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557화 (557/956)

신속, 정확(1)

-------------- 557/952 --------------

송곳니, 해찬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이어질 상황을 기다렸다. 성격이 꽤나 폭급한 동영이는 거의 매일 주먹질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친구였기 때문이다. 조금 전까지도 2학년 교실이 있는 복도 화장실에서 주먹질을 하다 나왔다. 뜨거워진 피가 아직 식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며 해찬은 입술을 혀로 핥았다.

처음 ‘범생이’를 봤을 때는 키도 크고 어깨도―자기만큼은 아니지만―벌어진 모습에 전교 1등을 독식한다던 소문 속의 그 아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전교 1등을 한다는 놈은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책상에 앉아 펜만 굴리느라 등은 굽고, 엉덩이는 퍼진 키 작은 땅딸보 안경쟁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지와 다르다고 해서 기죽을 동영이 아니었다. 이 자리에서 교과서를 펼치고 지식 대결을 할 것도 아닌 바에야, 힘으로 하는 싸움에서 지는 일은 별로 없었으니까.

손을 내밀었을 때, 그리고 그 손을 ‘겁도 없이’ 잡을 때는 살짝 놀라는 감도 있었고, 힘주어 잡았음에도 표정 변화 없이 밀리지 않던 모습에는 속으로 많이 놀랐지만 드러내진 않았다. 싸움에서 질 것 같진 않았으니까.

“눈깔아, 새끼야.”

동영은 단유의 머리를 향해 손바닥을 휘둘렀다.

****

단유는 반걸음 물러서며 손바닥을 피했다. ‘어쭈?’라는 감탄사가 동영에게서 나올 때, 단유는 손을 등 뒤로 가져갔다. 다시 손을 앞으로 뻗었을 때, 그의 손에는 긴 칼이 들려 있었다.

‘칼?’

뜬금없이 등장한 칼에 해찬은 잠깐 사고가 정지되는 기분을 맛봤다. 단유의 들린 긴 장검은 마치 애니메이션에서 일본 사무라이들이 들고 다니며 휘두르던 장검과 비슷하게 보였다.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이 번뜩이는 것을 보며 해찬은 생각했다.

‘저 긴 칼을 어떻게 숨기고 있었지? 저거 휘두르면 진짜 다칠 수 있겠는데? 영화 같은 데서는 저 칼에 맞아서 팔도 베이던데? 쟤는 검도도 배운 건가? 검도를 배웠다면 위험할 수도 있겠는데?’

그러다 깨달았다.

“씨발, 뭐야!”

칼이다. 위험한 살상 도구. 어떻게 휘둘러도 맞으면 큰 상처가 날 수 있는 도구다. 학교에서 저런 위험한(?) 도구를 어떻게 들고 왔고, 어떻게 지니고 있었다는 말이지?

단유가 칼 손잡이를 두 손으로 잡고 머리 위로 들었을 때, 단유의 흔들림 없는 눈빛과 햇살에 번득이는 칼날을 보자, 그제야 위험을 자각했다.

‘피해야 돼!’

어떻게 저 칼이 나타났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 걸 고민하고 있을 여력도 없다. 지금은 당장 저 칼을 피해 달아나야 한다는 점만 깨달았다.

“동영아, 피해!”

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해찬이 말을 뱉기 전에 칼날이 아래로 그어졌다. 무방비였던 동영은 칼을 막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칼날이 지나간 자리로 피가 뿌려졌다. 붉은 피가 안개처럼 뿜어지고 큰 덩치의 동영이 짚단 베어지듯 허물어졌다.

“어···.”

입을 벌리고 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살인.

지금껏 수많은 아이들을 친구들과 괴롭혀왔던 해찬이었지만, 고작해야 주먹으로 치거나 발로 차는 정도였지, 저런 도구를 쓴 적은 없었다. 친구 중에 괜히 커터칼의 레버를 밀었다 당기며 드르륵거리는 소리를 즐기는 녀석이 있긴 했지만, 걔가 진짜로 커터칼을 사람에게 사용하는 것을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서 감히 진검을 들어 사람을 베어버린 녀석이 있다. 전교 1등이라고 들었는데, 알고 보니 미친놈이다. 그리고 그 미친놈이 자신을 향해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피가 흘러내리는 검을 든 채로.

