잠시나마 책에 집중하려 했다. 그러나 아무리 단유라도 그게 쉽게 될 리 없었다.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무리지만, 지난 세월 동안 겪었던 여러 일들을 토대로 추리하면 힘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며 쾌감을 얻는 이들이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이들에게 어떤 선물을 주면 좋을까?

한편으로는 그런 이들에게 신경을 쏟아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고, 자신의 시간을 빼앗겨야 한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그런 생각이 이어지니 괜히 독한 선물을 주어서 괴롭히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뒷문이 열렸다.

3년간 함께 학교를 다녔지만, 이런 식으로 과중반을 찾아온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문을 열었을 때,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는 괜히 허탈함도 느끼는 승현이었다.

‘똑같네.’

다른 일반반 교실과 다를 바 없었다. 대단히 특수한 아이들만 모아놓은 교실이라 뭔가 다를 거라고 예상했지만, 편견이었을 뿐이다.

감상은 거기까지.

승현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누구?”

앞뒤 다 자른 말이었지만, 동영은 찰떡같이 알아듣고 손가락을 내밀었다. 그 끝에 시선을 마주한 아이가 보였다. 전교 1등처럼 보이지 않더라는 동영의 말처럼, 꽤 몸이 좋아 보이는 아이가 자신들을 무심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승현은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가슴에 붙은 명찰을 본 후 물었다.

“네가 김단유?”

단유 역시 승현의 명찰을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그래.”

대담한 녀석, 이라는 게 승현이 단유를 본 첫인상이었다. 뭐, 대담하든 쫄아있든 상관은 없다. 어차피 올라온 목적은 하나였으니까.

“미안하다.”

승현의 말에 당황한 건 뒤에 선 아이들이었다. 특히 동영은 한껏 어깨에 힘을 주고 있었다. 만약에 엉뚱한 말로 심기를 건드린다 싶으면 승현이 말리기도 전에 뛰쳐나가서 아구창을 날려버리겠노라 벼르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승현은 그 녀석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동영은 순간 자신이 들은 게 뭐였나 싶은 생각에 혼란스러웠다.

동영뿐만 아니라 뒤따라온 패거리들 역시 혼란스러운 눈으로 승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단유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과 다르게 단유의 혼란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었다.

“내 친구들이 너한테 괜히 시비를 걸었다고 하더라. 아직 철이 덜 든 녀석들이라 그렇다. 이해해라.”

승현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야.”

“응?”

“너도 사과해.”

“······.”

씨발, 내가 왜 사과를 해야 하는데, 라는 말이 목구멍을 뚫고 나올 것 같았지만 차마 승현에게 그렇게 말할 순 없었다. 그렇다고 불만이 없지는 않아 얼굴을 붉히는데, 승현이 눈을 부라렸다. 검은 동공 사이로 핏빛이 일렁이는 기분에 동영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미안하다.”

“공손하게 해.”

“씨···”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은데, 그래도 승현에게 대들 순 없었다.

“미, 안하다. 시비 걸어서.”

지금 이 교실이 가득 차지 않았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늦은 시간 야자를 하기 위해 교실에 남은 아이들이 더러 있었고, 그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받는 동영은 쪽팔려 죽을 거 같았다.

그러나 그런 동영을 배려할 마음이 없는 승현은 다시 단유에게로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공부하는데 방해한 거 같아서 미안하다.”

대답을 기다리는 모양새라 단유도 입을 열었다.

“괜찮아.”

“사과 받아주냐?”

“그래.”

“알겠다. 열심히 해라.”

뭘 열심히 하란 건지 목적어는 빠졌지만, 승현은 할 말이 끝났다는 듯 돌아섰다. 그리고 동영의 어깨를 툭 치며 교실을 나가자는 신호를 보냈다.

등장만큼이나 시크하게 퇴장하는 무리들을 보며 교실에 남아 있던 아이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패거리가 교실에서 멀어지는 소리를 확인한 후, 정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단유에게로 달려왔다.

“뭐야? 무슨 일이야?”

단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원은 그런 단유를 잠시 바라보다가, 아무래도 지금은 이야기를 나눌 타이밍이 아니라는 판단에 슬그머니 몸을 돌렸다.

책에 시선을 두고 있지만, 아까보다 더 혼란스러운 느낌이었다.

‘이게 뭐지?’