“으아악!”

해찬은 의도하지 않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전속력으로, 있는 힘껏 발을 놀리며.

해찬은 우선 학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피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달아났지만, 일단 뒤를 쫓아오는 기색이 보이지 않자 다소의 안정감과 함께 다른 생각이 이어졌다.

누구에게든 달려가서 알려야 했다. 신성한 학교에서 살인이 났다고. 친한 친구가 웬 미친놈이 휘두른 칼에 죽었다고.

이 시점에서 똑똑한 아이라면, 당연히 교무실로 향해야 했다. 살인 사건은 고작 학생이 아이들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니까, 당연히 어른들에게 맡겨야 했다. 그리고 이 학교에서 어른은 선생님들이다. 선생님께 사실을 밝히고 사건이 커지지 않도록 해야 옳다. 해찬의 말대로 그 아이가 ‘미친놈’이라면 가끔 해외 토픽 기사에 나오듯 고등학교 내 연쇄 살인 사건이 벌어질 수 있으니까.

하지만 아쉽게도 해찬은 그렇게 똑똑한 아이가 아니었다. 아니, 솔직히 이 시점에서 똑똑하고 안 하고는 문제가 아니다. 조금이라도 이성적이었다면 선생님께 가서 고해야 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눈앞에서 살인을 목격한 충격 때문에 이성적인 판단을 할 겨를이 없었던 해찬은 교무실 대신 2학년 화장실로 향했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았던 탓인지 화장실에는 해찬과 어울리던 학생들 무리가 여전히 자리하고 있었다. 큰일(?)을 치르고 난 뒤라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여운을 즐기고 있던 친구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나타난 해찬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동영이가 죽었어!”

해찬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시선에는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태연하게 담배를 흡입하는 아이도 있었다.

“뭔 소린데.”

가운데 선 아이가 느린 어조로 물었다.

“동영이가 죽었다니까!”

“나 참. 언 놈이 째려보고 갔다면서 뒤쫓아가더니 갑자기 동영이가 죽어? 자살했냐?”

“그게 아니라, 그 새끼가 칼로···.”

“칼?”

“무슨 칼?”

태연하게 되묻는 아이들의 태도에 해찬은 답답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어 발을 동동 굴렀다.

“씨발, 존나 긴 칼 있잖아? 사무라이들 쓰는 칼!”

해찬의 말에 무리의 뒤에서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놓고 담배를 물고 있던 아이 한 명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키득거렸다.

해찬은 왜 사람을 못 믿냐며 소리쳤고, 그 소리에 앞에서 이야기를 들어주던 친구는 해찬의 뺨을 때렸다. 화장실이 울릴 정도로 큰 소리에 웃음소리는 그쳤다. 멍한 얼굴로 뺨을 감싸 쥔 해찬에게 친구가 말했다.

“씹새끼야. 왜 소릴 지르고 지랄이야.”

화장실은 교무실에서 먼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더구나 오늘은 2학년 아이들이 없기 때문에 이 층으로 선생님들이 오지도 않는다. 그래서 일을 치르기 좋은 곳이다. 하지만 해찬이처럼 소리를 질러대면, 지나가던 선생님이나 아니면 정신 빠진 학생들이 기웃거릴 수도 있다.

“목소리 낮추고 천천히 말해봐라. 뭔데?”

핏기가 가시지 않은 눈으로 묻는 친구의 말에 해찬은 떨리는 가슴을 꾹 참고 말했다. 자신들을 쳐다보던 놈을 쫓아갔더니 전교 1등 한다던 놈이었고, 동영이가 가볍게 교육을 시키려 하는데 갑자기 칼을 빼 들더니 동영을 베었다. 그리고 동영이 죽고 나서 자신은 달아났다, 는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무슨 칼?”

“그, 있잖아. 사무라이들 쓰는 긴 칼.”

“긴 칼?”

“···응.”

친구가 피식 웃었다.

“약 먹었냐?”

“······.”

“아니면 동영이랑 짰냐? 그렇게 말하면 재밌을 거라고 하든?”

“······.”

“머리 쓰는 꼬라지 하고는.”

해찬은 입술을 깨물고 뒤를 슬쩍 바라보았다. 복도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는 없었다. 다시 고개를 돌리고 이번에는 바닥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아이를 보았다.

모처럼 호구 정신 교육을 시킬 겸 화장실에 끌고 와서 주먹을 휘두르고 삥을 뜯던 중이었다. 평소와 달리, 오늘은 학교가 워낙 한산하고 여유로운 탓에 이런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말하자면, 아이들 모두가 긴장하지 않던 중이다. 그런데 갑자기 동영이 ‘사무라이 칼’에 맞았다는 이야기를 믿을 수 있을까? 입장이 바뀐다면, 자신도 친구들처럼 웃고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자신은 두 눈으로 똑바로 봤고, 그 사실은 변함이 없다. 게다가 그 녀석은 살인의 현장에서 자신이 있었다는 사실을 안다. 자신의 얼굴도 기억할 것이다. 이대로는 자신이 위험하다.

“씨발, 믿기 싫으면 믿지 마. 난 선생님들한테라도 알릴 거다.”

그 말에 아이들의 표정이 변했다.

“···뭐냐, 얘.”

“진짜일 리 없는데 진짜 같네?”

거짓말이라고 치부하기엔 절박해 보이는 해찬의 표정에 아이들은 ‘의심’을 갖게 되었다. 혹시, 라는 생각에 아이들이 머뭇거릴 때, 친구가 물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내던졌다. 느릿하게 앞꿈치로 꽁초를 비벼 끈 친구가 말했다.

“가 보자.”

“응.”

해찬이 돌아서서 안내하려 했다.

“만약에 장난이면, 너 죽는다?”

친구의 음산한 협박에 해찬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사라졌다.

“장난이면 내가 죽어줄게.”

라고 호기롭게 외치진 못하고, 침만 꿀꺽 삼키는 해찬이었다.

“너희 둘은 여기 정리하고 있어.”

친구는 그렇게 지시를 내린 후 남은 3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해찬의 뒤를 따라갔다.

급한 마음과 달리 뒤에서 느긋하게 따라오는 아이들 때문에 해찬은 걸음을 빨리할 수 없었다. 하지만 건물을 빠져나온 뒤에는 저도 모르게 느려지는 걸음에 친구가 해찬의 등을 밀치는 상황이 벌어졌다.

“빨리 가, 새끼야.”

“으응.”

엉뚱하지만, 괜히 섭섭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친구인데, 말을 저렇게 하나 싶은 것이다. 하지만 티를 낼 순 없었다.

결국 쓰레기장에 도착했다. 그리고 해찬은 당황했다. 당황해서 말도 못하는 와중에 친구가 이를 꽉 깨물고 물었다.

“동영이는?”

“그, 그게···.”

분명 이 자리였는데, 동영이 보이지 않았다.

친구는 조용한 쓰레기장을 둘러보다 해찬의 목덜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목덜미를 짓누르는 손에 담긴 흉포함에 해찬의 당황스러움은 배가 되었다.

“자, 잠깐만.”

“뭐냐, 너?”

그때 해찬을 구해주는 목소리가 들렸다.

“야, 이 개새끼야!”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더니, 죽은 줄 알았던 동영이 씩씩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어?”

“이 새끼가 혼자 튀고 지랄이네?”

“어?”

“승현아, 꼭 잡고 있어라. 그 새끼.”

다가오는 동영을 본 승현은 해찬을 붙잡고 있는 대신, 힘을 줘 앞으로 밀었다. 해찬은 갑자기 밀리면서 바닥에 고꾸라졌지만,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 채 그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동영이를 바라볼 뿐이었다.

승현은 눈을 살짝 찌푸리며 동영에게 물었다.