처음 승현이라는 아이가 나타났을 때, 얼굴과 눈빛에서 드러나는 잔인함을 읽었다. 주위를 공포로 억누르며 힘으로 약한 자들을 괴롭히는 악당의 전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악당이 다가와 건넨 첫 마디가 사과라니.

당연히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정말 단유를 혼란스럽게 만든 점은 그 말을 던지는 순간에 보인 승현의 진심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사과의 말을 건넸고, 그 말 속에 다른 흑심은 보이지 않았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단유의 판단으로는 그랬다. 이제껏 만났던, 타인을 죄책감 없이 괴롭히고 자신의 힘을 과시하여 인정받으려 하는 아이들 중에 승현과 같은 부류는 없었으니까.

비록 그의 사과가 반쯤은 강요하는 어투이긴 했으나, 사과를 받아주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 는 속내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사과를 안 받아주면 어쩔 수 없지, 라는 생각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승현의 행동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걸까?

책에 시선을 두고 있지만, 이런 상황에서 글이 머릿속에 들어올 리 만무하다. 단유가 고개를 들었더니 슬쩍슬쩍 훔쳐보는 시선들이 화들짝 놀라며 안 본 척,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아이들이 보였다.

의자를 뒤로 빼며 일어서자 들려온 소음에 고개를 돌려 호기심을 보이는 아이들도 단유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거란 걸 알 수 있었다. 사정은 잘 모르지만, 조금 전과 같은 상황에서, 패거리를 데리고 온 아이가 순순히 사과를 하고 사라진다? 마치 양자(proton) 충돌 실험에서 양자가 서로 부딪혔음에도 아무런 에너지의 폭발도 없는 현상을 발견한 것과 같지 않을까?

단유가 교실을 나간 뒤, 아이들은 수군대다가 정원에게로 향했다. 정원은 단유와 자유롭게 소통하는 몇 안 되는, 아니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야, 무슨 일인데?”

“나도 몰라.”

“단유, 쟤들이랑 싸운 거 아냐?”

“말이 되냐? 단유가 싸우게?”

“그럼 무슨 일인데?”

정원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한 가지는 알겠어.”

“뭔데?”

“단유가 사과받을 일을 쟤네들이 했고, 쟤들은 사과한 거지.”

“···바보냐?”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시나리오를 추리하기 시작했다. 물리학, 화학, 생명과학, 지구과학 등의 과목에서 뛰어난 사고력을 뽐내는 아이들이지만, 방금전 관찰한 상황에 대한 합리적인 추측은 쉽지 않았다. 충분한 조건들이 주어진 상황에서 결과를 예측하는 건 전혀 과학적이지 않았으니까.

그렇지만 늘 같은 문제집을 반복해 풀면서 식상함에 질려있던 아이들에게는 흥미롭기 그지없어, 마치 세기의 난제를 풀 듯 집단지성을 발휘해서 추리를 이어나갔다.

****

다른 친구들에게 가방을 갖고 나오라고 문자를 보낸 후, 아이들은 곧장 학교를 빠져나갔다. 나가는 동안에도 아이들은 별다른 말을 붙이지 않았다. 하교 시간이 지난 터라 학교 앞은 한산했다. 승현은 터벅터벅 걸어 사람들이 잘 지나다니지 않는, 그래서 자주 애용하는 옹벽 옆 골목으로 향했다.

“야, 김승현.”

한참을 따라가던 동영이 승현을 불렀다. 승현은 슬쩍 고개를 기울여 동영을 쳐다보니, 동영은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아까 뭐야?”

승현은 무심한 눈으로 동영을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그러나 더 걸어가진 않고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더니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고 한 모금 길게 빨아들인 뒤, 고개를 들고 하늘을 향해 소리 없이 연기를 뿜어냈다. 마치 그게 자신의 대답이란 듯이.

“야, 김승현. 솔직히 말해서 아까는 너무 심했던 거 아냐? 씨발, 내일부터 애들이 졸라게 씹어댈 거 아냐? 내 자존심도 생각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

승현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래서 뭐?”

턱을 치켜들고 동영을 바라보는 승현의 눈빛은 여전히 무심했고, 그래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좀 그렇잖아. 일단은···그래도 친구니까, 그래서 하란 대로 했지만 그래도 설명은 좀 해줘야 하지 않냐?”

“설명하면, 이해할 순 있겠냐?”

“뭐?”

동영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뒤에 서서 관망하던 친구들 중의 한 명이 얼른 다가와 동영의 어깨를 짚으며 달랬다.

“야, 야. 왜 소리를 높이고 그래. 진정하고 들어보자.”