“뭐냐, 니들?”

승현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 여긴 동영이 속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

단유가 자신의 손을 뿌리친 뒤에도 도망가기는커녕 눈을 맞대고 있자, 동영은 단유가 겁도 없이 까분다고 여겼다.

“쳤냐?”

밀쳐진 손을 그대로 공중에 든 채로 동영은 단유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때, 동영의 등 뒤로 다급히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싶어 고개를 돌렸는데, 마침 건물을 돌아 등장하는 선생님이 보였다. 국어를 담당하는 지영호 선생님이었다. 그 전까지는 그저 사람 좋은 선생으로만 생각했었는데, 급식실 앞에서 보여준 모습을 보고 ‘꽤 성격이 있는’ 사람으로 인식이 변한 선생님이었다. 그걸 떠나서라도 선생님에게 들켜서 좋을 게 없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함께 있던 해찬이 허겁지겁 달아나는 모습을 보니, 자기도 달아나야겠다는 순간적으로 들었다.

해찬은 어찌나 빠른지, 동영이 겨우 몸을 돌려 달아나려는 순간인데, 그는 이미 저 멀리 달아나고 있었다. 그 뒤를 쫓아가려는데 선생님이 ‘야, 거기서!’라며 뛰어왔다.

“아, 씨발.”

욕지거리를 입에서 굴리며 동영은 무거운 몸을 움직였다. 건물 모서리를 끼고 돌았더니 이미 해찬은 보이지 않았고, 지영호 선생님은 기이할 정도로 빨라 거의 뒤에 붙은 모양이었다. 놀란 동영은 혀를 깨물 뻔했다.

두꺼운 허벅지를 탓할 시간도 부족해 열심히 다리를 놀려 달아났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저 쫓아오는 선생님과 거리를 넓혀야 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뛰었다. 시원한 가을 날씨에도 금세 얼굴이 땀으로 범벅이 될 정도였다.

정신없이 뛰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보니 쫓아오는 선생님이 감쪽같이 사라진 상태였다.

‘뭐야?’

그제야 뜀박질을 멈추고 숨을 고른 동영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건물로 들어갔다. 그리고 화장실로 갔더니, 친구 둘만 남아서 호구 새끼를 씻기고 있었다. 정확히는 씻도록 명령하고 뒤에서 감시하는 쪽이었지만.

“야, 다른 애들은?”

친구들에게서 어이없는 이야기를 들었다. 동영은 기가 찬다는 듯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린 뒤, 말도 안 되는 말로 친구들을 기만하고 자신을 버리고 도망간 일을 합리화시킨 해찬을 손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혼자 도망간 새끼는 친구도 아냐.’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동영이었다.

동영의 이야기를 들은 승현은 잠시 말없이 동영과 바닥에 쓰러진 해찬을 번갈아 보다가 물었다.

“그 새끼는?”

“누구?”

동영의 물음에 승현은 혀를 찼다.

“전교 1등이라는 애.”

“아, 걔.···어?”

동영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 모습을 보며 승현이 재차 물었다.

“몇 반인지 알아?”

“어? 아까 말했는데?”

해찬이 끼어들었다.

“9반, 9반이라고 그랬어.”

승현은 해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쓰러진 해찬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해찬의 눈에 떠오른 두려움을 보며 승현은 입꼬리를 올렸다.

“병신 새끼야. 어쨌든 넌 도망친 거잖아. 친구 두고.”

“그게 아니라···.”

승현의 손바닥이 다시 해찬의 뺨을 때렸다.

“그냥 닥치고 있어, 새끼야.”

별로 큰 힘을 들여 때리지는 않았지만, 이어지는 따귀 세례에 해찬의 뺨은 붉어졌다. 그리고 해찬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잠시 후, 승현이 일어섰다.

“가자.”

한편, 4층 복도 창가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단유는 고개를 돌리고 교실로 들어갔다. 선물을 받기 위해 몰려올 아이들에게 어떤 선물을 줘야 할지 곰곰이 생각하며.

0