“놔봐, 새끼야.”

거칠게 친구의 손을 뿌리친 동영은 승현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방금 뭐냐, 그 말은?”

승현은 침을 뱉은 뒤, 동영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뭐?”

“······.”

“이제 내가 만만해 보이냐?”

“······.”

굳은 얼굴의 동영을 노려보던 승현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니가 그래서 안 되는 거야.”

“뭐?”

동영의 뺨을 툭툭 두드리며 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 승현이었다.

“이렇게 덤빌 사람 구분 못 하고 나대니까 좆밥인거야, 새끼야.”

부들부들 떠는 동영을 보면서도 입가에 지어진 웃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동영아. 우리 친구잖냐. 그치?”

“······.”

“친구 말 잘 들어. 이게 다 너를 위해서 하는 충고야.”

아이들은 승현이 동영을 놀리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동영은 이성을 잃고 금방이라도 주먹을 휘두를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승현을 눈앞에서 바라보는 동영은 그럴 수 없었다.

질끈 눈을 감는 동영을 보며 승현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

단유는 수도꼭지 아래 쏟아지는 물줄기에 손을 집어넣고, 손가락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씻었다. 이후 페이퍼타올로 물기 하나 남아 있지 않도록 깨끗이 닦아냈다. 휴지를 한 손으로 꾸깃 구겨 쓰레기통에 집어넣은 뒤, 손을 바라보았다. 유난히 창백해 보이는 손가락과 손바닥을 들여다보던 단유는 고개를 들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에서 담담한 얼굴을 드러낸 그 사람은 타인에 대한 신뢰가 극히 낮다. 그가 남몰래 가진 비밀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으나, 본질적으로 그의 그런 생각은 지난 세월 동안 겪은 일들이 바탕이 되고 있다. 그가 만났던 많은 사람들, 그중에서도 특히 악의를 가지고 단유를 대하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그런 경계심을 만들었다.

한때는 타인을 믿고 함께 협동하여 결과를 만들어내는 일에 가슴 뭉클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살면서 느낀 건, 그런 경우가 매우 특수한 상황에서나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축구장이라는 특정 공간에서는 그 공간에서만 허용되는 특수한 규칙과 시스템으로 인해 타인―동료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가능하다. 하지만 일반적인 공간에서 그런 신뢰가 가능한지 따져보면 단유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과중반은, 그런 점에서 단유에게 안락함을 주었다. 학교의 규칙을 일부러 위반하려 드는 아이들은 드물고, 주변 아이들에게 악의를 가지고 시비를 거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비교적 경계심이 옅어졌던 3년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단유는 주변을 경계하고 있다. 신뢰하지 않았고, 거리를 두었다. 사교성이 부족한, 이라는 정원에 대한 평가는 사실 단유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겠다. 그런 모습에 단유가 정원을 받아들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오늘의 일은 단유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사람을 신뢰하냐, 안 하냐의 문제가 아니다. 승현이 나쁜 아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다.

이제껏 단유가 가졌던, 사람에 대한 자신의 판단에 혼란이 온 것이다. 선입견 없이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 단유의 장점이고 특기다. 사물뿐만 아니라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오늘 승현을 통해 단유는 자신의 판단을 의심하게 되었다. 단유에게 말을 걸던 승현은 분명 약자를 괴롭히면서도 그 약자에게 어떤 죄책감도 가지지 않는, 폭력 서클의 일원이었다. 그런 승현이 단유에게 ‘사과’를 했다. 엄밀히 말하면 친구의 잘못을 사과시키기 위해 온 것이지만, 어쨌든 이해하기 힘든 일임에는 분명했다. 미안해하는 얼굴도 아니었다. 그저 친구의 일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있으며, 자신이 대표로 상황을 종결시키겠다는 의지 정도가 그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었던 감정이었다.

“왜?”

왜 그는 단유에게 와서 그런 말을 한 걸까? 강자에게 약하고 강자에게 강한 타입이라고 해석하기도 어렵다. 단유는, 적어도 승현의 기준에서는 강자가 아니었으니까.

가정해보면, 굳이 와서 사과를 할 필요도 없다. 그저 모른 척하고 지나가도 상관없는 일이다. 자신에게 오는 대신 자기들 갈 길 가면 되니까. 이제껏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그들과 단유가 다시 얼굴을 맞댈 일은 별로 없으니까.

그럼에도 그는 단유에게 와서 ‘미안하다’라는 말을 던졌다.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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